9월 25일 월요일 한시협회에 나가 보다.
격주로 월요일 오전에 있는 한시협회의 퇴직 교수들의 작시 모임이 이번 학기에는 오늘 처음 있었다. 지난 학기 5월 중순부터 빠지고 보니 4개월 만에 처음 나간 것인데, 이전에 못보던 얼굴들이 몇몇 있었지만 나에게 따로 소개를 시켜주지 않아서 두 사람은 누구인지도 잘 모르겠으나, 한 사람은 성대 중문과에서 아직도 근무하는 교수인데, 전부터 알던 사람이라서 매우 반가웠다. 이전에 죽 나오던 사람들 중에서도 몇 사람은 나오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은 실족을 하여 보행이 불편하기 때문에 지난 학기 도중부터 사뭇 못 나오고 있다니 참 안타깝다. 고령자들의 모임이니 출결이 무상하다.
나는 다음과 같은 시를 1수 발표하였다.
〈丁酉七月旣望牽興〉 정유년 칠월 16일에 흥을 내다.
無情歲月逝東流 무정세월 서동류 하여
무정한 세월은 동쪽으로 흘러가버려,
瞥眼窓前已報秋 별안창전 이보추 라
별안간에 창 앞에는 이미 가을 소식이로 구나.
蟋蟀啾啾初夜哭 실솔 은 추추 초야곡 하고
귀뚜라미는 찍찍하고 초저녁부터 울고,
蜻蜓遍遍晝中遊 청정은 편편 주중유 라
잠자리는 이리저리 대낮에 날아다니는 구나.
常驚是夕蘇仙興 상경시석 소선흥 하고
늘 이날 저녁에 소동파 같은 신선 흥겨움에 놀라고,
又慕今宵赤壁休 우모금소 적벽휴 라
또 오늘 밤에 적벽에서 쉬던 일 흠모하게 되네.
可羨古人如此醉 가선고인 여차취 하여
옛사람들 이와 같이 도취하였던 일 흠선할만하여,
勸君一醆此佳樓 권군일잔 차가루 라
그대에게 권하게 되네, 이 한잔 술 들고
이 좋은 정자에 오르기를!
요즘은 몇 달을 외유하면서 잘 놀다가 보니, 밀린 일이 좀 많아서 도무지 흥이 나지 않으나, 숙제로 시를 지어야 되니 겨우 이렇게 흉내만 내어본 것이다.
점심을 같이 먹고 헤어졌다.
9월 21일 목요일 맑다. 구기터널 위의 산길을 2시간 가까이 걸어 넘어가다.
오전에는 녹번동의 초당서실에 가서 글씨(전서 기초) 지도를 받고서 점심을 선생님과 같이 먹고서, 2시간 가까이 북한산 둘레 길을 걸어서 구기동에 있는 삼보회사 회의실에 가서 집안사람들과 같이 한문 공부를 하였다.
늘 차만 타고 지나다니던 평지의 길을 접어 두고서 산길로 올라서 보니 생각하였던 것 보다고 산이 높고 험하였으나, 길은 여기도 “북한산 둘레길”의 일부라고 해서 잘 다듬어 두어서 매우 걸을 만하였다. 평일 낮 시간인데도 건강을 챙기는 중년 이상의 남자 여자들이 심심치 않게 쏘다니고 있다. 대개 다 간단한 등산 차림에 간편한 배랑 같은 것까지 메고 다니나, 나는 평상 복장에 구두까지 그냥 신고 왔으니 좀 어색한 기분이 들었으나 길은 잘다듬어져 있어 걷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오늘은 주역을 잘 아는 집안 아지메 한 분이 하도河圖 낙서洛書에 대하여 몇 가지 도표를 복사하여 가지고 와서 나누어 주면서 자못 소상하게 설명을 하여 주어서 좋았고, 상서 홍범 편 원문 강독을 몇 주 만에 대충 끝냈다.
9월 29일 금요일 맑음. 계간 잡지 《세계 시민》 발행인이 찾아 오다.
매주 금요일 퇴계학연구원에서 모이는 철학 윤독 모임에 《세계 시민》 발행인인 최두환 교수(중앙대 독문과 퇴직, 시와 진실 출판사 사장, 괴테를 사랑하는 모임 주관)가 찾아와서 2시간 동안 청강을 하고 회원들과 점심까지 같이 먹고 갔다. 칸트가 “영구평화를 지향하는 세계 정부” 세워 보자고 하는 정신을 지금 재현하여 보자는 취지에서 만든 잡지인데, 창간한지 이제 2년 쯤 되었다.
내가 지금 일본에서 그러한 생각에 동조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책(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제국의 구조》 같은 것)이 한국어로도 여러 권 번역된 것이 있는데 알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당장 서점에 가서 그런 책을 3권이나 샀다고 하면서 좋아하고, 그 잡지에 이런 책들에 대한 해제 같은 글을 좀 만들어 주면 좋겠다고 하였다. 80이 넘은 고령인데도 이렇게 발로 뛰면서 활동을 하니 참 놀라운 일이다.
저녁에는 지금 살고 있는 마을(진관동)에 있는 한옥박물관에서 관장인 김시업 교수(성대 국문과 퇴직)가 연암의 소설에 대한 특강을 한다고 하여서 집 사람과 같이 가서 수강을 하였다. 허생전이외에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그 나머지 소설에 관하여서도 잘 설명을 하였다. 논지가 정연하여 매우 들을 만 하였고 강연 뒤에는 이 박물관에서 전시하는 “세계가 취한 한국문학”이라는 특별전을 관람하였다. 각국어로 번역된 한국문학 작품 전시였는데, 몇몇 작가의 작품에 대하여서는 집중적으로 소개를 하였다.
이런 서울의 변두리에 새운 조그마한 박물관에서 이러한 좋은 일을 한다니 반갑다. 김관장은 안동 사람으로 나이는 나보다 네 살이 적다고 한다. 벽사 이우성 교수의 제자인데, 퇴직 후에 정다산의 고향 마을에 선 실학박물관장을 몇 해 하였다. 퇴직 후에도 이러한 청직(淸職)을 이어서 하니 참 좋은 것 같다.
10월 1일 일요일 영풍문고에 가보다.
오후에 명동에 있는 중국서점에 가보았으나 문이 닫히었고, 종로 입구에 있는 서울에서 가장 큰 전시 매장을 가진 영풍서점에 가서 몇 시간 동안 있다가 저녁까지 사서 먹고 들어 왔다. 한국 책과 잡지는 물론, 일본 책과 잡지 영어 책과 잡지까지도 좀 있어 매우 가 볼만한 곳이다. 처음으로 일본 월간지(中央公論)을 1권 샀다.
10월 4일 수요일 추석 맑다. 친기(親忌)
추석날이지만 어버지의 제삿날이기 때문에 아침 제사는 지내지 않고, 평창동 큰 집에 가서 저녁 제사만 지냈다. 낮 시간에는 내자만 미리 큰 집에 가고 나는 집에 앉아서 이 달 하순에 퇴계학회에 나가서 발표할 글 한 편을 겨우 마무리하여 놓고서 저녁 때 가서 참사만 하였다.
원래 우리 집의 보통 기제사에는 사당에 신주를 모셔서 그런지 마루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도 지방을 따로 적는 일도 없었고, 또 “무축 단헌”이라고 하여 축문도 없고, 또 초헌 한 사람이외에 아헌이나 종헌도 없이 제사를 비교적 간단하게 지냈다. 그런대 형님이 서울에서 제사를 주관하고부터는 역시 지방은 따로 적어 붙이지는 않으나 축문도 읽고 삼헌까지 다 하게 한다.
그런대 요즘은 보니 조부모의 제사나 어른의 제사 때에도 곡(哭)까지 하자고 하신다. 역시 우리 집 기제사에는 이전에는 그렇게 하지 않던 습관이다. 내가 어릴 때 외가의 제사에 가서 보면 기제사에도 늘 곡을 하였는데, 한 밤중에 외조부모 같은 노인들이 곡을 하는 것을 들으면 머리가 쭈삣하게 설 정도로 겁이 났다. 그런대 지금 우리 집 기제사에도 곡을 하자고 하시니, 그런 것이 주자가례 같은 책에는 적혀 있는 일인지는 몰라도 참 무서운 일 같은 생각도 들고, 선뜻 내키지는 않지만 무어라고 반대할 명분도 없어, 형님이 곡하는 것을 그대로 듣고만 있었다. 첨단 과학을 연구한 어른이 무엇이든 전통을 지키는 면에 있어서는 더욱 철저하시다.
어른들이 살아 계실 때,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는 “아버지”라고 부르고, 어머니는 시골 사투리대로 “어메”라고 불렀는데, 형님은 다시 말투를 바꾸어 시골 사투리대로 “아베”라고 부르신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 서울말을 쓰고 있는 종손자들까지도 우리를 보고서는 ”할베”라고 부른다. 서울말 억양에 시골 사투리 호칭을 사용하니 재미있지만 묘게 들린다.
하여튼 이런 저런 습관이 언제까지 계속될라는지? 앞으로도 과연 제사를 이렇게 법대로 격식에 맞추어 잘 지낼 수 있을런지? 생각이 잘 잡히지 않고, 어쩐지 불안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