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아장성 등산기 셋째날>
1. 산장에서의 예의
24일 새벽 4시, 같은 방에 자고 있던 대학생들이 얘기를 한다. 산장에서는 새벽에 얘기를 한다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곤하게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기 때문이다. 계획이 되어 있으면 일어나서 5분 이내로 소리 없이 준비하고 나와야 한다. 이야기 소리에 잠이 깬다. 우리팀에서 뭐라고 한마디하니까 이 녀석들이 아저씨들도 어제 저녁에 떠들었잖아요. 한다. 나참, 9시 취침 전의 일을 들고 나온다. 규칙도 예의도 모르는 녀석들. 혈기 왕성한 강선생 벌떡 일어나 노려보고 있는데, 한 녀석이 ‘죄송합니다’한다. 이미 잠은 깨버리고, 우리도 4시 30분에 일어나 얼른 준비하고 나온다. 4시 50분 멀리 속초시의 불빛과 동해 오징어잡이배들의 불빛을 바라보며 랜튼을 들고 다시 봉정암으로 내려온다. 5시 30분 봉정암엔 새벽 예불을 마쳤는가 보다.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다.
찬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하산, 구곡담 계곡 쪽으로 내려온다. 어제 간 길에 비하면 평탄 대로이다. 걸음을 빨리 한다. 나도 이제서야 본래 등산하던 컨디션이 된다. 한참 내려와서 물이 좋은 곳에서 아침을 해 먹고, 세수하고, 다시 내려온다. 구곡담 계곡은 물웅덩이가 9개나 되고, 용손폭포, 쌍룡폭포, 용아폭포 등 쳐다보기만 해도 장관인 폭포가 여러 개 있다. 물이 정말 거울처럼 맑다. 폭포를 보면서 잠시 쉬는 동안 우리가 올라간 용아장성을 보니 천길 절벽이 우람하게 서 있다. 어떻게 저기를 지나왔나 싶다.
2. 다시 수렴동 대피소에서
드디어 수렴동 대피소, 이곳에서, 밥만 달랑 해 먹고 떠난 어제의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막걸리랑 도토리묵이랑 당귀차랑 사 먹는다. 차를 먹으면서 용아장성 얘기를 하니까 어제 언덕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아니냐고 한다. 그 구조대원 말이 사고가 워낙 많이 나니까 관리공단에서 출입을 막아달라는 협조를 의뢰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멀리서 계획하고 왔는데 꼭 말릴 수는 없다고 한다. 열흘 전에도 서울시립대생 한 명이 추락사했는데, ‘사람 살려’라는 소리를 구곡담 계곡으로 등산하던 사람이 듣고 봉정암에 가서 알려서 헬기가 떠서 시신을 찾았다고 한다. 그런 엄청난 일이.... 등골이 오싹한다. 그러나 용아장성은 우리가 두려워할 만큼 위험한 곳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대장은 공룡 능선이 우람하다면 용아장성은 결정적인 곳 몇 곳만 우회로로 등산한다면 오히려 아기자기한 곳이라고 한다. 이미 우리는 경험자 대열에 속하기도 하고.
수렴동 대피소를 출발 영시암으로 내려오는 길에 이제서야 꽃들이 잘 보이기 시작한다.
조희꽃, 갈퀴꽃, 영시암에 흰이질풀꽃, 그리고 백담사로 오는 길에 집신나물이랑 흰 물봉선, 금마타리꽃이 있다. 용아장성에는 솔체꽃, 갯기름꽃, 산구절초, 쑥부쟁이, 미역취, 금강초롱꽃, 산오이풀꽃 등이 있다. 소청 산장에 송이풀꽃, 구절초랑 노랑 물봉선이랑, 꽃향유, 산박하꽃 등이 있고, 소청에서 중청 사이에 산부추랑, 투구꽃이랑, 이제 시들고 있는 이질풀꽃, 참취꽃 군락지가 있다.
3. 설악은 아름다운 산
처음 천불동 계곡을 갔을 때는 지금까지 다니던 산은 산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만큼 아름다웠는데, 몇 번 다니다 보니, 그래도 산은 지리산이라고 한다. 해발 1915미터 천왕봉에서 내려다보면 구비구비 산자락이 다 보이지만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인데, 1707미터 대청봉에서는 천왕봉에서 느끼는 웅장함이 없다고 한다. 멀리 동해는 볼 수 있지만 정작 산의 모습은 중청에서 소청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봐야 능선들이 다 보인다는 것이다. 오히려 관광지가 되어버린 가벼움이 있다고 한 마디씩 한다.
그래도 설악은 아름다운 산이다.
백담사에서 셔틀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오는데 백담사 전용 버스가 우리를 태워준다.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 없이 예정보다 빨리 차를 세워둔 곳까지 온다. 소양강 줄기로 보이는 강의 다리 밑에서 점심을 해 먹고 달리고 달려서 드디어 거창 도착. 대호갈비에서 임무완수를 축하하면서 한 잔. 맛있는 저녁을 먹고 강원도의 어느 휴게소에서 한 박스 산 안흥찐빵을 5개씩 나누어서 집으로 가져가라니까 양선생님과 송선생님이 제일 좋아한다. 우리 팀이야 늘 부부 동반으로 다니니까 괜찮은데 혼자서 좋은 경치 구경하고 오니까 가족들 생각이 간절한가 보다.
다들 정겹게 인사하며 헤어진다. 설악산 등산 임무 끝!!
2001. 8. 27. 서종희
'용아장성 - 미리의 어금니처럼 날카롭고 긴 재'
* 용 – 미리
첫댓글 산행기 감동깊게 읽었습니다.
그날의 일들이 새록새록 기억나게 하는 산행입니다.
지금쯤 용아장성 등산로가 어떻게 변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더 좋아졌을까 더 험해졌을까? ㅎㅎ
17년전 용아장성 긴등산일기를
보니 그렇게 위험을 감수하고
꼭 가야했나? 하는 생각..
한편 새로운 경험과 두고 두고할수있는 끝없는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생각..
기록은 위대하네요
그때의 상황,나누었던 이야기,
주변풍경...읽어나가는 내내
생각한것
국문과 출신은 다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