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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묵상글 들 ( 대림 제2주간 토요일. - 바로잡아주는 사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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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바로잡아주는 사람
오늘 집회서는 엘리야가 불처럼 일어서서 다시 오리라고 하고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다시 오기로 된 엘리야라고 하시며
세례자 요한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것은 엘리야가 거짓 예언자들과 싸워 이김으로써 거짓을
바로잡은 것같이 세례자 요한도 그러할 것이라는 얘기지요.
그런데 엘리야는 싸워 이겼지만
세례자 요한이 싸워 이겼나요?
살해당했으니 싸움에 진 것이고
그러니 바로잡지도 못한 것이 아닌가요?
다시 돌아온 엘리야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뤘다고 하시며 당신도 같은 운명이 될 거라고 하지 않으십니까?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잘못이나 거짓을 바로잡는 사람은 죽음을 당하든
수난을 당하든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도 죽지는 않았지만, 이제벨에게 쫓기지 않았습니까?
도망가지 않았으면 그도 틀림없이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알아보지 못하여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만
설사 알아봤더라도 사람들이 바로잡는 사람을 내버려둘까 생각합니다.
한번 나에게 적용해보면 어떻겠습니까?
누가 나를 바로잡아주면 '아이구 고맙습니다.' 하겠습니까?
바로잡아주는 사람을 고맙다고 하는 사람은 성인입니다.
여기서 성인은 두 가지 뜻이 다 있습니다.
성숙한 어른이라는 뜻의 成人과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의 聖人입니다.
인격적으로 정말 성숙한 사람은 겸손할 뿐 아니라 지혜롭기에
당장은 비록 입에 써도 바로잡아주는 사람을 고마워할 터인데
그건 바로잡아주는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싫어하는 것을 욕먹어 가며
바로잡아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해코지까지
당할 것 같으면 더더욱 바로잡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옆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아예 나를 바로잡아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까이 있던 사람도 웬만한 사람은 한두 번 바로잡아주다 통하지
않으면 나를 포기하고 떠나는데 계속 옆에 있으면서 잡아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말하지만
나를 바로잡아주는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지금 내 옆에서 나를 제일 잘 알고,
나를 포기하지 않고 바로잡아주는 사람을 진정 사랑하고
고맙게 받아들이는 진정 지혜로고 성숙한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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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도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요한 1,26)라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당신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그리고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특히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않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우리들 가운데 서 계시고 형제들 안에 계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고 제멋대로 다룬다면, 바로 우리에게 구세주께서는 고난을 받으실 것입니다.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리고, 더 이상은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3-13)
또한, 바오로 사도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필리 1,29)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하오니,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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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본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알아보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루카복음 1장16-17절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1,23). 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6,26). 그러나 헤로데만이 그를 죽였는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나 봅니다. 사실 헤로디아의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1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역할을 한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죽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악하기보다도 자기 안에 갇힌 무지의 탓이 크다 할 것입니다.
물론,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예수님께서 살아간 삶을 살아가는 기회가 됩니다”(함께야).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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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엘리야가 불처럼 일어서서 횃불처럼 예언하다 - 공동선을 위한 사도직의 조건
횃불처럼 타오르는 예언자의 열정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행하는 사도직 활동이 공동선을 향할 때 필요한 은총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현존 양식에 충실하면, 역사 안에 그리스도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되어 최고선의 가치를 실현하고 수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개별 신자들이 기복신앙에 매몰되지 않고 교회 전체가 교세 증가에 매달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거니와, 세상에 빛을 비추고 세상 사람들이 부패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소금의 역할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다섯 가지 양식으로 계시된 주님의 현존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나아가서 복음적인 변화를 이룩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화로까지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사도직 활동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현존 양식에 충실하면서 공동선을 수호하는 사도직 활동에 이르러서야 인간화와 민주화를 거쳐 복음화의 과업이 이룩될 수 있습니다. 다섯 가지 주님의 현존 양식이 주로 종교적이고 교회적인 구조인데, 사도직 활동이 더해져야 활력이 솟아날 수 있습니다.
사도직 활동은 거창할 필요 없이 작아도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만 하면 자그마한 겨자씨가 겨자나무로 자라듯이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서 인간화와 민주화를 거쳐 복음화로 나아가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직 활동이 결코 포기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될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며, 사도직 활동의 질적 수준을 담보해 주는 가치가 바로 공동선의 가치들입니다.
그 초점은 어디까지나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지음 받을 때부터 그분을 닮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마귀의 꼬임에 빠져 온갖 우상을 하느님인 줄 알고 숭배하거나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고까지 하던 차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사람이 되게 하시어 참으로 하느님을 닮은 인간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인권 유린 현상에 대해 단호하게 맞서야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삶을 우리네 역사 안에서 현존시키는 주님의 현존 양식에 충실해야 합니다. 즉, 말씀과 성찬과 사랑의 섬김, 그리고 신앙 감각을 존중하면서 공동으로 합의하는 교회야말로 인간 존엄성을 이룩하게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 같은 최고선의 가치들을 짓밟는 우상숭배가 워낙 흔하게 벌어지기 때문에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공동선에 투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도직 실천이 필요합니다. 그 가치는 재화의 보편 목적에 충실하여 재화의 진정한 주인은 오직 하느님이시라는 대전제 하에 자본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자본주의적 사조와 대결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우상숭배적 경제 질서의 희생자인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인간을 위한 경제와 복음적인 경제 질서의 표본을 만드는 일이 그 다음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도직 활동은 보조성과 연대성이라는 방법 원리를 필요로 합니다.
보조성이란 국가 정부가 정책적으로 수호하고 증진시켜야 하는 공동선에 대하여 비록 보조적일지라도 당사자들 역시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되 간섭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공동선 사도직 활동에 있어서도 그저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자선 행위만으로 충분치 않고 당사자인 가난한 이들 자신이 자각하고 자립하며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가난한 이들이나 사회 전체의 공동선에 대하여 기여할 수 있는 존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보조성 원리는 자율성과 자주성일 뿐만 아니라 참여와 책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병들고 마귀들린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실 때, 반드시 그들의 이름을 물으신다든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다는지 하여 당사자들의 인격을 존중하셨으며, 일방적으로 도와주시는 법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치유나 구마의 기적이 일어났을 경우에도 당신의 신적인 기적 능력이 99% 작동했을 터인데도, 1%에 지나지 않을 당사자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보조성 원리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원리가 연대성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있어서 서로 연대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세상의 질서가 강자들 위주로 편성되고 운영되고 있어서 이를 개선하려면 약자들이 뭉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조성 원리에 따라 주체성을 지니게 되고 최소한의 생존을 담보하게 된 가난한 이들은 거기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더 가난하고 더 약한 이들을 위해 일어서야 하고, 이 경우에는 반드시 연대의 힘으로 사회적 공동선에 기여할 다짐을 해야 합니다.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계급투쟁이라든지 거리 시위에 필요한 물리적 연대의 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보다 선이 더 강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정신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선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여론이 형성될 수 있지요.
이렇게 공동선의 가치에로 투신할 그리스도인들에게 엘리야의 모범이 깃발입니다.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집회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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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작년에 어머니께서, 그리고 올해에는 아버지께서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한동안 커다란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실감에서 오는 슬픔, 또 하늘 나라에 가신 부모님을 떠올리며 이 세상 삶의 무상함도 크게 제 마음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텐데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할까?’
삶에 대한 묵상을 하게 됩니다. 삶은 순간의 기쁨이 모여 행복을 만들고, 순간의 만족을 통해 만족스러운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최신형 스마트폰을 구입 한 직후는 만족도가 높습니다. 그러나 그 만족도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질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예를 들어봅니다. 멋진 노을을 바라보며 감탄합니다. 그런데 이 노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질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할까요?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찰나의 즐거움이 모여서 내 삶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되어야지만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으로 허무한 인생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있기에 오히려 지금 순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삶 자체를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이미 왔음을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하십니다. 과거의 엘리야 모습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닌,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도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관은 세속적이고 정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재림도 영광 속에 이루어지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시하는 메시아관은 고난과 부활이 함께 있는 사랑이 가득 담겨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모습으로만 바라보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메시아의 모습이었습니다.
삶의 순간순간이 메시아이신 주님을 느끼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막연한 영광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특별한 시간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순간의 즐거움과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 기다리기만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 전부를 희생하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주님의 사랑을 과연 어디에서 느끼고 있습니까? 특별한 상황, 나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우는 상황만을 요구하지 말고, 매 순간에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기쁨이 모여 행복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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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육체에 지속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가장 심한 고통은 아주 잠시 머물며, 쾌락을 능가하는 육체적인 고통도 여러 날 지속되지 않는다. 반면 고질적인 질병은 육체적 쾌락이 고통을 능가하도록 허용한다(에피쿠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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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줍기(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위험에 처했을 때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그 고통을 이겨낼 강인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삶의 전장에서 함께 싸울 동지를 찾는 대신 나 자신이 힘을 지니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불안한 마음으로 구원을 갈구하는 대신 내 힘으로 자유를 쟁취할 인내심을 갖게 하소서.
오직 성공에서만 당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는 대신 실패에서도 당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시성 타고르의 멋진 시입니다. 솔직히 이런 기도를 잘 바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멀리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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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캠핑 중에 작은 사고로 왼쪽 발목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물집이 생기고, 연고를 바르면서 조금씩 좋아졌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아팠습니다. 즈음에 오른쪽 발가락에도 염증이 생겼는지 아팠습니다. 지금은 다 좋아졌지만 그렇게 아픈 1주일가량 부주의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조금만 조심했으면 아프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톨릭 평화신문을 보면서 일부러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보현 프란치스코의 이야기입니다. 중인 출신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성격이 모났던 이보현은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고, 신앙인으로 모범을 보였습니다. 박해의 칼끝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잔치를 베풀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포졸에게 잡힌 이보현은 당당하게 신앙인임을 드러냈습니다. 매를 맞으면서 웃으면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함께 갇힌 교우들에게 끝까지 참아 천국에서 만날 것을 전하였습니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졌어도 옥에 들어가서는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예수의 수난을 증언했습니다. 관장은 이보현을 장터에서 조리돌림 하게 한 뒤, 뭇 사람이 보는 앞에서 때려죽이게 하였습니다. 이보현은 27살에 장열하게 순교하였습니다. 며칠 뒤 그의 시신을 거둘 때 마을 사람들이 가서 보니, 몸이 눈부시게 빛나고 얼굴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보현은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했고, 난국에 빠져 방향을 잃었던 조선 교회의 명맥을 잇게 하는데 소중한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의 현존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고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변을 보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두 팔 없는 석창우 형제님은 7년 째 성서를 필사하고 있습니다. 1984년 10월 29일 감전사고로 두 팔과 두 발가락을 잃었다고 합니다. 2015년 환갑을 맞으면서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니 두 손이 있던 30년과 두 손 없이 살아온 30년 중 두 팔 없이 산 30년이 훨씬 행복했다고 합니다. 석창우 형제님은 두 팔이 없음에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두 팔이 있는 저보다 더 기쁘게 살고 있었습니다. 두 팔이 없음에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두 팔이 있는 저보다 더 감사드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두 팔이 없음에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두 팔이 있는 저보다 더 기도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 성서는 신앙인들이 따라야 할 ‘이정표’와 같은 분들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들었던 ‘엘리야’ 예언자도 그렇습니다. 구약성서에 엘리야 예언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와 싸워서 이긴 이야기, 사렙다 과부에게 기적을 베푼 이야기,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 하늘에서 불을 내린 이야기, 승천한 이야기 들이 전해집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인 엘리야는 지금도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은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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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짐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 주님과 만남의 여정 -
“하느님, 저희를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
부활의 선물을 갈망하는 시편의 화답송 후렴입니다. 삶은 선물입니다. 하루하루가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사랑의 선물입니다. 결코 삶은 ‘짐’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이런 선물이란 깨달음에서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그렇습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하는 선물입니다. 무지에 눈멀어 까맣게 잊고 지내는 선물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아주 예전, 무려 20년전에 써놨던 ‘선물’이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꽃처럼 환한 웃음보다 더 좋은 선물 있을까
삶은 순전히 선물이다
꽃같은 삶이다
삶은 꽃이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순식간 사라져가는 꽃들
바로 선물인생 아니던가
얼마나 그 많고 좋은 선물들 놓쳐 버리고 살았는지
살아있는 동안은 그대로 꽃인 인생인 거다
어제의 꽃폈다 사라지면 또 오늘의 꽃폈다 지고
꽃같은 인생이다
평생을 꽃으로 사는 거다
끊임없이 폈다 지면서 떠나는 삶이다
잘 떠날 때 아름답지 않은가
길이길이 향기로 남는다”-2001.4.23
어제도 여러 선물을 받았습니다. 먼저 카톡을 통해 전해 온 귀한 깨우침이 되는 선물 내용을 소개합니다.
*인생에서 한번 무너지면 다시 쌓을 수 없는 세가지
1존경, 2신뢰, 3우정
*실패하는 사람을 만들어 주는 세가지
1술, 2자만, 3화냄
*성공적인 사람을 만들어 주는 세가지
1근면, 2진실성, 3헌신과 전념
*인간의 세가지 좋은 습관
1일하는 습관, 2운동하는 습관, 3공부하는 습관
아, 여기서 부득이 하나 더 넣어야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첫째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이 빠졌네요!
“기도하는 습관!”
*남에게 주어야 할 세가지
1필요한 이에게 도움, 2슬퍼하는 이에게 위로, 3가치있는 이에게 올바른 평가
*살면서 한번 놓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세가지
1시간, 2말, 3기회
*인생의 세가지 후회
1참을걸, 2즐길걸, 3베풀걸
*반드시 소유해할 세가지
1건강, 2재산, 3친구
아, 여기서도 부득이 하나 더 넣어야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첫째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이 빠졌네요.
“하느님 믿음!”
*내가 진정 사랑해야 할 세사람
1현명한 사람, 2덕있는 사람, 3순수한 사람
아, 여기서도 부득이 하나 더 넣어야 하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첫째 자리에 놓아야 할 것이 빠졌네요.
“믿음의 사람!”
“세가지 만남의 복
1부모, 2스승, 3도반道伴
*가치있는 성공의 원천 세가지
1사랑, 2자신감, 3긍정적 사고
참 중요한 깨우침과 가르침이 되는 선물같은 조언들입니다. 어제 올해 들어 맨처음 받은 성탄 선물에 감사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는 모습의 성물에 짧은 편지가 곁들여 있었습니다.
“존경하올 이수철 신부님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영육간에 건강을 빕니다. 수사님들께서도 기쁜 성탄 맞이 하시시기를 기도합니다.- Sr.노유자 쟌느 마리
또 저녁 휴게시 내년 1월12일 사제서품을 앞둔 과묵한 정영훈 아브라함 수사로부터 선물처럼 사제서품 상본을 받고 축하한다고 격려의 악수를 선물했습니다. 서품 성구가 참 특이했습니다. 종신서원 상본 성구는 -“아브라함아!”(창세22,1)- 이었는데 사제서품 상본 성구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세22,11)-이었습니다. 아주 단순하기가 수도승답습니다. 이어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발견한 교황님께서 무릎꿇고 겸손히 고백성사를 보시는 장면도 신선한 감동의 선물이었습니다.
참 많이 선물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선물중의 선물이 주님과의 만남일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과 만남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선물을 통해 무지의 눈이 열릴 때 선물들의 발견과 더불어 감사와 찬미요 참으로 나는 물론 이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지의 병에 대한 근원적 치유가 바로 주님과 만남의 선물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선물을 통해 참나의 발견의 구원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무지에 눈멀어 얼마나 어리석게도 선물을 못 알아보고 불행하게 살아가는지요! 그러니 선물도, 감사도, 행복도 발견인 것입니다. 눈만 열리며 곳곳에 널려 있는 감사와 행복의 선물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는 엘리야가 주인공입니다. 저자는 엘리야란 인물의 선물에 감사와 놀라움의 찬탄을 쏟아 냅니다. 흡사 엘리야 예찬 같습니다. 성서와 교회에 차고 넘치도록 주신 하느님의 성인 선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엘리야!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집회서의 저자를 통해 엘리야는 물론 하느님 사랑 안에서 잠든 죽음의 선물이요, 이어 주님 안에서 부활의 선물로 살아날 우리임을 깨닫게 되니 얼마나 복된 말씀인지요! 사실 부활의 희망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미사경문 중에 나오는 아름다운 선물 같은 기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
무지가 참 치명적이요 고질적 마음의 병입니다. 유일한 처방의 명약은 주님과 만남의 선물뿐입니다. 예수님 역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무지를 일깨웁니다. 참으로 주님을 못만났기에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을 알아보지 못한 이들의 무지를 일깨웁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의 재림임을 깨우쳐 알게 하는 주님이요, 세례자 요한을 통해 자신의 고난을 예감하는 주님이십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무지의 눈이 열려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의 재림임을 깨달았다 합니다. 주님과 만남의 결과 이런 깨달음의 선물입니다.
주님의 선물중의 선물이 주님과 만남의 선물인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참 좋은 당신 말씀과 성체를 선물하시어 우리 모두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결정적 상급의 선물을 약속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곧 간다. 상도 가져가, 사람마다 제 행실대로 갚아 주리라.”(묵시22,12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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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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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구약 성경의 맨 마지막 구절은, 말라키 예언서 3장 23-24절로
다음과 같이 끝을 맺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유다인들은 엘리야 예언자가 산 채로 하늘로 올랐기에,
메시아께서 오시기 직전에 이스라엘에 다시 와서
백성을 화해시키고 열두 부족을 재건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길을 닦는 사자요, 예언자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11,14).
요한은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였고,
위정자들의 악행을 비판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종말의 때에
먼저 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렸다면,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 먼저 와서 그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듯,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또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세례자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으니, 예수님도 그렇게 대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엘리야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까요? 세상 종말의 도래에 필요한 준비 작업인
회개와 쇄신을 외치는 요한의 소리를 우리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대림 시기와 한 해의 마지막 달을 지내며, 세례자 요한의 종말론적 관점에서,
곧 죽음 앞에서 오늘 하루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쁘다는 핑계로,
일과 사람, 각종 오락과 즐거움에 파묻혀 다른 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멈추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아니 다만 30분이라도 멈추어 봅시다.
잠시 멈추어,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시고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자기 비움, 함께함, 나눔, 그리고 구원의 역사를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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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논쟁을 보여주고 있다. 바리사이들은 엘리야가 종말 전에 온다(말라 3,23 참조)고 하였다. 엘리야는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며 모든 것을 예전의 상태로 돌려놓는다고 하였다. 바로 앞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변모가 그분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왜 선구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는지 물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여기서 “먼저”라는 말에는 엘리야가 먼저 오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자의 오심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다.
예수님은 요한 세례자를 엘리야로 소개하시지만,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당했기 때문에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로 생각하였다(11,14 참조).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했다(14,3-12). 이렇게 메시아의 선구자가 배척을 당한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배척을 당하셨다는 것이다(11,16-19 참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12절) 그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한 헤로데와 그들이 공범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절)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그들이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당신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12절)는 말과 그에 대한 구원자의 설명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 오심은 지금 오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줍니다.”(티토 2,11-12)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잘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 사도께서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라고 한다. 엘리야나 메시아의 참모습은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엘리야가 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은총의 기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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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 12)
신앙은
소모품이
아니다.
우리의
빈약한 사랑을
감출 수는 없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기에
하느님을 사랑할
마음이 우리에게는
없다.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배우는
마음의 대림이다.
알아보지도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는 거기에
아파하시는
주님이 계신다.
또 아파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우리에게
건네신다.
성탄의 길은
우리들 안에서
일어나는
아픈 사랑이다.
목숨을 거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모욕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의
뻣뻣한 교만이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한 적이 없는
우리들 삶이다.
애타게 오시는
예수님을
늘 배척하는
우리들이다.
끝끝내
우리를 향한
이 사랑을
알 턱이 없다.
우리자신에게는
너무 관대하고
하느님께는
늘 야박하다.
아무렇게나
살고 있는
우리들 삶을
하느님께로
바로잡아 주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고난을
동반한다.
아픈 것과
더 아픈 것
사이에
우리가 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랑이다.
엘리야도
요한 세례자도
아파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다.
사랑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고난의 아픈
시간이다.
신앙은
소모품이 아닌
함께 아파하고
함께 사랑해야 할
인격이다.
그래서 성탄을
기다리는
사랑의 대림은
누굴 탓하는 것이
아닌 버려지는
신앙을 되찾는
한줄기 간절한
마음이다.
먼저 와야
할 것도
마침내 와야
할 것도
하느님을 사랑할
마음이다.
마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마음을 제멋대로
다루는 아픈
마음을 위해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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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상만사 만인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보는 눈 ♣>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마태 17,12)
인류의 타락을 보시며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던”(창세 6,6) 하느님께서는 참을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이스라엘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가 산 채로 승천해 있다가(2열왕 2,11)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이스라엘에 다시 와서 백성을 화해시키고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믿었습니다(집회 48,10; 말라 3,1. 23 참조).
율법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마태 17,10).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7,12)고 하십니다. 예언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며 메시아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러온 두 번째 엘리야인 세례자 요한도 죽입니다(마태 14,3-12).
마침내 그들은 메시아 예수님마저도 신성모독죄로 몰아 십자가형에 처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을 죽임으로써 생명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단죄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 욕심에서 위대한 예언자로 칭송받았던 엘리야 예언자가 먼저 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고, 현세적 집착 때문에 요한과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는 길라잡이입니다. 요한은 잠깐 등장하여 의미 없이 사라져버린 조연이 아니라,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미리 보여준 (17,12) ‘하느님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자기 욕심에 눈이 멀어 예언자들을 죽인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세례자 요한을 죽음으로 내몬 율법학자들처럼 행동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성당, 성상들, 거룩한 장소들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일상사, 사건들과 피조물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든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의 상징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원론의 잣대로 성(聖)과 속(俗)을 가르지 말고, 모든 것 안에 담긴 하느님의 음성과 언어와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눈을 떠야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신론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었으며 성경의 가르침을 잘 알았음에도, 요한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시대의 표징도 읽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또한 자기 생각과 신념에 매이고 자기 의지를 자기것으로 삼는 어리석음에 떨어질 때, 해방하러 오신 주님을 끝내 알아 뵐 수 없음을 알고 자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이 때에 자기중심적이고 소유지향적인 삶에서 벗어나, 공생(共生)을 위해 따뜻하고 열린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는 거룩한 여백을 마련하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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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을 것이다."
콤비 플레이
올 한해를 시작하면서 결심한 다짐 중에 첫 번째 다짐이 수도자로서 가장 중요한 일, "집에 잘 붙어있자"였습니다. 집에 붙어있어 보니 너무나 좋더군요.
사실 수도자가 밖으로 다녀봐야 좋을 것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늦게 나마 깨닫게 된 것이 올 한해 제게 있어 제일 큰 수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는 한 사회복지시설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두시간 짜리 강의 때문에 오랜만에 집을 비웠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사람들이 너무도 행복한 표정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고 계시는 천국 같은 곳이었기에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강의 두 시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두 시간 동안 남 앞에 선다는 것, 그것도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 서서 뭔가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제는 꾀를 좀 냈습니다.
학기말 시험 끝낸 수사님 한 명을 살살 꼬셨지요.
물론 레크리에이션이나 성가반주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다재다능한 수사님이었습니다.
떠나기 전날 두시간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 함께 의논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름대로의 계획에 따라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결과는 참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강의일변도로 나갔으면 정말 지루했을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부상조해서 강의 시작 전 수사님의 성가연습, 그리고 제 간단한 강의, 휴식, 다시 모여 수사님과 함께 레크리에이션, 마무리 제 강의. 이렇게 진행하다보니 두시간이 금방 지나가더군요.
작은 체험이었지만 팀으로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서로 머리 맞대고 계획을 짜고 아이디어를 나누는 일, 고통을 분담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팀플레이로 대응하려는 노력, 공동으로 행하는 사목이 물론 더디고 때로 짜증도 나겠지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내가 이 일의 책임자니 내가 모든 것을 다해야겠다",
"나는 죽어도 이 모든 일의 주인공이다. 절대로 남에게 양보 못한다",
"내가 이 일의 책임자니 모든 영광도 내 몫이다"는 사고방식처럼 피곤한 사고방식도 없습니다.
찰떡 궁합이란 말이 있습니다. 함께 일을 하면서 서로 양보하고 서로 인내하는 가운데, 서로 한 마음이 되어 서로의 몫을 척척 잘 해내는 경우를 말하겠지요.
이렇게 될 때 진정 일할 맛이 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을 것이다."
여기서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진정 찰떡 궁합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죄인을 구원하는 선교사업에 더할 나위 없는 찰떡 궁합이었습니다.
두 분은 각자가 해야할 몫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잘 닦는 역할이 주어졌었는데, 그 역할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잘 마무리지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오실 길을 완벽하게 닦아놓자마자 정확하게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이 전면에 등장하자마자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한 세례자 요한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무대 뒤로 물러섭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더할 나위 없는 콤비 플레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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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이해 못 할 때; 부모도 자녀에게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다
오늘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변모하시고 내려오는 중에 제자들이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면 당신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율법 학자(모세) – 엘리야 – 메시아’에 관한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타볼산에서 만난 모세이고 모세는 율법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다음 엘리야가 필요하고 마침내 이 두 단계를 거치면 메시아가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알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종교 안에서도 하나에 지나치게 집중하거나 약간 교리를 바꾸어
돈벌이하는 사이비들을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은 모세-엘리야-메시아의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우리 종교 안에 스며들어있는 사이비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자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딸이 어렸을 때 받은 상처에 대한 탓을 너무 부모에게만 돌린다는 이유였습니다.
물론 부모로서 키우면서 딸에게 부족한 사랑을 준 것은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힘든 이유를 지나치게 부모 탓만 하니 더는 견디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년 동안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된 영성 심리 학회에서 교육도 받고 피정도 하고 상담을 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당연히 지금 상태가 좋지 못한 이유는 어렸을 때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영향이 가장 크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저도 모든 심리적 문제는 사랑을 부족하게 받아서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방법에 머물게 만드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는 사랑하지 못하는 탓을 남에게 돌리게 하지 않습니다. 자아와 삼구에 돌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방법을 따라야 하며 부모에게 용서를 받게 하고 자기 자신을 믿고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역할이 강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모세입니다.
그러나 이것에만 머물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이제 초점을 나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용서를 청해서 그 상처가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그 상처 받은 자아를 죽이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엘리야의 역할입니다.
왜 이미 성인이 되었으면서도 그래도 할 만큼 한 부모 탓을 하게 만듭니까?
부모가 부족했어도 부모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완벽합니까?
엘리야는 우리 시선을 자아로 이끌고 그 자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음을
깨닫게 만드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엘리야는 가르멜산에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이끄는 예언자들의 목을 쳤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시합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우리 문제가 그리스도의 피, 곧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음을 명확히 일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들은 무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자아와 삼구를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자신들이 하는 기도회나 상담, 피정,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어떤 방법들을 통해서 어렸을 때의 상처를 치유하라고 하며 그리스도의 피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자신들이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치장합니다.
그렇게 돈을 버는 것입니다.
혹은 자기 존재감을 느끼는 것을 즐깁니다.
모든 것은 나의 문제고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알리는 엘리야의 역할을
본인들이 하려고 하는 이들이 사이비입니다.
자신들의 역할을 강화하며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소시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대부분의 사이비는 이렇게 엘이야가 와야만 하는 필요성을 무시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사이비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라고 말하는 사이비들을 조심하십시오.
엘리야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표지판과 같은 존재입니다.
요한은 자신 안에 사람들을 잡아놓지 않습니다.
어린양께 자기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을 보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었고 요한은 그들이 예수님께 떠나는 것을 기뻐합니다.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이비는 자기가 커지며 예수님의 역할을 줄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이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합니다.
영화 ‘새크라멘트’(2014)는 마약에 빠진 누나가 어느 종교단체에 들어가는데 친동생에게 이곳이 너무 좋다고
한번 오라고 초대장이 와서 친구 두 명과 함께 누나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이는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존스타운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곳의 교주 짐 존스는 900여 명의 신도에게 에덴동산과 같은 그곳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그런데 무장한 사람들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동생과 기자들이 떠나는 날이 되자 그곳에서 소란이 일어납니다.
행복하기만 하다고 말하던 그들이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고 청하는 이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자 짐 존스는 무장한 부하들에게 그곳을 떠나려는 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였고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 당연시되자 남아있는 이들 또한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수백 명의 아이와 함께 900여 명이 자살하거나 피살된 이 사건은 911 테러 이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왜 9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된 것일까요? 그들이 엘리야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모든 문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고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십자가 희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인도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마치 자기를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하면
그것은 사이비입니다.
엄마도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는데 자녀의 종교적 자유를 주지 않는 부모도 어느 정도는 사이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영성체를 했다면 이제 자녀와 부모는 하느님 앞에서 같은 형제·자매들입니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선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여기서까지 부모가 자녀들에게 종교를 강요한다면 부모가 사이비 교주가 됩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데 본인도 구원에 들지 못했으면서 본인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니?”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어쩔 뻔했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본인이 예수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항상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게 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커지면 그것이 곧 사이비가 되는 것입니다.
사이비에 빠지지 않도록 ‘율법 – 엘리야 – 메시아의 고리’를 명확히 이해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모두 엘리야고 요한입니다.
우리는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합니다.
구원은 내가 아니라 그분에게서 옵니다.
그리스도 앞에 서 있으면서 나의 역할을 줄여가지 않는 사람은 사이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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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대림 제 2 주간 토요일-묵상과 기도
라틴어 Adventus는 곧 그분이 '도착'하신다. 뜻입니다.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전례력의 새해인 대림 시기는 주님 성탄 대축일 전 4 주간 동안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성찰과 회개, 믿음과 희망으로 오시는 구세주를 기다립니다. 미사와 성사 참여, 그리고 선과 자선을 행합니다.
집회서 저자는 엘리야 예언자를 말합니다. 그는 북 이스라엘 아합왕이 주님의 계명을 버리고 바알을 따를 때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 아브라함 이사악과 이스라엘 하느님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백성들 앞에서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키고 도랑의 있던 물도 핥아 버리게 하여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마차로 하늘로 올라간 예언자이며 이스라엘의 횃불이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보다 앞서 온 세례자 요한이 구약에서 말한 예언자 엘리야임을 암시합니다. 사람들은 엘리야의 길을 걸었던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으며, 예수님도 그들에 의해서 고난을 당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되돌아봅니다. 나와 이웃, 그들과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그리고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들였고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 엘리야여, 당신은 놀라운 일들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처럼 자랑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과 사랑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우리도 반드시 살아날 것입니다. 집회 48,1-4.9-11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마태 17,10-13
실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에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그분의 길을 닦은 세례자 요한을 기억합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북 이스라엘에서 바알을 섬기던 아합왕 앞에서 주님의 권능을 드러내고 백성들이 주님의 계명의 길로 돌아오게 하고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예언자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그 엘리야 예언자가 다시 발현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예언자의 길을 걷는 이가 엘리야 역활의 세례자 요한이다. 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앞 서 와서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선포하였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통하여 자신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태 3,3)외쳤습니다. 그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하고 이스라엘을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마태 3,11).
세례자 요한은 백성들이 주님의 계명으로 돌아오게 하고, 엘리야의 역할로서 오시는 크신 분, 구원자 예수님을 앞서 증언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입니다.
마침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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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집회서48,1~4.9~11)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가 불처럼 일어섰는데,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48,1)
'엘리야'란 이름은 '하느님은 나의 힘이시다'는 뜻이다. '불','횃불'의 표상은 여기서는 '사랑' '열정' 혹은 '심판'의 의미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해석한다.
"엘리야는 그들에게 굶주림을 불러 들였고"(48,27)란 말씀은 48장 3절의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는 하늘을 닫아 버리고" 와 연결이 되어 있다. 가뭄 예언과 관련된 말씀 (1열왕17,1 ; 18,1-3 ; 참조18,45)이다.
하늘 문을 닫고 여는 하늘의 신, 풍요다산의 신인 바알을 숭배하던 아합왕과 이스라엘의 변절된 신앙에 대한 질타로 가뭄이 예언되고, 그 결과로 기근(굶주림)을 체험하는 것이다.
즉 가뭄을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진짜 하늘(햇빛과 비)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자신의 열정으로 그들의 수를 감소시켰다"(48,2ㄴ)는 것은 카르멜산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키손천에서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사로잡아 죽인 사건을 가리킨다(1열왕18,40).
48장 3절에 "세번씩이나 불을 내려보냈다"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은 열왕기 하권 1장에 아하즈야왕이 자기 옥상 방의 격자 난간에서 떨어져 다친 후, 하느님을 찾지 않고 사자들을 보내어 에크론의 신 바알 즈붑에게 가서 병의 회복에 관한 문의를 하라고 명령한 것에 대한 벌(심판)의 이야기이다.
두 차례나 엘리야가 예언한대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오십인 대장과 부하 쉰 명을 삼켜버린 사건을 말한다(2열왕1,10ㄷ.12ㄷ). 이 두 번과 450명 바알 예언자들과의 카르멜산 대결에서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린 사건을 말한다(1열왕18,38).
"당신은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48,9)라는 말씀은 엘리야와 엘리야 영의 두 몫을 청하는 엘리사의 이별이야기에 나온다.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 두 사람을 갈라 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에 실려 올라간 사건을 말한다(2열왕2,11).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48,10)
이 구절은 말라기 3장 1절과 23절에 있는대로, 죽지 않고 산 채로 불수레를 타고 승천한 예언자가 하느님이 세상을 심판하기 직전에 다시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키고 열두 부족을 재건할 거라는 말씀이다.
엘리야는 종말 심판자이신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 메시아의 선구자(선주자)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세례자 요한에 이어 예수님이 활약하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요한 세례자(=엘리야)가 예수(=메시아)의 선구자(선주자)라는 입장을 취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말라3,1)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려치지 않으리라." (말라3,23-24)
[대림 제2주간 토요일]
自身을 제멋대로 다루는 信仰을 사시렵니까?.
(마태17,10-13)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 구약의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 끝에 예언이 되어 있다.
(말라3,23-24) 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 부모의 마음과 자녀의 마음을 어떻게 화해시키나? 오늘 독서에서 말씀하셨듯이 하느님에 대한 열정의 마음으로 하는 하늘나라의 복음 선포다.
(마태3,2) 2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 하느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그분의 뜻으로 살지 않고, 자신들의 뜻대로, 제멋대로 살기에~ 그 제멋대로의 길에서 하느님의 길로 돌아서는 회개를 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하느님의 진노가 내리지 않아 자녀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사람의 길, 방법으로 살았던 그 육적 인간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대속, 그 십자가인 하늘의 진리를 통해서 갈 수 있다. 그 십자가를 지고, 곧 그 십자가가 주는 용서, 의로움을 받고, 입고 가야 들어갈 수 있다.
하느님은 그 예수라는 안경으로 보시기에 곧 그 아드님의 죽음, 그 대속의 피를 통해 보시기에 우리를 깨끗하게, 거룩하게 보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피로 맺는 구원의 새 계약이다.(루가22,20) 그렇게 당신의 자녀가 구원되는 것을 기뻐하시며 진노를 거두신다. 그것은 창조이전에 미리 계획하신 하느님의 뜻이었다. 하느님의 사랑이, 자비가 하신 일이다.
(에페1,4-5)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13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 모든 동물은 본능대로 행동하고 산다. 사람 역시 그렇다. 무엇이든 자신의 생각으로 보고, 듣고, 행동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도 제멋대로 생각해서 듣고, 행동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판단했던 아담처럼(창세3,7-8) 자신까지도 제 멋대로 다룬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도 제멋대로 다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그 사람의 제멋대로의 생각으로 목이 잘려 죽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사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맞다.
그러나 그 땅의 방식으로 영원한 하늘을 살 수 없기에 하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땅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요한1,14)
그 말씀을 하늘의 생명의 양식으로, 하늘의 생명의 옷으로 배워서 먹고, 입고 오라고~ 그러나 세상은 그 생명의 빛을 알아보지 못해, 받아 드리지 않았다.(요한1,9-11참조) 그러니 말씀을 인간의 뜻, 지혜, 계명이 아닌 하느님의 뜻으로, 지혜로, 계명으로 배워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포도밭(성경)에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말씀 안에 머물러 씨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8,31-3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예수님의 말씀이 하늘의 진리의 양식, 옷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우리의 보호자 성령께서 오시면~
(요한14,26)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
(요한16,23)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1요한1서2,27) 27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성령)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성령)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 성령의 보호하심, 이끄심을 거부하고 제멋대로의 뜻을 고집했기에,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까지도 제멋대로의 생각으로 다루어 십자가에 못 밖았던 것이다. 옛적이나 지금이나 같다는 것이다.
(애레5,30-31) 30 소름 끼치는 무서운 일이 이 땅에 일어나고 있다. 31 예언자들은 거짓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사제들은 제멋대로 다스린다. *그런데도 내 백성은 그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끝 날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 성경에 미리 기록되어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이다.(로마15,4참조) 율법의 제사와 윤리로 착하게, 의롭게 살았던 바리사이들 에게~
(마태15,8-9. 14)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9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14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 그러니 분별해서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뜻)인지, 사람의 제멋대로의 말인지를~~
(말라2,8) 8 그러나 너희는 길(진리)에서 벗어나 너희의 법으로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하였다.
(이사29,13) 13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다.
(티토1,14) 14 유다인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1코린4,4-5) 4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양심)을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5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히브10,22)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 믿음을 칭찬하신다.
* 은총이신 천주 성령님!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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