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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3), 화평(갈 5:22-23,엡 2:14-18)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진리가운데 인도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깨우쳐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도록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안에 계시면 그증거가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열매는 9가지라고 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열매의 근원입니다.
사랑의 열매가 맺히면 함께 맺히는 열매가 바로 희락(기쁨)입니다. 여러분, 지난 한 주간동안 기쁨의 열매를 얼마나 맺으셨습니까? 기쁨을 의지적으로 선택했습니까?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기쁨을 선택하면 감사가 나옵니다. 또 찬송이 나옵니다. 기쁨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은 그 안에 화평이 이루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원어상으로 복수가 아닙니다. 단수입니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살펴볼 말씀의 주제는 성령의 세 번째 열매인 화평입니다. 이 화평의 열매는 헬라어는 “에이레네”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과 일치하는 히브리어는 ‘샬롬’입니다. 유대인들의 인사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힘들고 고단했기에 이 ‘샬롬’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샬롬은 깨어진 관계가 회복된 상태입니다.
전쟁이 없고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적극적으로 서로 믿고 기쁨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가 화평한 것이 샬롬입니다. 또 육체적으로 건강한 것은 육신의 샬롬이고, 근심과 두려움이 없고 마음이 평안한 것이 정신적 샬롬입니다. 이 말은 우리 말로 해석하면 화평, 평화, 평강, 평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 평화는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어떻게 영적인 평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죄악의 담을 허물고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롬5: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성경에서는 원수가 되었다고까지 말씀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 만 아니라 십자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고 서로를 화목케 만들어 줍니다. (엡 2:12-16)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방인과 유대인은 서로 원수된 관계였습니다. 서로 정죄하고 심지어 서로 악수나 식사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서 이방인과 유대인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민족과 신분의 경계를 넘어 교회 안에서는 모두가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 하나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하나님과 나사이를 연결시키고 나와 너 사이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 화평케하는 자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신이 화평을 누릴 뿐 아니라 화평케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화평케하는 자입니다”
화평, 평화의 주님은 우리들 또한 세상에 나가 화평케하는 자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시다.
무엇보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불편하게 하고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죄입니다. (사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래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힘써야 하고 죄악을 대적해야 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곧바로 회개하고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죄를 지으면 일단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집니다. 죄를 지으면 마음에 어둠과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자꾸 하나님을 피하게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저질렀던 아담은 (창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하며 하나님을 피했습니다.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분께 기도하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야 우리 마음에 화평이 주어집니다. 우리 마음에 먼저 화평이 주어지지 않고는 다른 사람과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먼저 구약시대에 속죄제물을 드리듯이 하나님앞에 나아와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요즘 살펴보는 느헤미야서를 보면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자기들의 죄앆을 발견했습니다. 통곡하며 슬퍼했습니다. 하나님앞에 엎드려 회개했습니다. 이러한 회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뿐 만 아니라 거기에 이웃이 관계되어 있다면 그 사람을 찾아가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대단한 것같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별것도 아닌 것으로 마음을 상하게 한 것입니다. 화목제물은 바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 있는 상처와 쓴 뿌리를 하나씩 치유해 가야 합니다. 이것들이 우리를 얼마나 자주 넘어지게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그릇된 욕망들이 작용하지 않도록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불화의 마귀가 우리 마음과 인생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우리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회개함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모이듯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사람의 마음가운데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집니다. “나의 화평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앞에 나의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습니다” 이렇게 내려놓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기뻐하십니다. 그 때 비로소 영혼의 화평이 주어집니다. 이 화평이 여러분에게 풍성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이웃과의 화평을 누립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변화되는 것이 있는데 이제 우리의 지향점이 달라집니다. 이제는 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친죄 성향이 없어집니다. 남과 싸우는 것이 싫어집니다. 화평케 하는 자로 변해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팔복을 말씀하실 때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평하게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화평의 열매를 맺습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늘 싸움을 붙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Troble Maker입니다. 당 짓는 것, 분쟁하는 것, 수군수군하는 것, 남을 비방하는 것 등으로 이간질하고 싸움을 붙입니다. 남의 좋은 점을 보지 못하고 늘 허물만 보며 수군수군하고 비방합니다.
가는 곳마다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혹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 다니면서 자신을 정의의 사도로 착각하고 늘 싸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의를 실현한다고 교회를 싸움터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을 반복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싸우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후 5장18-20절에서는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어 화평을 만드는 사람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싸움을 붙이는 사람이 아니라 싸움을 말리는 Peace Maker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평화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화평케하는 자입니다” 문제를 보고 방관하는 자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화평케 하는 자로 불렀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어떤 모임에 가든지 “내 사명은 화목이야”라고 다짐하고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에 화평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성도와 가족과 이웃과 화평을 누리려면 우리가 화평의 사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다른 사람과 화목해야 하지만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우리의 사명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화목하게 사는 것을 시기합니다. 어떻게든 분열시켜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미워하며 살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아담 때부터 예수님 재림할 때까지 사탄을 끊임없이 분열을 조장할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렇게 큰 소리로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조금 지나면 별거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메뚜기와 하루살이가 싸웠는데 하루살이가 엄청 두들겨 맞았답니다.
화가 난 하루살이가 천 마리나 되는 친구를 데리고 와서 메뚜기에게 도전했답니다. 그런데 메뚜기의 한 마디 하더랍니다. "야. 나 오늘 피곤하니깐 내일 싸우자" 하루살이는 말 그대로 하루살이입니다. 싸우고 살만큼 긴 시간의 여유가 없습니다. 죤 번연이 "이상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있다. 마귀와 더불어 대적해야 할 교회와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싸우는구나!"라고 했듯이 오늘날도 교회안에서 성도들끼리 갈등하고 다투는 모습을 봅니다.
분쟁은 서로를 죽이는 독약입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분쟁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Trouble Maker의 혀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입을 조심하지 않고 혀를 함부로 놀려대기 때문에 평화가 깨집니다. 남의 허물을 보고 혀로 비판하고 싶으면 그때 의도적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면 평화의 도구가 되어 화평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될 것입니다.
험담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할 때 침묵하면서 기도하십시오. 느헤미야서의 느헤미야가 그렇게 생활 기도를 잘 하는 분이었습니다. 어떤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했습니다.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좋습니까? 성령을 따라 행하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자신의 육신의 소욕이 사라지고 성령이 기뻐하시는 화평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공연히 아는 척하고 충고하고 비난하려는 유혹을 참고 의도적으로 칭찬을 하게 되면 피스메이커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누가 비방하는 말을 할 때 그 사람에게 가서 그 말을 전하지 않으면 평화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견해나 의견을 교회 안에서는 강하게 주장하고 싶을 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분별하면 화평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화평의 열매는 가장 빨리 입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약 3:17-18)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대의 실수가 있었다면 그것은 십자군 전쟁이었을 것입니다. 회교도들에게 빼앗긴 성지를 탈환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고아와 미망인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결과 오늘까지도 기독교들과 마호멧교도들 사이에 무서운 증오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군 전쟁이 계속되던 그때 이 전쟁의 잘못을 지적하고 아군 진영뿐만 아니라 적군들에게까지 평화의 사신을 보내고 복음전도자들을 파송하며 눈물로 기도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아씨시의 성자 성 프란시스입니다. 그는 한 시대 평화의 도구로 쓰임받았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려 죽음으로써 영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자신과의 관계에서 평안을 누립시다.
우리 자신과의 화평은 평안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시기를 (요 14: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서도 여전히 불안해하고 두려워합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질병이 걸리고 부도의 위기가 다가오고, 교통사고를 당하고, 직장에 문제가 생기면 불안해지고 긴장해집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화해 못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평안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믿으면서도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경우에서도 참 평안을 누리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평강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방법을 없겠습니까? 죽음 앞에서도 평강을 잃지 않고 천국가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빌 4:6,7절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먼저 염려와 걱정은 죄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의도적으로 마음의 평강을 깨뜨리는 염려를 거절하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염려는 고통입니다. 두려움입니다.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우리가 염려의 늪에 빠지면 자신이 황폐화되어 버립니다.
염려는 불신앙의 죄입니다. 염려는 염려의 상황을 결국 만들어 가는 올무입니다. 어니 J 젤린스키는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그리고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사건들이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들"이라고 말했습니다. 96%의 염려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귀중한 인생을 황폐화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염려거리가 있을 때 그 때가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염려가 죄라는 사실을 깨닫고 "염려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하고 각오한다고 염려의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평강이 없으면 하나님앞에 나아와 기도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와 기도하면 염려거리는 쓰레기 통으로 들어갑니다. 힘없는 다윗이 골리앗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니까 평안이 찾아옵니다.
나병 환자가 나병 때문에, 혈루증 여인이 혈루증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니까 문제가 해결되고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문제를 해결해주실 분은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고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다 맡겨 버렸습니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문제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전체를 맡기는 것입니다.
(시 37: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염려거리를 기도거리로 바꾸고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환경에 메이고 염려에 사로잡혀 끌려다니지 않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그 모든 것을 지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진정한 평강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축복은 바로 평강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속에 평강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뿐 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우리는 화평케하는 자가 되어 평화의 도구, 평화의 사신, 화평케 하는 사명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함으로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열매, 화평의 열매를 주렁주렁 풍성히 맺어서 여러분의 가정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오직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