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숙 시인의 시조집 『들판 정치』
약력
임영숙 시인
경기 용인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국문학을 대
학원에서 미디어문예창작을 전공했다. 아이
들을 가르치는 일을 16년간 하다 이직했다.
2014년 《나래시조》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풀잎의 흔들림이
내게 건너왔으니』, 『들판 정치』가 있으며,
<나래시조 젊은시인상>,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계간 《나래시조》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E-mail: roosia715@hanmail.net
시인의 말
너에게 말하지 않았던 뒤척임
생각의 형상에 닿기 위해
현실의 작은 표식을 남긴다
2024년 8월
임영숙
들판 정치
들판에 부려놓은 바람의 난장, 난장
피고 지는 꽃들 사이 매일이 혁명이다
줄댄 채 줄로 얽힌 판
민초들의 날 샌 파동
들판 위 울음들로 모여 맺은 열매들
쏟아붓는볕살 공습 뿌리째 흔들린다
옆으로 밀려 선 자리
우듬지를 향하며
들판엔 저마다의 향기로 대화하는데
포자처럼 떠도는 말, 내 귀를 간질인다
나, 이제 투표할래요
꽃, 나무, 강, 바다에게
허공 포옹
- 홀로그램
영원을 기억코자 영혼을 압축해요
바람을 베어 물고 엄마와 딸 AI로봇
사차원 가상현실에서
서로인 듯 만나요
아카시아 꽃잎 필 때 감자 꽃도 피었고
나비 혼 굳은 관절 빙빙 춤출 수 있죠
눈부신 무지개 밟고 홀로그램 만들어요
오늘은 너의 생일 소원을 말해 보렴
더 많이 울지 않고 사랑할게, 편지를 쓰네
이상은 휴머노이드 허공 딛고 피어올라요
꿈만 같아요. 바람 속 태풍의 눈처럼
아무도 모르게 있고도 없는 홀로그램
한 공간 같이 있지만
너와 나는 다른 세계
성수聖水처럼
한여름 소낙비 쫀듯
내리는 은총을
쉼 없이 흘러내리는
그 눈물의 수직성을
내 머리 위 정화수처럼 맞을 수 있을까
한겨울 눈꽃 피듯
내려오는 영광을
하얗게 덮어버리는
그 눈꽃의 수평성을
내 이마에 세례수처럼 그을 수 있을까
벽 속에 새긴 문
빛 드는 회벽 위에 일렁이던 그림자
화지에 그려가는 손처럼 어른거린다
지난날 그린 그늘 잡고
고요에 잠긴 시간
벽화 속 또 다른 길 통하는 문 만들면서
순간마다 움직이며 형상을 바꾸었다.
속내에 전할 말 새겼지.
마음 한 켠 무늬로!
그 속에 새겨진 아득히 흐릿한 길
그녀가 걸어갔을 두근거린 발걸음
벽 안에 열지 못한 문
꿈을 향해 내민다
귓속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요
기울인 왼쪽 귀에 외계인이 사나 봐요.
집중하면 할수록, 조용하면 할수록
두 두 두 심장 뛰는 소리
어둠 속에 들려요
며칠을 품고있어도 나올 생각 없는지
심장 소리 안고, 맥박 소리 달고
달팽이 이비인후과에
달팽이 의사 만나요
안경 낀 늙은 의사 더듬이가 날 봐요
고막이 말렸어요, 발살바 호흡해요
검이경 탐지하는 동안
컴퓨터에 접속해요
모스 부호 같은 말들 내 귓속에 울려요
누구의 타전인지 소리 깃이 겹쳐와요
동굴 속 또 다른 기척
언제쯤 괜찮을지
추천사
임영숙 시인은 경청과 편집으로 일과가 분분하다. 사물의 안 팎을 되밟는 길에 만나는 난망쯤 가락으로 보듬는다. 간혹 지난날의 사진과 사람의 기억이 뒤채면 다시 정형에 얹어 새로운 율로 간추린다. 여릿한 해금을 품고 더 은미한 소리를 끌어내듯. 또는 "빛 쪽으로 움직이는 기억" 너머 바람들을 입술에 얹어 가만가만 읊조려보듯. 그렇게 일상에서 일고지는 마음의 소리를 따라다닌 흔적인지, "심장 뛰는 소리" 들려주는 귀의 아픈 속내도 생생히 전한다. 몸에 대한 사유가 깊어지면 「등이 멀다」처럼 생의 비밀이 담겼을 법한 먼 데를 더 가본다. "닿지 못한 그리움" 이자 "마주한 적 없는 곳", 때로는 "가깝고도 먼 그곳"을 찾아나서는 게다. 그런 길목 어디선가 반짝 띄는 시상을 오붓이 받아 적은 『들판 정치』 속을 함께 거닐면, 누구든 임영숙의 시인의 아름다운 전언을 만날 것이다.
정수자(시조시인)
해설
꿈의 몸짓과 생명의 시학
차성환(시인, 문학평론가)
임영숙의 시조는 전통적인 시조의 문법을 기본으로 하지만 그 틀을 자유롭게 넘어서는 운율감을 큰 특징으로 한다. 이 운율상의 보법은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바탕으로 꽃과 바다와 같은 자연의 완상에서부터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자유자재로 운용되면서 우리 시조의 현대적 감각을 개성 있게 드러내고 있다. 그만이 가지고 있는 이 호흡은 언뜻 정형시라고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들숨과 날숨, 밀물과 썰물처럼 자연스러운 리듬을 만들어내고 자신의 사유와 정서를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이 호흡은 자신과 타자의 만남에서 체득된 것이다. 임영숙 시인은 타자와의 교호작용을 통해 사랑의 일을 배우게 된다. 그의 시조는 자신의 내밀한 기억과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에서 출발해 타자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공명하는 일로 나아간다. 그렇게 임영숙의 시조는 하나의 소리에서 기원했을 것이다.
시조집 『들판 정치』에는 세상의 꽃과 울음이 가득하다. 꽃과 울음의 시학이라 할 수 있겠다. 울음은 존재가 감당해야 할 숙명이며 바로 이 울음을 통해 존재는 성숙해지고 한 송이의 꽃으로 피어난다. 울음 없이는 꽃도 없다. 고해와 같은 이 세상에 서로의 울음을 돌보고 보듬는다면 우리의 존재는 생生이 뜨거울 때 피는 꽃처럼 내내 아름다울 것이다. 서로에게 빛나는 꽃과 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