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상징 속 성인 읽기] 성인의 삶과 상징 (1)
- 로마의 성 알렉시오
부모 집에서 비렁뱅이로 산 사람: 로마의 성 알렉시오
성 알렉시오는 4세기에 로마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봉사하며 거룩하게 살고자 노력했고, 그러는 가운데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꼈다. 한편, 로마 원로원 의원으로 덕망 높고 매우 부유하던 아버지의 생각과 계획은 전혀 달랐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권력과 재산을 두루누리며 살기를 바랐고, 그렇게 살도록 해주고자 아들의 결혼을 서둘렀다. 알렉시오는 부모의 뜻에 따라 일단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그러고는 결혼식 날 신부(新婦)를 설득하여 자신이 염원해 온 소명을 따르는 삶을 살기로 양해와 동의를 구했다.
그리고 그는 결혼 첫날 밤에 거지로 변장하고 집을 나섰다. 그 길로 시리아의 에데사로 가서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 문 앞에서 걸식하며 지냈다. 그의 부모는 난데없이 종적을 감춘 아들을 찾기 위해 사방으로 사람들을 보냈고, 그 사람들 중 몇몇이 에데사의 한 성당 문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틈에서 그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를 알아보지는 못했고, 그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그에게 작은 도움만 베풀고는 돌아섰다.
그곳에서 알렉시오는 환시 중에 성모님을 뵈었다. 성모님은 그를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주셨다. 마을 사람들은 성모님이 그를 이처럼 특별한 사람으로 식별해 주시기 전까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뜻하지 않게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된 그는 그만 로마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가족들이 알아보지 못하기를 바라면서 마침내 비렁뱅이로 부모의 집에 도착했다. 가족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다만 가난한 이를 돕고 보살피던 습관대로 그를 따뜻이 맞아들여서 일거리와 먹을 것을 주었다. 또한 그 집의 계단 아래 빈 곳에서 지내게 해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17년 동안 잠을 자고 가족들이 먹고 남긴 음식을 먹으며 지냈다. 그러면서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고, 동네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람’을 찾아라. 그는 로마를 위해 기도할 것이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은총을 베푸실 것이다. 이제 그는 곧 죽을 것이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하느님의 사람’을 찾아 나섰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알렉시오에게 그가 살아온 삶을 글로 기록하라고 이르셨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 종의 거룩한 신원을 확증해 주신 것이다.
- (좌로부터) 남은 음식을 전해 받는 성 알렉시오, 하느님의 분부로 자서전을 기록하는 성 알렉시오, 성 알렉시오의 죽음
알렉시오는 숨을 거두었고, 계단 아래의 거처에서 문서 하나(자서전)를 손에 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교황은 이 문서를 큰 소리로 읽었고, 이 내용을 들은 사람들에게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탄이 함성으로 터져 나왔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된 알렉시오의 깊은 자기 부정이 로마의 신자들과 가족들에게 큰 감동을 준 것이다. 그의 부모가 살던 집은 나중에 성 알렉시오에게 헌정된 성당으로 바뀌었다.
교회는 7월 17일을 성 알렉시오의 축일로 기억하고 기린다. 그리고 화가들은 부모의 집 계단 아래 공간에서 지낸 ‘하느님의 사람’의 생애의 여러 행태로 이 성인을 표현한다.
- 성 아이다노
말, 사슴, 횃불: 린디스판의 성 아이다노
성 아이다노는 7세기에 아일랜드에서 태어났고 훗날 스코틀랜드의 수도원 섬이 된 이오나에서 공부했다. 그 뒤 수도사가 되었고, 북아일랜드 지역의 주교로 봉사하다가 사임하고 다시 이오나의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이때 마침 이오나 수도원으로 피신해 온 오스왈도를 만났다. 나중에 군대를 일으켜 노섬브리아(고대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족이 세운 7왕국 중 하나)의 왕이 되고 또한 성인으로 시성된 오스왈도는 이곳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고 자기의 왕국에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이오나 수도원에 요청했다.
이에 아이다노가 노섬브리아 왕국으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주교로 또 축성되었다. 오스왈도 왕은 아이다노가 마음껏 복음을 선포하도록 도왔고, 섬 하나(린디스판)를 주교좌로 삼도록 기증했다. 아이다노는 도피 중에 친구가 된 오스왈도 왕의 영토에 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세우고 복음을 전했다. 해박한 성경 지식과 뛰어난 설교, 높은 성덕과 가난한 이들을 향한 애정 그리고 수많은 기적 이야기로 그는 왕국 전체에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린디스판은 또 하나의 이오나인 듯 잉글랜드 북부 지역의 선교 중심지요 배움의 전당이 되었다.
- 오스윈 왕이 선물한 말을 가난한 이에게 건네주는 성 아이다노
아이다노는 오스왈도 왕이 전사한 뒤 왕국의 남쪽 지역을 새로 다스리게 된 성 오스윈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한번은 오스윈 왕이 걸어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던 아이다노에게 왕실의 말을 선물했는데, 아이다노는 왕궁에서 나오다가 마주친 어느 가난한 이에게 이 말을 선뜻 넘겨주었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사냥꾼 모르게 사슴 한 마리의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다. 그리하여 고독, 경건함, 기도를 상징하던 사슴은 또한 그를 표상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아이다노라는 이름은 게일어로 ‘불(불꽃)’을 뜻하며, 그러기에 불꽃으로 어둠을 밝혀 주는 횃불이 또한 아이다노를 가리키는 상징이 되었다.
자신은 아일랜드 출신이지만 켈트 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성덕과 온유함이 뛰어나고 하느님과 가난한 이들을 향한 열정과 사랑이 충만하다고 칭송되는 성 아이다노의 축일은 8월 31일이다. 그리고 화가들은 성 아이다노를 그릴 때 그의 면모를 잘 드러내 주는 말, 사슴, 횃불을 곁에 동반하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상징 속 성인 읽기] 성인의 삶과 상징 (2)
- 몬테풀치아노의 성녀 아녜스(좌) 천사에게 성체를 받아 모시는 몬테풀치아노의 성녀 아녜스(우)
몬테풀치아노의 성녀 아녜스: 어린양, 백합
성인의 이름 중에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칭호 중 하나인 ‘하느님의 어린양’에서 어린양을 뜻하는 라틴어 아뉴스(Agnus)와 철자며 발음이 비슷한 아녜스(Agnes)가 있다. 대개는 4세기 초에 로마에서 순교한 아녜스 성녀를 떠올리는데, 이 이름으로 불리는 성녀들이 몇 분 있다. 그중의 한 분인 몬테풀치아노의 성녀 아녜스는 13세기에 당시 교황령이던 이탈리아 몬테풀치아노에서 태어났다. 6살 때부터 부모에게 수도 생활을 하게 해달라고 졸라대던 그는 9살에 수녀원에 들어갔다. 교회법의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교황의 특별한 허가로 가능했다.
4년 뒤에 인근의 한 영주가 자기 영지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우고자 몬테풀치아노의 수도자들을 초빙했는데, 이때 아녜스도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놀라운 성덕으로 많은 이에게 모범이 된 그는 15살 남짓한 나이에 이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20여 년쯤 뒤에 몬테풀치아노에 또 다른 수도회가 설립되자, 몬테풀치아노의 주민들은 그가 돌아오기를 요청했다. 몬테풀치아노로 다시 돌아온 그는 선종할 때까지 원장의 소임을 다했다.
몬테풀치아노에서 그는 수도원과 수도자들의 삶을 개혁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한편으로 그 도시에서 분쟁 중인 가문들 사이에서 평화를 중재하는 데도 힘을 보탰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철저하게 금식하며 수행하는 삶을 살았다. 성체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깊은 그는 관상기도 중에 여러 차례 환시를 체험했다. 한번은 환시 중에 성모님에게서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은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환시에서 깨어났을 때는 아기 예수님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기적이며 다른 놀라운 일들도 많이 행했다. 그 놀라운 일들 중에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과도 같이 몇 덩이 빵을 수도원 식구들이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아지게 한 일이 있다. 그리고 금식과 고행에 몰두한 나머지 성체를 영하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크게 마음 아파하며 슬퍼하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 성체를 모시게 해주셨다고도 한다.
그는 생전에 이미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를 통하여 정신적,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받던 많은 사람이 치유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심한 질병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다. 그러다가 건강이 급속하게 나빠졌고,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49세에 선종했다. 그의 유해는 몇십 년이 지난 뒤에도 부패하지 않아 마치 살아있는 듯이 보였으며, 이에 그 유해가 안치된 수도원 성당은 많은 이가 찾는 순례지가 되었다.
몬테풀치아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그는 교회 미술에서 로마의 성녀 아녜스와 마찬가지로 그 이름과 관련되는 상징인 어린양, 또는 수도자로서 정결한 삶을 나타내는 백합과 함께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성녀의 축일은 4월 20일이다.
-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좌) 천사의 전갈을 듣는 알로이시오 곤자가(우)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십자고상, 백합, 해골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16세기에 이탈리아의 귀족 집안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유하지만 야심 많고 부도덕한 면도 있었던 아버지는 그가 군인이 되기를 원했고, 그는 사제가 되고자 했다. 8살 때 동생과 함께 유력한 권력자의 궁정에 보내져 교육을 받았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성인전을 읽으며 기도하는 데 맛을 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회에 들어갈 결심을 했다. 어머니는 그의 뜻을 받아들이고 응원했으나, 아버지는 온갖 방법과 협박으로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17살에 장자로서 상속권과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고 예수회에 입회해 수련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9살 때 첫 서원을 한 뒤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22살 때 로마에 흑사병이 퍼졌다. 이에 예수회는 환자들을 위해 병원을 열었고, 그는 자원해서 그곳에서 환자들을 씻기고, 음식을 먹이고, 마지막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환자를 돌보는 데 온 힘을 쏟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일에 대한 거부감과 혐오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무던히 애를 썼다.
이 와중에 예수회의 젊은 회원들 상당수가 흑사병에 걸렸고, 이에 장상들은 그가 병원에서 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찍이 아버지의 완강한 거절을 극복하는 데 이골이 난 그는 끈질긴 청원으로 복귀 허가를 받았고, 전염병 환자는 받지 않는 병원에서만 일한다는 조건으로 다시금 환자들을 돌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감염되었고, 가브리엘 대천사가 나타나서 알려주었다는, 그리하여 자신도 예고했다는 날에 23세 나이로 선종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느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신앙 안에서 정결을 지키며 살겠다는 굳은 의지를 지닌 신앙인이었고, 모든 일을 신중하고 분별력 있게 처리하며 긍정적이고 관찰력이 뛰어난 신학생이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악습들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존심과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해 수련하며 살아간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리하여 선종한 지 14년 만에 시복되고, 100여 년 뒤에 성인품에 오른 그는 젊은이들과 신학생들, 특별히 대학생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성인의 축일은 6월 21일이다.
교회 미술에서 흔히 십자고상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성 알로이시오의 주변에는 백합이나 해골이 함께한다. 십자고상은 성인의 회개와 희생을, 백합은 성인이 특별히 받은 정결의 은사를, 해골은 일찍 찾아온 죽음을 나타낸다. 이탈리아에서는 성인이 루이지 곤자가로 불리는데, 이는 라틴어 이름 알로이시오가 이탈리아어로는 루이지이기 때문이다.
[상징 속 성인 읽기] 성인의 삶과 상징 (3)
- 이콘: 성녀 안젤라 메리치. 사다리는 성녀 안젤라 메리치의 상징이고 화살은 성녀 우르술라의 상징이다.
사다리와 망토: 성녀 안젤라 메리치
성녀 안젤라 메리치(1474-1540)는 어려서부터 성인전을 즐겨 읽으며 성인들의 삶을 본받고자 했다. 일찍이 부모와 형제 대부분을 여읜 뒤, 그는 동정녀로서 청빈하고 소박하게 살며 기도와 고행으로 이웃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 보탬이 되기로 다짐했다. 그러한 마음가짐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작은형제회 재속회(제3회)에도 입회했다. 부모처럼 그를 돌봐주던 외삼촌이 세상을 떠나자, 스무 살 즈음 그는 전적으로 이웃을 위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먼저, 물려받은 아버지의 집을 학교로 내놓고, 뜻을 같이하는 여성들과 함께 형편이 어려운 소녀들을 모아 기도와 교리문답을 가르쳤다. 차츰 세탁, 바느질, 요리, 간호 등으로 교육 내용을 넓혀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들판에서 기도하던 그는 놀라운 환시를 체험했다. 세상을 먼저 떠난 동생을 포함한 동정녀들이 나타나서 뜻을 함께할 이들의 모임을 만들라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자신을 오롯이 하느님께 봉헌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의 삶에서는 모성적인 사랑과 너그러움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사람들은 차츰 그를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마드레’(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또한 그를 모범이자 선망의 대상으로 삼아 동정을 지키며 신앙적인 삶을 살려는 여성들이 날로 늘어 갔다. 한번은 그가 성년을 맞아 로마에 갔는데, 그의 명성을 익히 알던 교황이 로마에 머물며 자선기관의 운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의 소명은 자기가 사는 지역의 가난한 소녀들을 돌보는 일이고, 이를 위해 동정녀들의 모임을 시작하려 한다는 뜻을 밝히고는 교황의 허가까지 받았다.
마침내 그는 동정녀 12명과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했다. 그가 만든 규칙을 따라서 청빈, 정결, 순명의 삶을 살며 가난한 소녀들을 돌보는 데 헌신할 것을 서원하는 수도회, 그가 어려서 성인전을 읽을 때 매료되었던 성인이자 가톨릭 교육, 교사, 학생의 수호성인인 우르술라 성녀의 이름을 딴 수도회였다. 우르술라회는 이렇게 가톨릭교회 최초의 교육 수녀회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우르술라회의 초기 회원들은 공동생활을 하지 않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지냈다. 그리고 수도복이 아닌 망토 차림으로 활동했다. 수수하고 간편한 망토는 작은형제회 제3회원이라는 정체성과 소박하고 겸손하게 헌신하며 살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 복장이었다. 그리고 손길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보호와 의지처를 가리키는 표지였다. 그러했기에 우르술라회의 설립자요 초대 원장인 안젤라는 선종해서도 작은형제회 제3회원의 복장을 입고 안장되었다.
안젤라 메리치와 우르술라회 회원들은 환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데, 특히 여성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성녀 안젤라 메리치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다. 교회 미술에서는 그를 묘사할 때는 그가 환시에서 본 사다리와 우르술라회의 초기 복장인 망토를 그의 상징으로 곁들인다.
- 예루살렘의 성 안젤로
가슴(또는 머리)에 꽂힌 칼: 예루살렘의 성 안젤로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 안젤로(1185~1220년)는 환시를 통해 성모님을 뵙고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이때 성모님께서는 그의 어머니에게 유다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는 이미 오셨고, 오셔서 하느님의 백성을 구원하셨노라고 일러 주시면서 자녀 둘을 두게 될 것이라는 약속도 하셨다. 이 예고대로 태어난 쌍둥이 형제 중의 한 사람이 안젤로다.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읜 두 형제는 18살 때 카르멜 수도회(카르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형제회)에 들어갔고, 25세 때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가 된 안젤로는 앓는 이의 병을 고쳐주는 기적을 행하기도 했다. 이 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되자, 그는 사막의 은둔소로 물러가서 지내다가 로마에 가서 교황에게 수도회의 새로운 규칙에 대한 승인을 받아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아울러 이탈리아에서 기승을 부리는 이단들에 맞서서 설교하고 또한 그곳의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지시도 받았다. 그는 로마에서 교황을 알현했고, 라테란 대성당에서 설교했으며, 수도회의 설립자들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며 오스마의 도미니코도 만났다. 이때 그는 프란치스코가 장차 그리스도의 오상을 받을 것이라고, 프란치스코는 그가 머지않아 죽음을 맞을 것이라 서로 예고했다고 한다.
그 뒤 안젤로는 팔레르모로 가서 많은 유다인들을 개종시켰다. 그런데 그 자신이 유다인이었기에 팔레르모의 유다인들에게 비난과 원성을 크게 샀다. 이어서 시칠리아섬에 도착했는데, 이미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서 명성이 자자해져 있던 그를 많은 사람이 찾아오곤 했다. 그때 그곳에는 생활이 문란한 데다 카타리파 이단에 빠져 있던 한 귀족이 있었다. 안젤로는 그를 회개시키고자 했고, 그런 가운데 그에게서 나온 달갑지 않은 말에 그 귀족은 격분했다. 그리하여 그는 성당에서 설교하던 중에 귀족의 사주를 받은 불량배의 칼에 찔렸다. 치명상을 입어 며칠을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하느님께 그 귀족과 암살자를 용서해 주십사 기도하고, 신자들에게는 복수하지 말도록 당부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순교한 지역이 시칠리아였기에 시칠리아의 성 안젤로라고도 불리는 그는 팔레르모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다. 교회 미술에서 성 안젤로를 그림으로 표현할 때 칼에 가슴(또는 머리)이 꿰찔린 모습으로 묘사한다.
- 카르멜산의 성모님과 카르멜산의 성인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