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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47)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인류 위기 가리는 '보이지 않는 손'
공동선과 사회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富)의 재분배와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 그리고 인권이 온전히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교황은 이를 위한 원칙 4가지를 제시하였다. 그 가운데 세 번째를 다루고자 한다.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알듯말듯하다. 개념이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조금 더 그분의 생각과 사상을 살펴보자.
현실의 위기를 포장하는 이론들
교황은 현재의 위기 상황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현재가 위기이고 이것이 ‘실재’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론으로 포장하여 모두를 현혹하는 사상과 생각들에 대한 경계를 분명히 한다. 더는 무관심의 세계화도 방관할 수 없다. 실재를 바라보아야 한다. 생각을 다듬고 포장하여 그럴듯한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더는 묵과할 수 없다. 시장경제의 절대적 자율성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없다. 검증되지 않은 낙수효과를 믿을 수 없다(54항 참조).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이론이나 자본주의자들의 이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 우리는 더는 시장의 눈먼 힘과 보이지 않는 손을 신뢰하지 않는다.
시장경제는 그것이 국제적이건 국내적이건 간에 공동선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세계화된 오늘날,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규범에 입각한 경제 질서가 정치적으로 확립되어야 한다. 이는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회칙 「백주년」(Centesimus annus)에서 강조하신 바이기도 하다(「백주년」 42항 참조). 정치 지도자들이나 경제 부문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그만큼 막중하다.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교황이 제시한 세 번째 원칙의 의미가 조금 더 가깝게 이해된다. 사회 경제적 이념(ideoligia)의 상당 부분이 실재와 다르다는 것이다. 아니 아예 반대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의하게 다듬어진 이념들이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 ‘무관심의 세계화’(54항 참조)를 부추기면서, 힘(권력)의 불의한 관계들을 적당하게 포장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이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가난한 이들을 우선해야 된다는 그리스도교 정신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림자 걷어내고 현실 직시해야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는 원칙을 통해, 교황은 ‘실재’를 보지 못하도록 그림자를 드리우는 온갖 수단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재는 사실 그대로이지만, 생각은 다듬어지기 때문이다. 곧 천사 같은 순수주의, 상대주의의 독재, 공허한 미사여구,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 반역사적 근본주의, 선의가 없는 도덕주의, 지혜가 없는 지성주의 등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31항). 형식적인 유명론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객관성으로 실재를 응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실은 왜곡되고 겉치장이 신체단련을 대신하고 맙니다”(232항). 우리의 ‘실재’는 어떠한가? 배척과 퇴출의 경제 사회 구조 속에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절규가 하늘에까지 오르고, 주변 이웃들은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뒷짐 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실재’가 아닌가!
교황은 「치빌타 카톨리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방(최전선)의 삶을 작위적으로 조련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오히려 최전방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 변방을 조금 색칠하기 위해, 그리고 모두의 구미에 맞게 다듬기 위해 집으로 가져와서는 안 됩니다”(「두 분 교황님과 함께」 79쪽 참조). 작업실에서 ‘실재’를 조작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교황은 실재의 현장에서 그 문제를 이해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생각’이 ‘실재’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지속적인 대화가 가능해야 한다. 교황은 이를 위해(생각과 실재의 지속적인 대화를 위해) 현장의 삶을 강조했다.
삶의 현장으로
하느님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 삶의 현장으로 오셨다.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면, 관념적인 구원을 말하는 영지주의에 빠지고 만다. 우리도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지 않고 영적 안정과 평화의 말씀으로만 이해한다면, 다시 말해 “말씀과 실재를 일치시키지 않는다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고, 순전히 생각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며, 결국 활력도 없고 결실도 없는 자기중심주의에 빠져버리고 만다”(233항).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48) 전체는 부분보다 더 크다
퍼즐 조각 모여야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다
‘전체는 부분보다 더 크다’의 의미는 무엇인가?
권고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전체는 그 부분들의 단순한 총합보다도 더 큽니다. 따라서 제한적인 개별 문제들에 너무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236항).
단순히 그 말씀의 뜻은 이해되나, 이 원칙을 통해 무엇을 설명하고자 하시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본문을 여러 차례 읽고, 이곳저곳에서 하신 비슷한 말씀을 찾아보고, 교회 전문가들의 해설서를 참고하여 이렇게 정리하여 보았다.
교황은 공동선과 사회평화를 이루기 위해 부(富)의 재분배와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 그리고 인권이 온전히 존중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평화와 정의와 형제애를 추구하는 시민의식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했다(221항 참조). 이 모두를 위해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원칙 4가지를 제시하였다. 그 가운데 네 번째를 다루고 있다.
고유성이 보장되며 공동선을 지향하는 사회
‘전체는 부분보다 더 크다’는 세계화와 지역화의 서로 다른 차원이 함께 완성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때에는 고립된 지역주의를 극복하라는 말씀이다. 세계화 속에서 지역화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와 ‘부분’의 중요성을 동시에 강조하면서, ‘전체’ 안에서 ‘부분’을 바라보는 안목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전체가 부분보다 더 크다는 원칙을 내세워, ‘결정적인 순간’이나 선택적인 상황에서는 ‘부분’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는 표현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다시 말해 자신의 독특한 개성을 보존한 채, 공동체에 진심으로 통합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235항 참조).
교황은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기발한 상징을 이용한다. 우리의 모델은 ‘구체’(球體)가 아니라 ‘다면체’라고 했다(236항). 모든 인종과 문화가 상존하며 공생하는 통합의 사회를 ‘다면체’로 표현했다. 각 부분의 고유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각 부분은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통합된 사회 전체 안에서 자신들의 질서를 세워야 한다.
“다면체는 모든 부분의 집합이고, 각 부분은 그 고유성을 간직합니다. 사목활동과 정치활동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다면체 안에 각각의 가장 좋은 부분을 모으고자 합니다. 거기에는 가난한 이들과 그들의 문화, 그들의 열망, 그들의 잠재력을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 잘못을 저질러 비난받을 수 있는 사람들조차도 저마다 줄 수 있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236항).
그 어느 것도,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처지라도 ‘소수’이고 ‘일부분’이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소수’인 어떤 부분이나 어떤 사람들만을 위한 정책이나 배려도 이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공동선을 위한 정책이어야 하고, 모든 사람을 통합시키는 것이어야 하며, 전체를 위하는 배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이를 위한 기쁜 소식
교황은 자신의 마지막 원칙을 복음의 빛으로 재해석했다. 복음의 부요함은 특정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학자, 노동자, 기업가, 예술가와 모든 사람을 통합시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라도 잃지 않는 것이다. 길 잃고 헤매는 보잘것없는 한 마리 양이라도 구하려는 착한 목자의 모습이 닮았다.
“복음은 ‘전체성’이라는 고유한 원칙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될 때까지, 인간의 모든 차원을 치유하고 열매 맺을 때까지, 모든 사람이 다 함께 하느님 나라의 식탁에 모일 때까지, 언제나 기쁜 소식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전체는 부분보다 더 큽니다”(237항).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49) 국가와 나누는 대화
선과 악의 윤리적 기준 제시는 교회의 역할
2014년 12월 18일. 미국과 쿠바가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54년 만에 국교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하였다.
2015년 9월 23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을 사목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백악관으로 초대해 “우리가 쿠바인들과 새로운 시작을 하는데, 귀중한 도움을 주신 데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이 세상에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한 교회의 노력이 결실로 맺어진 데 대해, 교황은 겸손하게 기쁨을 표현했다.
교황은 권고문에서 세상을 ‘복음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대화’라고 했다. 세 가지 분야로 크게 나누어 필요한 대화를 설명했다. ‘국가와 나누는 대화’, ‘사회와 나누는 대화’, ‘다른 신앙인과 나누는 대화’가 그것이다.
평화의 복음을 위한 협력
먼저 ‘국가와 나누는 대화’를 살펴보자.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은 ‘평화의 복음’(에페 6,15)이다. 평화, 이 위대한 보편 가치를 수호하고 증진하기 위해 교회는 모든 국가 권력과 국제적 권위에 협력하고 있다. 교회의 협력은 너무도 당연하다.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 그 자체가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나아가 인간과 자연, 우주와의 온전한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은 우리의 ‘평화’이시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평화를 위해 사셨고, 부활하신 뒤에도 나타나셔서 평화를 기원해 주셨다. 그래서 교회는 국가와 평화를 위한 대화를 나누고자 노력한다.
국가, 사회 공동선과 평화 증진해야
국가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필자는 이렇게 설명해 본다. 국가는 모름지기 사회의 공동선과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적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기관이다. 교황은 이 모든 것을 국가의 책무로 설명하면서 교회도 최선을 다해 국가를 도와야 한다고 했다. 2014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그리고 동방정교회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까지 로마로 불러함께 올리브 나무를 심으며 평화를 다짐하던 교황의 모습은 교회의 역할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다. 유엔이나 유럽연합 의회에서 한 연설과 활동도 그렇다. 그동안의 역대 교황들의 노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전 세계 모든 대륙을 여행하며 대화를 나누고 정치인들의 대화를 주선했다.
엉킨 실타래처럼 풀기 쉽지 않은 문제
국제 질서 안에서 평화 문제는 그리 쉽지 않다. 국가 간의 과거 역사적 문제 그리고 현재의 정치적 질서와 이익이 상충되어 있어서, 모든 이의 희망처럼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거기에다가 위정자들의 부패와 부정 그리고 독재정권의 출현 등이 가세될 때에는, 엉킨 실타래를 바라볼 때처럼 난감하기만 하다. 어디에서 평화를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지, 어떤 시도를 해야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지, 참 어렵다. 이럴 때 우리는 기도한다. 성령께 지혜의 영을 내려 주십사 기도한다.
교황은 교회가 국가와 대화하며 도울 수 있는 방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먼저 국가와의 대화에서는 보조성과 연대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국가가 모든 사람의 전인적 발전을 추구하도록 촉구한다. 또한 인간 삶의 근본 가치들을 분명히 제시하고, 정치 활동으로 옮겨질 수 있는 확신들을 전달하며, 그들의 정당하고 고유한 역할을 적극 지지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240항 참조). 모든 것을 복음의 빛으로 재해석하여 선과 악의 윤리적 기준을 그들에게 제시하고 국가 권력이 나아갈 방향을 밝혀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인 것이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말해야 한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50) 신앙과 이성과 과학의 대화
신앙도 이성도 하느님에게서 왔다
교회는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 여러 분야와 다양한 사람들과의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교황은 이와 같은 대화 중, 두 번째로 신앙과 과학의 대화를 언급하였다.
배타적 사상의 위험성
과학은 이성의 산물이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과 신앙이 양립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는 편견이 깔려 있다. 신앙은 과학적 기초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 주장이 옳은가? 그들 중 대부분은 ‘실증주의’와 ‘과학주의’라는 이데올로기(Ideologia)를 들고 나온다. 오직 실증 가능한 학문만, 오직 과학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교황은 이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며 차분히 자기 생각을 설명했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배타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교황은 이와 같은 사상을 경계한다. 오직 그것만을 신뢰하는 것은 치명적 오류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것만을 신뢰하고, 다른 것은 배척하는 것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틀리기도 하다. 아직 검증되지 않았으나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실증과학의 영역도 끊임없이 확대되고 있다. 제한된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은 실제로 모든 것을 경험할 수도 없다. 따라서 다른 형태의 지식의 타당성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교황은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학문의 성과를 존중하면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태도를 요구했다. “경험 과학의 방법론들을 책임감 있게 사용하면서, 이를 신앙뿐만 아니라 철학이나 신학과 같은 다른 학문과 종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242항).
교황은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신앙’과 ‘이성’의 관계 정립부터 시작했다. 이성적인 것은 신앙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다른 것이라는 인식을 불식시켰다. 신앙은 이성과 분리된 초월적인 것에만 관심을 둔 어떤 것이 아니다. 이성의 빛과 신앙의 빛은 둘 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둘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있을 수 없다. “신앙은 이성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신앙은 이성을 추구하고 신뢰합니다” (242항).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교황이 주장한 권고문의 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 아우구스티노(354~430)의 태도가 필요하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모든 내용을 다 파악하고 나서 믿겠다고 하는 태도보다는 그 모두를 이해하기 위해서 일단 믿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습니다”(Credo ut Intelligam).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하여 그분을 탐구하십시오. 그분을 항상 탐구하기 위하여 하느님을 발견하십시오.”
중세 시대의 성 안셀모(1033~1109)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신앙을 설명하면서 “이해(깨달음)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말씀하셨다. 신앙은 늘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인은 계시 진리의 내용을 믿으면서 끊임없이 그 의미를 탐구하는 사람들이다.” 교황은 권고문에서 신앙의 참된 가치를 이렇게 표현했다. “신앙은 인간 존재를 자연과 인간 지성을 초월하는 신비에 이르도록 드높여 줍니다”(232항).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과학의 놀라운 진보를 막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교회는 하느님께서 인간 정신에 주신 크나큰 잠재력을 깨닫게 되어 기쁘고 또 즐거워합니다”(243항). 교회는 과학의 진보에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신앙과 자연의 빛으로 과학의 새로운 진보를 해석하며 기뻐한다. 그리고 과학의 진보가 인간 삶의 모든 단계에 있어서 참된 가치를 찾도록 도움을 준다. 언제나 그 중심에는 인간이 존재해야 하고 생명과 구원의 최고 가치가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이렇게 과학과 대화할 때, 사회 전체는 사상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이성의 가능성을 확장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51)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
만나고 손을 잡고 대화하라
교황은 계속해서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를 설명한다.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위한 대화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 믿는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요한 17,21). 이 기도의 응답은 개신교와 정교회와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교회의 공적 문서를 보면, 개신교는 ‘갈라져 나간 형제들’이고 정교회는 ‘자매 교회’라고 표현되어 있다. 같은 아버지 밑의 형제자매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근본 이유이다.
타종교와 대화하는 이유
이어서 유다교와의 관계와 대화의 필요성을 언급한 뒤, 타종교 간 대화를 설명했다. “우리와 다른 그들의 존재 방식, 사고 방식, 표현 방식을 수용하는 법을 대화를 통해 배웁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정의와 평화에 봉사할 의무를 함께 맡을 수 있습니다”(250항).
이러한 우리들의 노력은 진리를 사랑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들 종교가 지니고 있는 특정 진리의 내용을 우리가 인정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교황은 이를 ‘진리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설명했다. 진리를 설명해 내는 타종교의 독특한 표현 방식은 우리를 풍요롭게 해준다. 따라서 타종교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그들과 대화하고자 한다. 그들도 우리가 주장하는 진리의 어느 특정 부문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슬람교와의 대화 필요성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언급하였다. 먼저 그들이 우리와 공유하는 신앙의 내용을 언급한 뒤(아브라함과 예수님, 그리고 성모님), 서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슬림들이 서방 국가에서 누리는 자유만큼, 이슬람 전통 국가들이 그리스도인에게 종교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을 겸허히 청합니다. 폭력적 근본주의의 불안한 사건들에 직면하여, 우리는 참된 무슬림에 대한 애정으로 적대적인 일반화는 삼가야 합니다. 진정한 이슬람이라면, 또 쿠란을 똑바로 읽어보면, 온갖 폭력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52항).
종교의 자유와 새로운 형태의 차별
교황은 마지막으로 종교의 자유 상황에 관한 사회적 대화를 주제로 설명했다. 종교의 자유는 자신의 판단으로 종교를 선택할 자유와 자신의 신앙을 공공연히 표명할 자유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수의 믿는 이들의 신념을 침묵시키거나 풍요로운 종교 전통들을 무시하면서까지, 소수의 불가지론자나 비신자들의 주장을 무한 존중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차별과 권위주의라고 설명했다. 이는 관용과 평화보다 분노를 키울 따름이라고 했다(255항).
2015년 7월 28일, 미국의 오클라호마 주 정부의 대법원 판사들은 중립성을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사탄 숭배자들이 설치하려고 했었던 사탄 조각상을 주 의사당 앞에 설치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들은 같은 이유로 2012년부터 이미 그곳에 설치되어 있었던 십계명 조각상도 제거하라고 명령하였다. 사탄 숭배자들은 “아베 사타나!”(AVE SATANA!)하며 환호했다. 그들의 최종 목적은 십계명 판을 의사당 앞에서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소수의 처지인 자신들의 권리를 무한대로 주장하면서, 미국 정부의 유다ㆍ그리스도교적 문화의 뿌리를 지닌 다수의 권리와 신념을 제거하고 침묵하도록 하였다. 공화당의 수반인 메리 폴린(Mary Fallin)은 이의를 제기할 것이며 십계명 조각상을 제자리에 그대로 있도록 하겠다고 공적으로 발표했으나, 어떤 의미에서 이 경기는 이미 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대법관들은 마치 빌라도처럼 더 이상 이 문제로 골치 아프기 싫다는 태도의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사탄 숭배자들이 즐거워 환호성을 지를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많은 사람의 ‘분노’만 키우는 결과를 낸 것이다.
교황은, 스스로 그 어떤 종교에도 속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선미를 추구하는 사람들과는 언제든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진선미의 원천과 최고의 표현이 바로 하느님 안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258항). 교황은 ‘이방인의 뜰’과 ‘새로운 아레오파고스’라는 개념을 통해, 그들과의 만남의 장을 설명했다. “이곳에서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은 윤리와 예술과 과학의 기본적인 주제나 초월적인 것의 추구에 대하여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험한 세상에서 우리가 평화를 이루어 가는 길입니다”(257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