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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에 다시 보는 '니케아공의회
1700주년 맞은 최초의 세계공의회... '교회 일치'의 시작이었다
레오 14세 교황은 5월 30일 교황청 사도궁에서 세계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를 만나 튀르키예 방문을 논의했다. 방문지로 거론되는 튀르키예 이즈니크(옛 지명 니케아)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할 예정이었던 도시다. 바로 이곳에서 325년 최초의 세계공의회인 니케아공의회가 열렸다. 니케아공의회 개최 1700주년을 맞는 6월 19일, 그리고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 삼위일체 교리를 공고히 한 니케아공의회를 돌아본다.
‘아버지와 아들이 어떻게 한 분인가?’…삼위일체를 논하다
325년 6월 19일 세계 각지에서 교부(敎父) 318명이 니케아에 모였다. 교회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교리를 주장하며 극심한 분열에 이르자 교회의 일치를 바랐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세계의 교부들을 니케아에 모두 소집한 것이었다.
가장 첨예한 대립은 ’성자 예수님은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한 논쟁이었다.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이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믿음, ‘삼위일체’는 초대 교회부터 이어온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였기에, 이를 잘못 받아들이는 이들도 많이 나타났다. 그중 4세기에 팽배했던 사상이 아리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아리우스주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는 창조되지 않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분은 성부 하느님 한 분 뿐이라고 봤다. 그렇기에 성자 예수님은 하느님의 피조물, 즉 창조된 존재라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말씀(예수님)을 하느님이라 부르는 것은 말씀이 은총을 통해 하느님이 됐다는 것이고, 본성적으로 하느님이 아니라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는 여러 성경구절을 근거로 삼아 자신의 주장을 강화시켰고 아리우스주의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일부 교부들도 아리우스주의에 동조했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중)
아리우스주의자들과의 격렬한 논쟁 끝에 교부들은 신경의 문장을 빚어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 창조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고,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 한 본체임을 고백한 것이다. 공의회를 통해 완성된 ‘니케아 신경’은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며, 나뉠 수 없는 하나의 본질을 지니고, 성자의 본질은 모든 면에서 성부와 완전히 동일하며 동등하다는 우리의 믿음을 명확하게 했다.
이후 교부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두 번째 공의회를 통해 거룩한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 성령이 하느님임을 고백하면서 니케아 신경을 보완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완성했다. 교회는 오늘날까지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미사의 공식 신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듯’…교회의 일치를 이루다
니케아공의회의 가장 큰 과제는 아리우스주의에 대응하는 것이었지만, 교부들은 이밖에도 교회의 여러 법규를 정비했고, 무엇보다 지역마다 제각각으로 지내던 주님 부활 대축일의 날짜를 일치시켰다.
주님 부활 대축일은 처음부터 교회의 모든 축일 중에서도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그러나 당시 교회는 지역마다 서로 다른 날에 부활 대축일을 지냈다. 유다인들이 많이 머무는 지역의 신자들은 유다력의 파스카 축제일에 부활 대축일을 지냈지만, 유럽권에서는 파스카 축제일 다음에 오는 주일을 부활 대축일로 지냈다. 예수님이 안식일 다음 날, 주간 첫날인 주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또 파스카 축제일은 유다력을 토대로 하는데, 유다력은 춘분을 기준으로 하되 달의 변화에 따른 달력을 사용했기에 로마의 달력이었던 율리우스력에서 계산하는 방식이 지역마다 다른 문제도 있었다. 이 때문에 지역 교회 사이에 의견 차이가 발생했고, 또 어느 지역에서는 단식과 참회를 하고 어느 지역에서는 부활 축제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세계의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니케아공의회는 온 교회가 같은 날 주님의 부활을 경축할 수 있도록 주님 부활 대축일을 산정하는 방법을 통일시켰다. 바로 오늘날과 같이 춘분 후 보름달 다음에 오는 주일에 주님 부활 대축일을 기념하게 된 것이다.
16세기에 율리우스력을 보완한 그레고리오력이 도입되면서부터는 그레고리오력에 따른 춘분에 따라 부활 대축일을 정하고 있다. 그래서 율리우스력을 고수하는 정교회와 부활 대축일에 차이가 생겼다. 그러나 니케아공의회 1700주년인 올해는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모두가 같은 날 부활 대축일을 보냈다. 달력 계산법에 따른 우연의 일치기는 하지만, 부활 대축일의 일치로 교회의 일치를 일궈낸 니케아공의회의 의미를 되짚어 볼 기회기도 하다.
우리는 1700년 전 신자들과 같은 믿음을 고백하고, 어느 나라의 교회에서도 같은 날짜에 부활 대축일을 지낸다. 니케아공의회를 통해 우리는 시간을 넘어, 공간을 넘어 일치하고 있다. 교회가 여러 갈래로 갈라진 오늘의 현실 속에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일치하심을 고백한 니케아공의회는 교회 일치의 중요한 모범이다.
니케아공의회 가르침 수호한 ‘성 아타나시오’
교회는 니케아공의회를 통해 일치를 이뤘지만, 이단으로 선포된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아타나시오는 이런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항해 니케아공의회가 선포한 가르침을 수호한 대표적인 성인이다.
사실 니케아공의회 당시 아리우스에 맞선 이는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성 알렉산데르 주교로, 아타나시오는 그를 수행하던 부제였다. 아타나시오는 알렉산데르 주교에게 직접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공의회 중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하는 여러 신학자들과 교류했다. 이렇게 알렉산데르 주교의 뜻을 이은 아타나시오는 알렉산데르 주교의 후임으로 주교가 됐다.
그러나 아타나시오는 주교가 되자마자 큰 난관에 부딪혔다. 아리우스주의자를 비롯한 여러 이단들이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좌를 노리고 아타나시오에게 누명을 씌워 고발하는 등 아타나시오를 공격했다. 게다가 황제까지도 이단자들의 편을 들면서 아타나시오는 5차례에 걸쳐 17년 동안 유배를 당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바람 잘 날 없는 세월이었지만 아타나시오는 탁월한 재능과 강인한 신념을 바탕으로 일생에 걸쳐 이단자들의 잘못된 주장에 맞서 니케아공의회가 선포한 교회의 정통 가르침을 수호했다. 온갖 시련을 딛고 말년에 이르러 다시 교구를 돌보게 된 아타나시오는 선종하기까지 이단자들로 인해 갈등과 폭력으로 피폐해진 교회를 재건하면서 여러 저술과 강론을 남겼다.
비록 생전에 아리우스주의의 종식을 보지 못했지만, 아타나시오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강조하며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에 ‘교회의 기둥’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아타나시오는 오늘날까지 동방·서방교회를 막론하고 위대한 교부요,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생활교리] 교황, “하느님과 형제들의 겸손한 종”
1. 베드로 직무 - 가톨릭교회는 교황의 사임 혹은 선종 후에 추기경단(80세 미만)의 교황 선거, 곧 콘클라베(Conclave)를 통해 새로운 교황을 선출한다. 단, 교황직의 기원은 교회 스스로 만들어낸 제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워진 사도적 직무이다(마태 16,18-19). 곧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 사명이 세상 끝 날까지 이어지기를 원하셨고, 이에 따라 베드로를 맏이로 한 사도단에게 그 임무를 맡기셨다. 단, 사도단 안에서 베드로에게 맡겨진 직무는 고유하면서도 특별했다(요한 21,15-17). 이를테면 베드로는 12사도의 명단에서 늘 가장 첫 번째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마태 10,2; 루카 6,14), 예수님의 주요 사건에도 자주 동행했고(마르 9,2; 14,33), 무엇보다 교회 지도자로서 제자들을 대표해 발언하는 등(마태 16,22; 18,21; 19,27) 그의 위치와 역할은 초대교회부터 높은 권위 속에 인정되어 왔다.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 베드로 직무는 베드로 이후에 그의 후계자인 교황을 통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2. 로마의 주교 - 『교황청 연감』(Annuario Pontificio)에 따르면, 교황은 오랜 교회 전통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바티칸 시국의 원수” 그리고 “하느님의 종들의 종” 등 다양한 호칭으로 일컬어진다. 다만 교황의 호칭 중에서 “로마의 주교”라는 직함은 가장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단적인 예로,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부터 최근 레오 14세 교황까지 선출 직후 자신을 우선적으로 ‘로마의 주교’라고 소개했다. 그중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임 이후 곧바로 교황의 공식 호칭을 표기하는 첫 페이지에 오직 ‘로마의 주교’만을 단독으로 명시하고, 다른 나머지는 둘째 페이지에 ‘역사적 호칭’으로 분류하여 표기하도록 명했다. 이점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물론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서 순교한 이후 로마의 주교가 베드로 직무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더 나아가서 “교황직의 본질이 권위가 아니라 봉사”(『희망』 500)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교회 안에서 교황의 최고 권위는 교회 지도자로서 지배와 군림으로써가 아니라, 로마의 주교로서 세계 주교단과 보편 교회의 친교와 일치에 봉사하는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드러난다.
3. 약함과 강함 - 성경은 초대 교황인 베드로의 놀라운 설교와 기적 그리고 용감한 활동 등의 ‘강함’을 전하면서도, 동시에 베드로의 성급함과 나약함 그리고 배반 등의 ‘약함’을 빠뜨리지 않는다. 이는 교황이 전 세계 교회의 목자로서 최고 권위를 지니지만, 동시에 그 역시 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필요함을 말해준다. 일례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저는 죄인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저를 살피셨습니다.”라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며, 하느님 백성에게 축복하기 전, 먼저 고개 숙이며 하느님 백성의 축복을 청했고, 또 고해성사 집전하기 전, 먼저 무릎 꿇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몫은 분명하다. 주님께서 당신의 “포도밭에서 일할 단순하고 겸손한 일꾼으로”(교황 베네딕토 16세) 뽑으시고 세우신 교황이 인간적 약함을 넘어 “하느님과 형제들의 겸손한 종”(교황 레오 14세)으로서 교회의 참된 목자의 길을 담대하게 걸어 나갈 수 있도록 마음으로 연대하고, 기도로 함께하자!
[매주 읽는 단편 교리] 평화 예식(Ritus Pacis)
미사 때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나면, 평화 예식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마태 5-7장)에서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런 가르침에 따라, 이웃과 화해하는 평화 예식은 이미 2세기부터 미사에 있었습니다. 155년경에 기록된 유스티노의 「호교론」에서는 말씀 전례를 마치면서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예물을 봉헌한다고 전합니다. 지금도 동방 전례에서는 이 순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 그레고리오 교황(590~604년 재위)은 평화 예식을 ‘감사기도’ 다음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현행 전례는 평화 예식을 다음에 이어질 ‘빵 나눔 예식’과 분리하여 이웃과의 화해를 통한 영성체 준비라는 의미를 더욱 선명히 하였습니다.
먼저, 사제는 평화 기도를 바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약속하신 평화(요한 14,27 참조)와 부활 후 건네신 평화의 인사(요한 20,19.21 참조) 말씀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사제는 평화를 깨뜨린 죄에 대한 용서와 평화와 일치를 간청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라고 사제가 인사하면, 신자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하고,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시오.”라는 권고에 “평화를 빕니다.” 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이때 사제가 팔을 벌리는 건 기도 권고나 주례 기도 때와는 달리 신자들을 포옹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베드로 1서의 마지막 인사를 떠올립니다: “여러분도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5,14).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방법은 민족의 문화와 관습에 따라 다른데, 한국 주교회의는 “가벼운 절이나 가볍게 안음, 손을 맞잡는 동작을 할 수 있다.”(「미사 경본 총지침」 82항)라고 규정하였습니다.
평화 예식은 단순히 주위 사람들과 가볍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나누는 인사가 아닙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평화를 나누고 기원하는 기도이자 서로를 향한 축복입니다. 더 나아가 천상 예루살렘에서 누릴 완전한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겠다는 신앙 공동체의 다짐이 담긴 표지입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17) 교회는 가시적이고 영적이다 ② 「교회헌장」 8항 후반부
「교회헌장」 8항의 전반부에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가 가톨릭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언급을 통해서, 교회일치 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들과 공동체들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도 발견되는 이 성화와 진리의 요소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8항의 후반부는 가시적 구조로서의 교회가 걸어가야 하는 길, 곧 구원 역사 안에서 교회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세 번째 단락은 교회가 취해야 하는 모습을 그리스도와 ‘유비’를 통해 표현하는데, 이는 교회의 성사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원성사라고 한다면, 교회는 유비적으로 그리스도의 근본성사가 됩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 속에서 구원 활동을 하신 것처럼, 교회도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 구원의 열매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지만 종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셨듯이, 교회도 현세의 영광보다는 비움과 버림을 통해 세상에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며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셨듯이, 교회도 고통받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보아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합니다.
넷째, 그리스도께서 거룩하고 순수하고 순결하여 죄를 모르는 분이지만 사람들의 죄를 없애러 오셨듯이, 교회도 거룩하지만 동시에 죄인을 안고 있어 정화되어야 함을 알고 참회와 쇄신을 추구하여야 합니다.
표현 형식에 있어서 네 번째 내용은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는 분이시고, 교회는 죄인을 안고 있기에 죄가 있는 공동체인 점에서 앞의 세 가지와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는 분이시고 교회는 정화되어야 하는 조직인 것입니다.
다음 단락은 「교회헌장」 1장의 마지막 단락으로서 종말론적 전망 안에서 교회의 여정을 설명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을 전하고, 세상의 박해 속에서 하느님의 위로를 받으며 나그넷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의 도움으로 교회는 세상의 고통을 인내와 사랑으로 이겨내어, 마지막 때에 드러날 주님의 신비를 어렴풋이나마 세상에 보여줍니다. 종말을 향한 순례의 여정에서 교회는 인간 상호 간에 그리고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이루는 일치의 성사입니다.
[사회교리에서 희년을 보다] 시민이든 이민자든
지난 1월부터 미국의 제47대 대통령으로서 다시 국정(國政)을 운영해 나가고 있는 트럼프는 여러 가지 이슈들로 하루가 멀다 하고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불법 이민자에 대한 강경한 대응이 그렇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첫날부터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추방 작전을 실행하겠노라고 천명(闡明)합니다. 그리고 이후 실제로 관련 행정명령과 조치를 통해 이를 구체화하고 있죠. 최근에는 두 살배기 아이와 그 부모를 따로따로 추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아이는 얼마 후 무사히 어머니 품으로 돌아갔다고는 합니다만, 이러한 조치가 결코 옳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죠. 트럼프의 반(反)이민 정책은 물론 그의 독단은 아닐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어떤 정책도 결코 사적인 이유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국민의 여론을 따릅니다. 더 정확하게는 자신에게 표를 던져줄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살피죠. 정치생명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의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강경한 대응 역시 현재 많은 미국인이 가지고 있는 반이민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는 미국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유럽에서도 반이민 정서가 점점 확대되고 있습니다. 더불어 반이민 정책을 지지하는 극우(極右) 세력도 꽤 커졌죠.
이러한 현상들은 백여 년 전 독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1930년대 독일 사회는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이후의 패전(敗戰) 후유증과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인해 극도로 불안정했습니다. 사람들은 우울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죠. 그런 그들 앞에 바로 ‘히틀러’가 구세주로 등장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려 했어요. 우리는 위대한 민족이라고 말하고 싶었죠. 그러나 그가 선택한 방법은 20세기 최악의 비극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독일인의 우수성을 드러내기 위해 유대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그들에게 모든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습니다. 그렇게 극단적인 반이민 정서는 역사의 큰 아픔만을 남기고 말았죠.
트럼프가 종종 하는 말이 뭔지 아시나요? “Make America Great Again!” 네, 맞습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고, 그는 외치죠. 동시에 미국엔 반이민 정서가 확산되고 있고요. 20세기의 비극이 반복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겁은 납니다. 현상에 주목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새로이 선출되신 교황 레오 14세께서 최근 공식 석상에서 이민자에 대한 존중을 촉구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큰 울림을 줍니다.
“태아부터 노인까지, 병든 이부터 실직자까지, 시민이든 이민자든 상관없이 누구든 모든 이의 존엄성을 보장하려는 노력에서 제외되어선 안 됩니다.”
교황님 말씀처럼 사람은 모두 소중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극우도 극좌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로지 사람 중심이어야 합니다. 내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이 펼쳐지길 하느님께 청합시다.
[교회의 언어] 성삼위의 Economy
협조자(advocate)이신 성령님께 힘입어 우리는 하나됩니다. 다민족 국가에서는 성령 강림 대축일에 다중 언어 미사를 봉헌하곤 합니다. 그럴 때 각자 저마다 언어로 성가를 부르는데 다 같이 하나되는 체험을 하곤 합니다. 가톨릭 성가책에는 전 세계 신자들과 다함께 부를 수 있는 성가가 몇 곡 있습니다. 가톨릭성가 31번도 전 세계 신자들이 다 잘 아는 성가입니다.
영어 가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만물의 창조주시여.
O God Almighty Father, Creator of all things.
창공은 주님을 경외하며, 땅은 주님의 영광을 노래합니다.
The heavens stand in wonder, While earth your glory sings.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 갈림 없이 하나이신 분,
O Most Holy Trinity, Undivided unity,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불사불멸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Holy God, mighty God, God immortal be adored!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를 영어로 이코노미(Economy), 우리말로 구원경륜이라고 합니다. ‘경제’라고 옮기기도 하는데 한 집안 살림을 잘 돌보는 것을 오이코노미아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창조하신 세상 만물을 돌보시고 섭리하시며 구원으로 이끄시는 모습에 빗대어 하느님의 이코노미라고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삼위의 이코노미를 찬미합시다.
[가톨릭 신학] 새로운 사태, 새로운 빈곤
이전에 없던 기계가 발명되고 인간의 산업은 진보했습니다. 도시화가 이뤄지며 삶을 풍요롭게 해줄 물품이 빠른 속도로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혁신적이었습니다. 값비싼 노력과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것들을 이제는 더욱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수는 없었습니다. 생산량의 급증은 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했고 이는 오히려 인간 존엄성의 파괴로 이어졌습니다. 산업의 팽창이 노동자의 양적 필요의 확대로 연결된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노동자들이 열악한 근무 환경, 장시간 노동, 저임금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농촌 출신의 사람들, 특히 아동들은 유용해 보였습니다. 저렴한 노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12~16시간, 주 6일의 노동. 그럼에도 이들의 임금은 성인의 1/4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노동 운동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과 결부되어 위험한 사상으로 오해받았고, 기득권 세력과 국가 권력은 억압이나 방임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당시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국가와 자본가 계층에게 위협적으로 비춰졌습니다. 이에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 요구는 ‘급진적인 선동’으로 매도되었습니다. 인간다운 삶, 정당한 임금, 가족 부양의 권리 등 당연한 윤리적 요구가 그렇게 묵살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91년, 레오 13세 교황님께서 회칙 <새로운 사태>를 발표하십니다. 노동자의 권리 보호는 공산주의적 사상이 아닌 ‘인류의 윤리적 책임’이라는 가르침이 선포되었고, 이념적 색깔로 왜곡되었던 노동 운동의 도덕적 정당성이 새롭게 퍼져 나갔습니다. 교회의 사회 교리는 이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후, 122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교황님은 레오 14세라는 교황명을 선택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새로운 사태, 새로운 빈곤을 조명할 의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새로운 사태를 돌아봅시다. 이전에 없던 기술이 발명되고 인간의 산업은 진보했습니다. 세계화가 이뤄지며 삶을 풍요롭게 해줄 기기와 정보가 빠른 속도로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혁신적입니다. 값비싼 노력과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것들을 이제는 더욱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술이 인간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인간 존엄성의 파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약자들은 더욱 고통받고 정당한 권리의 요구는 묵살됩니다. 선과 악의 구분이 사라지고 교회의 부르짖음에 세상은 더욱 냉소적입니다. 우리가 새 교황님의 행보, 교회의 사회 교리와 윤리 가르침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입니다. 교회는 외칩니다. “기술을 사랑하되, 인간을 먼저 사랑하라. 세상의 진보를 환영하되, 그것을 정의 위에 세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