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을 만나는 자세
20: 18-26
18.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19.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2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21.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23.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25.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26.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
만약 내가 큰 병에 걸려 수술을 해야 하게 되었다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어떤 의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어떤 의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생명이 좌우될 수 있습니다. 환자들은 의사를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데, 나를 담당한 의사가 경험이나 실력이 없거나 오진을 했을 때에는 그 의사를 만난 것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는 더욱 중요합니다. 누구와 결혼하느냐 하는 것은 일생이 달린 문제입니다. 자신을 맡길 상대를 선택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잘 생기고 시원시원한 겉 인상만 보고 마음에 들어서 결정했는데 막상 결혼해 보니 아내를 막 구타하고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이라면 한 사람의 일평생을 도둑맞은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신에게 나 자신을 모두 맡긴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문제만 아니라 우리 생명과 내세까지 맡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하나님께 자신을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하나님을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신앙생활 했으면서도 건성으로 교회 다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신앙의 태도가 달라졌다면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죽을병에 걸렸다가 기적으로 나은 신유를 경험했거나 특별한 말씀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믿는 이 세상의 종교는 신상을 세워놓은 앞에 다가가서 그 형상을 보고 절을 하고 제물을 바치는 예배형식을 통해서 그 신을 만납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어떤 형상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로 볼 수가 없고 오직 말씀으로만 만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말씀을 듣는 길 밖에 없습니다.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전달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신 모습입니다. 그런데 역시 구름과 번개와 연기는 보였지만 어떤 모양은 볼 수가 없었고 대신 커다란 음성을 들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들은 앞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것인데, 그들은 거기서 애굽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되었고, 가나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서도 안 되었습니다. 그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구별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보여 주어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어 세계 만민 앞에서 뛰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구별된 삶을 통해 특별한 복을 누리면, 세계만민이 그들을 부러워하며 그들이 복 받은 원인을 주목하고 묻게 될 것이고, 그래서 결국은 천하 만민이 하나님을 섬겨서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율법을 주시는 목적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아와서 선포하는 십계명이 정말로 하나님이 주신 것일까? 모세가 지어낸 말은 아닐까? 하고 백성들이 의심할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이 모세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모세가 십계명을 선포할 때에 그들 앞에 엄청난 우레 소리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가득한 연기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저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여, 앞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 모세를 함부로 대하는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난날 애굽에서 400년을 살다가 해방되어 나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이란 개구리나 뱀처럼 말 못하는 짐승이거나 사람이 만들어 놓은 우상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신으로 대접하고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말할 줄을 몰랐고 모양만 있는 가짜 신이었습니다. 말만 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생각도 없는 모형이었습니다. 오늘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도 말 못하는 신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 먼 장래까지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우주와 인생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이리 가라. 저렇게 살라고, 그들의 갈 길과 본분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주 만물도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도 당신을 닮아 언어를 가지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를 가진 사람이 섬기는 신은 인격을 가지고 말씀하는 신이어야만 합니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할 때 메마른 광야에서도 날마다 먹을 것을 내려 주셨지만, 말씀을 거역하면 한꺼번에 수 만 명을 죽이시는 두려운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분이시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가지고 와서 백성들에게 한 절, 한 절을 전할 때마다 하나님은 시내산이 흔들리고 땅이 진동하도록 커다란 우레 소리를 내셨고, 시내산은 깜깜한 흑암에 싸이고 연기가 자욱했기 때문에 그들은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엉뚱한 공상을 하거나 장난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말씀 하나하나가 자신들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세에게 부탁하기를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 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무서워서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가 없으니 당신이 가까이 가서 듣고 와서 우리에게 대신 말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두려움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가서 말씀을 받고 와서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와서 전하는 사람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뵈면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삿13:22에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고서 그 아내에게 하는 말이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사6:에 보면 성전에 올라갔다가 하나님의 형상을 본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부정한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음이라."고 절규하며 몸이 화석같이 굳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그런 경우가 허다하게 많습니다.
삼하6:8에 보면, 다윗이 법궤를 메어 오는 날, 법궤를 소 수레에 싣고 오는데 나곤이라는 사람의 마당을 지날 때 수레를 끄는 소가 뛰어서 법궤가 흔들렸습니다. 웃사가 달려가서 법궤를 손으로 붙잡았더니, 감히 법궤에 손을 댄 이유로 즉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죄인이 법궤에 손만 댓어도 즉사 했는데 죄인이 하나님과 직접 만날 때, 살아 남을 수 있겠습니까?
태양은 부피는 지구의 100만배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양의 표면온도는 5800도나 된답니다. 6000도나 되는 태양의 표면에 우리가 부딪치면 어떻게 될까요? 순간적으로 "파싹" 하면서 한줌의 재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연기도 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완전연소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37도의 체온을 유지하는 작은 인간의 몸은, 표면온도가 6000도나 되는 거대한 태양과 충돌할 때 흔적도 없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절대적으로 완전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더러움의 뭉치인 피조물인 인간이 직접 만난다면 인간은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욥25:5-6에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고 명랑치 못하겠고 별이라도 깨끗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오셔서 상대하시면 우리의 외식과 부정함을 목격하게 되고, 그러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용납하실 수 없으므로, 우리가 안전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달할 사람을 대신 세우시고 그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당신의 사자들을 교회마다 세워서 말씀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 선포하더라도 여전히 두려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말씀을 선포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애매모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상황과 처지에 대하여 아주 정확하게 가르치고 책망을 하고 바로잡아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보다 더 예리하여 사람의 관절과 골수와 영혼을 쪼갠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성도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나를 치기 위해서 자기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 설교자에게 적대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말씀에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은 내가 고민하고 힘들어 하는 문제를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아시고 응답해 주시느냐고 감탄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좋아하며 기꺼이 순종합니다.
모세가 당신의 말씀을 선포할 때 하나님께서 천둥과 번개와 벼락으로 나타내신 것은, 비록 사람이 내 말을 전하더라도 내 말이니까 너희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여라. 그래야 네 문제의 해결이 되고 복이 된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의 태도를 시험하십니다.
2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시험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두려워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시험해 보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자진해서 순종하려고 애쓰는지 보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시험입니까?
지금 시내 산에서 모세가 말씀할 때는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번개와 뇌성과 나팔소리로 두렵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안 지키면 금 새 천벌이 내릴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모세가 인간의 목소리로 말씀할 것입니다. 모세가 혼자서 말씀을 전해도 그때도 잘 듣는지 시험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메마른 광야라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당장 죽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농사하여 먹을 수가 있습니다. 좋고 즐거운 것이 얼마든지 많을 것입니다. 형편이 좋아지고 강요받지 않은 상황이 왔을 때에도 너희가 내 말을 전하는 선지자를 두려워하며 자발적으로 순종하는지, 지금 강요된 상황, 막다른 골목에서만 내 말을 지키는 체 하는지를 시험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해 보니까 그들이 나중에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나중에 모세가 율법을 대언할 때에는 우레 소리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연기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은 모세가 하는 말을 시내 산에서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과 똑같이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번개와 뇌성과 구름과 연기는 잊어버리고 모세의 말을 믿지 않고 대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망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어떤 명령을 하신다면 모두가 순종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는데 순종치 않을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신론자라고 교만하던 사람도 자다가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네가 내일부터 당장 교회 나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시면 당장 교회에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눈앞에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면 누가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두려워서이지 사실 하나님을 존경해서 단 마음으로가 아닐 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세워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시면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대하고 그가 전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듣고 순종하지만, 하나님께 대하여 존경의 마음이 없는 사람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의 외모만 보고는 “너 같은 것이 무슨 하나님의 종이야.” 하면서 무시해 버릴 것입니다. 구약에 그런 이들이 많았습니다. 고라, 다단, 아비람, 심지어 아론과 미리암 까지도 모세를 무시했고, 네가 뭐가 잘났다고 하나님의 종 행세 하느냐고 대적하다가 모두 망하고 말았습니다.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존경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대언자를 세우십니다. 아주 약하고 어린 사람을 세우기도 하십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서서 외칠 찌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라면서 존경하여 청종하는지, 아니면 외모만 보고 저 사람이 무슨 하나님이 종이야 하면서 무시하고 듣지 않는지를 보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보내신 사람을 영접하고 순종하는 것이 곧 지혜로운 사람이고, 구원받는 길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10:40) 주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어서, 41절에서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하나님의 종으로 대접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특히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말씀하신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행10:33에 보면 베드로가 자기 집에 왔을 때 취했던 고넬료의 태도는 우리에게 가장 귀한 모범입니다. 겉으로 비교하기에 고넬료는 로마의 권력자요 베드로는 무식한 갈릴리 천민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베드로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찾아오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믿었기에 베드로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말씀을 청종하다가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시험을 지금도 우리에게 하십니다. 막다른 상황에서 눈물로 간구하고 은혜를 체험하고는 잘 믿을 것처럼 합니다. 평생을 말씀에 순종할 것 같습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됩니다. 평범한 생활이 계속되는 가운데 설교자를 통해서 주일마다 설교를 듣습니다. 기적을 본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 하나님은 지켜보십니다. 평안하고 다급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고 즐겨 순종하는 사람인가를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신자를 가려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여러분은 평소에도 언제나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십니까?
3. 형식주의 신앙을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셨지만 형상은 보여주시지 않았고 말씀만 들렸습니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싼 구름과 연기와 천둥소리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22-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하나님이 얼굴을 보여주시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모양을 만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의 특징은 말씀입니다.
다른 종교는 신이 계시하신 말씀이 없습니다. 인간이 어떤 것을 신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신격화해서 모시니까 신이라고 하지, 살아계셔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당신의 뜻을 분명히 말씀으로 계시하시는 살아있는 신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당신의 계획대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영하시며, 그 뜻을 말씀으로 알려주시는, 계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형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인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런데 사람은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 같이 느낍니다. 신이 눈에 보여서 그 앞에 가까이 가고 싶고, 만지고 절하고 그 앞에 무엇인가를 바쳐야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 모양의 우상을 만들어 세워놓고 섬기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또, 자기 안에 있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서 사람들이 시를 쓰듯이, 자기 안에 있는 신앙심을 밖으로 표현하고 싶어서 돌이나 나무로 신을 새기려고 합니다. 우리 신은 이렇게 인자하고, 이렇게 무섭고, 이렇게 자상한 분이 아닐까하는 표현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를 형상화 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하셨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형상을 보이지 아니하시고 말씀만 나타내심으로 금하시는 뜻을 보이셨고,
☛둘째는 말씀으로 내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직접 엄금하셨고,
☛셋째는 24절에서 토단을 쌓으라고 명하신 말씀에서도 드러납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희 양과 소로 너희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단을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그들은 지금 광야를 여행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제단을 크게 돌을 다듬어서 쌓으라고 하시면 아무데서나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 조상신에게 제사를 하려고 해도 절차가 복잡합니다. 시간을 맞춰야 하고 제사상을 차려야 는데, 거기에도 복잡한 형식이 있습니다. 홍동백서니 어동육서니 하는 법칙을 따져야 합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아버지 어머니도 아무 때나 만날 수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만나려면 그 주위에 있는 흙을 모아서 단을 쌓고 제사하면 됩니다. 흙이 없고 돌만 있어서 돌로 단을 쌓게 되었으면 정으로 쪼아 다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높게 층계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사람들은 그 제단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드리는 곳이니까 정성들여서 아주 멋지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면 온갖 기교를 부리며 거기에 무슨 형상을 새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는 어떤 형상을 새길 것입니다. 그것이 조금 더 나아가면 우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게 우리 하나님이다’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고 만지고 싶은 본능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만들 소재가 없고 만들었다 해도 모실 곳이 없으며, 만들었어도 그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너무나 영광스럽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인간의 솜씨나 세상의 소재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서 금이나 다이아몬드로도 묘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구태여 그분의 형상을 만들거나 새기려하다면, 결국 하나님을 아주 못생긴 어떤 모양으로 만들 수밖에 없어서 위대하고 영광스런 하나님을 모독하게 됩니다. 게다가 신의 형상을 세워놓게 될 경우에 만들어 세운 형상 앞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체 하겠지만, 그 형상에서 멀어지면 함부로 행동하게 됩니다. 천지에 어디나 계신 크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어느 한 장소에, 아주 못난 모습으로, 묶어 두고 자기는 저 멀리 가서 자유로워지려는 악한 의도가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고, 오직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분이며 언제 어디서나 복잡한 형식 절차 없이 만날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사치스런 외모보다는 진정한 회개와 말씀에 대한 순수한 신앙과 순종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제단을 멋지게 쌓는 형식이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참 예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말씀에 주의하는 것입니다. 상황이 변하고 평안하게 되어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형식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와 말씀에 대한 순수한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자세,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신자의 자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진짜 신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