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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하는 자의 기쁨
성경본문 : 시편 122:1~9(6절) / 찬송 : 469장-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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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 묵상하며 :예배하는 자의 기쁨(122:1-9)
이 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축제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부르던 다윗의 시로 알려져 있는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객들의 마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시인은 누군가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하였을 때 기뻐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 때를 크게 기대하며 기다려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문 안에 발을 들여 놓자 아름다운 성읍과 각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올라오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 왔습니다(4절). 그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읍을 순례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려고 올라오는 행렬을 보면서 감격하며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그가 감격하고 기뻐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었고, 마음껏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시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대해야 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예배자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 바로 서게 되면, 우리는 감사할 것밖에 없고 회개할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평화를 사모해야 합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에서 다윗 집의 보좌를 보면서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고 요청합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줍니다(6절). 다윗 집의 보좌는 하나님의 보좌를 대리한 보좌이며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보좌를 세워주신 분이시며, 다윗은 자신의 보좌 위에 계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통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의 통치가 완벽하고 전혀 흠이 없었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인정하고 맡기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길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평안을 구하라는 것은 온 백성들이 평안과 형통과 축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에 평화가 없으면 전국적으로 평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자가 가져야 할 마음은 하나님 백성들의 평강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을 잃게 되면 아무런 기쁨도 복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의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평강을 맛봄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민족과 세계 가운데 있도록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일용할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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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 휫필드 목사의 열다섯 가지 점검표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가 휫필드는 매일 밤, 열다섯 가지 항목의 점검표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엄격하게 체크하였습니다.
첫째, 개인 기도에 열렬하였는가?
둘째, 작정해놓은 기도 시간에 기도하였는가?
셋째, 매시간 부르짖었는가?
넷째, 대화하기 전이나 후에 나 자신이 행하려는 것이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 돌릴 수 있을지 심사숙고하였는가?
다섯째, 기쁜 일이 있을 때 즉시 하나님께 감사하였는가?
여섯째, 하루의 일과를 미리 계획하는 일을 잊지 않고 했는가?
일곱째, 모든 일에 순수하였고 또한 반성해 보았는가?
여덟째, 내가 행할 수 있는 선한 일을 감당하거나 행할 때 뜨거운 열심히 있었는가?
아홉째, 말하거나 행할 때 온유하고 명랑하고 붙임성 있는 태도를 견지하였는가?
열 번째, 다른 이들에 대하여 교만하거나 허탄하게 굴거나 참지 못하거나 투기하지는 않았는가?
열한 번째, 먹고 마실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감사한 마음을 가졌는가? 또 잠자는 일에 절제가 있었는가?
열두 번째, 윌리엄 로의 규칙을 따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에 시간을 드렸는가?
열세 번째, 연구하는 일에 부지런하였는가?
열네 번째, 나의 모든 죄를 고백하였는가?
하나님께 열납 되는 예배 뒤에는 언제나 예배 정신에 부합하게 산 사람들의 삶이 있었습다. 우리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온전한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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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며 적용하며
1. 시인이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의 감정과 목적이 어떠하며(1,4절), 예루살렘에서 감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2~3절, 5절)?
2. 예루살렘의 평안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6~9절)?
3. 당신은 예배자로서 어떤 감격과 기쁨을 맛보고 있으며, 그렇지 못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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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하며 간구하며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는 주님!
믿음이 없이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오니
우리 한결이가 예배드릴 때 성령으로 인도하여 주사 신령과 진정으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게 하소서.
늘 언제 어디서나, 지금 여기에서 한결같이 예배하게 하소서.
예배함으로 온전히 드릴 때 삶이 온전해지니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예배자가 되게 하소서.
우리 한결이가 주님을 찾아 예배드림을 즐거워하게 하소서.
우리 한결이가 주님을 찾아 기도드림이 습관이 되게 하소서.
우리 한결이가 주님을 찾아 말씀을 묵상함이 생활이 되게 하소서.
우리 한결이가 부지런히 주님을 찾을 때에 만나 주시고 한없는 축복을 받게 하소서.
정결한 마음으로 예배하으로 영적인 열매가 날마다 맺어가게 하소서.
예배를 통하여 죄씻음을 받게 하시고 예배를 통하여 상처를 치유 받게 하시고 예배를 통하여 삶의 나아갈 길을 인도함 받게 하소서.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림이 얼마나 놀라운 촉복인가를 알아 주님을 온전히 섬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
평화와 형통을 위한 기도
시편 122:1~9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큰 세 가지 명절이 있는데 그때에 부르기 위하여 쓰여진 시 같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이 시편도 다윗이 쓴 것으로 봅니다. 왜냐 하면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도성으로 처음 선택된 때가 바로 다윗의 시대였습니다.
이 시인은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거룩한 성, 예루살렘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고 할 때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어린 애들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가자고 하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며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합니다.
이 시인에게도 이와 같은 기쁨이 있었습니다. 왜요? 예루살렘 성전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훼손되었는데 그것이 이제 다시 건설되었으므로, 본래의 성전도 귀하고 좋았지만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어 70년 동안이라는 긴 세월을 고생하다가 보니 처음에 포로 되어 갔던 사람들은 이미 이방의 땅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이제 고국에 돌아온 사람들은 그 당시 어릴 때 떠났던 사람들이 늙어지고, 돌아온 젊은이들은 이방에서 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일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가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해야 할 마당에서 지금은 노인이 되었지만 어린 때에 한 번 보고 7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지금 그 분들을 모셔다가 70년 전의 성전의 모습이 어떠했던가를 더듬어 가면서 재건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본래에 지었던 성전에 비하면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아무런 경제적 힘도 없을 때 그저 열과 성으로 성전을 짓다 보니 부족한 점도 많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으로 생각하면 70년의 포로 생활을 하고 돌아와, 있는 정성 다해 저희의 손으로 성전을 짓고 그 성전에 올라가자 할 때 그 기쁨과 감격은 형언하기 어려웠을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그 성전의 장관이 어떠했습니까?
3절을 보세요.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같이 건설되었도다” 보면 볼수록 감격스럽고, 아름다워 보이고, 잘되어 보인다는 말입니다. 왜요? 저희의 정성과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보아도 마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좋아 보이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면 세상에 많은 여자가 있지만 자기 아내가 제일 좋아 보이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볼 때 제일 훌륭해 보이고, 좋아 보이고, 여러분과 같이 이처럼 교회를 섬기는 것이 한없이 행복합니다. 왜요? 제가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자기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재건한 하나님의 집을 바라보니 그리 감격스럽고 훌륭해 보이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4절에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포로생활 할 때에 그들이 당한 치욕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려 해도 하나님의 집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포로생활 중에는 그와 같은 행사를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지냈습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습니까?
다니엘 같은 청년은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을 열어 놓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생명의 위험을 느끼면서도 계속 기도드렸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에 대한 향심이 얼마나 간절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제 나중에 생각하겠습니다만 시편 137편을 보세요.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거역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고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치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얼마나 이스라엘 민족이 시온을 사모했던가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예루살렘에 돌아가게 되었고, 자기들의 손으로 손수 성전을 재건하고 주의 전에 올라가게 되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저는 어릴 때 북한에서 자라면서 시골에서 다니던 교회를 지금도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제 집에서 가지고 있던 토지 중에서 사방 십리에서 보이는 땅을 기증해서 거기 예배당을 지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예배당이 사랑스러웠습니다. 이제라도 통일이 되면 제가 자란 동리, 거기가 비록 시골이요 서울의 예배당에 비하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지만 한 번 돌아가 예배당을 바라보고 예배당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게 된다면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야 합니다. 꼭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주일에도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귀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삼일기도회 시간에 몸으로는 피곤한 가운데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어떤 분은 예배당에 나오시기 위해서 문을 미리 닫고 이처럼 주의 집에 오시는 것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시는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면 만나고 싶어합니다.
5절에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왜 주의 백성이 예루살렘을 사랑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에 의해서 정의가 다스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을 축복하는 자가 받을 축복이 어떠한가를 말합니다.
6절에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도 하늘나라를 가리켜 새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늘나라의 특색이 무엇입니까?
사랑을 통한 평화와 기쁨입니다. 인간이 사는 데도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지옥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저택에서 살고,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고, 값진 옷을 해 입고, 기름진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지옥입니다.
사람이 사는 데서 사랑의 요소를 제거해 보세요, 생각하기도 끔찍한 일입니다. 사랑 없는 부부를 생각해 보세요. 싸움 뿐입니다. 사랑 없는 가정을 생각해 보세요, 싸움 뿐입니다. 사랑 없는 교회를 생각해 보세요, 싸움 뿐입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부부, 사랑하는 가정, 사랑하는 교회는 그저 한마디로 평안합니다. 그러니 모든 일이 잘됩니다.
옛날부터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가정이 사랑하는 식구들로 구성되면 평안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면 모든 일이 다 잘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서로가 미워하면 다툼이 생기고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서로가 달라도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어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합니까? 평안한 교회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조화를 이룬 교회입니다. 사랑하면 서로 자랑을 합니다. 목사가 교인을 자랑합니다. 교인이 목사를 자랑합니다. 그런 교회는 듣는 이에게 많은 호감을 주게 되고, 자연히 그 교회에 나가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기고, 그래서 그 교회로 모이게 되고, 그런 교회는 부흥하게 됩니다.
초대 교회를 보세요. 저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후 서로 사랑하게 되고 서로 돕게 되니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아니, 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되어서 저렇게 서로 좋아하나? 우리도 저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저 사람들처럼 될까?” 이런 호기심을 가지고 교회로 나오게 되고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많아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면의 일을 생각해 보세요, 서로 미워하고, 비난하고, 헐뜯는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세상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볼 때 교회에 대한 호기심이 생길 수가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 예루살렘을 축복한 내용을 보세요.
7-8절을 보십시다.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교회의 특징은 평안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 온 세상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한 마디로 평화입니다. 돈을 열심히 버는 사람도 돈 많이 벌면 평안하게 살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권력을 얻으면 평안할 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도 공부를 많이 하면 평안하게 살 줄 믿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이민을 가는 사람들 생각에는 한국보다는 미국이 모든 면에서 안정이 되었으니까, 미국만 가면 평안할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돈 많이 벌면 평안합니까? 돈은 많을수록 불안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어떻습니까? 높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을수록 잠시도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사람이 평안을 원한다고 해도 그 원하는 평안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세계를 보세요. 잠시도 평안한 날이 없습니다. 세계 한 모퉁이에서는 언제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평화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결과인데 평화가 올 만한 원인이 없이는, 다시 말하면 평화를 이룩할 만한 조건이 구비되지 아니하면 평화가 오기 어려운 것입니다. 세계의 평화나 한 나라의 평화나 가정의 평화나 개인의 평안이 오는 것도 이렇게 평화가 올 만한 조건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평화가 올 수 있는 조건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공의입니다. 정의입니다. 이사야 32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의의 공효는 평화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니라” 평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먼저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공의라는 것입니다.
한 나라가 평안하려면 그 나라에 공의가 행해져야 합니다. 불의가 행해지는 나라 치고 평안한 나라가 없습니다. 대개 후진국의 경우를 보세요. 독재자에 의해서 불의가 행해집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국민에게는 불만이 생기고, 불만이 가득한 국민에게 원망이 생기고, 원망이 폭력으로 화하여 사회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정국은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폭력이 없는 사회를 원한다면 먼저 공의가 행해져야 합니다.
한 나라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마음이 평안하기를 원합니다. 차라리 육신적으로는 좀 고되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평안한 편이 더욱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평안을 원하면 먼저 그의 생활이 의로워야 합니다. 악인은 좇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합니다. 죄 지은 사람의 마음이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 85편 10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했어요. “긍휼과 진리가 서로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의와 화평이 입맞추는 것같이 언제든지 의와 평화는 같이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화가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의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장 2절 하반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멜기세덱’이란 칭호를 썼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말로서 ‘의의 왕’이란 뜻입니다. 또 ‘살렘 왕’이란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평화의 왕이란 뜻입니다.
이와 같이 의는 평화의 조건이 됩니다. 의가 없이 참된 평화가 올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는 평화의 기초가 됩니다. 평화는 의의 터 위에만 건설될 수가 있습니다. 불의의 터 위에 건설된 평화의 기구나 어떤 정권이나 제도, 나아가서는 불의의 터 위에 세워진 가정이나 개인은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같아서 언제 창수가 나서 부딪쳐 그 집이 무너지고, 그 무너짐이 어떻게 비참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평화를 말씀하시기 전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리라”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준다”고 하신 그 말씀 가운데서 온 세계 인류, 국가, 가정, 그리고 개인의 평화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 의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우리에게 경고하시면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의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나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더욱 발전하고 복을 받고 선진국 대열에 어깨를 겨누려고 하면 과거와 같은 불의한 일이 다시없어야 합니다. 공의의 원칙에 의해서 일해 나아가는 나라가 될 때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잠언 14장 34절에 보면 “의는 나라를 흥하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한 나라의 지도자의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지도자가 바른 생각을 가지고 바로 일을 해나가면 그 나라가 흥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 전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라를 영도하는 대통령을 위해서 언제나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십니다. 대통령이 의의 길을 걷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준엄한 심판을 내렸고, 그로 인하여 국민이 당한 어려움이 얼마나 컸습니까? 이 나라에서 다시는 불의가 행해지지 않아야겠고 그와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국민도 불의한 방법으로 치부한 사람이나 권력을 얻은 사람을 멸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저 돈이 있으면 훌륭하게 보고, 권력을 잡았으면 무조건 아부하는 국민은 복 받은 국민이 못됩니다. 의가 행해지는 곳에서는 불의한 방법으로 얻은 사람이 부끄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는 부르짖기를 “오직 공법을 물과 같이 정의를 홍수같이 흘리게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공법을 우리 나라 어떤 기관, 어떤 단체든지 어떤 사회, 어떤 기구를 막론하고 물과 같이 홍수같이 공의의 법대로 운영될 때 과연 우리 나라는 축복을 받고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우리 자손 만대에 큰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라뿐만이 아닙니다. 교회의 평화도 그렇습니다. 공의에 의해서 모든 일이 처리될 때 교회에 평화가 옵니다.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 식구에게 공의가 없으면 그 가정에 불평이 생깁니다. 아무리 한 부모님 밑의 자녀라고 하지만 부모는 치우치지 않고 자녀를 사랑해야 그 가정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가정 안에 불화가 일어납니다.
개인도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의가 있어야 화평이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인 까닭으로 우리의 생활에 불의가 있으면 어떤 사람이 형벌을 내리기 전에, 어떤 사람이 나를 책망하기 전에 제일 먼저 우리 마음이 불안하게 됩니다.
이사야 57장 20절에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하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아나게 하는 바다와 같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너무너무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악한 사람의 마음은 바다 물결이 움직여서 바닷물 밑에 있는 진흙과 검불이 솟구쳐 올라서 빙빙 도는 그런 바다 물결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마음에 안정이 없고, 그 마음이 깨끗지 못하고, 마음이 출렁거리고, 밤에 잘 때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음식을 먹어도 음식의 맛이 없을 만큼, 악한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형벌은 제일 먼저 그 마음이 불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하면 의의 길로 돌아오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에게는 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이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께 죄의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기 전에는 우리의 마음에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의 왕이 되시고 평화의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누구든지 저를 믿는 사람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 양심이 맑아지고, 우리의 양심이 깨끗해질 때 그때에만 참된 평화가 우리 마음 속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평안은 예수님만이 주시는 평안인데 곧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해주시고, 우리의 양심에 평안을 주십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은 평안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와 같은 마음의 평화가 있는 사람에게는 형통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6절 이하를 같이 읽고 기도하십시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하나님께서 평화를 우리 마음에, 가정에, 교회에, 이 나라와 온 세계에 임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형통의 은혜가 여러분의 앞날에 길이 같이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