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창세기 4:1-8)
두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사람은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셨고 또 한사람은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이 예배를 드렸지만 한 사람은 은혜를 받고 한 사람은 예배 후에 시험이 들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시험이 든 이 사람은 은혜 받은 사람을 미워하고, 그 사람 때문에 자신이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다 아벨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한 가인은 결국 동생을 죽여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사실 모두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사실 모두 하나님을 잘 믿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사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귀한 시간을 내어 귀한 물질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러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는 길을 발견하시고 예배를 통하여 은혜를 받으시고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믿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히브리서 11:4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아벨이 드린 예배는 믿음으로 드린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가인이 드린 예배는 믿음이 없는 예배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일까요?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배를 잘 드립니다. 예배를 좋아합니다.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립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신명기 6:5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이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예배를 드리기 싫어합니다. 무슨 핑계거리가 있으면 예배에 빠집니다. 결혼식에 간다고 빠지고 장례식에 간다고 빠집니다. 동창회에 간다고 빠지고 축구 한다고 빠집니다. 직장 무슨 모임이 있어도 빠집니다. 모처럼 예배에 참석해도 정성도 없고 ...믿음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히11:5)
그러니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할 때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아이들에 집중해서도 안 되고 옆사람에 집중해서도 안 됩니다. 유리창너머 세상에 집중해서도 안 됩니다. 내 마음이 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28-29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예수님이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셨습니다. 믿는 것이 우리들의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비즈니스, 사업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새벽마다, 주일마다, 속회마다 내 마음과 몸을 끌고 가는 것이 일이 되어야 합니다.
서울에 한 신실한 여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간암이었습니다. 두 달 남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낙심되었지만 곧 정신을 차렸습니다. 남은 두 달을 어떻게 살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먼저 재산부터 정리했습니다. 재산의 일부를 잘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또한 처녀 때 은혜 받고 선교사가 된다고 했는데 결혼 후 바쁘게 살다가 그 다짐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후방에서 ‘보내는 선교사’가 되겠다고 했는데 그 다짐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재산의 일부를 또 잘라서 선교헌금을 보냈습니다.
또한 매일 성경을 읽으며 아이들에게 유서처럼 매일의 묵상을 썼고 미웠던 사람에 대한 미움을 털고 화해할 사람을 찾아가 화해했고 평소에 전도하고 싶었던 사람을 찾아가 전도했습니다. 그렇게 2달이 지나면서 죽을 날이 가까이 되었는데 오히려 몸에 힘이 났습니다. 2달 후 어느 날, 검진 후 의사 선생님이 난처한 듯이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난번의 간암 진단은 오진 같습니다. 암 덩어리가 안 보입니다.” 그때 세상이 달라 보였고 하나님의 은혜가 달콤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사이에 병이 나았을 수도 있고 오진일 수도 있었지만 오진이라도 전혀 원망스럽지 않았습니다.
누가 물었습니다. “집사님! 오진으로 교회와 선교사를 위해서 돈을 많이 써서 억울하지 않나요?” 그분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게는 지난 두 달처럼 보람 있고 행복했던 때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종말의식을 가지고 주님 만날 준비를 하며 열심히 살면 건강도 얻고 지경도 넓혀지고 축복도 받습니다. 게다가 언제 주님이 오셔도 “주님! 기다렸습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라고 하며 기쁘게 주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 섬기는 일로 누구를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자 동생 아벨을 미워합니다. 그냥 밉상이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여야 되겠다는 하는 증오심을 가진 것입니다. 아벨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가 드린 예배를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미워하고 그 마음에 살인의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가인은 마치 시험을 잘못 본 학생이 공부 열심히 하여 시험 잘 본 학생을 미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드린 예배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은 자신이 예배를 잘 못 드렸기 때문이지 아벨 때문이 아닙니다.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아벨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인과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엉뚱하게도 아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분노가 끓어오르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합니다. 혈기가 끓어오르고 난폭한 마음이 되어 동생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찾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그리고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제가 알고 지내는 어떤 장로님과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부인 권사님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심방을 왔습니다. 반갑게 맞이하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님 어서 오세요. ㅎㅎㅎ’ ‘장로님 잘 지내셨습니까?ㅎㅎㅎ’ 원래가 장로님이 목사님을 끔찍이 섬기는 분이라 주일마다 예배가 끝나면 꼭 목사님을 모시고 외식을 시켜드리고.. 하던 장로님입니다. 그런데 거실에 좀 특별한 사진이 액자에 있었습니다. 미스코리아 사진이었습니다. 사모님이 이게 무슨 사진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권사님이 자기가 60년대 초에 미스코리아가 됐을 때 사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모님이라면, ‘어머나, 권사님이 미스 코리아였어요? 어쩐지 예쁘다 했더니...’이러지 않겠습니까? 이 사모님의 행동이 서운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남이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해 주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 축협마트에서 경품을 추첨했는데 아는 목사님이 모닝 승용차를 탔더라고요.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어디를 가다가 그 소식을 듣고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우리 집사람은 전화를 걸어 사모님에게 축하하고, 난리였습니다. 정상적인 성도의 모습입니다.
누가 미워지면, 마음에 분노가 가득차면 내 마음에 혈기가 끓어오르면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바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믿음생활 바르게 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배생활 기도생활 교회를 위해 봉사생활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구를 미워하며 사는 것은 내가 독약을 먹고 상대방이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가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가인이 드린 예배를 하나님이 받지 않았을 때, 가인이 그 마음에 동생이 미워지고 동생을 죽이려는 마음이 들었을 때 하나님이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아, 어찌하여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이냐? ...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4:6-7,새번역)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듣지를 않았습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의 악한 생각대로 동생을 죽이고 맙니다. 동생만 죽으면 행복할거라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부터 가인의 인생은 지옥이 됩니다. 자신의 불행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로 불행괴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는 순종 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동생만 죽이면 문제가 해결되고 자신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가인은 극심한 두려움에 빠지고 그 마음이 패닉/ 공황 상태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두려움과 피해망상에 빠졌습니다.
사람에게는 죄의 소원이 있습니다. 소원이라는 말은 ‘좋아하고 그리워한다, 사모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그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죄의 본성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들으면 그 말씀을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흘려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각과 다르니 말씀을 받고 싶지를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잘못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들면 받고 들지 않으면 흘려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항상 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으면 복이 있습니다. 삼하 12:1-15에 보면 어느 날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다윗에게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떤 성읍에 두 사람이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부유하였고, 한 사람은 가난하였습니다. 그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한 사람에게는, 사다가 키우는 어린 암양 한 마리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양은 주인의 딸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에게 나그네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데, 자기의 양 떼나 소 떼에서는 한 마리도 잡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가난한 사람의 어린 암양을 빼앗아다가,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대접하였습니다."
다윗은 몹시 분노하여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다.” 고 하자, 나단이 다윗에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너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고, 또 내가 사울의 손에서 너를 구하여 주었다. 나는 네 상전의 왕궁을 너에게 넘겨주고, 네 상전의 아내들도 네 품에 안겨 주었다. 그런데 너는 나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내가 악하게 여기는 일을 하였느냐? 너는 헷 사람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다.” 그러자 다윗이 나단에게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고백하고 그 죄를 뉘우쳤습니다. 나단이 다윗의 죄를 폭로할 때, 다윗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정말 악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였습니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이 전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윗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살려 주셨습니다. 말씀을 새겨듣고 순종하면 소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