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통제영(統制營)」 대보름날 달밤에 통제영에서 그 감회를 읊다>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달 밝은 대보름날 밤에 저자는 통영시 통제영의 강한루(江漢樓)와 충무공 사당을 둘러본다. 이때 그 감회를 읊은 「통제영(統制營)」 칠언절구 4수(首)는 조선 말기의 한학자ㆍ개화사상가ㆍ시인이자,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였던 고환당(古歡堂) 강위(姜瑋 1820~1884)의 작품이다. 강위가 1862년 정월 보름날 밤에 통제영의 강한루(江漢樓)에 올라, 달빛 쏟아지는 먼 바다를 바라보며 대도가(大刀歌)를 읊조린다. 그리곤 신령을 깨우친 통제사 이순신 장군 같은 위대한 분이 생각나서, 세상에 드문 명장이자 영웅의 굳센 명세가 서려 있는 충무공 사당을 둘러보았다는 내용이다.
◉ [1862년 정월 남도(南道) 기행] 저자 강위(姜瑋)는 1862년 정월달에 남도(南道) 기행을 하다가, 경남 통영시 통제영을 방문하곤 187대 삼도수군통제사 신헌(申櫶 1810~1884)•본명 신관호(申觀浩)를 배알하였다. 당시 통제사 신관호(申觀浩)와 강위(姜瑋)는 스승 김정희(金正喜)의 문하생으로 촉망받던 제자들이었고 강위는 신관호를 큰형으로 모실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신관호의 통제사 재임 기간은 1861년 1월12일~1862년 12월 27일이었다.
그리고 초암(蕉庵) 박치한(朴致翰), 통제사의 아들 향농(香農) 신정희(申正煕)과 삼금(三琴) 신낙희(申樂煕), 그리고 한산수방장(閑山守防將) 품산(品山) 강경문(姜慶文), 남우(南芋) 고배후(高配厚),혜사(蕙史) 서응우(徐應禹),소초(小蕉) 박계석(朴啓錫)과 함께 통제영의 수항루(受降樓), 강한루(江漢樓), 거북선(龜船), 세병관(洗兵館), 충무공 사당, 용화사(龍華寺) 등을 두루 둘러보게 된다. 이후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안의 3동(安義三洞) 거창군 수승대(搜勝臺)를 거쳐서, 함안의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 1824~1894)을 만나 다시 진주 촉석루(矗石樓)를 둘러보고 남원을 거쳐 돌아갔다.
○ [저자 시인(詩人) 강위(姜瑋)] 고환당(古歡堂) 강위(姜瑋 1820~1884)는 조선말기 전통 속에서 혁신을 찾아 한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는 김택영(金澤榮), 황현(黃玹)과 함께 조선말의 3대 시인으로 불렸으며, 또는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을 포함해서 4대 시인으로도 부른다. 강위는 한미한 무반 출신이고 종9품의 말직을 얻고 감격한 사람인지라, 조선왕조의 운명을 맡아서 근심해야 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의 처지에 어울리게 중인들과 가까이 지내며 위항시(委巷詩)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자기의 문학세계를 구축하고 도학과 경세, 그 어느 쪽에도 쓰일 수 없는 능력을 작품 창작을 통해서 발휘하고자 했다. 오직 시문에 뛰어났기 때문에 지체 높은 사대부라도 따르며 배우고자 했으니 뜻하는 바를 이룬 셈이다. 그는 한시문(漢詩文)이야말로 신분적인 열등의식을 상쇄할 수 있는 최상의 창조물이라는 생각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통제영(統制營) 4수(首)」는 저자 강위(姜瑋)가 이러한 의식을 드러낸 좋은 예이다. 이순신 장군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가서 이순신과 자기는 같은 무관이라는 점에서 서로 같고 범속한데 매몰되지 않는 비범한 생각을 하는 일치점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이순신의 전공처럼 놀라운 시(詩)를 이룩하고자 했다. 그래서 「통제영(統制營)」의 두 번째 수(首)에서 “글이나 칼 어느 쪽에서도 입신을 하지 못하고 늙어버려 처량한 신세가 되었으나, 이순신이 지휘하던 통제영 수대에 서서 종일 시를 읊조리니 정신적 비약이 이루어진다.” 또 “산 기운은 두류(頭流, 지리산)에서 솟구치고 햇살은 거제도(巨濟)로부터 온다”라고 읊었다. 산 기운은 ‘머리에서부터(頭流)’에서 솟구치고 해상의 저문 햇살은 ‘커다랗게 건너온다(巨濟)’고 지명을 통해 적절한 상징과 비유를 들었다. 이어 강위는 거북선을 기린 시를 통해 이순신과 같은 영웅이 다시 나타나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할 것을 염원하였다.
또한 그는 외교사절이 아니면서 일본과 중국을 여러 차례 드나들었고 그때마다 기행시를 지었다. 침략의 물결이 고조되던 시기에 조국의 안위가 근심스러운 상황에서, 시련의 역사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를 거듭 노래하며 허허로운 마음을 달랬다. 하지만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시대적 태풍이 문 앞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 다음 ‘歌’, ‘灰’, ‘尤’, ‘侵’ 운목(韻目)의 칠언절구 「통제영(統制營) 4수(首)」는 조선말기의 한학자ㆍ개화사상가ㆍ김정희(金正喜)의 제자ㆍ시인이었던 고환당(古歡堂) 강위(姜瑋 1820~1884)의 작품이다. 그의 가계는 조선 중엽부터 문관직과는 거리가 멀어져서 강위의 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무반 신분으로 굳어져 있었다. 신분상의 제약으로 문신이 될 수 없음을 알자,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과 문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 글의 4수(首)의 첫 수와 둘째 수, 넷째 수는 측기식이고 셋째 수만 평기식이며, 그의 문집 『고환당수초시고(古歡堂收艸詩稿)』 권7(卷之七)에 수록되어 있다.
첫 수(首)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에 통제영의 강한루(江漢樓)에 올라, 짙푸른 하늘에 달빛 쏟아지는 먼 바다를 바라보며 대도가(大刀歌)를 읊조린다. 둘째 수에선,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드니 마음 더욱 서글프고 종일 긴 한숨 뿐이다. 산 기운은 두류(頭流)에서 솟구치고 해상에는 햇살이 거제(巨濟)로부터 비춰온다. 셋째 수에선, 바다에는 독룡(毒龍)이 떠다닌다는 당시(唐詩)를 읽고서, 신령을 깨우친 이순신 장군 같은 위대한 분이 나라를 지켰던 바다를 바라본다. 넷째 수에선, 대숲 속의 충무공 사당에서 세상에 드문 명장이자 영웅의 굳센 명세를 떠올린다.
*「통제영(統制營) 4수(首)」* / 강위(姜瑋, 1820~1884)
江漢樓前萬里波 강한루(江漢樓) 앞 만 리 물결
太平元帥大刀歌 태평한 통제사 대도가(大刀歌)를 부른다.
遙夜群鴻都睡着 긴 밤 기러기 떼 모두 잠들고
碧空無際月華多 가없이 넓은 짙푸른 하늘에 달빛이 쏟아지네.
書劒無成老更哀 서금(書劒)을 못 이루고 나이드니 더욱 서글픈데
沈吟終日在戎臺 종일 군사훈련장에서 깊은 한숨뿐이로다.
天中積翠頭流出 하늘에 쌓인 산 기운이 두류(頭流)에서 솟구치고
海上斜陽巨濟來 해상에는 저문 햇살이 거제(巨濟)로부터 비춰오네.
水偏淸處毒龍浮 독룡(毒龍)이 떠다니는 물이 편벽되게 맑은,
讀得唐詩可戰不 당시(唐詩)를 읽고, 어떻게 싸우지 않으리오.
神解如公千古少 신령을 깨우친 공 같은 분이 먼 옛적에도 적었으니
莫將敦說擬凡流 범부에 비견해 지나친 말이라 하지 말라.
忠武祠堂萬竹林 무성한 대숲 속 충무공 사당에는
英雄事畢海沉沉 영웅의 일을 끝내고 바다에 잠긴,
世間不乏千名將 세상에 드문 아름다운 명장으로
有否盟山誓海心 굳게 맹세한 마음만 있도다.
[주1] 통영 강한루(江漢樓) : 강한(江漢)은 군사요충이며 양자강과 한수가 만나는 곳으로 이름난 중국 호북성의 경승지라고 한다. 1840년에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이 여기에 누각을 지었을 때 강위(姜瑋)가 충무공의 위업을 강한과 관련된 고사에 연관 지어 강한루(江漢樓)라 명명했다. 현 누각은 전형적인 조선의 팔각지붕 양식으로 1988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주2] 서금무성(書劒無成) : 글과 칼, 그 어느 쪽도 입신을 하지 못했다.
[주3] 수편청처독룡부(水偏淸處毒龍浮) : 율곡이 이순신에게 "독룡이 숨어 있는 곳의 물은 편벽되게 맑고 산에서 나무 찍는 소리가 ‘정정’ 울리니 산은 다시 그윽하다(伐木丁丁山更幽 毒龍潛處水偏淸)"이란 시구를 전해주었는데 "伐木丁丁山更幽"는 두보의 시인 "제장씨은거(題張氏隱居)"에 실려 있다.
[주4] 맹산서해(盟山誓海) : 썩 굳게 맹세(盟誓)함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