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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3:9-15절)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듣는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사람은 누구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창녀나, 도둑 같은 인생의 실패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니고데모처럼 성공하고 존경받는 선생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를 만났을 때, 요3:3절)...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그의 인생을 다시 출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어린이가 새 도화지를 꺼내어서 그림을 다시 그려 나가듯이 그의 인생을 다시 출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이렇게 반문합니다. 4절)..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 누가 다시 출발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하는 줄 아십니까? 저도 이 나이가 되도록 해보지 않은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에게 다시 태어나라고 말씀하십니까?* 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들도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즉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절대로 이런 식으로 살지 않고, 정말 멋있게 살다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그럴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Ⅰ.성경이 가르치는 것
니고데모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절)...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즉 니고데모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도무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인데, 이것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면, 이것쯤은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 전체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다시 태어난 백성의 창조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본성대로 살다가 죽을 뿐이라면, 성경은 필요 없습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중심 사상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어떻게 하면 더 잘 가꾸고 번식시키느냐?* 라는 것이 아닙니다.즉 성경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더 잘 관리하는 법, 제 2의 에덴동산 개발 법, 씨 없는 수박을 만드는 법, 앵무새를 번식시키는 비결, 콩으로 만든 고기 요리법, 간염 퇴치법...등 이런 것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중심 사상은 바로 인간을 새로 창조하여 새로운 백성을 만드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것입니다. 즉 성경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한 번 태어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새로 태어날 수 있느냐? 는데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즉 성경 전체는 새로 만들어진 사람, 새로 태어난 사람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스라엘의 선생, 즉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는 사람이 새로 태어난다는 것을 모른다면,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한 번 태어난 후,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모릅니다. 즉 잘났거나 못났거나 한 번 태어나면, 자기 생긴 모습 그대로 살아야만 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작은 책(성경)은 바로 한 번 태어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책(성경)을 가지고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Ⅱ.땅의 일과 하늘의 일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 우리에게 생소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것이 이 땅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저 높은 하늘에서부터 시작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12절을 보십시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도 믿지 않고 있다고 하시면서,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은 더욱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럼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며,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일까?
다시 3:11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 도다.”
여기서 *땅의 일* 이라고 하는 것은 한 번 태어난 자가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믿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성경을 수없이 읽고, 가르쳤지만, 자신은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우리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즉 내가 이미 한 번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변하여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사실 주님의 이 책망은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이 말씀으로 완전히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전에는 믿었습니다. 즉 나이 어린 청소년들의 경우에는 아무리 거칠고, 반항적이라 해도 일단 말씀을 접하기만 하면 새로워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시간이 갈수록 어른들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이 저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너는 어떻게 해서 어린 청소년들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은 믿으면서 니고데모 같은 어른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믿지 않는 것이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즉 내가 오늘까지 어디서 어떤 식으로 살아왔든지 간에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변하여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답답한 사람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전혀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혹시 가족이나 가까운 분들 중에서 너무나도 성격이 나쁘고, 마음이 닫혀 있어서 도저히 구제불능이라고 생각되는 그 사람이 변하여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어느 구체적인 인물을 머리에 한번 그려 보십시오. 바로 그분을 말입니다. 그 분이 완전히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오늘 주님의 책망은 우리에게 해당됩니다.
*너는 어찌하여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도 믿지 않느냐?*
만약 우리가 여기서 완전히 변하여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그 이상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리 들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즉 이 땅에서 변하여 새사람 되는 것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려고 하느냐? 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일*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 안에 세운 영원한 의논(議論)을 말합니다. 시간은 정확하게 말할 순 없습니다. 영원한 시간 안에서 삼위 하나님 사이에 회의(會議)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영원한 회의, 또는 영원한 의논*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삼위 하나님 사이의 회의(會議)입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도 낄 수 없는 영원한 신성(神聖)을 가지신 하나님 안의 의논(議論)이었습니다.
그 회의의 주제(主題)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회의의 주제는 곧 *우리의 거듭남* 이었습니다. 즉 *인간이 자연적인 본성이 아니라 새로운 본성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가?*라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회의(會議)의 주제(主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것은 우리 안에 *신의 성품을 심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영원한 시간에 삼위(三位) 하나님의 회의(會議)가 열렸습니다.
이 땅에서 내가 변하여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것을 주제로 하여 영원 전에 삼위 하나님 사이의 의논이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외에는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고집이 있어서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의 삶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운명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 벌고, 밥 먹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즉 변하기를 싫어합니다. 지금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은데, 어떡합니까?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회의(會議)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돼지는 먹을 것이나 주어야 좋아하지, 진주 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발로 밟고, 그것을 준 사람에게 *왜 이런 것을 주느냐?*고 덤벼듭니다.
이 땅에 사람들이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회의(會議)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세우셨는가? 하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Ⅲ.하나님의 회의 내용
영원한 시간에 삼위 하나님께서 의논하시는 중에 내리신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3:l4절을 당신의 성경을 펼쳐놓고 보십시오. 성경을 덮어 놓고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하나님의 영원한 회의(會議)에서 내려진 결론은 인자(人子)를 드는 것이었습니다. *인자(人子)를 든다*는 것은 *저주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회의의 결론은 제 2위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불순종과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이 놀라운 *새 성품을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민21:5-6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다시 한 번 음식으로 하나님을 몹시도 원망하고 욕했을 때, 하나님께서 불 뱀을 보내어 그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즉 날아다니는 불 뱀 떼가 이스라엘 진을 습격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니까 모세 앞에 나와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원망하여 범죄 했으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불 뱀으로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불 뱀만 떠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 불 뱀에 물려 죽어 가는 자들을 치료하는 방법도 제안하셨습니다. 그것은 놋으로 불 뱀의 모양을 만들어 장대에 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뱀을 쳐다본 사람마다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민21:8-9).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단다는 것은 그들의 죄의 원인이 된 사건을 공개하고 시인한다는 뜻입니다. 원래 놋은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며, 무엇을 높이 다는 것은 저주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사람을 죽여도 나무에 달아 죽이는 것은 하나님께 범죄한 자를 죽일 때, 그럴 수가 있습니다. 즉 놋 뱀을 매다는 생각은 순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다가 놋 뱀을 만들어 달기로 하고, 이것을 하나님께 부탁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뱀에 물린 자들은 다 죽는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놋 뱀을 보지 않은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즉 *내 경험으로는 적어도 이 사막 불 뱀에 물린 자는 살 수 없어. 흥, 놋으로 뱀을 만들고 그것을 보면 산다고? 그런 미신적인 생각이 어디 있어. 눈으로 본다고 해서 뱀에 물린 독이 빠지나? 이런 비과학적인 방법이 어디 있어*라는 식으로 교만하게 생각했던 자들은 모두 다 죽었습니다.
실제로 죽은 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놋 뱀을 본 자들은 다 살아났습니다. 즉 비과학적이든, 미신적이든, 간에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한 자들은 모두 다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사건과 연결시키면서 본문 3:14-15절)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순종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즉 호흡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더 멀리하고, 하나님을 더 무시하고, 업신여긴 것입니다. 그 결과 모두 죄의 독(毒)에 쏘여 코로나와 모든 재앙으로 영원히 죽어 갑니다.
마치 불 뱀이 습격한 것처럼 모든 인간들은 죄의 독(毒)으로 죽어 가고, 또 이미 많이 죽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게 요구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 하셨습니다.
그것은 제 2위 하나님(그리스도)을 높이 다시고, 누구든지 이분만 바라보면, 다 죄의 독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과는 비할 바 없는 영원한 신성(神聖)을 가지신 하나님이 저주를 받으시는데, 부족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모든 인간들이 모두 다 죽는 것보다, 이 한 분이 죽는 것은 더 가치가 있습니다. 즉 졸개들을 모두 다 죽일 필요가 뭐 있습니까? 왕이 스스로 걸어와서 죽겠다는데....
찬송가 151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우리가 완전히 변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그냥 멍청하게 가만히 있는데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엄청난 일이 있은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祝福)입니다.
이미 영원 전에 삼위(三位)하나님의 회의(會議)가 있었고, 그 결과 모든 책임을 제 2위 하나님(그리스도)이 지시기로 하고, 그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를 바라보기만 하면,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그가 나의 죄 때문에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그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이것을 미신(迷信)이라고 말하든, 비과학적인 일이라고 비난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삼위(三位)하나님 사이의 의논(議論)이요, 약속입니다. 성부(聖父)께서는 누구든지 아들을 믿고, 나오는 자는 모두 다 살려 주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즉 그가 전에 어떤 사람이었으며,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었고, 어떤 경력을 가졌든지 간에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 그로 완전히 새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빈부귀천 상관 없습니다.)
3:13절을 함께 봅시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바로 그 영원한 회의(會議)에 참가하셨던 장본인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이 곧 복음(福音)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듣는 이 복음(福音)은 처세술(處世術)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이 어떻게 서로 해치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느냐? 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계획하셨던 그것을 아들(예수 그리스도)은 성취시키기 위하여 내려오셨고, 그분만이 성취시키고, 완성시킬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분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또 그분만이 그 자리로 오르신 분입니다. 즉 그는 십자가 나무에 달리심으로 그 영광된 자리에 올라가실 분입니다.
본문에는 이것이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물론 그는 구약 시대에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계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의 사자로 표현된 천사는 거의 대부분이 제 2위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그가 오르시는 상황은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번에는 혼자 오르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무리들을 이끌고, 그들의 머리가 되셔서 그들 모두를 데리고 하늘 보좌 우편으로 오르셔서 영원히 왕 노릇하십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우리에게 이런 새로운 생명을 주실 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만 하면, 이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생명을 얻기 위하여 예수께로 나오지 않는 것일까?(고집이 너무나 쎄서 이제 마음이 돌같이 굳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뱀에 물린 사람들에게는 다른 것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저 장막에서 기어 나와 놋 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살 수 있었는데도 겸손히 하나님께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고 싶은 교만이 그들을 죽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밖에 없습니다. 나는 지금 죄와 허물로 죽어 있으며, 하나님의 그 방법 외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저(십자가)에 달린 자가 바로 *나*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존심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병원에서는 환자의 고집이나 자존심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죽어 가는데 무슨 고집과 자존심이 필요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군중들 가운데 가만히 있으면서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구경꾼으로 있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아쉬울 것이 없는 완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있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이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죄인으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즉 의사보다 더 똑똑한 사람은 의사가 필요치 않은 법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지는 이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고집과 자존심을 버리고, 내가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是認)하는 것뿐입니다. 찬송가 256장 *나의 죄 모두 지신 주님*
그러나 사람들은 고집과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겐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래 전에 의논하셔서 결정하신 십자가의 방법마저도 비과학적이니, 미신적이니, 하면서 배척합니다.
그러나 그 근본 이유는 교만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절대로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런 새로운 탄생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이 영원한 생명을 알지 못하고, 영원히 멸망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약4:6절)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셨느니라"
Ⅳ.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성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실 때, 다시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갔다가 태어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또 우리의 이름을 바꾸거나, 얼굴을 바꾸시지도 않습니다. 단지 우리 안에 새로운 성품(性品)을 심어 주십니다.
전에 없던 하나님의 성품(性品)을 심어 주십니다. 그 외에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아주 작은 새로운 성품(性品)을 심어 주십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으로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으며, 새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안에 새겨진 이 새로운 성품(性品)은 어떤 신랑이 신부와 결혼하면서 준 결혼 선물과 같습니다.
처음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는 모든 것을 다 주지 않습니다. 아직 함께 살지도 않습니다. 약간의 귀한, 보배로운 선물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있을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모든 생활의 약속입니다. 모든 귀한 것이 그 남편으로부터 올 것입니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장가드실 때, *지참금으로 당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장가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금반지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性品)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결혼선물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조그만 성품의 변화가 얼마나 귀한 것인 줄을 아십니까? 이것이야말로 앞으로 모든 영광과 존귀를 소유할 증표이며, 이후로도 모든 귀하고, 존귀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우리 안에 모든 것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난 후, 내 안에 조그만 변화가 생겼습니까? 그것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어떤 결과가 없이 모든 것을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실망스럽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영원한 영광을 소유할 수 있다는 증표입니다. 계속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결과를 찾아서 쫓아다니면, 결국 있던 믿음도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안에 생긴 이 작은 변화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모든 것은 주시지 않았지만, 작은 증표를 주신 것으로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한 번만 주님을 의지하지 말고, 계속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늘 주님을 기다리십시오.
뭔가 어렵고 뭔가 필요합니까? 주님을 기다리십시오.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그분이 일하시도록 기도하고 기다리십시오. 그분은 반드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힘을 주실 것입니다.
말씀이 나에게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주지 않고, 오직 새로운 성품에 대해서만 말씀한다고 해서 마음 문을 닫지 마십시오. 이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자라게 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모든 어려움 중에 안내하고 승리하는 비결입니다.아-멘
벧후1:3-4절)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찬송가 289장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진리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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