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e'라는 문자와 /triː/라는 소리(음성)는 기표, 나무의 이미지와 '나무'란 개념 자체는 기의이다.
기표(記表, 프랑스어: 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記意, 프랑스어: signifié 시니피에[*])은 페르디낭 드 소쉬르에 의해 정의된 언어학 용어이다.
"시니피앙"은 프랑스어 동사 signifier의 현재분사로 "의미하는 것"을 나타내며,
"시니피에"는 같은 동사의 과거 분사로 "의미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기표란 말이 갖는 감각적 측면으로, 예컨대 바다라는 말에서 "바다"라는 문자와 /bada/라는 음성을 말한다.
기의는 이 기표에 의해 의미되거나 표시되는 바다의 이미지와 바다라는 개념 또는 의미 내용이다.
기표와 기의를 하나로 묶어 기호(記號, 프랑스어: signe 사인[*])라고 한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 즉 의미작용(意味作用, 프랑스어:signification 시니피카시옹[*])은 그 관계에 필연성이 없다(기호의 자의성).
예컨대 "바다"를 "바다"라고 쓰고 /bada/라고 발음하는 데 있어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 만약 그것이 있었다면 모든 언어에서 바다는 /bada/로 발음되고 있을 것이다.
필연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이해하는 체계 속에서는 필연화되고 있다.
한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바다"라는 글자를 보거나 /bada/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거기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의 근저는 기본적으로 같다. 또 "바다"가 왜 /bada/냐는 질문에 답하기가 매우 어렵다.
고틀로프 프레게가 지적했듯, 기의, 즉 "의미 내용" 또는 "개념"은 "지시 대상"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지시 대상"은 레페렌트(referent)라 하며, 기의와는 구별된다.



■ 기호, 기표, 기의
기호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먼저 다음의 질문에 대답해 보라.
질문 : 당신이 아래에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정답 : 소의 사진 (소가 아님에 주의)

당신은 뭐라고 대답했는가? 아마 대부분 “소”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틀렸다. 왜 틀렸을까? 이 해답의 비밀이 바로 ‘기호’에 있다. 지금부터 그 비밀을 풀어보기로 하자.
원론적으로 다시 질문해보자. 기호가 무엇인가? 그것은 소리나 문자, 영상 등의 물리적인 형태로 존재하면서 그 물리적인 형태와는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소’라는 물리적 형태의 글자가 있다. 한국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ㅅ’ ‘ㅗ’라는 형태의 결합이 ‘네 발 달리고, 일 잘 하고, 맛있는 고기를 제공하는 몸집 큰 짐승’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기서 ‘ㅅ’과 ‘ㅗ’가 결합해 만들어진 ‘소’라는 물리적 형태(글자)를 소쉬르는 기표(signifier)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가 ‘소’라는 기표(글자)를 보고 머리에 떠올리는 ‘네 발 달리고, 일 잘 하고, 맛있는 고기를 제공하는 몸집 큰 짐승’이라는 음매 하고 우는 소의 이미지는 기의(signified)다. 기표나 기의라는 용어가 대단히 생소하고 어려워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어떤 것을 글자나 소리, 영상 등으로 표시(標示)하는 것을 기표(記標)라고 하고, 그 표시된 것을 의미(意味)하는 것이 기의(記意)다. 그러니까 ‘소’라는 글자는 기표이고, 우리가 이 글자를 보고 머리 속에 떠올리는 진짜 소(네 발 달리고, 일 잘 하고, 맛있는 고기를 제공하는 몸집 큰 짐승)가 기의다.
기표와 기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조금 전 질문의 답을 알아보자. 질문의 답은 바로 “소의 사진”이다. 아마 이 정답에 어이없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사진은 ‘소(문자)’라는 기표와 마찬가지로 소의 사진이라는(즉 영상이라는) 물리적 형태의 기표다. 우리가 저 사진을 보면서 머리에 떠올린, 실제 살아 움직이며 생명이 있는 진짜 소가 기의다.
바로 이처럼 기표(소의 글자나 소의 사진)와 기의(실제 소)가 합쳐질 때 기호(우리의 머리 속에 떠올리는 소)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기호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속이 있어야 한다. 만약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 사람이 ‘소’라는 기표(글자)를 본다면 아무리 봐도 그것이 뜻하는 바를 모르므로 기호가 만들어지지 않을 것(머리에 소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아랍어를 보면 “저것이 글자냐, 그림이냐?” 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내가 아랍인들의 기표를 모르기 때문에 나에게는 기호가 만들어지지 않고 무슨 암호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내가 아랍의 사회적 약속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회적 약속이란 말은, 그 구성원들끼리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필연성이 아니라 자의성을 띤다. ‘소’는 한국 사람들끼리 그렇게 하기로 한 약속이고, ‘cow’는 영어를 쓰는 사람들끼리 한 약속이며 ‘牛(우)’는 중국 사람들끼리 한 약속이다. 똑같은 짐승을 두고 누구는 ‘소’라고 부르고 누구는 ‘cow’라고 부르고 누구는 ‘牛(우)’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사람이 미국 사람보고 “너는 왜 소를 cow라고 부르냐? 너 바보냐?” 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것은 그 사람들끼리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남녀가 식구들 몰래 연애를 한다고 치자. 이들이 아무도 몰래 만나기 위해서는 둘만의 약속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남자가 여자의 창밖에서 밤마다 뻐꾸기 소리(기표)를 내면 여자가 나오기로 정한다. 이때 남자의 뻐꾸기 소리는 이들 둘만의 기호가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조금 이상한 뻐꾸기 울음소리를 듣고 “저 뻐꾸기가 미쳤나?”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여자는 “나를 부르는 소리구나.” 하고 밖으로 나갈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여자의 오빠가 이상한 뻐꾸기 울음의 정체를 알아버렸다고 치자. 오빠가 둘만의 기호를 인식한 것이다. 아마 그 날로 여자는 머리를 깎이고 금족령이 내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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