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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신년 제1강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즐거움
말씀 / 벧전 4:1-19
요절 / 벧전 4: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소망의 2025년 새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여러모로 혼란한 가운데 있지만 주님 안에서 희망찬 새해 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베드로전서는 송년 예배 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사도 베드로가 고난 중에 있는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편지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일 말씀을 통해 우리 성도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영원한 하나님 나라, 산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또 베드로전서 2장 말씀에서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산 소망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왕 같은 제사장일지라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숱한 고난들을 겪게 됩니다. 특히 오늘 말씀의 고난은 그저 조금 고생스러운 정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불 시험이라 할 정도로 매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또 복음 역사를 섬기면서 그리스도인이기에 겪는 고난들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말씀이 가르쳐주는 고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또 이런 고난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이 새해를 맞이하는 목자님들과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큰 힘과 위로와 방향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헬라어 원문에는 앞에 ‘그러므로’가 있는데, 3장 뒷부분과 연결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통해 부활과 하늘 영광에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는 분이지만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모진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보면 예수님도 십자가만큼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어떤 생각으로 고난을 감당하셨을까요? 히브리서 12장 2절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자기 앞에 주어져 있는 기쁨을 위해 십자가를 참았고 부끄러움을 의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앞에 있는 기쁨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입니다. 이는 만왕의 왕으로 만물의 통치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모습은 고난 앞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좋은 본이 됩니다.
우리는 인생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난들이 늘 있습니다. 직장 일로 피곤한데, 교회 와서까지 신경 써야 할 여러 사역으로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질병이나 사고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가족이나 동료로부터 조롱을 받을 수도 있고, 술과 음란을 피하는 등의 경건 생활을 하는 것으로 인해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 안의 사람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목자님들에게는 제자 양성이 쉽지 않고, 섬기고 있던 양들마저 떠나가는 것이 고난이고 아픔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고난 앞에서 “하나님, 왜 제게 그러십니까? 왜 하필 저입니까? why me?” 하면서 힘들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앞에 주어진 기쁨을 바라보면서 고난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지금의 고난은 잠시 있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앞에 있는 기쁨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고난 이후에는 말씀의 신실함을 경험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관계가 회복되는 기쁨이 주어집니다. 고난을 통해 맺혀지는 성숙의 열매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주와 함께 영원히 왕 노릇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우리 앞에 주어진 기쁨을 바라보면서 성도로서 겪는 고난을 감당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가치관으로 살도록 권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는 세상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은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2). 성도들이 이런 가치관이 없을 때 고난이 힘들고 싫어집니다. 이때 자기도 모르게 본성대로 살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다시는 옛 생활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왜입니까? 음란, 정욕, 술과 방탕,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며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이 행하는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기 때문입니다(3).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구원받은 성도가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는 목욕한 돼지가 배설물로 더러운 우리에서 다시 뒹구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남은 인생을 세상 정욕대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면 세상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비방합니다(4). 옛날에는 자기들과 술도 마시고 음란한 데 다녔던 사람이 예수님 믿더니 더 이상 함께 하지 않는 것에 세상 친구들은 이상히 여깁니다. 돈 벌 욕심에만 사로잡혀 구두쇠 같던 사람이 이제는 밥도 사고 여러모로 섬기니 ‘세상 살다 보니 별일이네’ 이런 소릴 듣습니다. 자기들과 가치관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왠지 불편하고 어색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비방한다고 해서 다시 그들과 같은 삶을 살 순 없습니다. 그들은 장차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5,6). 마치 검사 앞에서 조서를 쓰듯 자신들의 죄악 된 삶을 낱낱이 드러내야 합니다. 그들에 대한 판결은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는 것으로 이상한 사람 취급당할 때 쫄거나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이 땅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먼저 10절을 보면, 또 다른 성도의 정체성을 말씀합니다. 성도는 ‘은혜 맡은 청지기’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맡겨주신 것들을 충성과 지혜로 잘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와 더불어 복음 역사를 섬기는 사명인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각종 은사도 더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청지기로써 하나님의 뜻을 위해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삶일까요?
첫째,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세상 종말은 언제든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날이 도둑 같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도 소아시아의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정신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이고, 이 땅의 삶은 잠시 머무는 나그네의 삶입니다. 영원 속에서 생각해 볼 때 이 땅의 삶은 순간이요, 잠시 잠깐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성도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 쾌락에 팔려 딴짓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 ‘산 소망’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과 자세를 가지고 고난 중에도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둘째, 형제를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형제를 사랑하되 뜨겁게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뜨겁게’는 원문에서 ‘끝까지, 전심전력하여’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부모의 사랑은 완벽하진 못해도 ‘끝까지’ 자식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완벽한 ‘끝까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보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섬기기 힘들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끝까지’의 사랑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야고보서 5장 20절에도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한 자가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그 사랑이 우리의 죄를 덮는 것처럼,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덧입은 성도들도 다른 형제의 죄를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형제의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제자공동체, 즉 ‘교회’인 우리 모임의 본질은 바로 여기 ‘서로 사랑’에 있습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가 이를수록 불법이 성하고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는다고 했습니다(마24:12). 세상은 무정하고 무관심하며 자기중심적이기 쉽습니다. 다들 자기 일, 자기 공동체, 자기 행복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무엇보다 내가 고난 중에 있으면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무엇보다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저희 가정은 정민 목자님의 무릎 인대 수술과 재활치료를 하는 작년 한 해 동안, 많은 사랑과 기도와 섬김을 받았습니다. 관계성 있는 한 목자님은 정민 목자님이 수술하고 병원에 있을 때 요리도 제대로 해 먹기 쉽지 않을 텐데 수고가 많다며 마트 배송을 통해 데워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찌개류를 큰 박스로 보내주셨습니다. 어떤 목자님들은 진주센터까지 오랜 시간을 운전해 오셔야 하는데 심방 와주시고 동역자와 진주센터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기도와 물질과 여러모로 관심과 섬김과 사랑으로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진주 동역자들을 생각할 때 감사하고 믿음의 동역자들이 얼마나 소중한가 생각하고 뜨거운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 안에서 한 공동체의 형제자매인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 또한 믿음의 동역자들과 양들에게 좀 더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내 일처럼 돌아보고 뜨겁게 심정과 사랑을 담아 기도하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마음에 뜨거운 사랑이 있을 때 서로 대접하며 섬기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 당시 교회는 대부분 가정교회였습니다. 어떤 지역에 예수님 믿는 가정이 몇 가정 있고 그들이 어느 한 가정에서 함께 모이는 것이 당시 교회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성도들이 찾아올 때 따뜻하게 영접하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대접하는 데 인색할 수 있습니다. “왜 나만 섬겨야 하는가?” 그러나 원망 없이 즐거움으로 서로 섬기라고 사도 베드로는 말합니다(9). 초대 교회는 이렇게 하는 가운데, 점차 큰 공동체로 성장해 갔습니다. 우리가 가정을 오픈하고 교회에서도 형제자매들을 “welcome!” 환대하며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충성스럽게 섬겨야 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모든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 은사를 가지고 공동체가 든든히 서갈 수 있도록 섬겨야 합니다. ‘선한’ 청지기는 다른 말로 하면 ‘충성스러운(faithful)’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충성스럽게 섬기고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 종말이 가까운 때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청지기로서 주어진 사역들에 충성하되, 무엇보다 복음의 씨를 뿌리며 맡겨주신 영혼들을 제자 삼는 사역을 힘써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더라도 지금 고난 중에 있는데, 어떻게 충성할 수 있냐고 반문하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일도 그 의미를 알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습니다. 그 의미가 보람되고 영광스러운 것이면 도리어 힘이 납니다. 혹독한 훈련으로 유명한 진천 선수촌에 왜 선수들이 서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입니까? 훈련은 비록 힘들지만, 국가대표로 출전할 수 있고 메달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다는 최고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고난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당시 소아시아 성도들이 당하는 핍박은 정신을 혼미하게 할 정도로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불 시험’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닥친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면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하나님의 연단이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자란 강아지는 애완견이 되지만, 늑대는 야수처럼 강인한 생명력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난을 감당할 때 우리 믿음은 정금 같이 순수해져 강한 믿음의 용사들로 성장하게 됩니다. 세상 정욕의 불순물이 빠져나가고 오직 주님만을 사모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믿음과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이 닥쳐올 때 그것이 불 시험일지라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도는 고난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들은 고난을 겪을 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혹독한 불 시험 앞에서 어떻게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고난은 힘든 것입니다. 그것이 불 시험이라면 더더욱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면 말이 달라집니다.
소아시아 성도들을 ‘나그네’라고 했는데, 하나님을 멀리하는 불신앙적 사회에서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사는 우리 목자님들, 형제자매들이야말로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입니다. 세상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비주류 취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무신론이 팽배한 세상에서 신자로 살아가는 것에는 고통과 아픔이 따릅니다. 불신앙 공동체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색함과 거리감이 있습니다. 늘 이런 어색함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또 요즘 사회는 극한 방탕으로 달음질하고 있습니다. 대학 캠퍼스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까지 마약과 정욕의 유혹이 뻗쳐 있습니다. 입시와 취업 스트레스로 중증 우울증이 30%라는 통계도 있습니다. 이런 시대 풍조 속에서 경건을 지켜내기가 여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 중심을 지키며 어찌하든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불신 세상에 도전하는 우리 자녀들과 목자님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 삶입니다.
또 우리 목자님들, 사모님들은 자식뻘 되는 학생들에게 아쉬운 소리 해가며 복음을 전하고 함께 말씀 공부를 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드러나진 않지만, 복음 역사에 동역하고 역사 환경을 이루는 것 역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의 어려움, 자녀 양육과 집안일의 어려움, 사람 관계에서 주어지는 아픔 등 이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감당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혹시 신자로서 감당하고 있는 아픔과 심적 고통, 내적 갈등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 ‘내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구나’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로 고난을 겪을 때 하나님이 날 외면하신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세상적으로 더 나아 보이는 친구들과 비교할 때면 움츠러들기도 합니다. 별로 돋보이지 않는 목자 생활에 위축되고 때로는 포기하고, 내 신앙 하나나 잘 붙들고 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력이 출중하면서도 로마제국의 세상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산 소망으로 주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 영광,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셨습니다. 이 영광은 어떤 것입니까? 로마서 8장 18절은 말씀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세상에서 주어지는 아픔, 고난, 이런 것들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영광입니다. 사도바울 또한 이 영광을 바라봅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3:8,10) 바울은 예수님이 경험하신 부활의 권능을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생 여정 속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으며 숱한 고난들을 감당했습니다. 고난 없이는 부활의 영광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가본 적이 있는데, 함안에 손양원 목사 기념관이 있습니다. 물론 못 가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임당한 목사님의 두 아들의 시신이 집 앞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너무나도 큰 상실감과 슬픔에 휩싸여 있는데, 그때 과거 감옥 동기인 이인제 목사님의 호통이 그에게 큰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손 목사! 정신 차리시오. 우리는 과거에 감옥에서 순교하기를 원했으나 하나님은 우리의 순교를 허락하지 않으셨소. 오늘 젊고 아름다운 두 아들을 순교의 제물로 바친 것이 그리도 아깝소? 슬퍼하기만 할 일이 아니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오히려 기뻐할 일이지요.” 이인제 목사님의 책망을 들은 손 목사님은 천국 소망을 붙들고 고난 중에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며 상당한 물질의 감사 헌금을 드렸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믿음 안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주님 재림의 때에 천국 영광에 참여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 목자님들의 수고를 다 갚아주시고, 주님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토록 의와 생명을 누리며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천국 소망을 가질 때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늘 영광을 바라볼 때 고난 중에도 자녀들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고, 양들의 성장을 기대하며 인내로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이처럼 앞으로 주어질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확증하고 인감도장 ‘꾹’ 찍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난과 수치, 치욕을 당하는 성도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14a). 하나님의 영이 그들 위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능력과 은혜가 우리를 살포시 덮고 있는 상태를 표현합니다(14b). 아기가 어머니 품 안에 살포시 안겨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천국의 행복일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인자하신 품으로 우리를 안고 계신 곳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나를 안고 계시는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그 무엇이, 그 어떤 현실이 두렵고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까지는 받겠지만, 치욕은 정말 자존심 상해 감당하기 힘든데, 새해에는 더 적극적인 자세로 그리스도를 전하고 전도하면서, 배척받고 치욕을 당하면서 예수님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우리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복 있는 자로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죄악을 통한 고난이 아니라(15)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16). 그뿐만 아니라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 즉 교회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이 심판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더욱 훈련하고 연단하시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진정한 성도가 누구인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판가름 납니다. 하나님의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 성도들이 많은 고난 가운데서 구원을 받는다면,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 불신자들, 또 악인들은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17,18). 성도들이 겪는 고난에는 우리가 다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장차 그리스도의 하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을 소망하면서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내어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19).
우리 지역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진주입니다. 우리는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잘 압니다. 이물질이 조갯살로 파고들게 되면 모진 고통과 아픔을 오랫동안 겪으면서 아름답고 가치 있는 보석 진주를 탄생시킵니다. 현재 우리에게 주어지는 주 안에서의 크고 작은 고난들을 통해, 영광스러운 진주와 같이 키워가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바라봐야겠습니다. 2025년 새해에도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크고 작은 고난들은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보증수표입니다. 고난을 통한 연단이 우리 신앙을 순금같이 순수하고 강인하게 만들어줍니다. 장차 주님 재림의 날에 부활하여 하늘 영광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선물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은 생애를 세상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감당하며 즐거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청지기로서 늘 깨어 기도하고 뜨겁게 사랑하고 충성스럽게 양무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