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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국 전통문화콘텐츠연구원 원장(전 노원문화재단 이사장)
[문화 자유기고가 김승국] 젊은 예술계의 항해는 ‘선배’라는 ‘배’에 올를 때 든든해진다
우리 사회는 여러 선진국에 비해 볼 때 노인들에 대한 예우가 깍듯하다. 노인층이 경제적, 신체적 약자인 측면도 있겠지만 버스나 지하철에는 어김없이 경로석이 마련되어 있고, 노인에게는 지하철 무임승차를 할 수 있도록 '어르신 교통카드’가 지급되어 있고, 노인수당 등 노인들에 대한 다양한 사회복지 제도가 가동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효(孝)’ 사상을 바탕으로 전통적으로 경로 우대문화가 잘 조성되어있는 모범적인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사회 각계각층에서 ‘우리 사회에는 어른이 없다’라는 아쉬움과 푸념을 자주 듣는다. ‘어른’이란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는 말’은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존경받을만한 어른다운 ‘어르신’이 없다는 말일 것이다. 어른이란 후진들이 옳은 길을 가도록 마음으로 보듬어 주고, 잘못된 길을 갈 때 서슴없이 회초리를 들고 꾸짖는 분일 것이다. 그 회초리엔 후진들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랑과 일관성 있게 중심을 잡고 옳은 길로 인도하려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어야 한다.
사진: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언론인, 저술가 故이어령 교수
사진: 국악 작곡가이자 가야금 연주가 故황병기 명인
‘나 때는 말이야’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의 청소년기나 청년기에는 사회적인 이슈가 대두되거나 혼란스러울 때마다 준엄하게 꾸짖어주시던 큰 어른들이 있었다. 그러한 어른들이 계심으로써 가르침을 받거나 마음의 위안을 받고 용기를 내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종사하고 있는 문화예술계만 살펴보아도 죄송스럽게도 어른다운 어른을 찾아보기 힘들다. 마음으로 믿고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어른이 없다는 건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어른다운 어른, 어른 역할을 제대로 하는 어른이 없다는 사실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아픔이자 이 시대의 아픔이다. 개탄스러운 몇 년 전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사태가 있었을 때 우리 후배들을 위하여 용감히 나서서 당시 정부의 잘못된 행태를 공개적으로 질타하셨던 원로 어른이 있었는지 그 함자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빛을 밝혀주고 꿈이 되어야,진짜 별이다
문화예술계에는 성공한 원로 예술인들로 구성된 ‘대한민국예술원’이라는 기관이 있다. ‘대한민국예술원(이하 예술원)’은 예술의 창작·진흥에 공로가 큰 원로 예술가를 문학·미술·음악·연극 분야별로 선정해 우대하고 예술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회원의 자격은 예술 경력이 30년 이상이며 예술 발전에 공적이 현저한 사람으로 하며, 활동비로 매월 180만 원의 수당도 지급되고 있다. 또한, 예술원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에서도 정액 수당 외에도 추가적인 활동비가 지급된다고 한다. 예술원 회원 임기 역시 70대였던 정년제가 없어지고 사회적 책임감과 위상을 높인다는 이유에서 2019년에는 종신제로 굳어졌다. 대단한 예우이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이러한 파격적인 대우를 받는 예술원 회원들이 후배 예술인들의 본보기가 되기는커녕 자신들만의 특권 확보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민망한 비판을 받고 있다. 나 또한 예술원 회원들이 문화예술계 원로로서 후배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후배 예술인들의 창작환경 개선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다거나, 정부의 잘못된 문화정책이나 문화행정을 질타하거나, 대안을 제시하였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정도라면 대한민국예술원의 존립이나 현재의 운영 방식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경우는 비단 ‘대한민국예술원’의 경우만은 아니다. 각계각층에 원로회의라는 것이 이곳저곳에 있지만 구색 갖추기나, 기관장이나 단체장의 명분 축적용으로 활용되는 일이 허다하다. 프로야구선수로서 현역 시절 선동열과 함께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으로 손꼽히는 투수이자 롯데 자이언츠를 상징하는 선수로 야구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최동원 선수가 암 투병 중 마지막 인터뷰에서 “별은 하늘에만 떠 있다고 별이 아니고, 누군가에게 빛을 밝혀주고 꿈이 되어야 진짜 별”이라는 말은 원로들에게 주는 따끔한 충고가 아닐 수 없다.
비바람 막아줄 원로 예술인 많아지기를
원로 문화예술인들은 문화예술 공동체에 참가하여 공동체의 발전을 도모해주고 후배 문화예술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용기 있는 원로가 되어야 한다. 원로 예술인이란 자신이 가진 오랜 경륜과 경험 등 자신의 자원을 바탕으로, 예술계 공동체인 후배 예술인들을 지원하고 지켜줄 수 있는 사람, 필요한 곳에서 자신의 권위를 올바르게 행사하고, 그 권위에 걸맞은 책임을 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려운 시대에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원로 예술인들의 삶의 여정은 존경받을만하다. 그러나 예우만 받으려고 하지 척박하고 절박한 예술계 상황은 나 몰라라 하고 제 자리 지키기에 몰두하거나 한 자리 차지하겠다고 정치권이나 기웃거리는 한심한 원로들이 눈에 자주 밟히는 것은 나만의 시각이 아니길 바란다. 심한 말 같지만 잘못된 관행과 일에 쓴소리 한번 못하는 인물은 원로 예술인도 아니고 선배도 아니다. 후배 문화예술인들로부터 원로로서의 대우받기 이전에, 문화예술계 후진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배려하고 성원하며 이끌어줌을 실천하는 선배다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문화예술계 원로분들 중에 어르신다운 올곧은 분들이 물론 있으실 것이다. 왜 없겠는가? 이러한 훌륭한 원로분들의 강직한 목소리가 전혀 반영되지 못한 채 묻혀버리는 현재의 소통 시스템에도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원로들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도록, 언론이 더욱 많은 관심을 두고 원로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고 이슈화하고, 정치인들과 고위 관료들도 정례적으로 원로들의 의견을 경청하여 반영하는 시스템을 갖춰주길 바란다.
예술인들의 아픔을 깊이 공감해주고, 때론 자기희생으로 거센 비바람을 막아줄 우산이 되어주는 용기 있고 존경받는 원로 예술인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소망해본다. 예술인들의 거울이 되고 모델이 되며, 잘못된 관행과 일에는 거침없이 쓴소리를 내주고, 후진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원로 예술인에 우리 문화예술계는 목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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