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기념일]
-석화 김영욱
결혼 29년 기념일을 맞아서 아내와 함께 물어물어 순창 채계산 출렁다리를 갔다. 천백 4 계단을 아내를 앞세우고 올라 마지막 휴식공간에 앉아서 아내와 만났던 그 때를 회상해본다.
장미꽃처럼 고을 때 만나서 스물아홉 해를 살붙이고 한 식탁에서 먹고마시며 살았다. 처음에는 꽃길이었다. 향기가 진동했다. 점점 찌그닥 소리가 나기도 했다. 아이들은 그런 가운데 자라고 있었다. 귤 한 상자가 하루면 없어진다. 사과 한 상자는 사흘이면 바닥이 난다. 한 달 식량은 쌀 한가마가 적었다. 아내가 도시락을 하루 일곱 개에서 여덟개씩을 준비해야했다. 이것은 모두 아내의 몫이었다. 실상 숨 가쁜 질주였다. 시골교회가 이 많은 식량과 찬거리를 거의 대어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사랑의 빚을 많이 지고 나왔다. 그리고 개척을 시작했다. 아이들은 울며불며 만류했지만 나는 그 길을 가야만 했다. 아내의 도움으로 시작을 했다. 첨단에 대지 98평을 준비한 것은 모두 아내의 돈으로 한 것이다. 노후에 안식처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목사로서 그 곳에다가 교회당을 건축하면 좋을 듯하여 아내를 설득시켰다. 땅을 요처럼 깔고 자거나 이불처럼 덮고 살 수는 없소. 여기다가 교회 하나 세우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에 버금가는 복을 주실 것이요. 그렇다면 어떻게 교회당을 건축할 것이며 생활비는 어디서 나오며 아이들 교육비는 어떻게 할거냐고 묻는다. 아내로서 당연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 땅을 하나님께 바칩시다. 그 나머지 일들은 하나님이 해결할 것이오.라고 해서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필자는 강단에 올라가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여기까지 주님이 인도하셨습니다. 이 대지를 주님께 드리겠으니 붉은 벽돌로 완전한 건물을 건축해 주십시오. 아시다싶이 나는 돈이 없어서 벽돌 한 장도 준비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시골에서 만세반석 하겠습니다.” 3일 후에 노회 전도부 서기로 봉사하고 있을 때라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운암교회로 갔었다. 회의를 마치고 식사하기 위하여 가다가 운암교회 목사가 나를 보더니 김목사님도 큰일을 해야하는데 어떠냐고 물으면서 내 얼굴표정을 살피면서 1억은 준비했는데 서남교회 안영로목사님만 허락한다면 쉬울 것이란다. 그 때가 IMF(국제금융위기)1997년이다. 많은 기업이 도산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실직을 하게 되어 돈줄이 막혔는데 일억이 그져 들어온다니 가슴이 뛰었다. 선배 목사가 서울도림교회 유의웅목사가 부총회장을 나오는데 충청도에 1억 경상도에 1억 광주에 1억 총 3억 원을 교회개척 70주년 개척 기념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기금으로 내 놓겠단다. 그리고 그가 바른교회 세우기 세미나 강사로 서남교회 오니까 만나보란다. 설렘으로 기도하면서 그 날을 기다렸다가 세미나를 마친 후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만났다. 식사 후 그 장소를 가자고 했다. 서둘러서 식사를 마친 후 기다렸다가. 같이 고속도로에 진입하다가 첨단이 개발되던 곳을 보여주면서 개척동기를 설득력있게 설명했다. 유의웅목사가 알았다며 서울로 갔다. 그런데 서울로 가자말자. 전화가 왔다. “나 유목사인데 김목사님 생면부지의 초면인데 오늘 도로에서 하는 말을 듣고 보니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김목사님은 화술이 뛰어나서 큰일을 할 수 있다고 믿어져서 오는 즉시 당회를 소집하고 충청권 부산권 다 취소하고 광주에 3억원을 개척전도비로 주기로 가결했습니다. 허나 교회 이름은 광주도림교회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고속도로 변에 자동차를 잠깐 세우고 약 5분정도 이야기했는데 3억이 굴러오다니 25년이 지난 오늘 글을 쓰는데도 가슴이 뛰고 그분께 대한 감사함이 별처럼 빛이 난다. 그 후 건축위원회를 조직하고 온다기에 나주노안에 가서 25KG 한 박스에 이마므라배 다섯 개짜리 아홉박스를 선물로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가 장로님들을 영접했다. 함박눈이 소리도 없이 펄펄 내리는데 봉고차를 타고 일곱 분이 오셔서 땅을 보더니 처음에는 땅이 너무 작다고 시비를 한다. 그래서 “장로님들께서 언제까지 이 교회를 돕겠습니까. 시작만 하신 것입니다.” 이 후에 모든 일은 내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오신 장로님들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고 올라갈 때에 선물을 내 놓았다. 나중에 그분들이 건축위원이 되어 일곱 번이나 내려와서 감독을 하여 교회당이 붉은 벽돌로 완전히 건축되었다.
나이 오십에 인생을 정리해야할 때인데 개척한다고 만류하는 선배들도 있었고 차라리 상가를 지어 돈을 버는 편이 좋다는 이들도 있었지만 내 의지는 꺾을 수가 없었다. 대학생이 셋 고등학생이 하나 중학생이 하나 우리부부 일곱식구가 먹고 살만한 근거가 전혀 없는 때에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아내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아이들을 길러내는 것도 아내의 덕이다. 남자는 아이들을 기르지 못한다. 왜냐면 가슴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은 가슴으로 품을 수가 있어서 아이들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아내의 덕이다.
채계산 정상에서 곰곰이 생각에 젖는다. 아내에게 큰 빚을 진 것이라는 생각에 남은 생을 더 잘해야 되겠다고 다집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