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묘 사진 (*출처 구글검색 이미지)
현지 토속거주인에게 사천성 성도에 있는 왕건묘를 물어보자
"고려 왕건묘"라 기록하고
발음 역시 "가우리" 왕건묘라 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정부는 "전촉왕 왕건묘"
현지 토속거주인은 "가우리 왕건묘"
출처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692
글 : 이병화(역사연구가)
우리 민족사에서 고려高麗라는 국호로 국가를 영위한 나라는 고구려高句麗(전58~427)에서 고려로 국호를 바꿨던 고려(427~668)와 태조 왕건이 건국한 고려(918~1393)가 있다.
조선朝鮮(1393~1896)이 고려를 이어 건국한 1393년 이후 고려라는 국호는 쓰이지 않았지만 조선과 멀리 떨어져 있던 나라들은 조선을 고려로 인식했고, 오늘날에도 우리 스스로가 대외적으로 대한민국大韓民國을 The Republic of Great Han이 아니라 The Republic of Korea로 표기하고 있다.
조선朝鮮(1393~1896)이 고려를 이어 건국한 1393년 이후 고려라는 국호는 쓰이지 않았지만
조선과 멀리 떨어져 있던 나라들은 조선을 고려로 인식했고,
오늘날에도 우리 스스로가 대외적으로 대한민국大韓民國을
The Republic of Great Han이 아니라 The Republic of Korea로 표기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 볼 때 우리민족의 역사상 고려라는 나라는
인접 국가는 물론 멀리 떨어져 있던 나라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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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1] 고려의 도읍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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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대륙에 있던 나라
고려는 세계를 감동시킬 수 있었던 문화와 그에 상응하는 국력을 지니고 이웃했던
나라들과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던 나라였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오늘날 한반도에서는 화려했던 고려가 남긴 역사문화 유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고려의 도읍지가 한반도 경기도에 위치한 개성이었다고
인식하고 있는데 개성에는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에 부합되는 역사유적이 없다.
외성, 내성, 궁성 등 고려시대에 축조된 성곽의 자취가 없고, 궁궐이나 사찰,
그리고 사당이나 공공건물, 그리고 민가의 자취나 흔적이 전혀 없다.
고려사의 기록이 거짓이 아니라면 한반도의 개성이 고려의 도읍지 개경이라는
인식은 허구에 바탕을 둔 가설일 뿐이다.
한반도가 고려의 강역에 포함되는 주변지역이었다는 가설은 성립될 수 있지만
고려의 중심강역은 대륙에 있었고, 도읍지 또한 대륙에 있었던 건원칭제국이었다.
고려는 료遼, 송宋, 금金, 원元, 명明 등과 이웃하고 있었는데 송 금과는 화친했었고,
료의 끈질긴 침입을 막아냈으며,
원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40년간 전쟁을 치른 끝에 강화하면서 국가의 존립을 지켰다.
그러나 고려는 명의 침략이 두려워 명의 압박에 굴복한 친명파들에 의해 멸망했다.
존명 사대를 표방한 조선은 명과 왜倭의 침략을 이겨내지 못한 채
대륙의 강토를 지키지 못하고 대륙에서
반도로 도읍지를 옮기면서 대륙의 강토를 명에 빼앗겼던 것이다.
송악松嶽, 개경開京, 송도松都, 송경(松京)은 각각 다른 곳
고려의 도읍지는 송악松嶽과 개경開京, 강도江都와 송도松都, 임진臨津,
그리고 한양漢陽과 송경松京 등이다.
또 라주羅州, 복주福州, 청주淸州, 덕수德水 등도 전란을 극복하기 위해
옮겨다녔던 잠깐 동안의 임시도읍지였다.<표 1>
건국당시 도려의 도읍지는 태봉泰封(911~918)의 도읍지였던 송악松嶽이었다.
건국한 이듬해 태조 왕건은 개경開京으로 신궁을 조성하고 도읍을 옮겼던 것이다
8대 현종 때(1010) 글안契丹의 침입으로 라주로 피난했다가 다음해 개경으로 환도했고,
23대 고종 때(1232)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도로 도읍을 옮겼다가
강도에 인접한 송도로 옮겨가서 몽골에 저항했다.
24대 원종 때(1270) 몽골과 강화하면서 오랜 피난시대를 마감하고
개경으로 다시 환도하였다.
25대 충렬왕 때(1290) 합단哈丹의 침입으로 잠시 강도로 피난했었고,
31대 공민왕 때(1361) 홍두적의 침입으로 복주로 피했다가 청주와 덕수를
거쳐 개경으로 환도했다.
고려는 31대 공민왕 때 원에 빼앗겼던 국토를 대부분 회복했지만
원을 멸망시킨 명에게 회복한 국토를 또다시 빼앗기면서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1363년 도읍을 임진으로 옮겼는데 32대 우왕 때(1381)는 한양으로 1383년에는 송경으로 옮겼다.
34대 공양왕 때(1390) 잠시 한양으로 옮겼다가
1391년에는 다시 송경으로 옮기고 1392년에 멸망했다.
대륙고려의 사실을 뒷받침하는 역사유적
고려의 도읍지 송악은 하남성河南省 공의시鞏義市였고,
개경은 하남성 등봉시登封市였다.<지도 1> 송악과 개경은 인접한 곳으로
대륙 하남성 공의시와 등봉시에는 오늘날에도 고려의 궁궐과 사당 그리고 사찰들이 남아있다.
하남성 등봉시에는 그곳이 고려의 도읍지였음을 검증하는 특징적 유적이 있다.
바로 천체관측 유적이다. 천체관측은 지난날 황제의 특권이었다.
천체의 변화는 귀중한 정보였기 때문에 관측된 정보는 특정인 이외에 공개되지 않았던 것이다.
천체관측소가 있던 곳은 황제가 살던 황성 또는 황궁이 있던 곳이다.
하남성 등봉시가 고려가 아닌 다른 나라의 도읍지였다는 가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오늘날 중국의 관변학계에서는 등봉시에 남아있는 천체관측 유적을 관성대觀星臺라고
부르면서 원대元代의 유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곳이 원의 도읍지가 아니었다는 판단이 옳다는 것은 역사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 원의 황제가 살던 도읍지는 화림和林, 대도大都, 개평開平, 그리고 응창應昌이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을 피해 옮겼던 피난 도읍지 강도는 강소성江蘇省 진강시鎭江市,
송도는 강소성 남경시南京市였다.
이곳에 지금도 남아있는 궁궐, 사찰 등의 역사유적을
고려사의 기록과 대조해 보면 그곳이 고려의 피난 도읍지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한반도의 강화도에는 고려의 유적이 없다. 팔만대장경의 목판을 만들었던
선원사는 강소성 진강시에 있지만 강화도에는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또 강도는 강화가 아니다.
고려 때 강화는 송악과 개경에 인접한 곳으로 강도와는 엄청난 거리에 떨어진 곳이다.
강화는 하남성 의마시義馬市였다. 이곳에 고조선 때 쌓은 삼랑성과 고려 때의 이궁離宮이 있다.
강도는 송도와 인접한 곳이고, 강화는 송악과 인접한 곳이었음을 확실하게 구분해야 한다.
고려가 홍두적洪頭賊의 침입으로 옮겼던 임시 도읍지 복주福州는 절강성浙江省 항주시杭州市이다.
그곳에 아직도 남아있는 화려한 건축물들은 그곳이 고려의 황제가 머물던 곳이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고려의 청주는 산동성山東省 임기시臨沂市이다.
이곳에는 금속활자 인쇄시설을 갖추었던 외흥덕사外興德寺가 있다.
외흥덕사는 한양漢陽(산동성 제남시濟南市)에 있던 흥덕사興德寺에 딸린 절이었다.
지금 한반도에서는 흥덕사와 외흥덕사는 그 흔적도 찾지 못했지만
대륙 산동성에서는 그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 군인들이 강화도에서 불법 약탈해간 직지直旨를 간행한 곳은
대륙의 산동성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고려의 덕수는 하남성 락양시洛陽市이다.
이곳에는 고려의 최대 사찰이었던 흥왕사興王寺가 있던 곳이다.
흥왕사의 본찰은 수십 곳의 딸린 사찰을 관장하던 대규모 사찰이었다.
승려가 만 명이 넘었고 두 곳의 현縣이 흥왕사에 귀속되었다.
건축물의 규모 또한 거대해 조선초 축조한 경복궁 건축규모의
10배 이상이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대륙 하남성 락양시에는 지금도 수십군데 사찰건물이 남아있고
유적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이 한漢, 당唐의 도읍지였다는 것은 억지일 뿐이다.
당은 불교를 억제했던 나라였고, 기존에 설립된 사찰도 없애고 수도권 밖으로 내몰았다.
오늘 날 한반도 개성과 그 주변에는 사찰 건물이 즐비했다고 하는 흥왕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덕수라는 지명도 없다.
반도사관을 조작한 조선은 한반도 개성부근에 고려의 궁성조차도
재현시키지 못하는 형편에 흥왕사라는 거대규모의 사찰유적을 극히 일부라
도 재현시키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고려는 말기에 이르러 서쪽으로는 홍두적과 명,
북으로는 여진, 남과 동으로는 왜의 침탈로 국토의 보전이 어려웠다.
할 수 없이 국토의 서쪽 하남성의 개경에서 동쪽 산동성의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기 전에 하남성 개봉시인 임진을 거쳤다.
조선의 건국지였던 송경은 고려말의 도읍지였다. 한양과 송경은 인접한 곳이다.
한양은 산동성 제남시濟南市, 송경은 산동성 임청시臨淸市이다.
조선초의 한양과 송경은 대륙 산동성에 있었다.
사경四京과 삼소三蘇
고려는 개경외에 동경, 서경, 남경을 설치했다.
동경은 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慶州로 안휘성安徽省 합비시合肥市이다.
서경은 고려(고구려)의 도읍지였던 평양平壤으로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남경은 후백제의 주요 도시였던 익주益州로 호남성湖北省 단강구시丹江口市이다.
고려가 개경부근에 새롭게 건설했던 도읍지는 양주楊州였는데
양주는 남경이 아니라 신경新京이었다.
신경은 하남성 허창시許昌市이다.
이곳에는 고려의 역사유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고려의 남경이었다고 억지 주장하는 서울에서
고려의 유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도참설을 신봉했던 고려의 황실은 개경부근에 세 곳의 길지를 택해 궁궐을 축조하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
이는 고조선 때의 진한, 막한(또는 마한), 번한의 각 도읍지를 국가의 중심으로 중시했던 전통의 연장이다.
고려의 삼소는 백악산白岳山의 송림松林, 백마산白馬山의 승천부昇天府,
기달산其達山의 협계陜溪인데, 송림은 하남성 우주시禹州市,
승천부는 하남성 여주시汝州市, 협계는 하남성 락녕형洛寧縣이다.
고조선의 삼소나 고려의 삼소는 모두 일직선상에 위치하는 세 곳으로
저울추, 저울대, 저울접시에 비견될 수 있는 거리상으로 균형잡힌 곳이다.
<표 2> 대륙 하남성에는 고려의 궁궐유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곳곳에 축조한 이궁과 행궁
송악과 개경, 동서남의 삼경, 신경, 강도, 송도, 임진, 한양, 송경에 고려의 궁궐이
있었음은 엄연한 사실이며 삼소에도 당연히 고려의 화려한 궁궐이 있었다.
임시도읍지였던 라주, 복주, 청주, 덕수에도 궁궐이 있었지만
그 이외에도 고려는 여러 곳에 이궁과 행궁을 축조했다.
그 중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곳은 강화江華,
광주廣州, 백주白州, 진위振威, 그리고 봉화奉化 등이다.
한반도에 이곳과 지명이 같은 곳은 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고려의 궁궐은 찾아볼 수 없고, 또 그 흔적조차 없다.
광주는 산동성 태안시泰安市, 백주는 산서성山西省 예성현芮城縣,
진위는 하남성 녹읍현鹿邑縣, 봉화는 강소성江蘇省 소주시蘇州市이다.
이곳에는 고려의 궁궐유적이 그대로 남아있다.<표 3>
고려는 목조건축물, 금속활자, 도자기, 황칠 등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긴 나라였다.
전성기 때의 국토는 하남성을 중심으로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강서성, 복건성, 호북성, 호남성의 전지역과 산서성,
섬서성의 대부분, 그리고 한반도와 만주를 그 통치영역으로 관장했던 거대한 건원칭제국이었다.
그 문화유산은 조선이 대륙에서 반도로 이전할 때 팔만대장경판,
도자기, 불상과 불탑 등 극히 일부 옮겨온 것도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중화민국(대만)의 고궁박물관과 중국 각성의 역사고고박물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첫댓글 아 ~ !!! COREA가 이런 의미였군요 지금까지 배운 역사에서 땅 크기도 적은 고려나라를 멀리 떨어져있는 나라들이 지명을 어찌 알았을까 궁금하였는데 다소 의문이 풀립니다.
COREA = CORE = 핵 , 중심 + A (area 개념)으로 지금은 nation 으로 사용 1948년도에 무슨일이 ? KOREA 라고 사용됨 ......... 지금 세계어느나라가도 꼬리아라고 알고있습니다. 고유명사 입니다,. 지구의 중심국가 가 바로 COREA
홈키파님 이름이 홈키파라면 미국가서 홈키파지 요 고유명사이니 왜 고유명사인 KOREA 가 코리아여야 되는데 대한민국으로 사용하나요 한국에서만 해석하면안되지요 .. 장난질을 한것이죠 ...1948년도에
삭제된 댓글 입니다.
중국의 주장이겠죠 아무리 합리적으로 생각해도 18년 역사의 주인 묘는 아닌것 같습니다. 후촉(36년간 지배)이 전촉 선왕이 이뻐서 왕릉이 지어주었나요? 송나라가 전촉이 이뻐서 묘를 만들어 주었나요? ㅎㅎㅎ 그냥 웃지요
중국의 오대십국시대 때
전촉을 세웠던 왕건을 모르십니까
15년 집권하고 죽은 사람 묘라고 생각되십니까? 자식들은 왕권을 두고 다투었다죠? 아버지 죽고 3년간 왕릉 만들다 왕연이 살해당해 망했나봅니다.
전촉(前蜀, 907년 ~ 925년) 총 18년 역사네요 ㅎㅎㅎ 전촉 인구수도 얼마 안되고 참으로 힘이 없는 나라인데 어디서 세금을 거두어 묘를 화려하게 장식했을까요? 전촉을 잘 아시는 온마루님의 답변 기다립니다.
특히 단재 신채호 선생, 백암 박은식 선생을 비롯, 해방 이후 한암당 이유립, 문정창, 복초 최인 등의 민족사학자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방촌 임균택(대전대 설립자, 철학박사. 대전대 부총장 역임) 선생은 사천성 성도 영릉의 왕건묘가 바로 우리의 고려왕조 왕건묘라 한마디로 잘라 일축
http://blog.daum.net/chaam-naah/4
윗분들의 주장보단 방촌 임균택 선생님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지네요
현지 토속거주인에게 사천성 성도에 있는 왕건묘를 물어보자
"고려 왕건묘"라 기록하고
발음 역시 "가우리" 왕건묘라 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정부는 "전촉왕 왕건묘"
현지 토속거주인은 "가우리 왕건묘"
*전촉역사 18년
@홈키파 예, 맞습니다.
사천성 출신 중국 배드민턴 국가대표선수였던 친구가 확인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건 AI조류독감으로 김치가 예방효과가 있다고 알려지자 사천성 바로 태조 왕건 당시의 김치 관련 기록을 중국에서 꺼내듭니다. 사실 기록으로 남아있는 김치 레시피로는 제일 오래된것이죠. 그래서 이 친구가 사실 김치는 중국거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따지면 김치, 고려자기, 각궁, 자개장 등 모든 유물들과 단오절 등의 풍습 등 다 대륙에 속하게 됩니다. 뭐, 고구려 마지막 왕의 후손이 현재 중국대륙에서 태어나 자라 한반도에 유학왔다가 다시 돌아갔고 고려 왕씨의 후손들도 90프로 이상이 대륙에 살고 있는 바 어찌 해볼 도리가 없네요
@economet 요즘 나오는 중국어 회화교재에는 "나는 한국인입니다"가 더 이상 "워 시 한꾸어련"으로 표기 안되고 "워 시 실려련" (나는 신라인입니다)로 실립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확대돼서 조만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 다 자기것으로 밝힐것입니다. 신라의 극 일부만 반도로 건너가 남은것으로 하고요. 방향은 정해졌습니다! 이미.
사실 한중일 다 한 본류에서 파생된거죠. 마치로마제국이 오늘날 독일 불란서 이태리 등의 국가로 쪼개져 버린것과 같이요. 중국은 반드시 원래의 시원역사 복구할것입니다!
@economet 고견 감사드립니다.
@economet 자주 오셔서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홈키파 천만에요! 그냥 조금 알게 된 사실을 보탠것 뿐입니다. 사진과 잘 정리해 주신 글 감사합니다.
@노란돼지 뭘요. 그동안 한가지 확실히 깨달은 건 기존의 프레임안에서 동일하게 대응하고 논란을 펼쳐봐야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법꾸라지같이 항상 대응논리를 개발하더군요. 한가지예를 들겠습니다: 광개토대왕비가 확실히 지금 서있는 곳으로 옮겨졌고 결정적인 부분이 풍화가 된게 아니라 정같은 것에 의해 쪼여 떨어져 나가고 심지어는 글자자체가 조작된게 여러군데 있습니다. 육안으로 확인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걸 즉, 이 비가 옮겨왔다는 걸 확실히 과학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있는데 이걸 언급하면 그들은 (조작세력들) 대응할 것입니다. 그래서 확실한 증거들과 검증방법을 제시하지 않는게 현 상황입니다.
@economet 조작된 프레임에 의구심을 가져서 진실이 무엇인지 견딜 수 없이 궁금하셔서 정론직필님의 카페로 오셨다고 믿습니다. 무엇이 원본이고 조작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검증 이것은 비단 북한관련 사항뿐만이 아니라 과학 그리고 역사 및 종교에도 적용된다고 하겠습니다. 책의 양피지의 죽간의 점토판의 원본 분명히 있습니다. 어떤건 어느 왕실에 어떤건 바티칸에 어떤건 대학도서관에. 이렇게 산재해 존재합니다. 우리 역사 관련 확실히 깨달은 건 우리에게 원본이라고 보여진 건 다 영인본이었습니다! 진짜 인감증명이나 오리지널 땅문서 같은 진본이 아니었습니다. 원본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economet 즉, 내게 누가 제 집이 자기집이라고 조작된 집문서를 들이대면 알겠습니다 집비우겠습니다 하고 집을 내어주고 물러나겠습니까? 당연히 아니죠! 그 집문서가 위변조되었다고 고소를 하겠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삼국유사가 조선왕조실록의 진짜 손타지 않은 원본을 요구해야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사학과 교수님들도 원본을 접해본 적이 없더군요!
@economet 한 말씀 한말씀이 이치와 논리,경우에서 벗어나지가 않는 양심의 소리이십니다.
지금 이 방에서 자의든 타의든 강단 식민사학의 논리대로 반론을 펼치는 분들은 결과적으로 민족혼과 참역사의 울부짖음을 외면한 행위입니다. 실증된 내용이니 무조건 믿어라 이며 증거를 제시해도 변종적인 같은 소리를 내뱉습니다.어떤때는 자신들의 말처럼 배경이 의심스럽스무니다.^^ 참으로 안타깝죠. 감사합니다. 좋은 글 부탁드리겠습니다.
@economet 아, 역시 보통분이 아니십니다. 조작된 프레임에 갇혀 사육되고 있는 느낌이지요. 그 철망을 벗어나려는 조짐만 보여도 이단아 취급합니다. 역사를 바로 알아야 인위적인 프레임의 철망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생각이지요.
우선 단군신화부터가 우화성입니다. 이걸 무조건 믿으라는 거죠. 진짜를 그리는건 평범한 인지상정입니다. 다행히 님같은 분들이 계시니 한숨을 돌립니다.
@노란돼지 아파트 관리비, 세금, 종교 헌금, 각종 기부금 및 성금. 다 1원1전이 최종적으로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투명하게 밝혀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진본 원본을 접하지 못하는 이상 한계가 있습니다. 딱, 한번 고속철 도입 당시에 (노태우때였던걸로 기억합니다!) 불란서의 미테랑이 병인양요때 강탈해간 외규장각 도서 300여권을 (지도 및 역사서포함!) 우리나라에 반환하겠다고 일본에 협박을 합니다. 그 후 일본은 고속철 수주전에서 빠지죠. 결국 경전인 직지심경만 돌려주기로 불란서에서 우리정부에 제안합니다!
@economet 자금 출처와 사용 추적에 영수증 그리고 이체내역이 필요하듯 원본/진본이 필수입니다. 그런데 이건 가지고 있는 임자가 그런게 있다고 내비치지 않는 이상 그런게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현재, 북이 이런 강건한 지배세력에 균열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적어도 불란서, 독일 등은 러시아와 북에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미국에 대한 종속관계가 이제는 종식되어야 한다고 보기때문이죠. 즉, 고속철 수주전때 역사서와 지도 원본이 병인양요때 불란서가 가져가 원본이 파리에 있다는 사실이 잠깐 내비쳐졌습니다. 설사, 진짜로 불란서가 이 원본들을 돌려주지는 않았을 것이라도요.
@economet 일본이 고속철 수주에 계속 참여하면 이 원본 특히 지도와 역사서를 한국에 까겠다고 불란서 미테랑 대통령이 협박을 합니다. 그 후 고속철 몇조원은 아까운게 아니라며 일본이 입찰에 참여도 안하고 독일의 ICE그리고 불란서의 TGV (이게 KTX인거죠!)에 그냥 자리를 내줍니다. 병인양요때 가져가 경전들은 오늘날 루브르의 문서기록보관서에 있음이 밝혀졌는데 다른 책들은 거기 없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직접 루브르 문서보관서에 들어가서 기록물들을 확인하신분이 못 보셨더군요. 다른 곳에 또는 아주 은밀한 비밀보관소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환국 은 환하다 밝다 에서 나와서 밝달국 배달국 으로 태양을 숭배한 민족 이죠
드디어 숨은 재목이 양지로 나오셨군요. 축하드립니다.. 훌륭하신 내용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홍건적 후손이라고 중상모략허는 자들이 나타날지도 모르겠습니다.^^짱개의 동북공정은 물건너 갑니다. 되려 쪼개집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댓글 중에 왕건묘가 거론되어서 잠시 검색해보니 어랏 이건 아니다 싶어 펌글을 올려봤습니다.
전촉 역사가 18년이고 중국이 주장하는 왕건이 15년 집권하다 죽습니다. 죽은뒤 형제끼리 왕위찬탈하다 막내 왕연이 어부지리 하지요 계승한지 3년만에 살해 당하는데 전촉 왕연이 3년동안 왕릉짓다가 죽었나봅니다 ㅎㅎ
앞뒤가 안맞는 내용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오히려 중국이 주장하는 바를 여과없이 받아드리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것 같습니다. 의구심도 안갖는게 습관화가 되었는지도 모르지요..아무튼 철야 서류작업하다 몇자 남기고 갑니다. 노란돼지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홈키파 고맙습니다.^^ 좋은 게시글 계속 부탁드려 봅니다. 건강하십시요.
보통 왕의 묘에는 능(陵)이란 이름을 씁니다.
그런데 중국 사천성의 묘는 왕건묘라고 현판에 적혀있군요. 나중에 중국이 영릉으로 바꾸긴 했지만.
한반도 개성에는 태조 왕건의 묘인 현릉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병화씨는 한반도 개성에 고려의 유적이 없다고까지 단언하고 있는데, 유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곽 흔적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지만, 개성에 고려유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군요.
하지만 사천성의 왕건묘에 대해 현지주민들이 "가우리" 왕건묘라고 부르는 것은 관심이 갑니다.
언급한 임균택 선생같은 경우 고려사를 조선이 조작했다는 주장을 하더군요. 고려왕조는 대륙에서 반도로 쫓겨났고, 조선이 뒤엎었다고 하면
서 말이죠.
사천성 왕건묘가 고려 왕건의 묘라면, 태조 이성계의 묘를 능이 아닌 묘라고 칭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겠죠.
왕건은 고려를 창업한 창업군주이기도 하니, 반드시 존호를 붙혀 능이라 칭했어야 하는 것이죠.
이병화씨는 <고려의 도읍지 송악은 하남성河南省 공의시鞏義市였고, 개경은 하남성 등봉시登封市였다.>고 주장하고 있군요. 만약 고려가 대륙에 있었다면, 하남성 등봉시와 한참 떨어져있을 사천성에 왕건묘를 조성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개경 인근에 조성했겠죠.
임균택선생 같은 경우 사천성 성도를 송악인지, 개경인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고려의 수도였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청량산 그래서 전촉의 왕건묘라 생각하시는지요?
@홈키파 님한테 합리적인 답을 원하는 것입니다.
제 질문에 답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타당한 의문에 근거해서 님한테 질문드리는 것입니다.
http://cafe.daum.net/sisa-1/dqMu/25664
대륙조선사의 실체...지명위치
http://cafe.daum.net/sisa-1/f8lD/735
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1~30>
http://cafe.daum.net/sisa-1/f8lD/740
'중국사'는 한족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사'다!
http://cafe.daum.net/sisa-1/f8lD/742
中교수 “순수한 漢族은 없다”… 多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http://cafe.daum.net/sisa-1/f8lD/752
역사 팔아먹으라고 국가가 해 마다 1천억 원을 지원한다?
(내년에도 올해와 똑같이 지원을 할건가 모르지요)
역사에 나오는 지명을 한반도보다 중국에서 같은 지명을 찾아 대입하면,
자료의 설명과 일치되는 경우가 많지요
간도는(한반도 1.5배 -연해주 포함됨) 1905년까지 실질적으로 조선이 지배했다가,
을사능약으로 외교권 박탈당해서 1909년 조선 허락없이 일본이 청나라한테 넘겨 준것이 간도협약..
그래서 100년만인 2009년 정부가 국제사법 재판소에 간도 되찾기 제소했지요.
우리가 정신나간 나라라서 유엔에 제소했을까요?
중국땅을 청나라가 지배하기전에는 조선땅이 간도보다 더 넓어겠지요..
조선왕조실록도 일본이 36년간 왜곡하고 해방후 지금까지도 고쳤거나 왜곡한게 많다고 봅니다.
원본을 확인하고 필사본을 확인해야 되겠지요.
이병도 제자와 기타 학자들은 필사본을 가지고 배우고 가르쳤겠지요.
세종때 설치한 4군의 실제위치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