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하는 사도들 12-1
1801년과 1802년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영원히 기억해 둬야 할 해이다. 순조가 즉위한지 1년 1801년은 전국이 천주교도의 피로 얼룩진 한 해였다. 천주교를 박해하려는 금교령을 내리면서 시작된 신유년의 대 박해는 그동안 명맥을 유지하던 천주교의 뿌리를 아예 뽑아 버리고자 계획했던 정부의 계획대로 수많은 사도들이 순교, 치명을 했다.
I784년 명례방 집회에서부터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는 윤유일의 북경 파견으로 주문모 신부를 조선 입국케 함으로써 활기를 띠게 됐다.
1791년 조상 제사 문제로 인한 진산사건이 발생하고 이 여파로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뒤로 숨어버렸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1801년에는 대부분의 배교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서슬이 퍼런 조정의 금교령은 교회의 지도자는 물론 일반 신도들까지 모조리 잡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이승훈, 정약종, 홍낙민 홍교만, 최필공, 최창현 등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 치명했고 권철신, 이가환이 장독으로 옥중에서 순교를 했다. 정약전은 신지도로, 정약용은 장기를 거쳐 강진현으로 유배를 당했다. 이존창이 공주 황새바위에서 참수 순교를 했고 주문모 신부가 자수하여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를 했다.
주문모 신부를 숨겨준 죄로 강완숙, 문영인 강경복, 김연이, 한신애 등 여교우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됐고 정순매와 윤점혜는 여주와 양근에서 각각 참수 순교했다. 여주에서 이중배, 윤요한, 임희영, 최 창주, 정종호 등이 치명했고 같은 무렵 김건순, 김백순, 이희영도 순교 를 했다.
유항검, 유중철, 유관검, 윤지헌, 이종집, 김유산이 전주에서 순교했고 정조의 동생 은언군의 부인 송씨(마리아)와 며느리 신씨(마리아) 고부가 양재궁(경희궁)에서 연금중 사약을 받고 순교를 했다. 강화도로 유배됐던 은언군도 사약을 받았다. 황사영은 백서사건으로, 백서를 전하려던 황심, 김한빈, 옥천희 등도 모두 처형이 되었다.
1801년 한 해 동안 1만 명이 넘는 신자 가운데 지도자급 3백여 명이 순교를 했다. 순교의 피비린내는 그 이듬해로 이어졌다. 1802년 정광수, 홍익만, 김게완, 손경윤, 김기호, 송재기, 김귀동, 최설애, 김일효 장먹유, 변득중, 이정도 황인광, 한덕운, 흥인 권상문 등이 순교를 했고, 동정부부 이루갈다가 전주에서 순교를 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한마디로 쑥밭이 되고 말았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베드로는 반석이란 뜻이다. 이승훈은 초기의 사도 베드로와 같이 약속을 잘 지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1791년 신해박해로 벼슬을 빼앗길 때까지 3년간 평택 현감을 지냈고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사실이 발각돼 체포령이 번질 때도 예산으로 귀양 갔다가 몇 달
만에 양구 현감으로 복직한 일은 그의 양면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제자리에 돌아왔고 신유 대 박해 때 잡힌 몸이 되었다.
그는 함께 잡힌 최필공(56세), 홍교만(64세), 최창현(43세), 홍낙민 (51세) 등과 함께 서소문 형장으로 끌려갔다. 이때 그의 아우 이치훈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 인간적인 정에 매달려 호소를 했다. 장래가 훤히 트이고, 사람이 큰 형이 천주교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너무도 아깝고 한스러웠기 때문이다.
「형님, 제발 천주교만 믿지 않는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매달렷다.
이승훈은 수레 위에서 한 수의 시를 읊었다.
「월락재천(月落在天), 수상지진(水上池盡)」
이 말은 달은 떨어져도 하늘에 그저 걸려 있고 물은 솟구쳐도 연못에 온전하다는 뜻으로 진리는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날 한자리에서 순교 치명한 6명은 모두 사회적 덕망이 높은 양반이었다. 그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천주를 위해 죽는 것이 행복하다면서 십자가를 긋고 칼을 받았다.
특히 곧은 성격과 진실성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최필공은 신유박해 령이 내려졌을 때 맨 먼저 붙잡힌 몸이 되었고 형장으로 걸어갈 때도 당당했다.
망나니는 경험이 적어서 그의 머리를 한칼로 단번에 자르지 못했다. 최필공은 칼날이 들어갔던 자리에 손을 갖다대면서,
「이것은 보배로운 피다.」
하고 외쳤다.
망나니가 두 번째 휘두른 칼은 마침내 최필공의 목을 떨어뜨렸다. 정조대왕은 최필공을 무척 아꼈었다. 서울의 중인계급에서 출생한 최필공은 1750년에 입교했고 이듬해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모든 고문과 유혹을 물리쳤었다. 그러나 숙부와 동생의 간청으로 배교, 정조는 그에게 집을 마련해 주었고 장가까지 주선해 들여 주었다. 그러나 곧 신앙을 되찾았다. 1799년 8월 형조에 불려 들어가 신문을 받던 중 신앙을 고백하였고 정조 앞에서 당당히 천주교의 옳음을 주장했다.
정조는 이런 최필공을 형조의 극형에 처한다는 상소를 무시하고 석방시켜 주었다.
그때 정조와 최필공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국왕이 최필공에게 물었다.
「나도 그동안 천주교 서적을 읽어 보았다. 네 생각에는 그 도리가 불교와 비교하면 어떤 것 같으냐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와 불교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늘과 사람과 땅과 만물이 천주의 은혜에서만 생겼고 보존되는 것은 또 한 가지이며 지극히 높으시고 위대하시며 우주의 어버이시고 주재자이신 그 천주의 강생 구속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 뜻도 없는 도를 어떻게 감히 이 종교와 비교하겠습니까? 여기에는 참된 결과 참된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네가 지극히 착하고 지극히 위대한 주재자라고 부르는 그이가 어떻게 세상에 내려와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며 더구나 악한 자들에 게서 모욕적인 죽음을 당함으로써 세상을 구할 수가 있었단 말이냐. 그것은 짐이 과히 믿기 어렵다.」
「중국 역사를 읽어 보면 탕 임금께서 당신의 온 백성이 7년 가뭄으로 죽게 된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손톱을 깎고 머리를 자르고 초석을 두르고 유림 빈들로 나가서 울며 고행을 하고 당신을 제물과 희생으로 드렸는데 그 기도가 끝나기 전에 풍족한 비가 2천리가 넘는 지역에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백성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임금을 성왕으로 불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속의 은혜는 이보다 더 큰 것입니다. 예전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미래 사람이나 모든 백성과 만물이 이 구속에 젖어 있고 그것만으로 보존됩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그것을 믿기 어렵다 하심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정조는 진리란 스스로 지탱되는 것이며 매사가 마침내는 바른 곳으로 돌아가는 법이니 더 두고 보자면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정조는 자신이 주선해 장가까지 들인 최필공을 가능하면 풀어줄 것을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대신들의 요청을 물리치고 그를 석방시켰다. 이런 임금이 등창으로 승하하였다. 정조가 승하하자 최필공은 다시 잡혀 순교를 했고 사흘 후 그의 사촌 최필제가 잡혀 들어왔다. 최필제 역시 중인계급 출신으로서 이존창의 권유로 입교를 했다. 신해박해 때 최펼공과 함께 체포당했으나 배교를 하고 석방이 되었다.
그 뒤 그는 냉담한 생활을 했으나 1793년 다시 교회로 돌아와 황사영이 지도하는 명도회의 간부로 활약했다. 1801년 주의 봉헌축일 때 오현달과 함께 체포되었고 옥에 있던 중 아버지가 사망하자 임시 석방이 되어 부친의 장례를 치른 뒤 옥으로 돌아와 사형선고를 받았다.
최필제의 사촌형인 최필공이 참수 당하자 옥리가 슬그머니 찾아와,
「자네를 보아하니 딱한 생각이 드네. 이번에 자네 사촌형이 장례를 치른 다음 도망을 하게. 내가 대신 눈감아 주겠네.」
하고 넌지시 일러주었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에게,
「나는 한때 마귀의 꾐에 빠져 배교를 한 적이 있었네. 이제 그 마귀에게 원수를 갚겠네. 내 행복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치명하는 것이 네. 내 머리를 바쳐 증거 하는 것이 내 평생의 소원이네.」
하면서 석방시켜 준 옥리의 말을 따르지 않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들이 순교했던 서소문 형장은 우리나라 103위 성인 가운데 44위가 보혈을 뿌린 곳이다. 이승훈이 마흔 다섯에 치명한 서소문 밖 형장은 우연히도 그가 태어난 반석골의 이웃이었다.
이승훈의 순교 이후 70년, 사이에 4대에 걸쳐 7명이 순교의 피를 흘렸다.
月落在天 水上池晝
서소문 형장 자리에는 공원이 돼 있고 밤마다 많은 연인들이 찾아와 그들의 미래를 약속하고 있다. 거기 분수대가 한 대 있고 밤하늘을 수 놓은 분수는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 같지만 다시 떨어져 연못으로 들어가길 반복한다.
그 시절 이승훈이 읊은 시처럼 진리란 영원한 것이고 진리 앞에 민간의 짧은 세월은 오직 무력하기만 할 뿐,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또 그들은 진리 앞에서 행복감을 맛보고 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