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2편]
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3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4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5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6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7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8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9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10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설교]
어제 말씀처럼 오늘 본문도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알파벳 시입니다. 모두 10개의 절로 되었는데, 각 절마다 제일 첫 글자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로 치면 ㄱㄴㄷㄹ순으로 시가 쓰인 것입니다.
앞선 시편 111편의 제일 끝 구절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111편 10절,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리고 이어진 오늘 본문 1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11편과 112편이 이렇듯 ‘여호와 경외’를 중심으로 서로 이어집니다. 사실상 111편과 112편은 서로 하나의 시편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이러합니다.
1~3절에서 시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누리게 될 복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2절,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3절,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여기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후손의 복, 재물의 복을 누린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복은 흔히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자판기식 복’은 아닙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자동으로 음료수가 나오듯이, 예수를 믿으면 자동으로 복을 받는다?! 이런 말씀이 아닙니다. 흔히 이런 말씀을 근거로 ‘기복신앙’, ‘번영신학’ 등을 가르치는데, 이런 가르침은 꼭 주의하셔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어떤 경우든지 ‘자판기식 복’은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자동적으로 복이 주어진다?!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철저히 ‘관계중심적인 복’입니다. 관계중심적인 복이란 말은 달리 말하면 ‘언약중심적인 복’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있는데, 그 둘 사이가 마치 부부관계처럼 하나로 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합이 이루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복을 얻는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복의 기초입니다. 자판기식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측면에서 본문을 보십시오.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라!’ 여기서 정직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뜻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도덕적으로 정직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도덕적으로 정직하다는 뜻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여기서 정적하다는 뜻은 철저히 관계적입니다. 말하자면 여기서 정직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과연 거짓된가? 정직한가? 이것을 묻는 것이지, 우리 자체의 도덕성을 따지는 건 아니란 것이지요.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집이든지 부와 재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하필 우리에게 있을까요?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좋은 직장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말씀에서 부와 재물이 우리에게 있는 이유는 곧 공의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공의가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가 부와 재물을 쓰는 쓰임새가 참으로 공의롭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함부로 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또한 공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변에 있는 가난한 이웃을 결코 방관하지 않습니다. 공의가 있다는 것은 이렇듯 우리 삶에 아주 구체적인 행동으로까지 변화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바로 이와 같이 우리 삶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변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의의 실천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모두 다 어디로부터 출발하느냐? 바로 ‘관계’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 바로 이 ‘관계성’이 우리 삶에 주어지는 복의 가장 핵심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나머지 부분을 보면 계속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일컬어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라고 묘사합니다. 예를 들어 4절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자비, 긍휼, 의는 모두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과 연합해 있으니, 자연히 이 사람도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6절에서는 ‘그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이 사람이 그만큼 여호와께 딱 붙어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복을 애써 케네는 자가 아니라, 말씀 그대로 여호와께 딱 붙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사실상 하나님과 연합한 자입니다. 하나님이 신랑이시고 그들은 신부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그들은 자녀입니다. 그러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어떤 부분이든지 하나님을 닮고자 합니다. 그들 마음의 가장 큰 소원! 오직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으로 여호와를 경외한다?! 결단코 두려움이 아니라, 즐거움입니다. 1절에서 거듭 말씀하듯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을 닮고 싶은 것은 우리에게 중노동이 아니라 즐거움입니다. 이러한 즐거움이 오늘 하루 우리 삶 가운데 충만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구하며, 그 은혜로 살아가는 삶이 우리에게 중노동이 아니라 기쁨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를 위하여 오늘 아침, 여호와를 경외하는 기쁨을 구하시는 복된 성도님들 되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