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단법석(野壇法席);우리나라 불교대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 이란 뜻이고,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 라는 뜻이다.
즉,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 라는 뜻이다.
법당이 좁아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그만큼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석가가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할 때 최대 규모의 사람이 모인 것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을 때로 무려 3백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니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하게 된다.
이처럼 경황이 없고 시끌벅적한 상태를 가리켜 비유적으로 쓰이던 말이 일반화되어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게 되었다.
야단법석의 유래;
흔히 야단법석(野壇法席)이라 하면 "들판에 단을 쌓고 불법을 설파한 야외법회"에서 유래한 말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끌벅적하게 두드리고 노는 가운데 자아성찰을 이룰 수 있는 소중한 계기를 이루고자 한 공영의도와 어울리는 명칭을 일컫는다. 원효스님께서 경남 양산군 불광산 산내 암자인 척판암에 주석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도력(道力)으로 관해 보니 중국의 종남산 운제사(終南山 雲題寺)에 거주하는 천명 대중이 법회를 보고 있었는데, 곧 산이 무너져서 순식간에 법당을 덮쳐 큰 변을 당하게 되었음을 직관하였다.
사태가 다급하여 마침 다과상을 받고 있다가 그 소반을 들어 해동원효 척판구중(海東元曉 擲板救衆)이라 적어 서쪽을 향해 공중으로 날려보냈다. 그 때 종남산 운제사 대중 가운데서 한 사람이, "웬 널판자가 동쪽하늘에 떠 있다" 소리치니 대중은 기이하게 여겨 절 밖으로 나왔다.
순간 절이 무너져서 치어 죽을 천명이 구제되었다. 당나라 1천 대중은 머리 숙여 해동원효를 향해 우러러 예배하였다. "거룩한 원효대성을 찾아 가르침을 구하자"고 발원한 천명 대중은 수륙 수만리 해동의 나라 신라를 향해 널판자를 따라 길을 재촉하였다.
그들이 '海東元曉 擲板救衆'이란 글씨가 쓰인 널판자를 따라 온 곳이 지금의 경남 양산군 내원암으로 천성산(千聖山)이었다. 그리하여 천명 대중은 모두 원효스님 앞에서 제자되기를 선서하니, 이곳에 절을 세워 내원암(지금의內院寺)이라 부르고 이들을 위해 내원암 뒷산에서 <화엄경>을 강설하였다.
이곳 너른 들을 '화엄벌'이라 이름한 것은, 주춧돌 같은 돌덩이 천여개가 마치 좌석인 양 널려 있어 野壇法席(들판에 단을 쌓고 법회 자리를 마련함)을 차려 화엄경을 설하였다는 데서 연유한다. 법회가 있는 날은 큰북을 달아놓고 산내의 모든 암자에서 다 듣고 모이게 했으므로 집붕봉이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1천명이 모두 성인이 되었다 하여 산 이름을 천성산(千聖山)이라 했다 한다.
당시 도를 이룬 천명의 스님 중 여덟명의 성인이 팔공산에서 수도했고, 네명의 성인이 문경에 와 살았다는 데서 사불산(四佛山)이 유래한다. 즉 野壇法席은 순수히 우리 불교에 어원을 두고 있는 불교용어이다. 하지만 천명대중이 '들판에 단을 쌓고 법회자리를 여는' 자리였으니 시끌벅적도 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 뿐이었겠는가! 천명의 중국 스님들 외에도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이 함께 하였을 것이니 소란스러웠으리라.
따라서 세월이 흐르면서 어의(語意)가 전의(轉意)가 되어 소란스럽고 분주한 일에 '야단법석 떤다'고 하게 된 것이리라. 이제 1300여년의 시공을 초월해 여기 문경 백화산 골짜기에서 매년 원효성사(元曉聖師)의 얼을 이어 野壇法席을 해오고 있다.
그는 떠나지 않았다. 그는 한국불교가 낳은 불멸의 聖師이다. 원효는 인도의 나가르주나(Nagarjuna;용수)나 중국의 천태지자(天台智者)에 비견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국사상사의 첫 새벽을 환하게 열어놓은 원효는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