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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속 작품에 관한 이야기
| 9월 20일을 기준으로 이 전시를 30만 명 넘는 분들이 관람
| 10월 9일까지 전시가 계속되니 이제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 [국립중앙박물관]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 -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https://cafe.daum.net/201s/AYJ5/7392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 ‘유태인 신부·이삭과 레베카(The Jewish Bride or Isaac and Rebecca)’,
1665-69년, 167x122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어둠 속에 남녀 한 쌍이 서 있다. 화려한 의상과 여자가 착용한 값비싼 장신구는 이들의 높은 신분을 드러낸다. 몸짓으로 보아 두 사람은 친밀한 관계 같지만 얼굴에는 왠지 근심 걱정이 서려 있다. 대체 이들은 누구고 무엇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걸까?
이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화가 렘브란트 판레인의 말년 대표작이다. ‘이삭과 레베카’(1665∼1669년·사진)가 제목이지만, 오랫동안 ‘유대인 신부’로 불렸다. 이는 19세기에 한 미술품 수집가가 결혼식에서 딸에게 목걸이를 선물로 주는 유대인 아버지를 그린 것이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그림 속 인물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소장처인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은 성경에 나오는 이삭과 레베카를 묘사한다고 설명한다. 이삭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그는 마흔에 레베카와 결혼했지만 20년 동안 자식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도 첩을 두지 않을 정도로 아내를 사랑했다. 부부는 살던 마을에 기근이 들자 목초지를 찾아 그라르로 떠났다. 이스라엘인과 적대 관계였던 필리스티아인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그곳 사내들을 만났을 때, 이삭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 아름다운 아내를 빼앗기 위해 자신을 죽일까 봐 두려워서였다. 여전히 불안했지만 두 사람만 있게 되자, 남편은 아내를 다정하게 보듬으며 애정을 표현한다.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아내는 남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으며 안도하는 듯하다. 렘브란트는 바로 이 순간을 포착해 화폭에 담았다.
이삭과 레베카라고 하면, 이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성경의 레베카는 리브가로 표기된다. 구약성경에서 이삭과 리브가는 아비멜렉 왕이 지배하는 블레셋 땅에서 피난을 해야 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리브가를 시샘하여, 아내를 빼앗기 위해 자신을 죽일까봐 겁이 났던 이삭은 그 둘이 부부가 아닌 남매사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 하지만 서로 무지하게 사랑했던 이삭과 리브가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사랑을 나누다가 이 장면을 아비멜렉 왕에게 들켜버린다. 이 그림의 장면은 남매로 위장하고 있지만 남들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고 있는 이삭과 리브가 (레베카)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이삭은 한 손을 아내의 어깨에 걸치고, 다른 손을 그녀의 가슴위에 대고 있다. 여인의 손은 가신의 가슴위에 올려져 있는 남편의 손에 닿아있다.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화려한 미술적 기교를 마음껏 발휘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림 위에 물감은 아주 두껍게 발라져 있고, 붓의 뒤끝으로 두껍게 칠해진 물감을 긁어내어 입체감과 풍성함이 넘쳐나는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림속의 두 남녀는 아주 화려한 옷을 입고 있고, 여인의 목과 손에는 진주를 포함한 보석이 장식되어 있다.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두 사람의 정체가 결국 아비멜렉 왕에게 밝혀지고, 왕은 자신을 속인 이삭을 질책하지만, 결국 사람들에게 이들을 해하지 말도록 명령을 내렸기에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이삭은 결국 예수의 선조이니 해피엔딩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아닌 빈센트 반 고흐 때문에 더 유명해졌을 수도 있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을 본 적이 있고, 만일 이 그림 앞에서 마른 빵만 먹더라도 2주일만 이 그림을 원없이 볼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1년치라도 내 놓겠다고 편지에 쓴 적이 있다고 한다. 물론 반 고흐에게 실제로는 내놓을 수 있는 1년치의 목숨은 없었지만, 얼마나 그가 이 그림에 감명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결국 이 그림이 누구를 그린 것인지, 어떤 장면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금은 이삭과 레베카 (리브가)를 그린 그림이라는 것이 다수설이지만, 17세기 네덜란드에는 역사 초상화 Portrait historie라는 장르가 있었다고 한다. 의상과 분장, 그리고 포즈를 통해 역사의 한 장면, 성경이나 신화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초상화의 서브장르이다. 요즘 식으로 하면 분장 셀카 또는 코스프레에 해당하겠다.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의 이삭과 레베카로 분장하여 그린 초상화라는 설이다. 어쩌면 이게 가장 현실적인 설명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사랑스러운 두 남녀가 사랑을 주고받고 있는 아름다운 그림을, 아내도 잃고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두번쨰 아내 헨드리케는 1663년에 죽었다), 파산하여 경제적으로도 피폐했던 렘브란트가 그려냈던 것은, 나이가 들어 화가의 원숙함과 삶의 지혜가 더해진 떄문일지도 모른다. 고난이 모든 이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배우자든 자식이든 사랑하는 가족은 나를 던져서라도 지키고 싶은 존재다. 렘브란트는 63년 굴곡진 인생 마지막에 이 그림을 그렸다. 이른 성공으로 귀족적인 삶을 누렸지만, 세 자녀와 아내를 일찍 여의고, 파산과 생활고로 비참한 노년을 보내던 시기였다. 어쩌면 화가는 지켜주지 못한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이 그림에 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해로한 성경 속 부부가 자신과 아내이길 바라면서.
✺ 렘브란트(Rembrandt)의 대표 작품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 ‘23세의 자화상’, 1628년
빛의 마술사, 빛과 어둠의 화가로 불리는 렘브란트 하르멘스존 반 레인은 네덜란드의 최고 화가로 네덜란드 예술의 황금시대를 열었으며, 서양 미술사상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꼽힌다. 그는 특히 초상화에 인물의 개성과 심리를 담아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런 재능을 〈자화상〉에서도 발휘했다. 22세 때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은 괴테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이로 인해 탄생한 작품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괴테는 이 작품 속에서 젊은 날 꿈을 접고 우울과 방황의 날을 보내던 자신을 떠올리며, “꿈이 없는 청춘은 시체나 다름없으니 살아가지 않느니만 못하다.”라고 말했다.
렘브란트, 'Self Portrait at the Age of 63', 1669년, 캔버스에 유화, 86x70.5cm, 내셔널갤러리 런던
렘브란트, ‘토론하는 두 철학자(Two Scholars Disputing)’, 1628년,
Oil on panel, 71×58.5Cm, 멜버른 국립 갤러리 빅토리아 소장
렘브란트는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 레이덴에서 제분업자 하르멘 헤리트스존 반 레인의 9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620년 레이덴 대학에 입학했으며, 야코브 반 스바넨뷔르흐 아래에서 도제 생활을 하며 그림과 판화를 배웠다. 1624년경부터 독립 화가로 활동했으며, 1630년경에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역사화가 피터르 라스트만을 스승으로 모시며 도제들을 가르쳤다. 라스트만의 공방에 있던 기간은 약 반년에 불과하지만, 이 시기는 렘브란트의 화풍을 결정짓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라스트만의 영향으로 장르적인 구성, 완벽한 데생과 이상적인 인체 표현 등의 고전적인 회화 방식에서 탈피해 인물의 표정과 동작을 통해 심리 묘사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초기 작품 〈발람의 당나귀〉, 〈토론하는 두 철학자〉, 〈성 베드로의 부인〉 등에서는 라스트만의 화풍이 엿보인다.
렘브란트, '웃고 있는 제욱시스', 1668년, 쾰른 발라프-리하르츠 박물관
여기에 〈야경〉의 일로 작품 주문이 줄어들었고, 사스키아가 죽기 전 무리하게 집을 장만한 데다 무모하게 투기를 하면서 렘브란트는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렘브란트는 사스키아가 죽은 후 집안 하녀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재혼할 경우 사스키아의 재산을 관리할 수 없기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게르테라는 하녀와의 사이에서 문제가 생겨 렘브란트의 명성은 더욱 떨어졌고, 하녀 헨드리케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여 교회 위원회에 간음죄로 소환되기까지 했다. 헨드리케는 그의 딸 코르넬리아를 낳았다.
채권자와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던 렘브란트의 말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율법의 석판을 깨뜨리는 모세〉, 〈성 베드로의 부인〉, 〈포목상 조합 이사들〉 등의 작품에서 화가로서 절정의 기량을 보였으며, 하녀들과 아들 티투스, 자신을 모델로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렘브란트만큼 자화상에 매료되어 있던 화가도 없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꾸준히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으며, 말년에는 더욱 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그는 자신을 때로는 화가로, 때로는 신사로, 때로는 이야기 속의 인물로 표현했다. 예컨대 〈웃고 있는 제욱시스〉는 고대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가 죽어 가는 와중에도 늙고 주름진 노파를 그리면서 웃음을 참았다는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따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렘브란트, '야경', 1642, 유화,453.5×379.5cm,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1630년대에 렘브란트는 성서를 주제로 한 에칭을 여러 점 제작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 〈목동들에게 예수 탄생을 알리다〉 등이다. 그는 에칭에 있어서도 빛과 어둠의 대비 효과를 극대화하여 표현했다. 가령 윤곽선을 진하게 그리는 경우에는 색조를 연하게 사용하거나 아예 윤곽선을 지우고 형태와 광휘를 드러내도록 색채를 사용하여 어둠 속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효과를 주었다.
1642년, 아내 사스키아가 한 살 된 아들 티투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다섯 아이가 태어났으나 살아남은 건 티투스 하나뿐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졌으나 화가로서의 렘브란트는 완숙기에 접어들어 풍부한 작품 세계를 펼쳤다. 대표작 〈야경〉은 이때 탄생했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 사수 길드 클로베니에르 회관이 완공된 기념으로 그려진 단체 초상화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네덜란드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해 활동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렘브란트는 기존의 단체 초상화와 달리 극의 한 장면을 보듯 화면을 연출했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기 있는 표정과 몸짓, 극적 효과를 더해 주는 명암 대비로 전체 화면에 긴장감과 활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부유한 시민들의 의뢰로 그려진 이 작품은 단체 초상화로서 큰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비중이 각기 다른 점은 차치하고라도, 다른 인물이나 명암 효과로 인해 얼굴이 가린 인물이 생긴 게 문제였다. 자신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항의하면서 이 그림은 후원자들의 외면을 받았고, 렘브란트의 명성도 떨어졌다.
렘브란트,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 1632, 유화, 216.5×169.5cm,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 네덜란드 헤이그
렘브란트는 미술상 헨드릭 윌렌부르흐와 함께 일하면서 화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고, 1632년 외과의사 조합의 의뢰로 첫 번째 집단 초상화인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완성하면서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가 되었다. 튈프 박사의 공개 해부 강연을 그린 이 불멸의 명작에서 렘브란트는 자신이 인물들의 개성을 담아내는 데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렘브란트, ‘플로라처럼 분장한 사스키아(Saskia as Flora)’, 1634년, 캔버스에 유화, 124.7×100
1634년, 렘브란트는 윌렌부르흐의 조카 사스키아 반 윌렌부르흐와 결혼했다. 렘브란트는 그녀를 모델로 수많은 소묘와 유화를 그렸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플로라처럼 분장한 사스키아〉, 〈깃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웃고 있는 사스키아〉 등이다. 또 그해에는 성 루가 길드에 가입하여 독립 장인의 지위를 받았다. 윌렌부르흐에게서 독립한 렘브란트는 초상화가로서 수많은 부를 축적했고, 많은 제자들을 거느렸다. 초상화 주문은 줄을 이었고, 많지는 않지만 성서를 주제로 한 연작과 대작 역사화들도 주문받아 화가로서 높은 명성을 얻었다.
렘브란트, '발람의 당나귀', 파리 코냑 제 박물관
렘브란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렘브란트의 그림은 강렬한 명암 대비가 특징으로,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대비시켜 입체감을 드러내 그림에 극적인 효과를 주었다. 이를 키아로스쿠로라고 하는데, 16세기 이탈리아의 천재 화가 카라바조가 창안한 것이다. 또한 렘브란트는 독일 화가 아담 엘스하이머의 명암법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렘브란트는 유화뿐만 아니라 에칭과 드라이포인트 기법을 이용한 판화도 많이 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동판화를 독학으로 연구할 만큼 판화에 특별한 애정을 기울였다고 한다.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어머니를 모델로 제작한 〈늙은 여인의 흉상〉, 〈늙은 여인의 얼굴〉과 암스테르담 시절에 제작한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빌라도 앞에 선 그리스도〉는 이 위대한 화가가 판화에 있어서도 특출난 재능을 가졌음을 보여 준다. 또한 초상화가로서 자신의 자화상을 평생 그렸던 그답게 사스키아와 자신의 모습을 그린 동판화도 남겼다.
렘브란트는 1669년 10월 4일 암스테르담에서 사망했다. 가난 속에서 죽어 간 늙은 화가의 무덤은 비석 하나 없이 초라했다. 죽을 무렵 렘브란트는 유행에 뒤떨어지고 한물간 잊힌 화가였으나, 18세기 초 프랑스에서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하여 19세기에 네덜란드인이 과거의 황금시대를 돌이켜보며 네덜란드를 빛낸 천재 화가로 적합한 인물을 찾으면서 다시 부각되었다.
빈센트 반 고흐, ‘봄 뉘넌의 목사관 정원(De pastorie in Nuenen in het voorjaar)’,
1884년 5월, 유화. 흐로닝어 미술관에서 소장.
반 고흐가 부모와 함께 뉘넌에서 목사관과 주변 정원에서 살면서 그린 그림으로 2020년 3월 30일, 호르닝어 미술관에서 대여하여 전시 중이던 노르트홀란트주 라런에 있는 싱어 라런 박물관에서 도둑에 의해 도난당했다가 2023년 되찾았다. 추정 가격 80억원.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동아일보 2023년 08월 24일(목)(김은화 미술평론가), 미술사를 움직인 100인(김영은, 청아출판사), ArtePhile의 명화보기, Daum·Naver 지식백과]
첫댓글 10월3일 화요일
밤새 편히 잘 주무셨는지요?
오늘은 단기4356주년 하늘이 열리는 개천절 아침이 밝았습니다.
이 땅에 오신 단군 할아버지의 민족 긍지의 건국 이념을 생각하는 하루입니다.
가을 오곡백과
무르익는 들판처럼 성취와 보람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활기차게 하루를 시작하시고 근심 걱정으로 주름진 얼굴에도 웃음꽃이 활짝 피어나는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