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지혜 담긴 중복날
오늘은 2026년 중복이다. 장마가 물러간 하늘에는 뜨거운 햇살이 머물고, 대지는 열기를 품은 채 숨을 고른다. 이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할 것이라는 기상예보에 이 더위를 어떻게 이길까 걱정이다. 사람들은 더위를 두고 흔히 "삼복더위"라 부른다. 초복과 중복, 말복으로 이어지는 이 계절의 절정에서 선조들은 자연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의 이치를 받아들이며 몸과 마음을 다스렸다.
복날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날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배우는 날이었다.
'복(伏)' 자는 엎드릴 복(伏)이다. 사람 人과 개 犬이 함께 있다. 묘하게도 복날 개고기를 먹던 풍습이 연상된다. 중국 진나라 이후 음양오행과 간지(干支)를 바탕으로 절기를 계산하면서, 여름철 강한 양기 앞에 사람이 엎드려 더위를 견딘다는 뜻에서 삼복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후 절기 문화가 전래되었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농경사회 속 생활 풍습으로 깊이 자리 잡았다. 농부들은 가장 무더운 시기를 지나야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맞이할 수 있었다. 삼복은 인내와 기다림의 계절이었다.
이 더위를 참고 이겨야, 시원한 가을, 결실의 계절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복날에 보양식을 먹는 풍습도 이러한 생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요즈음에는 삼계탕, 장어, 오리, 추어탕 등 다양한 음식이 복날 음식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이후 1980년대까지는 개고기를 이용한 보신탕도 먹었다. 나는 즐기지는 않지만 그런 자리가 되면 보신탕을 먹곤했다. 당시에는 냉장시설도, 충분한 영양 공급도 어려웠다. 여름철 땀으로 빠져나간 단백질과 무기질을 보충하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현대의 동물보호 윤리와 사회적 인식은 크게 달라졌으며, 오늘날 보신탕 문화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역사는 당시의 시대적 환경 속에서 이해해야 하며, 오늘의 가치관으로만 단정하기는 어렵다.
선조들의 지혜는 영양학적으로도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 무더위에는 땀과 함께 수분과 전해질, 단백질이 손실된다. 닭고기와 오리고기, 장어, 미꾸라지 등은 양질의 단백질을 공급하고 비타민 B군과 철분, 아연 등을 보충하는 데 도움이 된다. 여기에 마늘, 대추, 인삼, 생강 같은 식재료는 음식의 풍미를 더할 뿐 아니라 체력 회복을 돕는 재료로 오래전부터 활용되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는 말도 단순한 속설이 아니라,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땀을 흘려 체온 조절을 돕고 식욕을 회복하려는 생활의 경험에서 나온 지혜였다.
그러나 복날의 진정한 보양은 음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몸보다 먼저 지치는 것은 마음이다. 쉼을 잃은 사람은 영양이 넘쳐도 피곤하다. 욕심으로 가득한 삶은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회복되지 않는다. 자연은 여름에도 잠시 쉬어 간다. 매미는 울다가 침묵하고, 나무는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도 묵묵히 그늘을 만든다. 자연은 우리에게 속도를 늦추는 법을 가르친다.
영국의 수필가 조지 기싱(George Gissing)은 『헨리 라이크로프트의 사기록(The Private Papers of Henry Ryecroft)』에서
"행복한 사람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중복 여름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더위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을 거스르기보다 그 안에서 쉼과 질서를 배우는 사람이 결국 건강한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우리 문학에서도 계절은 삶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피천득은 『인연』을 비롯한 여러 수필에서 계절의 변화를 섬세하게 바라보며 삶의 품격을 이야기했고, 이양하는 『신록예찬』에서 자연 속에서 인간 정신이 새로워짐을 노래하였다. "신록은 젊음의 상징이요 생명의 약동이다."라는 그의 문장은 계절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성찰하게 한다.
복날은 많이 먹는 날이 아니라 감사하는 날이다. 자연이 준 곡식에 감사하고, 함께 밥을 먹는 가족에게 감사하며, 오늘도 생명을 허락하신 하늘을 기억하는 날이다. 한 그릇의 따뜻한 음식은 배를 채우지만, 감사하는 마음은 인생을 채운다.
오늘은 중복이다. 한낮의 태양은 여전히 뜨겁다. 그러나 계절은 이미 가을을 향해 조금씩 걸음을 옮기고 있다. 자연에는 무더위도 영원하지 않다. 인생의 시련도 그러하다. 견디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새로운 계절이 온다.
선조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복날에는 음식을 준비했고, 가족을 불렀으며, 서로의 건강을 빌었다. 보양은 육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사랑이었다.
한 그릇의 따뜻한 국물 속에는 계절을 이겨낸 역사와 생명을 이어 온 지혜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오늘도 우리에게 조용히 말한다.
"더위를 이기는 가장 큰 힘은 음식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며 감사로 살아가는 마음이다."
첫댓글 자연의 질서를 받아들이며 배우는
삶의 지혜와 감사를 주제로 하는 수필 한 편 감상 잘했습니다.
〈선조의 지혜 담긴 중복날〉은 삼복더위를 단순한 견딤의 대상이 아닌,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찰의 시간으로 재조명합니다.
'복(伏)'자의 어원부터 동서양 문학적 통찰까지 아우르며,
진정한 보양은 단순한 영양 섭취가 아니라 마음의 쉼과 감사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무더위 속에서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고 공동체적 사랑을 되새기게 하는
따뜻하고 깊이 있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