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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유럽여행! 함께 나누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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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길잡이★유럽 배낭여행
(http://cafe.daum.net/bpguide)
2004년 8/2(월)
여행이란 어쩜 기다림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아내와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설레이는 가슴을 진정하며 꿈에도 그리던 유럽여행길에 오르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을 타러 왔더니 앞차는 방금 떠나고 20분 뒤에 차가 출발한단다.
하지만 어떠랴! 여행이란 매 순간순간의 상황에 익숙해져야하는 법이니...
대한항공으로 13:30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하였다.
체코의 프라하까지는 10시간이 소요된단다. 시차 7시간을 감안하다면 프라하 도착시간은 8/2(월) 16:30 정도가 되지 않을까? 정확하게 하늘에서 바라본 프라하의 건물, 숲과 하천의 멋진 풍경을 아래로 하고 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16:50임.
고도 10,000m의 상공에서 우랄산맥을 넘으면서 먹는 기내식의 맛은 거의 환상적이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여행을 떠나면 식욕이 더 동해진다.
배가 고프기도 하지만 나중에 배가 고팠을 때를 대비한 본능적인 야성이 살아나는 것 같다.
프라하 공항에서 부다페스트로 가기 위해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이곳저곳을 들러보았는데 공항자체의 부지는 넓으나 무척이나 시골스럽다. 허나 이곳 체코의 여인들은 몸매가 무척이나 날씬하다. 나중에 둘러보는 다른나라의 여인들과는 달리 그다지 서구화된 식생활에 물들지 않은 듯하다.
20:10에 부다페스트로 출발하여 1시간 만인 21:10에 도착하였다. 현지 가이드(고종률, 악기제작을 배우고 있는 학생)가 나와 반갑게 헝가리의 입성을 축하한다며 브라암스의 헝가리 무곡,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렙소디)을 들려준다. 비로소 유럽에 도착하였다는 느낌을 받고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극도의 피로감을 느낀다.
23:00경에 호텔에 도착한 후 샤워를 하고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이곳 욕실에는 욕조가 없고 샤워부스만 있다. 마치 공중전화기에 있는 부스처럼...
8/3(화)
헝가리는 남한 정도의 크기와 서울크기 정도의 부다페스트에 인구 200만이 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룸 메이트인 명덕고등학교 선생님인 성근용 선생님이랑 같이 주변을 산책하였다. 주변의 주택은 전부 전원주택과 같이 아름다웠으며, 산책 중 영업용 택시인 대우자동차를 1대 보았다. 신기했지만 이것은 서곡에 불과했다. 온 유럽전체에 우리나라 기업의 로고가 그것도 제일 눈에 잘 뜨이는 곳에 버젓이 위치하고 있는 줄은...
특히 삼성, 대우, LG, 그리고 현대
엊저녁에 공항에서 들어올 때는 시가지 전체가 어두워서 잘 보이질 않았으나, 아침에 일어나보니 자연과 상당히 조화가 잘된 도시임을 알 수 있다.
내가 묵고있는 WIEN호텔과 주변의 건축물들은 대략 100-200년 정도 되어보였으나 새롭게 재건축을 한다든지 도색하는 것을 규제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잘 이해되지 않았으나, 건축물이란 사유물임과 동시에 도시전체의 미관을 단장하는 공공성을 강하게 부여하는 것 같았다.
헝가리는 유럽속의 동양이라고 한다.
검은 머리카락에 태어날 때에도 몽고반점이 있다고 한다.
아침 식사시간에 루마니아 노부부(70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처음으로 인삼껌을 선물하였다.(한국에서 떠나올 때 인삼껌 40통을 준비하였다)
식사 후 같이 묵은 호텔에서 또 다른 한국사람들이 있어서 물어보니깐 인천에서 왔다고 한다. 해서 또 물어보았다. 인천 어디냐고? 연수구 동춘동이란다.
어렵쇼. 또 물었다. 무슨 아파트냐고? (동춘동에는 아파트밖에 없음) 하나타운 아파트라고한다. 와! 몇동? 204동(우리집은 206동임). 세상 참 넓고도 좁다.
요한스트라우스의 다뉴브강이란 곡 들어보았는지.
잔잔하면서도 감미로운 선율의 대상인 실제모델이 부다페스트를 흐르고 있다.
돈나우강(영어명으로는 다뉴브강)이 서울의 한강처럼 부다페스트를 가로지르며 흐르고 있고
갤래러트 언덕을 올라가면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돈나우강을 중심으로 언덕이 많은 쪽과 평지로 되어있는 쪽이 있는데, 언덕이 많은 쪽을 부다라하고 평지가 많은 쪽을 페스트라고해서 부다페스트라고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갤래러트언덕은 로마교황으로부터 이슈트왕이 대관식을 받은 곳 이기도하며, 갤래러트 신부를 통나무에 집어넣고 돈나우강에 떨어뜨려 죽였던 유적이 있는 곳이다.
헝가리말 한마디
안녕하세요 : 요노뽀 감사합니다 : 퀘세넴(입을내밀고)
버스로 부다쪽을 잠시 이동하여 부다왕궁을 살펴보았다. 전통 유럽 건축양식으로 잘 지어진 건물이었으며 내각책임제에서 초라하리만큼 검소한 대통령 궁을 살펴보았다.
유럽의 건물을 가만히 살펴보면 같은 건물이라도 층수에 따라 창문의 형태를 달리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동질화를 거부하고 개성과 독창성을 키우는 그네들의 문화와도 관련이 있어보였다.
삼위일체탑을 보았다. 페스트로 헝가리 인구의 1/2이 죽고 살아난 사람이 감사의 기념으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88m의 종탑과 도자기로 지붕이 장식되어있는 마차시 성당을 들러보았다.
어부의 요새는 돈나우강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조합을 만들고 요새를 지어서 적군을 방어하였던 역사가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행주산성과 비슷하나 주변의 풍치가 너무 아름답다.
이어서 페스트 지역으로 가서 현지식인 우리나라의 육개장과 비슷한 구아치 스프을 빵과 함께 먹었다.
바실리카 대성당을 가보았다.
1851년에서 1905년까지 54년에 걸쳐 무려 3명의 건축가 손을 거쳐 완공된 성당이며 완벽한 대칭구조로 되어있다.
이곳에는 이슈트왕의 오른쪽 손목이 미이라 형태로 보관되어 있는 곳 이기도하고, 이슈트왕이 십자가를 들고 예수의 흉내를 내고 있다. 예수의 흉내를 내어도 좋다고 교황청의 허가를 받았다고 하니 헝가리에서의 이슈트왕은 우리나라에서 세종대왕에 버금하는 현군이었던 같다.
헝가리 영웅들을 동상으로 만들어 진열한 영웅의 광장, 프랑스 빠리의 샹젤리제를 본떠서 만든 거리로 카니발 페스티발의 거리인 대학광장, 무대길이만 43m에 달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고 수수한 오페라 하우스 이곳은 리스트 음대 학생증만 있으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단다.
도로와 건물로 조화된 8각형의 거리인 옥토건, 100년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지어진 지하철이 밑으로 지나가는 대사관거리를 지나서 시민의 공원으로 갔다.
시민의 광장은 영웅의 광장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가 드라큐라의 성과 같이 음침하게 조성되었으며, 현재는 농업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페스트의 명동거리에 해당하는 바찌거리에서 맥주를 한잔하였다.
이곳의 기온은 높은 편이지만 그늘만 들어가면 시원하여 한국의 여름날씨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시원하다.
하지만 도보로 이동하면서 강한 직사광선을 쬐여서인지 맥주한잔의 맛이 꿀맛 같았다.
유럽거리를 자유롭게 걸으면서 이곳 저곳을 기웃기웃하고 있는데 어느 선생님이 이곳 여자들은 팬티를 입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였다. 해서 가만히 보니깐 훤히 비치는 백바지들을 입고 있는데 우리 상식으로 적당히 있어야 할 곳에 팬티 라인이 있어야 되는데 하나 같이 그런게 보이질 않았다. 와! 세상에나.
그런데 다시 보니깐 있어야 할 곳에는 없고 엉덩이쪽 척추부근에 이런게 보이는 거라.
아하 안 입은게 아니라 우리랑은 구조가 다른 팬티(T자형)를 입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리 이곳 저곳에는 젊은이들이 벌건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진한 애정행각을 벌리고 있는 것이 보였고, 이런 것들이 우리를 당황하고 민망하게 하였지만 곧 익숙하게된다.
역시 반복되는 충격에는 내성이 생기나 보다.
이곳 부다페스트를 포함하여 나중에 유럽의 전역을 돌면서 느낀 것은 시내 전체가 마치 거대한 박물관과 같으며 건축물이 도시를 상징하는 조형물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시차 적응이 안되어서 저녁을 먹고 7시에 호텔로 들어온 후 9시까지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9시에 호텔 발코니에 모여서 우리 연수단 6기들의 모임을 가졌다.
각자가 가져온 팩소주와 슈퍼에서 산 맥주를 가지고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아름다운 풍물에 반해서인지 아님 술을 한잔하고 난 뒤 객기가 발동한 것인지는 몰라도 밤 11시경에 박중석 선생님, 정용선 선생님, 성근용 선생님,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은 낮에 본 갤래러트 언덕과 돈나우강가의 세차이 다리의 야경을 보러 야간투어를 하기로 하였다.
약 1시간 가까이 걸어서 아름다운 야경을 보면서 사진도 찍고 시원한 강바람을 쐬면서 즐겁게 노닐다가 호텔로 돌아오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온 길을 그대로 가면 될 것을 우리의 어림짐작으로 빠른 길을 선택하여 온다고 온 것이 그만 미로에 빠지고 만 것이다.
시간은 흘러 기진맥진하고 거리에 사람은 없고 호텔 전화번호나 주소도 없이 나왔으니 참으로 암담하였다. 주변의 호텔에 들어가서 WIEN호텔을 물어보아도 영어가 통하질 않으니...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을 때 또 다른 호텔이 보였고 우리가 유일하게 알고있는 WIEN호텔 이름을 대니 콜택시를 불러주겠단다.
와! 살았다.
새벽 2시 반경에 무사히 콜택시의 도움으로 귀가하였다.
8/4(수)
9시에 여장을 꾸린 후 호텔을 출발하여 국회의사당과 구 헌법재판소(현재는 민속박물관)를 둘러본 후 리스튼 대학으로 갔다.
방학이라 대학의 문이 잠겨있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대학 앞에서 기념 촬영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야했다.
그런데 리스튼 대학에서 대학광장을 거쳐 오면서 그만 일행중 1명이 없어진 것이다.
큰일났다. 13:00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비디오 카메라를 가져온 신영욱선생님이 촬영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만 일행을 놓쳐버린 것이다.
가까스로 찾아서 버스에 승차하여 물어보니 정작 본인은 11시까지 기다려보고 그래도 못찿으면 공항으로 바로 갈려고 했다고 한다.
어찌되었거나 머나먼 타국에서 미아가 될 뻔한 사람이 5명으로 늘어났다.
13:05 터키 이스탄불로 이륙하였다.
터키까지는 1044km로 16:10에 이스탄불 아타트루쿠공항에 도착하였다.
실제 비행시간은 2시간인데 터키는 1시간이 빠르기 때문에 총 3시간이 소요되었다.
터키의 행정수도는 앙카라나 상업경제도시는 이스탐불로 되어있다.
그 옛날 로마시대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바로 지금의 이스탄불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행정수도는 연기공주 상업경제도시는 서울로 되겠지. 근데 왜 꼭 그렇게 되어야 되는지는 알 수 가 없다.
터어키는 우리나라와 같은 우랄알타이어를 사용하고 있단다. 해서 물을 수, 하지마를 야트마라고 말한다.
터어키말 한마디
안녕하세요 : 멜하바 감사합니다 : 싸올
터키의 건물은 한국과 비슷하며 부다페스트 건물보다는 가볍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스탄불로 가는 도중의 해변길이 너무나 시원하고 보기가 좋다. 이 해변길을 케네디도로라고 하며, 국민의 도로라고도 불린다.
바다 건너보이는 곳은 아시아이며, 왼쪽으로는 비잔틴시대의 성곽이 나타난다. 이 성벽은 3중으로 되어있으며 첫 번째 성곽은 5m, 두 번째 성곽은 7m, 세 번째 성곽은 12m로 되어있으며 1차와 2차 성곽사이에는 도로가 나있다.
도저히 점령당할 것 같지 않은 이 도시도 결국 오스만 터키의 손에 넘어가버린 역사를 생각해보면, 그 옛날 중국에서의 만리장성을 쌓아놓고 방심하다가 결국 망해버린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나라의 강건함은 물리적인 형상으로만 측정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우리가 저녁을 먹으러 들어가는 황혼의 이스탄불 실루엣은 온통 첨탑(마나렛)와 사원의 돔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뾰족 둥글 편평, 그리고 뾰족 둥글 편평... 이런 형태가 지면의 굴곡에 따라 펼쳐져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겠다.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성소피아 사원과 블루 모스크(술탐 마하렛)를 거쳐 지나갔다. 이제 내일이면 저안을 들어가서 살펴볼 수 있겠지.
저녁은 이슬탄불 호텔에서 불고기와 된장찌게로 정말 맛잇게 먹었다.
ORSEP 호텔에 7시 반에 들어와서 샤워를 하고 나니, 다른 선생님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시내구경 하자고...
터어키의 환율은 장난이 아니다. 우리나라 돈 1,000원이 100만 티엘이니, 무조건 화폐단위에서 동그라미 세개는 떼고 봐야된다.
8/5(목)
호텔 아침 식사 중 벌꿀이 굉장히 맛있다. 바게트빵에 발라서 4조각이나 먹었다.
이승수 가이드와 현지인 가이드 일드론(63세)씨가 같이 동승하였다.
일드론씨는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가이드이다. 별명이 ‘똥배 할배’인 이 양반은 가방에 태극기를 꼽고 서툰 한국말로 ‘갑시다’ ‘왼쪽’ ‘오른쪽’등의 말로 우리를 안내해주었고 항상 포근한 미소로 우리의 관광을 도와주었다.
먼저 성소피아 사원을 둘렀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리는 건축물로 예루살렘 성전보다 더 크다고 한다. 기둥이 없고 완벽한 돔구조 형태로 두명의 건축가 - 이시도루스와 안테미우스 - 에 의해서 세워졌다.
돔구조로 된 홀의 직경은 30m이고 높이는 56m에 이른다. 비잔틴시대의 양식과 회교의 모스크양식이 혼합된 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십자군 원정때 말 발굽에 짓밟히고 금장식을 강탈당했건만 건물자체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외형은 참으로 잘 보존되어있다.
그럼 세계 7대 불가사의는 무엇일까?
기원전 450년경 오딧세이의 저자인 호머에 의하면
이집트의 피라밋, 파로수 등대, 바빌론의 공중정원, 아르테미스의 신전, 제우스의 신상, 로도스의 거상, 그리고 마우솔레욤의 무덤이라고 한다.
점심은 이곳 음식인 케밥을 먹고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골든 혼을 빠져 나갔다.
골든혼을 빠져나가면서 왼쪽은 신도시이고 오른쪽은 구도시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우리가 본 성 소피아 성당은 구도시에 속해 있음을 알 수있다.
왼쪽으로 내일 가게 될 돌마 바흐체 궁전과 수많은 부호들의 집과 별장을 볼 수 있었다.
여기도 빈부의 격차가 극심함을 또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모스크 해협을 빠져나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보스포로스 다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술탄메헤트 광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 터어키에서도 2개의 큰 재벌그룹이 있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삼성그룹과 비슷한 코지 그룹이 있다.
이 그룹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들러보기로 하였다.
한마디로 이곳 터어키의 인터넷 인프라는 열악하기 짝이 없다. 아직도 모뎀으로 인터넷을 하고 있으며, 최신의 설비를 갖추고 있는 이 학교도 교사5명 당 3대 정도로 컴퓨터가 보급되어있다.
주머 교감(?)의 설명에 의하면 부장교사외 다른교사는 일반 행정업무를 맡지 않으며, 교사의 봉급은 근무연수에 따라 차등지원하며, 영어로 수업을 하는 교사는 봉급을 30%정도 더 올려서 준다고 한다. 교과부장 교사는 서로 돌아가면서 맡으며 수업시간을 조금씩 더 적게 할 수 있도록 할애를 받는다고 한다.
교사 평가는 1년 과정을 교사 스스로 평가서를 작성하도록 하는 등 우리 한국과 별반 다름이 없어 보였다.
이외에도 ICT와 관련된 많은 내용의 질문이 오고 갔으며 진지한 토론은 결국 뒷 창가에서 따가운 햇볕을 받고 있는 다른 선생님의 불만을 살 정도로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너무 오랫동안 지체한 탓으로 오후의 다른 일정을 진행할 수 없어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곳 이스탄불의 저녁은 부다페스트만큼 상큼하고 깔끔한 기운을 느낄 수는 없다. 약간 더 눅눅한 기운을 느끼면서, 엊저녁에 길거리 카페에서 어제의 맴버 그대로 맥주를 한잔 걸치고 해변가의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블루 모스크의 야경도 구경하며 옛 고도의 분위기에 취해 잠이 들었다.
8/6(금)
아침에 팁을 놔두고 오는 것을 깜박 잊고 다시 들어갔다 나오니깐 물값을 계산하란다.
웬 물값?
가만히 보니 엊저녁에 우리가 밖에서 마신 생수통이 방에 놓여진 것을 보고 자기네 호텔에서 먹은 생수로 착각을 한 것 같았다.
이런 바가지가 싫어서 호텔에서의 물, 술, 그리고 음료수는 절대 안 먹는다.
시난의 제자인 마흐멧 아아에 의해 7년사이에 건립된 블루모스크를 들어가 보았다. 반바지를 입고 갔더니 보자기를 주면서 무릎아래까지 가리란다.
불루모스크는 첨탑(마나렛)이 6개이다. 이 마나렛은 기독교의 종탑과는 달리 직접 사람이 올라가서 ‘자 이제 기도를 올립시다’라고 육성으로 외치게끔 되어있다. 이 마나렛의 숫자로서 사원의 권위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겠다. 참고로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에 있는 사원의 첨탑은 7개이다.
성 소피아 사원을 모델로 맞은 편에 위치한 이 사원은 가운데는 돔형태 이나 4군데 아치형태마다 어머어마하게 굵은 기둥을 세워놓았다.
규모는 성소피아 사원보다 클지는 몰라도 예술적인 면과 건축구조적인 면에서는 성소피아 사원보다는 한수 아래임이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사원내부에는 아무런 그림과 상이 없는데 이것은 하나님(기독교에서는 야훼, 이슬람에서는 알라 라고 함)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슬람이 더 성경에 충실한 종교라 할 수 있겠다.
다음은 지하 물 저장고로 갔다.
이스탄불은 3중의 성벽으로 둘려 쌓여있기 때문에 물과 식량만 있으면 난공 불락의 요새이다. 1,500년 전의 이러한 지하 물 저장고가 시내에 30개가 있다니 ...
입이 딱 벌어질 수 밖에. 우리가 가본 곳은 길이 70 × 140m로 제일 큰 곳 이었다.
저장고의 맨 끝에는 쳐다보는 사람마다 죽음으로 안내하는 메듀샤의 머리가 거꾸로 묻혀있었다.
버스로 이동하여 토카프 궁전에 들렀다. 이궁전의 특징은 이즈타일이 부착되어 있는데 그 당시 이 타일 한 장 값이 은화 5냥에 해당된다고 하니, 이 궁전전체를 감싸고 있는 이 타일들의 값어치는 얼마나 될까?
한국여성 같아서 사진 한 장 같이 찍자고 하였더니 일본 여성이다. 생긋이 웃는 얼굴이 예쁘다. 해서 인삼껌을 하나 선물했다.
그 다음은 규모가 어마어마한 돌마 바흐체 궁전으로 갔다.
토카프 궁전이 오스만 터어키 전통형태의 궁전이라면, 이곳 돌마바흐체 궁전은 유럽식 궁전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사실 터어키는 전체국토의 97%는 아시아에 속해있고 3%만이 유럽에 속해있다. 터어키는 지금도 유럽공동체(EC)에 가입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단다. 허나 종교 문제로 가입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끊임없는 러브콜을 지금도 유럽국에 보내고 있다고 한다.
참 터어키는 6.25때 한국전에 참가한 공덕으로 NATO에 가입되어 있으며, 군사강대국이며, 다른 이슬람 국가와는 달리 여성들도 챠도르를 입지 않고 보자기만 머리에 쓰고 다닌다.
카메라는 들고 입장하면 6,000원,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입장하면 9,000원을 별도 촬영비로내어야 한다고 하길래 우리는 각각 대표 1사람만 선정하여 카메라를 들고 들어간다. 해서 이곳 내부사진은 없다.
허나 이곳의 명물은 셰계에서 제일 큰 32m짜리 샹드리에가 있으며, 궁전내부는 금박으로 치장이 되어있어 그 호사스러움은 극에 달한다.
이스탄불은 이슬람 국가도시답게 유흥가가 없다. 단 탁심이라는 곳에 술집이 있다고 하는데 가 볼 시간이 없어서 섭섭...
우리나라에 박정희가 있다면 이곳 터어키에는 아타투르크가 있다.
육군대위 출신으로 3번의 군사혁명을 주도하였으며, 부패한 정치 상황이 발생하면 군부가 나와서 정치인들을 처벌하고 다시 원대복귀를 한다고 하니 참으로 깨끗한 군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터어키의 모든 화폐에는 아타투루크의 인물이 실려있으니 전 국민들의 존경심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남대문 시장이 있다면, 이곳에는 그랜드 바자르 시장이 있다.
재래식 시장으로 가죽제품과 터어키석을 싸게 판매하는 곳으로 유명하단다.
이곳에서 약 30분 정도 자유롭게 쇼핑을 하였다.
이곳 터어키에서 한국인에 대한 인상은 매우 좋은 편이며 물건을 사지 않아도 한국인이라고 하니, 손을 내밀며 악수하잔다. 그러면서 편하게 BROTHER COUNTRY라고 한다. 나도 터어키석으로 치장된 팔찌와 목걸이를 구입하였다.
저녁을 먹은 후 저녁 9시 50분에 그리스로 출발하였다.
그리스 아테네에 비행기가 도착하니 밤 11시.
올림픽을 개최하는 국가 답지않게 쉽게 입국절차를 마치고 CADDIA호텔에 도착하니 밤 12시 30분. 너무 피곤해서 그냥 골아 떨어졌다.
8/7(토)
자판기가 없는 나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릴 때는 반드시 문을 손으로 열고 닫고 하는 나라.
신들이 사는 나라.
그리이스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수식어가 있지만 현재는 올림픽 개최를 1주일 앞두고 있는 나라이다.
허나 아직도 메인스타디움의 지붕이 설치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진입로 공사도 도저히 1주일 내에 끝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저러나 도로 옆에는 한국기술진에 의해 만들어진 전철이 시원스럽게 잘 달린다.
그리이스말 한마디
안녕하세요 : 야시스, 야수, 야 감사합니다 : 에프까리스또(또를 강하게 발음)
천천히 : 시가시가
시가 하니깐 담배가 생각나는데 이곳 그리이스에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울 수 있단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극도의 물란함에도 불구하고 이곳 그리이스에는 술마시고 추태를 부리는 것을 볼 수 없고, 성범죄가 없다고 한다.
특히 선생님에 대한 권위는 절대적이라서 만약에 학부모가 자기 아이을 선수학습을 시켜 학교를 보낼 때에는 선생님의 호출을 받고 혼이 난단다.
그리고 학원은 철저하게 학습부진아를 대상으로 수업을 하도록 법에 명시가 되어있단다.
흠~ 역시 고대 교육의 도시 답군.
그리고 이곳 그리이스에서는 절대로 뛰어서는 안된다. 매사가 느긋한 곳이니 만큼 도둑놈 말고는 뛰는 사람이 없다는 뜻이겠지.
아침 9시 반경에 아크로 폴리스 광장에 도착하였다.
아침에 들러 보지 않으면 기온이 섭씨 50도 가까이 올라가는 오후에는 힘들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곳곳에는 올리브 나무가 즐비하다.
올리브 나무는 사람이 일부러 죽이지 않는 이상 절대로 죽는 법이 없단다. 그만큼 생명력이 끈질기다는 뜻이겠지. 이곳 그리이스에는 연 강수량이 350mm정도 밖에 되질 않는단다. 그래서 인지 다른 작물은 보이질 않고 오로지 올리브 나무만 보인다.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아크로 폴리스.
말 그대로 높은 곳의 도시란다.
제일 먼저 재판의 언덕을 보았다. 포세이톤의 아들이 강간범의 사형선고를 받은 곳이기도 하고 소크라테스가 사형선도를 받은 곳이기도 한 곳인데 하도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인지 돌이 반들반들하다. 자칫 넘어지면 큰 부상을 입을 수 도 있다.
올라가면서 헤류아티쿠스 음악당을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스승이 아내를 잃고 난 뒤에 홀아비의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세운 것인데,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려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한단다.
우라나라에서는 정명훈씨가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여기서 옛 그리이스인 페리클레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가야겠다.
자고로 현존하는 고대유적은 옛날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것이 어떻게 잘 보존이 되어서 현재의 후손들이 보게 되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인데, 페리클레스는 민주화에도 큰 공헌을 하였지만, 후손들에게 무엇인가 선물을 남겨주자고 주창을 하여 그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파르테논 신전이다.
그래서 우리 후손들은 머나먼 조상으로부터 받은 귀중한 선물이기에 당연히 세계문화재 1호로 등록을 하여야 하겠지.
기둥은 도리아식, 아테네 여신을 위해서 건립한 건물이다.
참고로 그리이스 기둥양식에는 기둥 끝이 달팽이 모양으로 말려들어간 이오니아 양식이 있고, 접시모양으로 된 도리아식이 있으며, 잎사귀모양의 코린트양식이 있다.
에렉티온 신전의 기둥은 이오니아 양식으로 되어있으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동맹에서 배신한 까리아 도시를 처벌하고 난 뒤, 후세에 배신에 대한 경고를 하기위하여 까리아 도시 6명의 처녀 동상을 만들었다.
이곳 아크로폴리스에는 고대유적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서 카메라 후래쉬를 사용하여서는 안되며 여러 가지 유적들이 많이 전시되어있으나, 아쉬운 것은 모조품이 많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 그리이스는 워낙 외세의 침입을 많이 받다보니 조금 귀하고 돈이 될만한 것은 전부 외국으로 특히 영국과 프랑스로 다 반출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어린이에게 주는 선물로 일반적인 것은 투구, 지구본, 그리고 부엉이이다.
투구는 지혜를 보호하고, 지구본은 세계를 품고 살아가라는 의미이며, 그리고 부엉이는 지혜를 상징한단다.
그렇다! 그 옛날 내 공책에는 부엉이가 안경과 학사모를 쓰고 회초리를 들고 있는 그림이 있었다.
높은 광장에서 바카스신전으로 만든 연극장과 제우스 신전을 내려다 보면서, 소크라테스가
최후를 맞이한 삘로빠부스로 향하였다.
흔히들 소크라테스가 한말로 ‘너 자신을 알라’와 ‘악법도 법이다’를 기억하는데,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가 직접한 말이 아니고 그 이전부터 있었던 말을 인용한 것이며, 실제 한말은 ‘나는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을 확실하게 알고있다’라고 했단다.
하버드대 출신 현각스님의 스승이신 숭산스님께서도 ‘오직 모를뿐’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와! 역시 훌륭한 현자들은 시대와 장소가 달라도 서로 통하는 점이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 다음 일정으로 떼까뜨리 초등학교(13번째 학교라는 뜻임)를 방문하였다.
이곳은 5월 중순 부터 9월 중순까지 4개월간 방학을 하는데, 토요일에는 한인2세들의 한국어교육을 위하여 등교한단다.
역시 한국인의 교육열은 어디가도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이곳 그리이스에는 열악한 재정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에서 박사과정까지 모든 학비를 국고에서 지원하며, 초등학교 6학년까지는 반드시 부모님이 자녀를 학교에 바래다 주는데,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에는 주위의 덕망있는 노부부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한단다.
한인교포 회장님의 인사를 뒤로하고, 점심을 먹고 나서 13:00경 에게나 섬으로가는 배에 승선하였다.
이 곳 배안의 풍경을 잠시 묘사하겠다.
승선인원의 2/3가 여성이며 대부분 모녀, 자매, 그렇지 않으면 친구사이로 보였으며 반드시 개를 그것도 엄청나게 큰 놈을 데리고 다닌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얼마나 먹어댔는지 살이 피둥피둥 쪄있고, 눈동자는 생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곳 유럽에서는 대우받는 순서가 여성, 노약자, 애완동물, 그다음이 남자라고 한다.
아마 식구들은 에게해 어느 연안으로 휴가 보내고, 그 집 가장은 열심히 돈을 벌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안근처에는 멋진 부호들의 별장이 많은데, 그 많은 재벌들이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아 그리이스 정부는 가난하다는 것이다.
이곳 에게해에 있는 숫한 섬들은 제우신이 뭇여성들과 헤라의 눈을 속이면서 바람을 피웠던 곳이다. 여자들의 환심을 사느라 그랬는지 몰라도 에게해에는 바다 특유의 짠맛과 끈적끈적한 습기가 없단다.
1시간 반 남짓 가니 에게나 섬에 도착하였다. 흰색 예배당 건물이 첫눈에 들어온다.
BC 280년 전 고대 해양도시의 하나이며 헤라클레스의 조부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섬에 내려서 수상시장의 문어구이를 맛보았으며, 무화과를 사서 맛보았는데 이곳 지중해 연안의 모든 과일은 무척이나 달고 맛이 있다.
저녁 6시 반경에 아테네로 다시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올리브 비누랑 선물 몇 가지를 사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제는 사전 약속이 없어도 2조는 그냥 모인다. 모이면 그냥 시내를 돌아다닌다.
가다가 영화관이 있어서 들어갔다. 입장료도 3유로정도 싸다 싶어 들어갔다. 꽤나 야한 영화인데 문제는 영화관내에서 이곳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이곳 저곳을 어슬렁 어슬렁 걸어다니는 통에 도저히 집중해서 볼 수가 없다.
해서 한 5분 정도 앉았다가 나와버렸다.
결국 또 길카페에서 맥주를 마셨다. 마시다 보니 우리 6기 일행들이 하나 둘씩 또 모인다.
뛰어봐야 멀리 못가는군 하면서 서로 마주 보고 웃는다.
이제는 많이 친숙한 얼굴들이다.
8/8(일)
호텔 조식후 아테네 시내를 버스로 투어하였다.
아마 올림픽 준비 때문에 버스에서 하차하기가 쉽지 않은 현지사정 때문인 듯 하다.
먼저 빠나시사이트 스타디움을 보았다. BC 343년경에 지어졌으며 말발굽 형태이다. 한쪽이 틔워졌기 때문에 경기장내 공기를 잘 순환시켜 준다고 한다. 선수 전원은 옷을 입지 않고 경기를 하였으며 여자들 중 처녀는 관람할 수 있으나 만약 유부녀가 관람하다가 들키면 돌로 쳐 죽였다고 한다.
대통령 궁과 수상관저를 거쳐 신다모아광장과 국회의사당 그리고 무명용사탑을 들러보았다.
이곳에서 근위병들의 근무자세가 무척이나 흥미롭다. 남유럽 특유의 느린 듯 하면서도 절도있는 동작이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대학로와 같은 빤스 빤 거리를 거쳐 제우스 신전을 거쳐 공항으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에 해안가에 즐비한 요트가 진정한 선박국가 다운 풍모를 보여주었다.
한참을 가다 나체 수영객들이 수영하는 해변에 도착하였다.
해안을 잠시 내려가니 진짜 발가벗고 수영을 하는데 이 친구들의 물건들이 장난아니게 하도 커서 잠시 바닷물 속에 손을 넣어보았더니 물이 미지근했다.
아하! 그래서 오그라들지 않았구나.
같이 벗고 수영을 하려다가 도저히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아서 그냥 올라왔다.
아테네 국제공항에서 저녁에 우리조가 마실 와인을 하나 샀다.
이태리 로마발 15:30 비행기에 올랐다.
이미 3개국을 들르면서 느낀 것은 비행기 보딩하는데 소용되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것이다. 보딩하는데 2-3시간이 소요되니깐 비행기로 날아가는 시간까지 합하면 하루일정이 그냥 훌쩍 지나가 버린다.
로마 공항에 도착하여 버스에 승차하니 17:00.
가이드 김병구씨가 안내를 담당한다.
이탈리안의 뜻은 소치는 사람이란다. 아마 이곳도 낙농을 많이 하였는가보다. 하나 지금은 세계7위의 경제대국이며 세계의 패션을 선도하는 곳이지 않는가?
터어키와 그리이스와는 달리 강우량이 많은 탓인지 푸른 초원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보기에 시원하고 풍요롭다.
이곳 이태리도 남유럽국가와 마찬가지로 시에스타라는 낮잠을 자는데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그냥 잔단다. 그럼 언제 일을 하느냐고. 그야 뭐 출근해서 9시 반부터 12시까지 2시간 30분정도 근무한다나. 풍요로운 여유에 그만 질려버리겠다.
가며서 저녁을 먹으러 우리 한인이 운영하는 소나무 식당에 들렀다.
이곳 이태리에는 소나무가 무척이나 많은데, 우리나라 소나무와는 달리 마치 우산처럼 생겼다. 그래서 따가운 햇볕으로부터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그 옛날 로마 병정들이 원정 나갔다가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하도 많은 병사들이 자국에서 뜨거운 햇볕 때문에 쓰러져서 죽으니깐 마치 기다란 띠처럼 소나무를 심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태리는 많은 관광객들로 인해서 자칫 길을 잃을 수 있으니깐 조를 편성하기로 하였다. 허나 우리야 뭐 그냥 그대로. 조 명칭만 2조라고 칭하였다.
그런데 호텔로 들어가는데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
이유인즉 해외여행의 경험이 많은 김환섭 단장님이 호텔의 등급을 낮추더라도 반드시 숙소는 도심가에 위치하도록 특별히 계약을 하였건만 여행사에서 일방적으로 도심 외곽에 잡아버린 것이다.
유럽 여행을 할 때 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낮에는 너무 더워서 제대로 다닐 수가 없으니 야간에 투어를 해야 하는데, 언어가 잘 통하지 않고 대중교통 수단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우리가 외곽에서 마음대로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비싼 택시를 이용할 수 도 없고...(왕복 70유로 정도라니 우리나라 돈으로 10만원에 해당한다)
결국 여행사의 버스편을 제공 받아서 로마시내로 나가기로 하였다. 단 12시 까지는 때리미 역까지 집결한다는 조건하에.
결국 우리는 이날 지도를 들고 21명이 뭉쳐서 9시부터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우선 베네치아광장을 둘러보고, 콜롯세움을 보고, 그 다음 스페인광장을 구경하였다.
이곳은 모두 그 옛날 흑백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햅펀과 그래고리팩이 열연하였던 그 현장이다.
3시간 가까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걸어다닌 결과 정확히 11시 50분에 때리미 역에 도착 한 후 버스에 승차하여 숙소에 들어와서 아까 공항에서 사온 와인을 같이 나누어 마셨다.
새벽 2시경에 취침.
8/9(월)
7시에 모닝콜이 울린다. 아침에 일어나니 엄청 피곤하다.
허나 9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바티칸 왕궁과 베드로성당이 있는 곳으로 가기위해 버스에서 내리니 집시여인이 가슴을 훌렁 열어젖히더니 애기에게 젖을 먹이면서 다가온다.
그러니깐 가이드가 매정하리 만큼 야박하게 쫒아버린다. 너무 한 것 아니냐고 하니깐 이 양반은 예전에 유럽 배낭여행을 하는 도중에 집시여인이 다가오면서 애를 자기에게 던지길래 무심코 받았는데 그 순간에 주머니를 다 털린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쓴 웃음을 지으면 바티칸 왕궁으로 가기위해 줄을 서려니깐 장난이 아니다. 일요일은 왕궁문을 열지 않기 때문에 월요일에는 이렇게 줄을 많이 선다고 한다.
나중에라도 바티칸 왕궁을 볼 때는 월요일은 필히 피하여야겠다.
해서 베드로 성당을 먼저 보기로 했다.
아시다시피 르네상스시대의 대표적인 걸작이며, 가운데 돔은 길이가 42m나 되는데 천재 미켈란 젤로가 설계를 하였다고 한다.
캬톨릭에서는 이 베드로 성당보다는 더 이상 크게 건물을 세울 수 없다고 한다.
웅장함과 그 아름다움은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리만큼 화려하였으며, 이곳과 바티칸 박물관의 내부는 내 짧은 필설로 다 이야기하지 못함을 양지 해주시길.
이때까지 유럽 여행중 보았던 부다페스트, 이스탄불, 그리고 아테네에서 본 것 모두를 합한 것 보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훨씬 더 낫다.
이원복 교수의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를 보고 대충 짐작은 하였건만 이 정도까지 대단 할 줄은 몰랐다.
이태리 넘들. 정말 조상 하나는 기차게 잘 두었다.
나는 캬톨릭 신자가 아니라서 보고서도 경외감을 잘 느끼질 못하였지만, 일반 신자들은 이곳을 한번 와보려고 원을 세우기도 한단다.
베드로 성당을 보고나서도 바티칸 왕국으로 들어가는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30분은 따가운 햇살아래 족히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했다.
오늘은 입장객이 6만은 될 거란다. 보통 하루 입장객이 4만명이고 1인당 입장료가 12유로이니 가만히 앉아서 하루에 7억의 수입이 ...
그래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그 옛날 로마의 건축물과 조각작품, 그리고 그림 이 모든 것이 이곳에 다 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주는 그림으로 시작해서 페로시우스가 메듀샤의 목을 자르는 상, 헤라클레스 상, 시저 상, 촛대의 방, 그리고 라파엘로와 그의 제자들이 그린 그림을 가득한 라파엘로의 방, 마지막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는 숨이 막힌다.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아깝지만 그 위대한 천재인 자기 자신은 정작 거죽만 남은 형태로 표현한 부분은 인간으로써 갖는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2시간 가까운 투어에서 하도 천장에 그려진 그림을 쳐다보았더니 목이 아프다.
나와서 현지식을 먹고 판티온으로 갔다. 판티온이란 ‘모든 신들’이라는 뜻인데 원래는 신전으로 건립되었으나 나중에 성당으로 개조된 것이다.
아그리빠가 원통형으로 만들었는데 로마시대의 유적 중 가장 잘 보존이 된 것이라고 한다.
가운데 천장에는 큰 구멍이 나 있으나 실내의 상승기류 때문에 비가와도 실내로 비가 많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로마시내는 시내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다. 지은 지 수백년이 지났건만 1층은 상가이고 2층부터는 사람이 살고 있다.
그리고 거리에는 전차가 달린다. 우리나라에서는 60년대에 이미 사라진 유물들이...
앞에서 만든 것을 쉽게 없애지 않는 것이 이 곳의 미풍이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재개발이라는 명분아래 만든 것을 너무 쉽게 허물어 버리는 것 같아 반성이된다.
깜피틀리오 언덕으로 갔다.
제우스 신전터가 있으며 칼 5세가 로마의 입성을 축하하기 위하여 만들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동상이 있으며, 입구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계단이 있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넓어진다. 엊저녁에 많이 걸어다닌 덕분에 낮에는 버스로 투어를 하였다.
시저의 무덤, 원로원, 개선문, 그리고 콜롯세움. 진실의 입으로 갔다.
앞에는 포세이돈의 형상이 있고 거짓말을 하면 입속에 손을 넣었을 때 손목이 잘린단다.
저녁식사 후 볼보를 얻어타고 수퍼에서 맥주를 사가지고 와서 호텔앞에서 한잔하였다.
8/10(화)
아침에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김범숙 선생님이 전화를 했다.
왜 내려오지 않느냐고? 뭐 아차. 피곤해서 모닝콜도 못듣고 그냥 자버린 것이다.
부랴부랴 양치질도 못하고 옷을 챙겨입고 7시 20분에 피렌체로 출발하였다.
피렌체 - 아름다운 르네상스의 도시
10시 30분에 피렌체에 징비하여 미켈란젤로 광장, 듀오머 성당을 보고 점심을 먹었다.
그 뒤에 단테의 집, 시뉴리아 광장, 성십자가 성당, 아르노 강가를 들러보았다.
여기서 미아 여섯 번째 사건이 발생한다.
점심을 먹고 성십자가 성당 앞에서 쇼핑을 하고 버스을 탈려고 하는데 같이 인천에서 온 윤치의 선생님이 가이드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시뉴리아 광장앞에 있으니 데리러 오라고...
아마 가게에서 물건을 사면서 순간적으로 일행을 놓쳐버린 것 같았다.
해서 우리 6기는 총 21명중에 6명이 길을 잃어버린 경험을 갖게 되었다.
14:30에 피렌체를 출발하여 18:00경에 베네치아에 도착하였다.
베네치아 - 해상도시
그 옛날 흉노족이 침입하였을 때 해상도시의 건설을 필요로 하였으며, 원목을 바다에 띄운후 갯벌로 된 바닥에 박은 다음 돌멩이를 그 사이에 부었다고 한다.
이렇게 기초를 하면 무척이나 탄탄해지는데, 그 위에 대리석 건물을 올려놓은 도시이다.
자연섬 6개를 포함하여 112개의 인공섬으로 구성되었으니, 자연히 섬과 섬 사이에는 다리와 곤돌라등을 이용하여 이동하는 수 밖에는 없었겠다.
약 118개의 운하가 있고, 410개의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비가 많이 오거나 바람이 불 때는 약 30cm가 바닷물 속에 잠긴다고 한다.
그러한 인공섬에서 상업과 무역으로 부를 얻게 되었으니...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곳 사람들의 상술은 유명하며 이태리에서 제일 물가가 비싼 곳이라고 한다.
두칼레궁과 한숨의 다리를 보았다.
그리고 반대쪽에는 감옥이 있었는데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가 그 곳에 갖혀 있었다가 탈출하였다고 한다.
이곳을 안내한 가이드는 백순철이라고 희얀하게 생긴 외모에다, 튀는 복장과 말투로 여러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이곳 베네치아에도 페스트가 지나갔는데 역시 살아남은 사람들이 ‘성모님의 건강성당’이라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성당을 만들었다.
산마르크 성당은 1600년경에 건립되었는데 가만히 보니 기둥의 형태와 색깔이 제각각이다.
가이드의 설명으로 전쟁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기둥들을 이곳에다가 설치하였다고 한다.
산마르크 광장에는 수많은 비둘기가 있는데 공무원 비둘기라 다 퇴근하고 없다고 가이드가말을 하여 좌중들을 웃겼다.
9시 30분에 35유로씩 내고 택시로 베네치아 운하를 돌아보았다.
작은 운하를 지날 때에는 다리의 높이가 낮아서 머리를 조심해야한다. 소금장수집에 있는 솟대, 관공서표기 기둥 등을 살펴보면서 바닷바람을 쐬었다.
이곳에는 대학이 하나있는데 바로 건축대학이 있다. 운하를 둘러보고 11시경에 버스에 승차하여 베네치아와 밀라노사이의 빠도바라는 소도시의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제 이틀 뒤면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 그동안 친숙해진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이곳 유럽여행에 동승하게 된 경위와 소감 등을 말하였다.
평소 우리나라 ICT교육에 지대한 공로가 많은 교원들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었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와인을 마시며 새벽 3시까지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추책스럽게도 나는 도도히 흐르는 취흥을 이기지 못하여 이 자리에도 노래를 불렀다. 산~타루치아~.
8/11(수)
오늘은 버스로 이동하여 이태리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이동을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호텔 앞에 이동장터가 생겼다. 오늘 먹을 과일을 싸게 사서 싣고, 밀라노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이태리의 넓디 넓은 평원으로 된 지평선을 뒤로하고 스위스 국경을 넘는다.
근데 국경선 통과가 마치 톨케이트에서 요금 계산하는 것과 같은 간단한 절차를 거치고, 15:00경에 드디어 스위스 땅에 들어선다.
잠시 눈을 붙였다가 밖을 보니 노면이 젖어있다. 유럽에서 처음 보는 비다.
이제부터는 잠을 잘 수 없다. 왜냐고, 주위의 경치들이 나로 하여금 잠을 청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질 않으니깐.
한마디로 너무나 너무나 예쁘다. 이 곳에서 오늘 하루밖에 잘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정도로...
높디 높은 산을 따라 지어진 예쁜 집들과, 연이어 이어지는 터널들.
‘스위스 넘들 조상은 기가 막히는데 터를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세상에나 차로 10분 가까이 달려야만 터널을 통과할 수 있다면 그 터널의 길이는 도대체 얼마나 되나!
우리는 목적지인 인터라켄까지 2시간을 차안에서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 가면서 고개를 돌리며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호수와 산, 수목, 그리고 자연과 잘 조화된 집들...
버스가 굽이굽이 고개를 돌 때마다 다음은 또 어떤 절경이 펼쳐질까 하는 기대감으로 바깥을 한없이 바라보게 된다.
믿거나 말거나 괴물이 살고 있다는 루쩨른 호수를 오른 쪽으로 끼고 한참을 달려 인터라켄에 도착하니 19:30.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밖은 온통 축제 분위기이다.
현지인들이 추는 민속춤과 스위스 민요 합창을 들으면서 조금 더 가다보니 어린이들이 밖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어른과 어린이들이 융합되는 공간이라는 것을 느끼며, 애들이 너무나 예뻐서 한국에서 가져온 마지막 인삼껌을 나누어 주게 된다.
이곳 스위스는 무공해 청정 지역이라 정말 오랫간만에 밤하늘에서 은하수와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삼숙이네 방(경숙선생님, 남숙장학사님, 범숙선생님)방에서 과일을 안주로 맥주와 와인을 마시다가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8/12(목)
오늘은 유럽 제일의 봉우리 융플라우어에 올라가는 날이다.
아침 7시에 출발을 해야 하는데, 모닝콜 소리를 못 듣고 내쳐 잔 사람으로 인해 7시 1O분에 출발하는 바람에 출발역이 아닌 그 다음역인 브런트역에서 열차를 탔다.
그기서 열차를 몇 번 더 갈아타고, 절경 아닌 비경을 지나, 긴 터널을 지나면 드디어 3,571m의 융프라워 봉우리에 오르게 된다.
워낙 경사진 곳이라 열차 철도 가운데는 열차가 밀려나지 않도록 기어가 설치되어있다.
그리고 정상 가까이에는 터널을 무려 100년 전에 16년에 걸쳐 뚫어 놓았다. 스위스 넘들 정말 무섭다. 도대체 웬 터널을 이렇게도 많이 뚫었을까? 허나 지금은 이 터널 덕에 유럽 강국들에 군사적으로 요충지로 큰 소리를 치고 있으며, 세계 2차대전 중에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았겠지.
암튼 올라갈 때와는 달리 정상에 도착하기 정상의 봉우리를 볼 수 없을 만큼 일기가 불순하다. 그리고 너무너무 춥다. 아마 얇게 옷을 입고 올라온 선생님들은 꽤나 떨었을 것이다.
이곳 정상에도 또 터널을 뚫고 물을 뿌려서 얼음 동굴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가 한국에 도착한 그 다음날 우리나라 70세의 노인께서 이 융프라우어에서 운명을 달리했다는 보도를 접하였다. 우리가 올라갔을 때에도 워낙 고도가 높아서 약간 어찔한 현기증을 느꼈으니, 그 연세에 충분히 무리가 갈 수 있었겠다.
여행 특히 해외여행은 가급적 60대 이전에 다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더 하게된다.
여행을 가기 위한 요건이라면 첫째 충분한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고, 둘째 환경이 바뀌더라도 숙면을 취할 수 있어야 되며, 셋째 어떠한 현지 음식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비위를 갖추는 것이다. 구태여 네번째를 들라면 충분한 자금이겠지.
우리는 아름다운 스위스를 뒤로 하고 점심 식사후 쮜리히 공항에 도착하여 17:50 비행기를 타고 파리 드골공항에 도착한 후, 환승하여 20:05 인천국제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8/13(금)
충분히 자는 동안 9,000km를 날아서 15:30분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여행이란 출발지로 다시 되돌아오는 것이다.
출발할 때와는 달리 담담한 마음으로 가슴속에는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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