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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으로 선명한 흑군과의 협상과는 달리, ‘자칭’ 녹군이라 불리는 세력과의 협상은 난관이 많았습니다. 볼셰비키 지도부에 협력하는 사회혁명당의 최고 원로이자 최후의 인민주의자 중 한 명인 마르크 나탄손이 직접 특사 역할을 자임하고, 사상교육 전문가인 카튜셰프가 이념적 기반이 부족한 녹군을 설득하기 위해 특사단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협상은 흑군 때와는 달리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볼셰비키와의 상호불가침에 동의한 탐보프 지역의 '청군' 민병대 지도자 [알렉산데르 안토노프]는 자신은 지역 정치인일 뿐이라며 선을 긋고 3년 후로 연기된 제헌의회 선거가 꼭 제대로 이뤄지기만을 바란다는 짧은 말을 남겼습니다. 심지어 안토노프는 다른 녹군과는 달리 현지 민병대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그의 결정이 대국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어려웠죠.
다른 유명한 녹군 지도자들의 경우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헤르손과 자포로자 일대의 녹군 지도자인 [니키포르 흐리호리우]는 ‘나의 병력은 나의 편이다’라는 말을 일삼으며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이들과 손잡겠다고 공공연히 떠들었고, 그의 부하들은 가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는 도적떼에 불과했습니다.
키이우 시외의 녹군을 이끄는 [다닐로 테르필로]의 경우에는 더 심각했습니다. 본래 시몬 페틀류라의 아군이었던 테르필로는 페틀류라가 쿠데타에 실패하고 우크라이나 남해안으로 도주하자 재빨리 편을 바꿔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는 흐리호리우보다는 사회주의자라 부를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반유대주의자였습니다. 흐리호리우와는 달리 ‘부자 중 유대인이 많아서’ 유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 유대인만을 골라 피해를 주는 자였죠.
나탄손과 카튜셰프의 ‘협상’은 빠르게 공작으로 변했습니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흐리호리우의 공적을 찬양하면서 그에게 각종 선물을 주고 경호원으로 위장한 암살자를 파견했습니다. 흐리호리우의 ‘쓸모가 다 했을 때’ 그를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 예정이었죠.
카튜셰프가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가 주도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기초한 토지개혁안과 협동조합, 자작농 등에 큰 힘을 실어주는 전환적 사회주의 경제계획안을 한 아름 인쇄해 우크라이나 전역에 퍼뜨려 녹군에 가담한 농민들을 자연스럽게 무력화시키는 동안, 나탄손은 녹군의 간부 중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며 범죄자도 아닌 극소수의 인사들을 사회혁명당 당원으로 가입시키거나 당직에서 승진시킴으로써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이는 대부분은 사실 사회혁명당과 별 관련도 없었던 녹군의 주요 지도자들의 힘을 빼는 공작이었습니다. 흐리호리우의 경우에는 이를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눈치가 빠른 자가 아니었기에 별문제가 없었지만, 테르필로의 경우에는 달랐습니다.
체카에서 암살자를 파견하는 방안이 테르필로를 영웅으로 만들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최종적으로 반려된 뒤, 남부전선 정치위원 스탈린은 ‘남은 문제는 스워지니치니에게 달린 것’이라며 1918년 노농적군의 우크라이나 진입을 허가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소비에트 러시아에 소속되어 자치를 누리는 자치국이었기에, 녹군을 대상으로 한 진압 작전은 백군을 상대로 한 전선과 별도로 분류하여 ‘특별 군사작전’이라는 기묘한 이름이 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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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농적군이 창설되고 첫 실전을 개시하자, 1918년 3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새로운 수도인 모스크바에서 제헌헌법이라 할 수 있는 기본법을 제정하였습니다. ‘제헌의회 선거로 민주적 기관을 설립하여 이 기본법을 심의케 한다’라는 제한 조건이 있었지만, 러시아 정부의 힘은 차차 강력해졌습니다. 이념적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사회민주노동당 다수파는 ‘공산당’으로 개명하였고, 크로포트킨은 ‘오직 이 당만이 공산당이라는 명칭을 쓸 자격이 있다’라고 칭찬하면서도 공산당이 지금의 순수성을 잃지 않길 바란다는 의미심장한 충고를 하였습니다.
한편 전선 후방에서는 구 협상국 세력에 대한 마지막 정리가 끝나고 있었습니다. 중국인 노무자로 구성된 부대들을 제하고서라도, 동부전선에는 러시아 제국군과 함께 동맹국에 맞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위해 싸우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이하 체코 군단이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19세기 말 지식인들의 흐름을 따라 온건한 개혁적 사회주의와 체코 및 슬로바키아의 독립과 민족국가 건설을 믿는 이들로 구성된 5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자적인 명령체계를 완비하고 장갑열차와 전차를 비롯한 최신예 병기까지 보유한 체코 군단을 기본적으로 불신했습니다.
러시아가 독일과의 단독 강화를 통해 대전쟁에서 빠져나온 뒤 체코 군단은 붕 뜬 상태였습니다. 한때의 동맹이었던 협상국이 반불동맹처럼 반노동맹을 맺고 러시아를 쳐들어오는 최악의 사태는 피했지만, 엄연히 협상국 일부였던 체코 군단이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에 대해 느끼는 배신감은 컸습니다.
체코 군단을 통째로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태워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내버리자는 강경한 안이 나온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외의 반대자가 나왔으니 바로 레닌이었습니다. 레닌은 ‘체코 군단의 바투미행’이라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방안을 내왔습니다. 이는 자캅카스 지방에 소비에트 러시아를 지지하는 동맹이 존재했기에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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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혁명 이후 자캅카스 지방은 입헌민주당이 주도하던 임시정부인 자캅카스 특별회의가 전복되고 사회주의자들이 주류를 이루는 자캅카스 위원회가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군과 그에 협력하는 아제리인들의 인종학살과 전쟁 지속의 위협에 맞서 아르메니아고원의 점령지를 계속 수호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브레스트-리토프츠크조약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이었죠.
자캅카스 위원회는 이를 위해 1918년 2월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이라는 자칭 독립국을 선포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에 밀사를 보내 ‘자캅카스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한 방어 전쟁에서 승리하는 대로 우크라이나와 같은 방식으로 러시아와 통일할 것’이라는 약속을 맺었습니다. 이는 공산당원이었지만 민주적 의사결정 절차와 평화적 갈등 해결에 신경 쓰는 자캅카스의 공산당 지도자 [스테판 샤우먄]이 자캅카스 위원회 주석이자 멘셰비키 [니콜라이 치헤이제]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결과였습니다.
이 자칭 독립국의 등장에 오스만 제국군은 매우 분노하여 ‘자고 일어나면 공산주의자 놈들이 두 배로 늘어난다’라는 명언을 남겼지만 달리 대응할 방도는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아나스타스 미코얀]을 비롯한 공산당원들은 요직을 차지하였고, 이들은 공산당원 중에서도 멘셰비키와 가장 가까운 ‘온건파’로 분류되었습니다.
레닌의 노림수는 이 자칭 ‘독립된 온건 사회주의 자캅카스’로 체코 군단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자캅카스의 일부가 된 조지아 바투미 항은 교통의 중심지이자 주요 항구였으니, 이들은 영국이 장악한 페르시아로 향하던 아르메니아고원 전선에 합류하든 동맹국과 원하는 전쟁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였죠.
물론 그 전제는 체코 군단이 우크라이나 남해안을 [안톤 데니킨]과 [표트르 브란겔] 남작 등의 백군 지휘관들에 맞서 싸워 탈환하고 수송함을 통해 바투미로 이동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레닌의 방안에 대한 반대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체코 군단의 반응은 블라디보스토크 방안에 비해 긍정적이었습니다. 일단 바투미행 방안은 블라디보스토크행 계획보다 걸리는 시간은 훨씬 짧았다는 게 첫 번째였습니다. 두 번째로는 ‘같은 전선에서 백군을 상대로 공투하자’라는 공산당의 주장이 감동적이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공산당은 체코 군단을 의심한다’라는 반쯤의 오해이자 반쯤의 사실을 불식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윽고 군사 지휘권에 간섭할 권한이 배제된 체코 군단의 정치위원으로 트로츠키의 심복 표트로프가 파견되며 ‘통일전선의 군사적 방면’ 문제는 1918년 4월 일단락되었습니다. 이는 레닌-트로츠키 정권의 승리이자,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에 종속되었지만, 혁명군으로서의 성격 또한 띈 노농적군의 화려한 데뷔를 뜻했습니다. 그것이 모두가 바란 모습은 아니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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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인간 토템으로써 욕받이 역할을 자처하며 비볼셰비키 좌파와 공산당 간의 협상 실무 처리에 힘썼던 우스트랼로프는 좌천되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에 종군하며 백군에 가담한 공화파 인사들을 끌어들이겠다고 주장하였지만, 공산당 당내의 어느 정치 지형에도 끼기 애매한 그의 입지는 여전히 문젯거리였습니다. 당내에 친한 사람은 있어도 정치적 아군이 없는 우스트랼로프로써는 자신과 성향이 비슷하다는 자캅카스 온건파들은 도대체 어떻게 정치질을 하나 궁금해하며 속을 썩였습니다.
[카를 구스타프 만네르하임]이라는 러시아 제국군 출신의 명장이 이끌며 독일의 지원을 받는 핀란드 백군은 핀란드 내전에서 친러 사회주의 세력인 핀란드 적군을 압살할 기세였고, 이는 누가 봐도 만네르하임이 승리하면 우스트랼로프가 토사구팽 될 것을 의미했습니다. 우스트랼로프가 욕받이 토템으로써의 자신의 역할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스트랼로프의 좋은 의도는 인정하지만, 그가 순진해 빠졌다고 보던 크로포트킨은 중요한 조언을 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 내에서 정치적 다원주의를 주장한다는 것이 정적들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고 이념적 순수성에 집착하지 말란 의미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준 것이었죠. 즉, ‘정치적 다원주의’를 자신의 정체성 삼고 그 정체성에 맞서는 이들과 싸우며, 그와 동시에 자신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아 성찰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 자네는 다원주의라고 노선을 확실히 정하고 그 다원주의에 반대하는 자들하고 한판 붙으란 말이야. 모두를 포용하려 하지 말고. 그건 마르크스나 프루동이 살아 돌아와도 못해. 바쿠닌 형님은 반유대주의자였어!”
“예? 반유대 뭐라고요?”
“유대 자본주의와 유대인 은행을 없애야 무소유 아나키즘이 가능하다고 했다고. 그에 비해 볼셰비키는 최소한 아직은 다른 민족을 잡아 죽이려고 하지는 않잖아. 뭐, ‘아직은’의 문제일 수 있지만, 그거야 두고 봐야지.”
이는 마르크스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조언이었지만, 크로포트킨은 마르크스와 지겹도록 말싸움을 이어가던 프루동의 후예였으니 당연하였습니다. 우스트랼로프는 크로포트킨의 조언을 마음에 새기며 핀란드로 향했습니다. 아니, 향할 예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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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단 하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차르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일가에 대한 처분 문제였습니다. 프랑스 혁명 때에도 자코뱅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형하고 그의 아들 루이 17세를 옥사시킨 바 있었으니 공산당도 똑같이 하자는 의견이 나온 것은 당연지사였습니다.
레닌의 지시로 1918년 1월 오지 토볼스크에서 시베리아의 대도시 예카테린부르크로 이송된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다섯 명에 달하는 자녀의 운명은 풍전등화였습니다. 현지 소비에트는 백군에게 황족들을 뺏기지 않기 위해 이들을 모스크바로 이송할 준비를 진행 중이었고, 이 과정에서 니콜라이 2세는 알렉산드라 황후의 비서관이었던 [콘스탄틴 리하쵸프] 공작에게 밀서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밀서는 정치적인 거래였습니다. 니콜라이 2세는 본인의 죽음이면 몰라도 일가족 전체가 허망하게 학살당하는 일만은 피하고 싶다며, 자신의 모든 비자금을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 그것도 정확히는 공산당에 넘기겠다고 정확히 지적하였습니다. 레닌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며 백군이 곧 소비에트 러시아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고 여느 때나 다름없는 현실감각 없는 망상을 하던 그로서는 꽤 놀라운 선택이었죠.
이는 콘스탄틴 공작이 니콜라이 2세를 끊임없이 설득한 결과였습니다. 황족의 비서관인 주재에 혁명가들과 어느 정도 연줄이 있는 콘스탄틴 공작은 최소한 니콜라이 2세보다는 현실적인 정세 판단이 가능했으니까요. 콘스탄틴 공작은 공산당의 최고 지도부의 정치파벌 등에 대해서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었고, 그가 아는 정보는 2월 혁명 당시의 것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공산당 내에서 안 좋은 의미로 가장 유명하며 다른 정치세력에 온건하다고 ‘알려진’ 우스트랼로프에게 접근했습니다.
무려 5천만 루블, 달러로는 450만 달러에 달하는 금액이었죠.
물론 이 금액이 엄청난 금액은 아니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국채 대부분을 감당하며 일본의 전쟁 승리에 이바지한 유대인 부호 [제이콥 쉬프]는 트로츠키에게 50만 달러 이상의 거금을 제공한 바 있었고, 7월 혁명 뒤에는 공개적이지는 않더라도 비밀리에 간접적으로 지원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의 비자금은 규모가 달랐던 데다 훨씬 더 비밀스러웠습니다. 트로츠키는 자신이 받은 50만 달러를 전부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에 쏟아부었지만, 우스트랼로프는 그럴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내용이 확실히 헤비하긴 하죠 ㅋㅋ 근데 엔딩이 너무 강해서(...) 그 부분이 약해지는게 또 틀린말은 아니기도 하구요 ㅋㅋ
+ 사실 억까 당하지 않은 국가는 없긴 한데, 거기가 제일 심했어요 ㅋㅋㅋ
@렌지파일 ㅋㅋㅋ... 만일 위안을 보냈으면 진짜 핵 공멸(...) 가능성이 높았을걸요? 종명이는 진짜로 핵 쏴서 압박, 류메이란도 공멸 생각했으니 뭐... ㅋㅋ. 진짜 그나마 드림 매치 (어케 그거 찍었냐... 싶은데...) 로 몰고 가서 겨우 막았다 싶네요?
@dear0904 신병 확보한 사람들중에 전략미사일군 사령관이 있었거든요 ㅎㅎ.. 후종밍군은 탄두를 재조립하면서 쏘는 임시방편이었고..
잿더미 위 통일정부의 가능성은 있었죠
+아마도 오늘 다음편 올립니다
@렌지파일 아. 그러고보니 탈출 실패(...) 도 있었네요 ㅋㅋ... 방금 읽고 오니, 탈출도 위안 모디였으니... 이건 넘어가고 생각하고... 잿더미 위 통일 정부... 여도 거의 망국인건 같네요 ㅋㅋ 분단과 공멸보단 낫지만서도?
+ ㅋㅋㅋㅋ... 아니 어케 속도가... 솔직히 4월 되야 다음화 올리실거라 생각 했거든요. 퇴근하고 읽으면 딱 좋겠네요 ㅋㅋ
@dear0904 중국(인구 3억)
왠지 나쁘지 않은것같지만 넘어가죠(??)
@렌지파일 어...? 왠지 나쁘지 않은것 같네요...? 물론 세계의 공장(...) 이 박살나서 물가야 좀 오르겠지만...?
@렌지파일 사실 이 모든 것은 탄소중립을 위한 큰그림이었던것…
@E.E.샤츠슈나이더 아앗... 사실은 징기스칸의 재림이었군요... 환경 보호 계획을 망친 위안차이나는 죽음으로 사죄해야(?)
@dear0904 톰페티 후계자 이름이 텐무친인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E.E.샤츠슈나이더 어....? ㄷㄷㄷ 이게 다 복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