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초기 서울이었던 유공이 서울을 떠나고
일화가 only 서울을 연고로 한 첫 프로축구팀을 창단한다.
일화천마축구단 - 서울
1990년 부터 바뀐 각 구단의 연고이전 사항을 보면
유공코끼리 - 인천,경기 --> 인천
포항제철아톰스 - 대구,경북 --> 포항
대우로얄즈 - 부산,경남 --> 부산
이 3 구단은 자신의 지역에서 지역내의 거점을 정한것이니 연고지 이전이라는
단어는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럭키금성황소 - 충청 --> 서울
현대호랑이 - 강원 --> 울산
이 두팀은 당시 두팀의 흥행참패문제로 완전히 다른 지역으로 옮긴 제대로된
연고지 이전의 첫사례이다.
현대는 고 정주영회장의 고향인 강원도를 떠나 현대중공업의 거점 울산으로,
그리고 럭키금성은 이 해 프로야구 MBC를 인수 ,서울 연고 LG트윈스를
창단했고 90년부터 럭키금성(Luck GoldStar)라는 그룹을 LG라고 모든 그룹을
통합변경하여 프로축구,프로야구 모두 서울을 연고로 한 통합 연고지의 발판이
되게 된다. (당시 일화는 강북을, LG는 강남을 연고로 한 서울 더비매치가 있었다)
이러한 도시연고제는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이어지며 중도에 유공이 연고를
서울로 다시 재이전하는것 외엔 나름대로 정착이 이루어졌다.
94년엔 전북버팔로라는 팀이 창단되었으나 감독,선수들은 월급도 못받고
시즌을 겨우 연명하다가 해체되고 이것이 현재 전북 현대의 모체가된다.
95년무렵..정몽준회장이 월드컵개최에 뛰어들것을 선언하고
프로축구의 판을 키우게 된다. 그동안 공석이었던 호남지역에 역시 같은
현대그룹이 전북현대다이노스를, 포항제철은 광양을 기반으로 전남드래곤즈를
창단하여 현대,포철이 프로축구를 2팀씩이나 거느리고..95년부터는포항제철이
아닌 독립법인 포항아톰스로 명칭이 변하고..드디어 문제의 96년에 다다른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근시안적,단세포적,무뇌아적인 행태는 90년대 중반부터
절정에 달하는데 바로 93년 출범한 일본제이리그의 운영을 고대로 본딴 전후기
리그 및 챔피언결정전,그리고 수도 도꾜를 비우고 철저한 중소도시 지역연고
제를 수행한것을 벤치마킹하기에 이른다.
어쨌든 1996년 수원삼성이 리그에 처음 뛰어들고 팀명앞에 도시,지역명을
그리고 프로리그의 지방활성화를 위해 서울구단을 강제로 축출하게된다.
당시 프로축구팬이었기에 이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기억한다.
당시 팬으로써 지방축구의 활성화는 본인도그랬고 많은 분들도 찬성했다.
하지만 매끄럽지 못했던..불씨를 남겨둔 연맹의 문제가 컸다.
96년당시 연맹의 방침에 따라 제일먼저 연고이전한 구단은 일화였다.
일화는 천안으로 이전했는데 당시 일화가 무슨생각이었느니 알순 없다.
하지만..지금도 그랬고 그때도 그랬다. 관중수,팬들은 전혀 관심없는 성적에만
신경쓰던 팀이었고 천안 경기장에 야간조명시설 되는지 확인도 안하고
마케팅,팬층등은 전혀 신경안 쓴 근시안적인 이전이었다 생각한다.
(결국 경기장문제로 성남으로 또다시 이전)
이어서 유공이 서울과 인접한 부천으로 이전했고...가장끝까지 서울 연고를 주장
하고 버티던 LG는..끝내 연맹의 압력을 못이겨 인근 안양으로 연고를 이전하게
된다.
이리하여 팀들 최종 기착지를 보면
유공(인천) -> 유공 (서울) -> 부천유공 -> 제주(sk)
럭키금성(충청) -> LG (서울) -> 안양LG -> 서울(GS)
일화 (서울) -> 천안일화 -> 성남일화
현대 (강원) -> 울산현대
일화,유공,LG..적어도 금전적으로 재력으로 부족할것이 없는 대기업이었던
이 3기업이 왜 하나같이 서울인근 위성도시로 연고이전을 꾀했을까?
엄연히 대도시이자 월드컵 개최지로 선정 새로운 축구구장이 건설될 대구,
광주같은 대도시는 비어있었고 지역적인 절대흥행을 원한다면 강릉이나 창원
같은 축구열기가 높은 중소도시가 많았음에도 굳이 서울 인근도시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타대도시가 프로야구의 인기가 높았다라는점도 부인할 수 는 없지만
처음 서울에서 나가라고 떠밀때부터 나중에 조건부 재입성을 암묵적으로
동의해준 결과다. 지금까지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연맹은 연고이전에 대해
숱하게 번복을 해왔다. 당시 월드컵개최를 위한 전국적인 축구붐을 위해
일시적으로 서울 구단들을 몰아내었고 다시 복귀의 여지를 남겨둔것뿐이다.
이래서 구단들은 서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임시둥지를 틀게 되었고 별 축구에
투자에 관심이 없었던 SK(구 유공),일화와는 달리 삼성과 함께 최대 스포츠단을
이끌고 있는 LG였기에 과연 안양이라는 둥지가 성에 찼을까 추리해본다.
수원시는 삼성의 협조도 있었지만 96년 시점 월드컵개최도시 후보로 지원할
정도로 축구에 적극적이었고 월드컵을 유치했으며 세계에 손꼽히는 최신식 전용
구장을 짓게되었다. 전자업계의 라이벌로써 라이벌의식이 강한 LG와삼성이
비슷한 서울의 인근도시였지만 H/W에서 삼성보다 모자랐던 LG가..만약 안양이
월드컵 개최도시였고 최신식 축구전용구장 이 있었다면 그래도 서울로 이전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분명히 연고이전을 통해 팬들에게 상처를 준 원죄는 크다. 하지만..
과연 패륜이라는 말은 LG에만 해당하고 다른 구단,연맹에는 비해당사항인지..
분명한건 본인이 프로축구를 보러다니던 94년,95년까지 분명히 서울에도 수많은
서울 축구팬이 존재했었고 동대문구장에는 많은 관중들이 있었다.
또한 엄연히 서울을 연고로한 프로축구팀이 있었고 더비도 존재했었다.
끝으로 정리하는 차원에서
1. 처음으로 서울을 연고로 한 당시 팀 명칭은?
-- 유공(부천 sk를 거쳐 제주) ,1983
2. 서울을 연고로 처음으로 리그 우승한 당시 팀 명칭은?
-- 일화(현 성남일화), 1993 (주:유공은 서울에서 인천,경기로 연고이전)
3. 서울을 연고로 처음으로 강북,강남 더비전은 벌였던 당시 두 팀명칭은?
-- 일화(서울강북),LG(서울강남)
4. 지금까지 자의건 타의건 한번이라도 연고이전을 한 팀들은 ?
-- LG/GS (충남,충북 -> 서울 -> 안양 -> 서울)
-- 현대 (강원 -> 울산)
-- SK (서울,인천,경기 -> 인천,경기 -> 서울 -> 부천 -> 제주)
-- 일화 (서울 -> 천안 -> 성남 )
첫댓글욕먹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죠. ㅎ 80년도의 K리그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인터넷은요.? // 이러한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것도 그 이유중 하나일테고... 그때 당시엔 리그초창기로써 정착이 되지 않앗던게 사실이죠. 자국리그 란것 자체가 거의 실업리그처럼 됬을테니 말이죠... 누가 돈을 내고 축구를 보러갔겠습니까 ㅎㅎ// 그러나 현재는 어느정도 정착되었고 인터넷도 보급되었기 때문에, 연고지 이전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네티즌의 "의견"과 그에 따른 "의견 몰이"가 따르기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생각됩니다.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0&dir_id=10081702&eid=takdvpURFoEbap4T/dBtUtftydOcBoKD&qb=vLqzssDPyK0gRkO8rb/vIL+ssO3AzMD8 성남에 관한건 여기를 읽어주셨으면 ^^;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만 ㅎ
첫댓글 욕먹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죠. ㅎ 80년도의 K리그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인터넷은요.? // 이러한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것도 그 이유중 하나일테고... 그때 당시엔 리그초창기로써 정착이 되지 않앗던게 사실이죠. 자국리그 란것 자체가 거의 실업리그처럼 됬을테니 말이죠... 누가 돈을 내고 축구를 보러갔겠습니까 ㅎㅎ// 그러나 현재는 어느정도 정착되었고 인터넷도 보급되었기 때문에, 연고지 이전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네티즌의 "의견"과 그에 따른 "의견 몰이"가 따르기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생각됩니다.
80년대의 K리그 상당히 인기 있었습니다. '인터넷의 보급과 의견몰이' 라는 부분만 공감이 가네요.
80년도가 지금보다 더 인기가 좋았는데...연고지 인식이 없었던듯....
90년대 초엔 지역 연고제가 허울만 있을뿐 경기는 주로 동대문 운동장에서만 했었죠...
그당시엔 연고지라는 개념없었음 울산으로 이전후 그때부터 연고지라는 개념이 정착되기 시작되고 성남은 뭐 종교문제 민감한 사항이라 말하기가...
그럼 내셔널리그는 얼마나 연고의식이 있는지...미포가 욕먹을 이유는 그런 잣대로보면...하나도 없을 듯
지난 아쉬운 일들은 접어두고 지금 부터라도 착실하게 연고의식을 쌓아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부터는 그 누구도 연고이전을 못하도록 못을 박아두는 ..
가장큰 이유중 하나는 인터넷이 한몫했죠..
k-리그 경기장 가보시면 알겠지만... 서포터를 제외하면 관중들 분위기는 국가대표팀보는 관중과는 다릅니다. 플레이오프때야 조금 괜찮지만.. 국대경기의 관중열정이 그대로 반영되지 못합니다.
도시연고제 시행 이전이냐 이후냐는 것도 중요한 기준이 되고, 천안일화는 어려운 사정이 있었죠.
http://kin.naver.com/db/detail.php?d1id=10&dir_id=10081702&eid=takdvpURFoEbap4T/dBtUtftydOcBoKD&qb=vLqzssDPyK0gRkO8rb/vIL+ssO3AzMD8 성남에 관한건 여기를 읽어주셨으면 ^^;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만 ㅎ
케이리그는 슈퍼리그로 출범 연고라는 개념이 없이 투어경기로 진행되다 말만 연고인 연고지놀이 하다가 (서울 공동화니 뭐니 하면서 연맹에서 연고지에서 쫓아내는.....)96년 팀명에 연고지 이름을 넣어야 한다는 규칙생기고 그때 부터가 연고지라는 개념이 생기거죠
걍 서울이 미운골 박힌거죠...........
홈어웨이가 제대로 정착된건 96년입니다. 그 후의 연고이전이 문제가 되는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