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조
눈발 속
문득 둘러보니
구시가의 악기점 터
더러 부끄러이 기웃대면
새 피가 생겨 돌고
생머리 끝에 빛이 치렁했던
그녀의 진홍색 스웨터 속 같던
유리관의 악기점
꽃도 꽃대도 다 허물어진 꽃밭
가장자리
바다가 생겨서 그만
데려가버린
로만악기점
눈발은 미처 못 가고 남아
우리들의 목덜미를 찾아들고
들어가보니 간이술점
침침히 앉아 취한 친구의 자꾸 쏟아지는 고개 뒤로
희미하게 웃는 소년 소녀
간재미찜을 시켜놓고
퍼런 소주병을 비틀어 따고
그날 낮의 백일장 심사를 되새겨보는데
나도 그 자리에 앉아 시를 쓰고 있었다
악기점을 생각하며 시를 쓰고 있었다
어머니 나도 악기가 하고 싶어요
어머니는 이름도 모르는 악기 바람의 악기
나의 시 나의 악기 나의 저녁
나의 악기들, 첼로 전기기타 거문고 트럼펫 모두 책꽂이 위에서
먼지에 젖고 있다 한번씩 두번씩 안아보던 악기들
친구는 한때 숨어 지내던 연인의 방을 찾아보겠다며 비틀비틀 문을 나섰다
나는 또 새로 병마개를 비튼다
전쟁의 폐허 때도, 쿠데타가 있던 해에도
그 자리에 있었던 로만악기점
우리들은 무너진 악기들 위에 함부로미
술을 흘린다
이제는 논쟁도 싸움도 하지 않는다
어둡구나
어둡구나
더 어둔운 데로 귀를 기울여
음악을 듣는다
별이 나올 것이다
뭇별이 파도칠 것이다
귀에서 별이 쏟아질 것이다
뺨과 목덜미가 빛으로 낭자할 것이다
세상에 없는 악기*가 될 것이다
* 김종삼「배음背音」."나는 세상에 나오지 않은 /악기를 가진 아이와/손 쥐고 가고 있었다."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창비,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