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739
■ 3부 일통 천하 (62)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8장 상앙(商鞅)의 말로 (2)
드디어 공자 앙(仰)과 공손앙(公孫鞅)의 회견날이 되었다.
이른 새벽, 공손앙(公孫鞅)은 오성(吳城)으로 사자를 보내 자신의 일정을 알렸다.
"그대가 요구한대로 우리 군사는 모두 철수했소. 나는 먼저 옥천산(玉泉山)에 가서 기다릴테니 그대도 곧 출발하시오. 나의 수행원은 3백 명이오."
위나라 공자 앙(仰)은 공손앙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는 한가로운 마음이 되어 술과 음식을 수레에 싣고 악공들까지 대동하여 옥천산으로 향했다.
수행원도 공손앙처럼 3백 명으로 제한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옥천산(玉泉山)에서 만났다.
공자 앙(仰)은 주변부터 둘러보았다. 과연 공손앙의 수행원은 3백여 명이었고, 또한 아무도 병장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마음속에 남아 있던 한 가닥 의심마저 사라졌다.
술자리는 화기애애했다.
서로 술잔을 교환하며 지난날의 우정을 되새겼다. 두 나라 수행원들도 서로 담소하며 음식을 먹었다.
위(魏)공자 앙(仰)이 데리고 온 악공들이 나와 음악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어느덧 정오가 지나고 미시(未時)가 되었다.
공손앙(公孫鞅)이 문득 수행원을 돌아보며 지시했다.
"어찌 위나라 술만 축낼 수 있느냐? 이제부터는 우리가 가져온 술과 음식을 내어 위(魏)나라 공자를 대접하라."
이것이 신호였다.
수행원 중 한 사람이 음식을 가지러 가는 체하면서 슬그머니 산 위로 올라갔다.
또 다른 두 사람은 술병을 들고 공자 앙(仰) 앞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들은 실제로 진(秦)나라에서도 유명한 역사(力士)들이었다.
한 사람의 이름은 오획(烏獲)이었고, 또 한 사람의 이름은 임비(任鄙)였다.
임비(任鄙)는 일찍이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때려 죽인바 있었다.
오획과 임비는 공자 앙에게 술을 따르고 나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잠시 후였다.
별안간 산 위에서 북소리가 세 번 일었다. 동시에 산 밑에서 함성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공자 앙(仰)의 표정이 단번에 달라졌다.
"이 북소리와 함성 소리는 어디서 나는 것이오? 설마 그대가 나를 속인 것은 아니겠지요?"
공손앙(公孫鞅)은 웃음을 지으며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내가 잠시 공자를 속였소. 나의 죄를 용서하오."
공자 앙(仰)은 정신이 아찔했다.
"우정을 팔다니? 그러고도 네가 한 나라의 재상이라 할 수 있겠느냐?"
공자 앙(仰)은 욕을 퍼부음과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 곁에는 이미 천하 역사 두 명이 버티고 앉아 있었다.
오획(烏獲)은 몸을 일으키는 공자 앙의 다리를 잡아 쓰러뜨렸다.
임비(任鄙)는 달려드는 공자 앙의 수행원들을 막았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공자 앙(仰)은 오획에 의해 칭칭 묶인 채 공손앙 앞으로 끌려나왔고, 나머지 수행원들은 곧 이어 밀어닥친 진(秦)나라 군사들에 의해 모조리 사로잡혔다.
공손앙(公孫鞅)이 진나라 장수들에게 지시했다.
"위공자 앙(仰)을 함거에 감금하라. 그리고 본국으로 사람을 보내어 크게 이겼다고 아뢰어라."
이어 포로가 된 위나라 수행원들 앞으로 가 위협을 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너희들을 살려줄 것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모두 목을 베겠다. 어찌할테냐?"
수행원들은 새파랗게 질려 한결같이 대답했다.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오성(吳城)으로 돌아가 진(秦)나라와 화평을 맺었다고 속여 성문을 열어라.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행동을 하면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오획(烏獲)이 공자 앙(仰)으로 변장을 하고, 임비(任鄙)는 수레를 모는 어자로 가장을 했다.
그러고는 위나라 수행원들을 데리고 오성으로 출발했다.
오성(吳城)을 지키는 군사들이 성 위에서 바라보니 영락없는 공자 앙(仰)과 그 일행이었다.
그들은 지체없이 성문을 열었다.
수레를 탄 채 성문 안으로 들어간 오획(烏獲)과 임비(任鄙)는 별안간 수레에서 뛰어내리더니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을 단숨에 때려죽였다.
비로소 속은줄을 안 위(魏)나라 군사들은 황급히 전투 태세를 갖췄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공손앙(公孫鞅)이 대군을 거느리고 그 뒤를 쫓아왔던 것이다.
이리하여 공손앙(公孫鞅)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오성을 점령했다. 그때부터 그는 여세를 몰아 본격적으로 위나라 도읍을 향해 물밀듯이 밀고 들어갔다.
위혜왕(魏惠王)은 대경실색했다.
도저히 군대를 내어 싸울 마음이 일지 않았다.
한(韓)나라와 조(趙)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기에도 너무 늦었다.
- 다시 화평을 청하는 수밖에 없다.
그는 대부 용가(龍賈)를 사자로 삼아 공손앙에게로 보냈다.
"매년 조공을 바칠터이니, 화친을 맺읍시다."
공손앙(公孫鞅)은 협상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지난날 내가 위(魏)나라에서 벼슬을 구할 때 위왕은 무능력하다 하여 나를 쓰지 않았소. 그래서 나는 진(秦)나라로 건너가게 된 것이오."
"다행히 진(秦)나라 군주는 나를 등용하여 재상에까지 오르게 하였소. 이런 내가 위(魏)나라를 완전히 쳐없애지 않으면 이는 하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 되오. 항복이라면 모를까, 나는 화친을 맺지 않겠소."
대부 용가(龍賈)는 초조한 나머지 입술이 탈 지경이었다.
무릎을 꿇다시피 다시 한 번 사정했다.
"듣건대 새도 옛날에 살던 숲을 그리워하고, 신하는 옛 주인을 잊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왕이 어리석어 그대를 등용하진 않았으나, 그래도 그대는 한때 위(魏)나라 국록을 받지 않았소? 옛 임금의 나라를 완전히 없애버린다니, 그것은 너무나 무정한 말씀이오."
그제야 공손앙(公孫鞅)은 표정을 다소 누그러뜨리며 생각에 잠기는 척했다. 이윽고 그는 자신이 원하는 조건을 내세웠다.
"서하(西河) 땅을 우리 진(秦)나라에 모조리 내준다면 나는 귀국과 화평을 맺고 돌아겠소."
서하(西河)는 황하 서쪽 일대의 땅이다.
지금의 섬서성 합양현, 징성현, 대려현 일대에 해당하는 넓은 땅이다.
무엇보다도 교통 및 군사 요충지로 위(魏)나라에서 매우 소중한 땅이었다.
하지만 용가(龍賈) 로서는 지금 그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도성인 안읍(安邑)이 점령당할 판이 아닌가.
"그것은............제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듯하오. 내 돌아가서 우리 왕께 그대의 조건을 아뢰어 보겠소."
공손앙(公孫鞅)은 일단 진군을 멈추고 용가를 돌려 보냈다.
용가(龍賈)는 안읍(安邑)으로 돌아와 공손앙의 요구 조건을 위혜왕에게 전했다.
위혜왕(魏惠王)은 풀이 죽어 대답했다.
"우리에게 힘이 없으니 어쩔 수 없구려. 그대가 알아서 조처하시오."
결국 용가(龍賈)는 다시 공손앙에게로 가 서하 일대의 지도를 바쳤다. 지도를 내준다 함은 땅을 내준다는 뜻이었다.
이로써 공손앙(公孫鞅)은 서하 땅을 접수하고 의기양양하게 진(秦)나라 수도 함양(咸陽)으로 개선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