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인천시 강화군 건평항에 조성된 천상병 시인 기념공원에는 천상병 시인의 동상이 있다.
대표작 '귀천(歸天)' 의 시비(詩碑)도 함께 들어섰는데, 옛날에 건평나루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시다 쓴 시가 '귀천'이라고 한다.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 전문
애주가로 유명한 시인답게 동상은 막걸리 잔을 들고 앉아 있는데, 누군가 매일 빈 잔에 막걸리를 채우고 있다.
"누가 자꾸 천상병 시인에게 막걸리를 따라주고 있다!"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 박상희씨는 "강화도에 작업실이 있어서 매일 공원을 들르는데, 갈 때마다 천상병이 들고 있는
빈 잔에 막걸리가 담겨 있었다. 추운 날은 얼어 있기도 하고 동상이 부식될까 봐 매일 치웠는데 다음 날 가 보면
또 채워져 있더라. 근처에 수퍼마켓도 없는데."
천상병은 생전 남긴 시에서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라고 썼다.
박 씨는 "동상이 조금 손상되더라도.... 시인을 사랑하는 익명의 그분과 만나게 된다면 함께 막걸리나 한잔 하고 싶다."고 말했다.
(조선일보에서 인용 : 정상혁 기자)
지난해 연말부터 네이브 뉴스, tvN 등에서 천상병 시인이 자주 떴다. tvN 에서는 마산출신 황교익이 천상병 유고 시집
[새]에 얽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또 조선일보 <장석주의 사물극장>에서도 시집 [새]를 다루었다.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 "마지막 순수시인"으로 불리는 천상병 시인은 마고 10회로 우리들의 선배다.
천상병 시인은 1930년 창원 진동에서 태어났다. (일본 효고현 히메지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으나 자필 기록을 인용하겠다)
[내 고향은 慶南 昌原郡 鎭東面 / 어린 시절 아홉 살 때 일본으로 떠나서 / 서울 사는 나는 鄕里 소식이 消然해-
어른 되어 세 번쯤 갔다 왔지만 / 옛이 안 돌아옴은 절대 진리니 어찌할꼬? / 생각컨대 칠백리 밖 鄕愁 뭘로 달래랴...
願하고니 鄕土堂山에 죽어 묻히고파 / 바다가 멀찌감치 보일듯 말 듯 淸明天然에.....] - 故鄕思念
[내 고향은 경남 鎭東, 馬山에서 사십 리 떨어진 곳/ 바닷가이며 / 山川이 수려하다.
國敎 一年 때까지 살다가 떠난 / 고향도 고향이지만 / 원체 고향은 대체 어디인가? 태아나기 전의 고향 말이다. ] - [고향] 에서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아홉 살 때 일본 효고현 히메지(姬路市)로 간 천상병은 해방 후 귀국하여 이듬해 마산중학 2학년에 편입한다.
마산고 3학년(학제 개편 후) 때 쓴 [강물]이라는 시가 김춘수 국어선생 눈에 들어 나중에 유치환의 추천을 받게 된다.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 언덕에 서서 / 내가 /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 언덕에 서서 /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 내가 /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강물 전문)
또 [갈매기]라는 시로 모윤숙의 추천을 받았고, 현대문학에 평론으로도 추천을 받아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했다.
마고 10회로 졸업한 천상병은 서울상대에 입학한다. 서울상대 재학 중 [강물]을 좋아했던 여류 소설가 한무숙의 배려로,
한무숙 소설가 장남의 가정교사로 특채되어 입주한다. 한 소설가의 남편은 모 은행장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술에 떡이 되어
들어온 천상병이 술이 부족해 한 소설가 부부가 자는 안방에 칩입해 양주라고 고급향수를 마시고는 토하고 만다. 뿐만 아니고
억병으로 취해 비단이불에 지도를 그려놓고 술이 깨자 도망을 치고 만다. 그 후 구자운이라는 분의 집에 잠시 신세를 질 때는
국민학교에 다니는 여자 아이를 불러내 막걸리를 따르게한 것이 들통나서 그 집에서도 쫓겨났다.
천상병은 서울 상대 졸업 한 학기를 남겨놓고, 은행에 취직하지 않고 문학만 하겠다고 중퇴하고 만다. 여러 사람의 충고도 뿌리치고.
현대문학에 평론도 쓰고 여기저기 시도 발표하지만 생활은 어렵다. 그래서 독일 유학을 갔다 온 마산중학 친구 강빈구한테
자주 술을 얻어마시고 다녔다. 1967년 친구 강빈구는 동백림 사건 혐의로 자취를 감추고 멋모르던 천상병만 중정에 잡혀간다.
이 때, 박종규 실장의 여비서도 구속될 뻔했는데 박 실장이 김형욱에게 권총을 들이대는 바람에 잡혀가지는 않았다.
천상병은 6개월 동안 온갖 고문을 겪으며 자식 생산을 못할 정도로 몸이 망가졌다.
1968년~1970년 사이에 무절제한 음주와 영양결핍, 등으로 거리에서 쓰러졌다. 1971년 민영 등 천상병의 절친들이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유고 시집 [새]를 발간했다. 그때 천상병은 행려병자로 서울 시립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새] 발간 기사를 보고 천 시인을 알게 된 병원장이 지인들에게 천 시인이 안 죽고 살아 있다고 연락을 했다. 이때 천 시인은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유고 시집 [새]를 들고 찾아간 지인들에게 천상병이 한 첫마디는
"그라모, 내 고료는 얼마고?" 했다. 같이 갔던 서울상대 친구 목순복의 여동생인 목순옥 여사는 인간구실도 못할 정도로
망가진 천상병의 몰골을 보고 그의 반려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 전에 천상병은 친구 순복에게 "니 동생 내 도라! 행복은 책임진다!"
고 몇 번이나 졸랐다. 1972년 4월, 43세 신랑 천상병, 37세 신부 목순옥은 많은 문인들의 축복 가운데 김동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고 의정부 수락산 자락 대문도 없는 허름한 집에 셋방을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목순옥은 인사동 좁은 골목에 전통 찻집
[귀천]을 열어 생계비를 벌었다. 천상병은 매일 아침 목순옥이 출근할 때마다 담배 한 갑, 막걸리 한 병 값을 얻었다.
한 번은 찻집 [귀천]에 나갔다가 아는 손님한테 천 원을 얻었는데 옆 사람에게 또 달라고 했다. "막걸리 한 되 값을 얻었으면 됐지
왜 또 달라느냐?"고 했더니, "모르는 소리 하지 말아! 이건 오늘 꺼구, 내일은 비가 오니까 미리 받아두는 거야!"라고 했다.
내가 천상병 부부를 처음 만난 것은 1986년 10월 15일 부산 하단 에덴 공원에서 시화전을 할 때였다. 서울의 출판사와 부산의 임 명수 시인이 주선을 했다. 나도 초등학교 때 진북에서 몇 년 살았고 마산고를 나왔다고 인사를 했더니 천 선배는 후배를 만나 반갑다고 목 여사에게 "막걸리 한 잔 따라드려라!" 고 호통을 쳤다. 서울에는 마고 출신으로 이제하 (15회) 시인, 김병총 소설가 (16회)가 있었지만 교류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천상병은 1990년 5월호 월간조선 [작가의 고향] 화보를 위해 목순옥과 함께 양복을 빼 입고 고향 마산 진동을 방문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고향 방문이었다. 천 상병 시인은 1993년 4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목순옥 여사가 찻집 [귀천]으로 출근한 후 장모와 아침 식사를 한 후 그대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 하고 걱정했는데....
목순옥 여사는 2010년 75세로 별세해 의정부 시립공원묘지에 부부 합장으로 모셨다.
의정부에도 천상병 문학 공원이 있고, 천상병 문학제도 여러
마산 에는 만날공원에 천상병의 시 [새]의 시비가 있다.
첫댓글 요즌은 바둑이 똥개가 그리운 생각이던다 .머리통에 검은점 눈 어귀에 두개 위치해 있고 봄날 되면 마루청 아래 늘어지게 쭉뻗어 누워 있다가도 몇개월 만에 고향집에 찾아오는 가족들 보면 꼬리 흔들면서 반가워 해주는 바둑이 강아지 .살겨먹이고 음식 찌꺼기 먹이며 키우는 검은 돼지가 콜콜소리내면 ,들판 가 풀 한지게 해 먹이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순진하던 별욕심없던 어린시절이 고생 서러운 시절이지만.삭막한 지금 편하고 좋을것 같아도.돈이 무엇이지도 잘모르던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