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을 보존하고 '무명'을 다스리는 게 예배다
'혜가'의 물음에 대한 '조사'의 대답이 계속 됩니다.
『'예배'(禮拜)란 <항상 법(法)답게 한다>는 뜻이니, '진리의 본체'(理體)는
안으로 밝고, '현상계의 모습'(事相)들은 매양 밖으로 변하는데,
'이'(理)는 버려질 수 없고, '사'(事)는 '드러남과 숨음'(行藏)이 있다.
이와 같은 이치를 이해하면 비로소 <'법'에 의지한다>고 하느니라.
대저 '예'(禮)란 '공경한다'는 뜻이요, '배'(拜)란 '굴복한다'는 뜻이거니와,
'참 성품'(眞性)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을 '예배'라 하느니라.
(참 성품을) 공경함으로써 감히 등지지 않고, (무명을) 굴복시킴으로써
방일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니, 만약 능히 '나쁜 생각'(惡情)이 영원히 멸하고,
'선한 생각'(善念)이 항상 존재한다면, 비록 겉으로 (예배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항상 예배하는 것이 되느니라.
작용(用)하면 곧 드러나고 버리(捨)면 곧 숨는 것이니, 밖으로 드러나고
(동시에) 안으로 밝아지는 것은 오직 성·상(性相)이 상응하여야만 하느니라.
만약 겉모습의 예배에만 집착하고, 안으로는 탐내고 성냄을 방종(放縱)하게
하면서 늘 '악한 생각'(惡念)을 일으킨다면, 밖으로 공연히 외양만 드러내어
거짓으로 예경(禮敬)하는 것을 어찌 '예배'라 하랴?
성현을 기만하는 것이니, 윤회를 면치 못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꽤 열심히 공부한다는 불제자도 매일 아침 백팔배(百八拜)를 하지 않으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하니, 중생의 의타심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
알 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입만 벌이면 '정각'(正覺)을 되뇝니다.
맹목적으로 절을 하는 마음과, '정각'을 이루는 마음은 그래도 그 근본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말해야 할까요? 말인즉 옳은 말입니다.
'얼음'과 '물'은 분명히 그 본질에서 다르지 않지만, 그러나 직접 그 마음에
와 닿는 뜨거운 열기가 없다면 그 '얼음'이 어떻게 저절로 녹아서 '물'의 넉넉한
덕용(德用)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얼어붙은 '마음'의 얼음을 녹일 수 있는 '열기'라고 말한 건, 결코
"정각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해탈하고야 말겠다"는 그런 열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인과법'에 갇혀 있기 때문에
'유위행'말고는 아는 게 없지요. 그래서 무슨 일이건, 그것이 어려운 일일수록
<이루고 허물고>(成壞) 하는 데에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것인 줄 압니다.
이런 말도 참 조심스러운 게, 이런 말을 들으면 곧 그 반대쪽에 가서 달라붙을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 즉 애쓰고 노력하는 건 다 유위행(有爲行)이므로, 오직 '함이
없음'(無爲)만을 옳은 것으로 삼아서, 수행을 하지 않을까 봐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즉 <'닦되 닦음이 없는 닦음'(修無修修)의 도리>를 알지 못하는 거죠.
― 따라서 늘 이쪽 저쪽으로 내닫기만 하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는 그 마음의
'얼음'은 더욱 단단히 얼어붙을 뿐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결국 그와 같은 '열의'는 마음을 더욱 들뜨게 만들어서, 끝내는 그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그렇게 들뜬 마음은 '참 성품'을 등지고, 더욱 치성하게 밖으로 내달으면서
'무명'의 두꺼운 구름장을 더욱 두껍게 할 뿐이니, 이야말로 동쪽으로 가야 할
사람이 서쪽을 향해 내닫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이 그대로 '부처'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가지고 '마음' 밖의 '부처'를
예경(禮敬)한다는 건 '마음'을 가지고 '마음'에 예배한다는 뜻이니,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 안으로 본래 스스로 청정한 '마음의 성품'을
잘 보존하고, 밖으로 뭇 경계의 허망함을 철저히 간파해서, 나날이 그
<무명의 거친 기운>을 쉬게 할지언정, ―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보고, '마음'으로써 마음 바깥의 '부처'에 예배한다면, 어느 세월에
「'마음'이 그대로 '부처'인 도리」를 깨달아서 '청정한 자성불'(淸淨自性佛)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도 예에 따라서 다시 "예불을 해야 하는가" "예불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 하고
논쟁의 불씨를 댕기겠지요? ― '예불'이란 어디까지나 캄캄한 무명중생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성인'들이 베푼 방편일 뿐입니다. ―
오직 통틀어 '참된 하나'(眞一)일 뿐, '마음'도 '부처'도 다 세간법을 따라서
굴려지는 '빈 말'일 뿐인 겁니다. 이 '참된 하나'가 우뚝 드러나는 마당에선
'사람'도 '마음'도 '부처'도 '예배'도, 이 모든 게 다 '허공꽃'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심지어 그 '참된 하나'까지도 말입니다. 따라서 '예불'을 하건 하지 않건,
'깨달음의 성품'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명심할 일입니다.
'예불'에만 매달리는 자는 더딜 것이요, '예불'을 하지 않는 것으로 옳음을 삼는
자도 허물 되기는 마찬가집니다. 만약 진정한 본분납자라면 오직 순일한
허공성으로서의 '본분'밖에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밖에 '모습'이 있고, '이름'이 있는 온갖 존재는 오직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드리워지는 '업의 그림자'(業影)일 뿐입니다.
만약 마음 밖에 티끌만한 한 법이라도 '있다'고 본다면 이 사람은 청맹과니
소리를 면치 못할 거예요. 문자 그대로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하나만이
존귀할 뿐입니다>(天上天下唯我獨尊).
- 대우거사의 <그곳은 부처도 갈 수 없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