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이처럼 반가웠던 적이 근래 없었습니다. 비 오는 풍경 보면서 책장을 뒤적거리다 김연수 책을 발견해 몇 장 넘기던 중 문득 예전에 썼던 글이 생각나 옮여옵니다..이유는...비가 와서 입니다....ㅋ 반가운 비..처럼 한동안 이곳에 글이 아니 올라와 실망했을 회원분들을 위해 글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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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삼청동에서 김윤석 인터뷰가 있었다. ‘추격자’ 때 인터뷰를 했기 때문에 어색하지 않았지만 ‘거북이 달린다’는 할 말이 많은 영화는 아니었다. 인터뷰를 마친 시간이 낮 12시쯤. 보건복지부에서 홍보 담당하는 K를 만나기 위해 정독도서관 앞을 지나 재동 헌법재판소 골목길로 해서 현대사옥까지 갔다. K를 만나 생태찌개에 소주 한 병을 점심으로 먹었다. 다시 재동 골목길을 지나 정독도서관 앞의 씨네코드 선재로 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 시사를 봤다. 영화와 상관없는 배두나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기사를 마감, 덕성여고 돌담길을 거쳐 안국동으로 나왔다. 고장 난 휴대폰을 고치기 위해 용산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마침 안국동 사거리에 삼성전자의 AS기사가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길을 찾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종로에도 삼성전자 AS센터가 있을 것 같아 물어봤다. 종로 르메이에르 타운에 있다고 가르쳐줬다. 너털너털 조계사 앞을 지나 르메이에르타운에 위치한 삼성 애니콜 서비스센터에 갔다. 사십여분을 기다려 수리를 맡길 수 있었다.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지난 5월말에 산 김연수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 입니다’를 폈다. 주말에 읽으려다 끝내 첫 장을 펴지 않았던 책이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이란 단편이었다. 어떤 작가이기에 주변의 지인들이 이 사람을 이야기했을까? 하는 호기심에 몇 자 읽다가 이내 속으로 풋풋거렸다. 그의 단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박혀 있었다.
-총총히 정독도서관을 향해 비탈진 언덕길을 올라가느라 땀이 슬맺힌 교복차림 여학생들의 쇄골 안쪽 살갗이며...
-잠깐이나마 말이 끊기던 그 사이로 누기진 바람이 새들어오던 유월하고도 중순이었다. 가회동 큰길을 따라 다시 율곡로 쪽으로 걸어내려갈 즈음...
-장마가 머지않은 끄느름한 하늘빛이 그대로 배어든 듯한 헌법재판소 담장 너머로 뭉툭한 우듬지를 빼죽거리는 청단풍이며 산수유며 왕벚꽃 따위의 키작은...
-그녀는 커피숍이 많은 인사동 쪽이 아니라 다짜고짜 송현동과 안국동 사잇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선재아트센터에 우리가 몇 번 가봤던 커피숍이 있으니까...
-내가 헌법재판소 뒤에 있는 그 나룰 보러 가리라 마음먹은 일은, 그러므로 당연하다. 자, 이제 나는 살아서 서른네 살이 됐고 그 나무는 육백살이 넘었다...
살아가다 가끔 공명의 순간이 온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순간 무언가와 무언가의 텔레파시가 교감해 빈틈없는 일상에 ‘신비’라는 단어가 번뜩 떠오르는 순간이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주말 내내 시간이 있었음에도 나는 김연수의 책을 펴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AS하기위해 기다리던 그 순간 먼저 꺼냈던 것은 오늘자 신문들이었다. 하지만 왜 였을까? 그 시간 나는 김연수의 책을 폈고 그 책의 첫 번째 실린 단편을 읽었다. 그리고 그 소설속의 공간이 오늘 내가 돌아다녔던 공간과 계절이 일치했다는 것이 아득했다. 평소 지나쳤던 헌법재판소의 백송을 어인일인지 길가다 잠시 멈추고 뚜렷이 노려봤다. 선재아트센터는 오늘 시사회가 열렸던 씨네코드 선재의 옛이름이다. 정독도서관을 내려오며 얼핏 보던 여고생들의 모습 역시 그 책에 그대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소설의 화자는 나와 같은 서른 네 살이었다. 책과 나는 공명했던 것이다.
휴대전화가 다 고쳐졌다고 부를 때 까지 나는 책을 덮고 있었다. 기묘한 느낌이 싫지는 않았고 이렇듯 가끔 내 삶의 개별성을 자극하는 우연의 순간을 음미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챙겨 르메이에르 빌딩을 나왔다.
광화문 교보에 가서 수많은 소설책들에 쓰인 작가의 이름을 보며 내 삶에도 저런 날이 올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요즘 젊은 작가들의 생년월일을 확인했다. 나와 비교했을 때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나이. 그런데 저 사람들은 어디서 저런 글들이 솟구쳤을까? 시샘하고 부러워하고 나도 할 수 있어 스스로 으쓱하다 문득 사람과의 공명이 그리웠다. 다행히 그 시간에 나의 연락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나는 그 공명들보다 소소한 약속으로 만날 그 인연들이 오히려 이 삶의 허기를 채워주는’- 이렇게 마무리하지 못했던 오래전 문장에 대해 또 한 번 생각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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