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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해외에서 친 소비에트 여론을 조성하되, 다른 한 편에선 황가의 망명을 주선하란 것이오?”
“그렇습니다. 우리 지도부는 황가를 증오하지만, 수천만 루블에 달하는 금액과 백군 및 반혁명 세력에 대한 모든 지원의 중단과 황가의 목숨은 비교할 가치도 없습니다. 권력도 없는 야인일 뿐 아닙니까.”
“불편하지만 사실인데.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했소. 항구에 묶여 있는 내 배도 풀리는 것이오?”
“그건 당연합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사유 재산은 부정의 대상이지만, 공작의 배 선원들이 갑자기 소비에트를 결성할 게 아니라면 이런 상황에서 압류할 이유는 없습니다.”
크로포트킨의 말을 들은 뒤로 어떠한 사고방식의 변화가 있었는지, 우스트랼로프는 5천만 루블의 사용처를 마음대로 정했습니다. 1천만 루블은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에, 1천만 루블은 콘스탄틴 공작 본인에게, 3천만 루블은 ‘자신의 파벌’이라는 모호한 세력에 돌리겠다는 것이었죠. 공식 발표마저도 3개월 뒤로 미뤘습니다.
그리고 대학물 먹은 지하 혁명운동가답게 위조에도 일가견이 있던 우스트랼로프는 콘스탄틴 공작과의 밀서에 다른 사람의 필체를 위조해 적었습니다. 다름 아닌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인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의 이름이었죠. 그 내용은 ‘공산당이 황가를 재판 없이 즉결처분하지 않을 것이며 러시아의 실정에 책임이 있는 이들에게만 극형을 선고한다’라는 애매모호한 것이었습니다. 이어 콘스탄틴 공작도 알지 못하게, 이 밀약의 내용을 러시아의 전 황족 중 한 명인 [키릴 대공]에게 지노비예프의 이름으로 보내기까지 했습니다. 외국으로 도피한 후 친소비에트-친로마노프가 여론을 조성하라는 내용이었죠.
명망도 높고 통일전선과 동질적 사회주의 정부를 지지하기도 한 인사였던 지노비예프는 7월 혁명 당시 무장봉기를 반대했다 덤터기를 쓰고 자숙 중인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본래부터 온건한 인사로 분류되는 레프 카메네프와는 달리 대단히 권위적인데다 [미하일 프룬제]와 같은 아군까지 있는 지노비예프는 재기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우스트랼로프의 계획은 차후 콘스탄틴 공작과의 조작된 거래를 폭로해 지노비예프에게 타격을 주고 그 영향력을 뺏어오는 것이었죠.대권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아군을 규합하고 욕받이 토템 신세를 탈출해 중앙 정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노리겠다는 우스트랼로프의 계획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 계획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는 시간이 말해줄 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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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4월 우크라이나 녹군의 ‘탈도적화’ 작업이 끝나고 사회혁명당 소속이지만 친공산당 성향을 보이는 [알렉산데르 예고로프] 중령이 항복하거나 전향한 농민 출신 군인들을 중심으로 창설된 '녹색농민여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며 ‘특별 군사작전’은 종료되었습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혁명 및 조국 수호위원회를 비롯한 백군에 비해 한 줌도 되지 않던 녹군의 세력을 상대로 한 승리는 큰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통일전선을 중심으로 한 연립정부는 공산당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와 남러시아에서 원하는 만큼 식량을 공출할 수 없었으며, 이는 군량미의 감소를 불러왔습니다. 자본가와 지주의 지원을 받는 백군이 원하는 만큼 농민들을 수탈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죠. 카튜셰프가 설득과 선동을 겸하여 농민들에게서 식량을 최대한 뜯어냈지만, 여전히 한계는 존재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노농적군은 27개 군단에 달하는 대병력을 서류상으로 보유하고 있는 게 무색하게 되었습니다. 대전쟁 발발 이전 기준으로 약 6만 5천 명에 달해야 하는 러시아의 소총군단은 오랜 전쟁과 분쟁, 군량미 부족, 탈영과 해산을 겪으며 실질 인원이 그 절반 정도에 달하는 참담한 숫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전투 병력이 90만에 달한다고 우겨볼 수는 있었지만, 그중 대다수는 새로이 편성된 병력이라는 게 문제였습니다. 구 러시아 제국군 장교진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트로츠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체코 군단 같은 외국군이 핵심 전력의 일부가 될 정도로 노농적군은 부실했습니다. 이는 핀란드 내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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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군사고문단이 아르한겔스크와 무르만스크의 백군 점령지에 상륙하는 사이 우스트랼로프는 헬싱키에 당도했습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습니다.
수천만 루블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이 생긴 것은 좋았지만 핀란드 내전의 향방은 그러한 막대한 금액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의 회의에서 우스트랼로프는 ‘자생적 사회주의 정당이 봉기한 핀란드를 통 크게 지원해야 다른 국가에서도 혁명의 연쇄가 일어난다’라고 주장했지만, 북부 전선에 배정된 병력은 3개 군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마저도 핀란드, 정확히는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에 파견되는 병력은 핀란드의 주권을 존중하는 독일과의 평화조약을 준수한다는 의미에서 국제 의용병을 가장한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대다수 병력은 핀란드 백군과 손잡은 [게오르기 차플린] 제독과 [예브게니 밀러] 중장의 [북부최고행정부]를 상대로 무르만스크와 아르한겔스크를 탈환하는 데 투입될 터였습니다.
우스트랼로프는 핀란드를 자신의 실험대 삼았습니다. 콘스탄틴 공작이 제공한 비자금 중 100만 루블을 핀란드에 쾌척하는 한편, 핀란드 적군을 ‘민주주의와 대중주의, 평화주의와 정통 사회주의’로 포장하고 백군을 독재와 학살, 지주와 기업가 등의 세력으로 낙인찍는 것이었죠.
“아까 사형 집행의 중단이라는 단어를 말한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사형을 멈추라는 게 아닙니다. 사형 집행의 중단입니다. 토지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핀란드가 통일된 후에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해놓고, 몰수할 때 지급한 채권의 가치를 소멸시키고 분배자들에게서 유상 지불을 받지 않으면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1월에 통과된 법안은 너무 급진적입니다.”
“우스트랼로프 동무는 너무 유화적이고 온건한 것 아닙니까?”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전위당이 아니라 대중정당이잖습니까. 인제 와서 전위당이 되려 하면 안 됩니다. 핀란드의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겁니다.”
노동계급 독재나 평의회 민주주의 등을 생각하던 소비에트 러시아의 대표단은 우스트랼로프의 방책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핀란드 사회민주당은 러시아 공산당과 달리 명확한 패권을 쥔 자생적 대중정당이었기에 우스트랼로프의 조치도 효과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사회민주당은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처럼 온건파와 강경파로 당을 나누는 대신 대단결을 외치며 좌익 빅텐트 정당으로 남기로 하였으며, 사형 ‘집행을 중지’하고, 우익의 토지개혁안을 ‘임시적’으로 수용하는 등의 조치가 뒤따랐습니다. 이는 후일 핀란드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 더 강경한 정책을 펴기 위한 기만책이었습니다.
본국 러시아에서의 지원도 존재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핀란드의 동지들을 그냥 저버릴 수는 없다’라는 주장에 따라, 체카와 파우코이는 러시아 백군과 핀란드 백군을 단절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특히, 백군의 최고지도자 콜차크 제독이 ‘핀란드는 러시아의 분리될 수 없는 핵심 영토’라는 발언을 한 것을 핀란드 백군의 최고사령관 만네르하임에게 유출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이는 두 곳의 외국에 예상치 못한 나비효과를 낳았는데, 바로 독일과 스웨덴이었습니다. 첫 번째로는 독일군 발트해사단의 철수였습니다. 본래 발트해사단은 독립국 핀란드의 군항을 임대하고 정부수립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위성국을 설치하기 위해 주둔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돕던 핀란드-러시아 백군이 브레스트-리토프츠크 조약을 준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남의 전쟁인 핀란드 내전에 더는 개입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스웨덴이었습니다. 유럽에서도 가장 이른 사회민주주의 정부 중 하나가 들어섰던 스웨덴과 사회민주노동당은 사실 성향으로는 러시아에서 축출된 케렌스키 정권에 가까운 중도 좌익이었지만, 핀란드 사회민주당이 ‘온건화’하며 자신들과 유사한 성향을 보이자 태도를 바꿨습니다. 그들은 백군을 배신하고 스웨덴계 주민이 거주하는 올란드 제도를 해군으로 점거한 뒤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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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트랼로프가 정치적 공작을 일단락하고 서부전선의 소문과 전황을 참고해 산탄총을 밀수하는 사이, 러시아의 내전은 다른 지역에서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맞고 있었습니다. 다른 전선은 몰라도, 스워지니치니가 지휘하는 남부 전선에서 노농적군이 엄청난 대승을 거둔 것이었습니다.
스워지니치니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정치위원 스탈린이 그 전공에 감탄하고, 함께 좌천되다시피 파견된 바레츠노프가 ‘전공 나누어 먹기’를 요청하는 게 가능할 정도의 대승에 소비에트 러시아 지도부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노농적군은 크림반도에 번개처럼 진입해 흑해함대와 귀중한 주력함들을 장악했고, 남부 백군의 지휘관인 데니킨과 브란겔은 시베리아로 도피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1918년 5월부터 몇 가지 당황스러운 소식이 남부에서 올라왔습니다. 노농적군이 학살과 적색테러를 저지르고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정치위원 스탈린은 ‘인민의 적과 혁명의 적을 진압하고 있다’라고 담담하게만 평했지만, 크림반도의 공산당 지도자인 [미하일 크리스티]와 당간부 [예브게니아 바가투랸츠]는 즉결처분과 약탈, 납치와 고문이 일상화되었다는 호소문을 모스크바에 전달했습니다.
크림반도의 해안가에는 학살된 사람들의 시체가 파도에 밀려 돌아왔고, 브란겔이 남겨놓은 반혁명 운동가들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잔인함이 드러났다며 선전에 열을 올렸습니다. 이들에 맞서 노농적군이 반혁명 운동가로 의심되는 이들을 즉결처분하며 여론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공산당 지도부 대부분은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지만 몇몇 인사들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자신의 실질적 지도자 위치를 위협하는 이들에게는 가차 없었던 레닌과 정권 내 온건파인 멘셰비키를 비롯한 온건파들은 이에 분노해서 연일 남부전선 최고사령관인 스워지니치니와 정치위원 스탈린을 맹비난했습니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정점을 찍은 것은 구 러시아 제국군의 장성이었던 [파울 게오르크 폰 렌넨캄프]의 처형 사건이었습니다.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군을 붕괴시켰다는 악명, 러일전쟁의 영웅이라는 위명, 1905년 혁명을 무력 진압한 인민의 적이라는 세 가지 면모를 가지고 있는 폰 렌넨캄프는 타넨베르크 전투 이후인 1915년 예편하여 남러시아 타간로크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타간로크 주변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고, 데니킨의 군대가 타간로크로 역습해오는 과정에서 스워지니치니와 스탈린은 폰 렌넨캄프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노농적군의 지휘관 자리를 명목상으로 폰 렌넨캄프에게 제공한 뒤, 예상된 거절을 들은 둘은 폰 렌넨캄프를 총살하고 암매장했습니다.
인민의 적이자 혁명의 적이었던 폰 렌넨캄프의 죽음을 정말로 슬퍼하는 이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도부 중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 과정과 결과가 문제였습니다. 인민위원회는 즉결처분과 재판 없는 사형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발표한 지 오래였고, 법무위원 이사크 스테인베르그는 온갖 욕을 뒤집어쓰면서도 그 포고령의 효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7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전설적인 혁명군 지도자 스워지니치니가 공개적으로 인민위원회 포고령을 어기고 나름 명망 높았던 구 러시아 제국의 귀족 출신 전 장군을 총살한 일은 큰 논란으로 번졌습니다.
얄궂게도 모든 혁명의 적을 공평히 죽여버린 스워지니치니와는 달리 소비에트 러시아 지도부는 자신들이 하는 선전과는 다르게 ‘모든 인민을 평등하게 대우’하지는 못했습니다. 폰 렌넨캄프의 죽음은 그러한 그들의 이면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유명 인사의 사형을 과장되게 알려 스워지니치니를 공격하는 데 핑계로 사용되었으니까요.
비난의 집중포화를 정면으로 맞지 않은 스탈린도 악명을 뒤집어썼습니다. 공산당원들과 좌파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스탈린은 믿을 수 없는 자라는 인식이 지도부 내에 서서히 퍼졌습니다. 남부전선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었음에도 스워지니치니는 모스크바로 다시 소환되었습니다. 그는 처벌받지 않았지만, 승전의 영웅으로서 누려야 할 혜택을 단 하나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흑군과의 공투를 지휘하느라 노농적군의 군사 정치적 반혁명 대처 활동에 대처할 수 없었다’라는 정중한 표현을 올린 바레츠노프는 실제로 그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적었다는 것이 증명되어(혹은 단지 스탈린과 스워지니치니만큼의 거물은 아니었기 때문에) 공격을 피해 갔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스워지니치니와 바레츠노프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체스 동호회’는 스워지니치니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스워지니치니가 탄 모스크바행 열차에는 얄궂게도 크림반도에서 노농적군에 체포된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마리아 황태후와 동생인 크세니야, 올가 등이 타고 있었습니다. 평소 재판 따위 필요 없고 로마노프 황가를 기관총으로 쓸어버리자고 주장하던 스워지니치니의 등장에 로마노프 가문 인사들은 긴장했지만, 스워지니치니는 길거리의 돌덩이를 보듯 그들을 무시했습니다.
첫댓글 남부 전선 승리가 이렇게 짧게 언급만 되다니...ㅜㅜ...
그거랑 별개로 승리의 이면과 볼셰비키 내부 대립이 나왔군요.
+ 근데 공평하게 적이라면 다 죽이는 스워지니치니랑 비교하는 문구가 나오다니...
솔제니친이 점점 고립되가는 거 같은데... 기분탓인가?
파리 코뮌에서 나폴레옹 같은자가 등장할까봐 군 관련 인사를 지속적으로 견제한걸로 아는데 그거랑 비슷한거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솔제니친은 혁명을 주도한데다 내전에서 대전과를 거뒀는데.나폴레옹과 비슷한 행보로 보일 소지가...본인이 그런거 없다해도 안믿는게 당연하죠.
소설에서도 그런 경우 있구만.
+ 게다가 혁명과정에서 일방적으로 케렌스키등을 죽였으니...
평등하게 죽이는 스워지니치니… 마침 칼란다리쉬빌리도 이 무렵이면 캅카스에서 도살장 운영하던 때 아닐까요? ㅋㅋㅋ
지위고하나 출신등을 막론하고 죽음은 평등하다는걸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ㅋㅋㅋ
이야... 이렇게보니 잘도 적백내전 승리했네요. 이러고도 앞으로 상승일로만 걷다니(..)
우스트랼로프의 흑화.. 견제 받는 사령관.. 이번엔 무사히 부하린-트로츠키 체제가 이뤄질 것인가 ㄷㄷ
놀랍게도 저게 원역사보다 훨씬 개선된 상황이니, 저기 묘사된 것보다 열등했던(?) 실제 적군에게 패배한 백군은…
백군 시점이면 진짜 눈 뜨고 못 볼 수준 아닐까요 ㅋㅋㅋㅋㅋ
@E.E.샤츠슈나이더 근데 사실 백군이 이기긴 힘들었을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게.장비는 좋고 외국 지원도 있는데 병력수가 딸리는데다 지휘체계가 통일되지 못한것 같아서.
어쩌면 백군이 이겼어도 결국 이후 정국 주도권 갖고 대립하다 최악의 경우 또 내전이 벌어졌을지도?
@E.E.샤츠슈나이더 실제로 백군은 군기도 적군보다 나빴고, 유대인 학살을 마구 저지르는 나치의 전신같은 사고방식에 머리 여럿달린 히드라였죠 ㅋㅋ
@렌지파일 아무리 무장상태가 좋고 외부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해도 그런 상황이라면 이기는건 사실상 무리죠...차라리 지휘체계라도 통일되 있었다면 뭐라도 해봤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니
@E.E.샤츠슈나이더 사실 부랑자 신세가 되기 전 마지막 전쟁이었던 것(..)
하긴 모스크바 점령도 코앞까지 같던 것 같은데 그럴 법 했네요 ㄷ
@렌지파일 ???: 헤일 하이드라
@렌지파일 신기한건 이미지는 그렇지 않다는걸까요 ㅋㅋ... 아님 관심들이 적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dear0904 관심도 관심이지만 이념이 영향 끼쳤을 가능성도 있을것 같은데.
더하면 정치적 논쟁으로 변질될것 같으니 일단은 이정도만 말할게요
@dear0904 관심이 적어서일겁니다. 공산주의 아닌 러시아의 군대는 어차피 21세기에도 막장인 상태 그대로기도 하고요(?)
@렌지파일 아앗(...) 너무 맞는 말이라 아픈데요...?
@렌지파일 진짜 세계 2위 군사력은 어디로 간건가 싶긴 한...
아니 잠깐 ㅋㅋㅋ... 우스트"랄료"프가 아니라 우스트"랼로"프 였네요 ㅋㅋㅋ... 이 무슨 스타크래프트 멩스크도 아니고 ㅋㅋ 멩크스로 알고 있다가 엄청 나중에나 알았는데...
+ 근데 조금씩 쓴 맛이 나긴 하는군요... 전쟁은 비정한 일이지만, 생략된 부분이 더 자세해지니...
전 전에 글쓸때 아조레스를 아제로스로 쓴적도 있는.ㅋㅋㅋ
왼쪽오른쪽 헷갈린적도 있고.
형이 그걸로 오랜기간 놀려먹었죠...ㅎㅎ
+ 리메이크의 매력이죠.
원작에서 안나오는게 부각되는것 같은
미란다가 사실 미린다라는 걸 알아버린 그 기분(?)
@E.E.샤츠슈나이더 아 ㅋㅋ 진짜 그 기분이었습니다 ㅋㅋ 혹시 몰라서 우스트랄료프로 검색 했더니 글은 없고 제가 쓴 댓글이 ㅋㅋㅋ... 그래도 혼자만 틀린건 아니었더라구요 ㅋㅋㅋ
모르셨어요?
@돈이 곧 진리 네(...) 아무도 안 말해줬고,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동일한 인물을 지칭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철자까진 안 뜯어보는게 정상이잖아요...? 갑자기 너무 잘 보여서 오늘에서 알았다만은...
저도 틀리시는줄 몰랐네요 (...)
@렌지파일 이름 말할때는 보통 급박했을때니 그럴만 합니다 ㅋㅋㅋ... 거기다 위에도 말했지만, 동일 인물이면 한 두글자 틀려도 모르더라구요(...) 아니 근데 이제 와서야 안게 더 웃깁니다 ㅋㅋ
@dear0904 레닌 본명도 ‘율리아노프’로 알았었는데 사실 울리야노프(Ульянов)였죠(…)
@E.E.샤츠슈나이더 ㅋㅋㅋ... 그니까 발음이 안 이상하면 진짜 몰라도 이상하지 않아요 ㅋㅋㅋ
+ 거기다 율리아노프면, 러시아 이름을 대강 아는 사람이면 더 착각 가능성이 높기도 하네요 ㅋㅋ 율리아라는 이름이 대번에 있으니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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