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식디미방'은 실증적 요리서로서 최초이다.
물론 '음식디미방'이전에도 요리책은 있었지만 대개가
한문으로 쓰인 것이고 또 간단한 소개 정도로 그쳐
실용화하기가 어려웠다.하지만 이 책은 내용이 한글로
되어 있고, 각각의 음식에 대한 조리법과 조리기구 등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33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책을
따라서 요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실용적이라고 합니다.
'음식디미방'은 우리나라 전통음식 연구의 교본이다.
우리나라 식품사의 권위자이고 고조리서 연구가인
이성우교수는 이 책에 대하여 '아시아에서 여성에
의해 쓰여진 가장 오래된 조리책으로 세계 음식문화사에
특별한 의의가 있다'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 만큼 이 책은 옛날과 오늘의 식문화를 비교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이며 거의 사라져 버린 옛 조리법을 발굴할
수 있는 지침서로서도 가치가 대단하다고 자랑합니다.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의 飮食知味유래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의 음식디미飮食知味는
중용제4장 "人莫不飮食也,鮮能知味也"에서 취한 말로서
"사람은 누구나 먹고 마시기는 하지만,맛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사람은 드믈다"
"人莫不飮食也,鮮能知味也"이 구절에서 주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도는 우리와 떨어저 있을 수 없는데 사람들이 스스로
살피지 못하므로 과도 하거나 미치지 못하는 폐단이 있게
된다.'결국 우리가 매일 먹고 마시는 공기나 물처럼 도는
우리와 항상 가까이 있는데,매일 대하는 공기나 물의 맛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의 생활 속에 스며 있는 도를
잘 관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貞夫人安東張氏 女中君子 張桂香
여중군자 장계향 선생..음식의 달인
장계향 선생은 노량해전을 대미로 7년간에 걸친 대전쟁, 임진왜란이 막 끝나가던 1598년 11월,
아버지 경당 장흥효(1564~1633)와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의 외동딸로 안동 검재(금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학봉 김성일의 문인으로 당대 학자로 인정받았으며, 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드나
들었다.
그러한 집안 분위기 탓일까, 어린 소녀는 사랑방을 기웃거리면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곁눈으로
배웠다.
아버지는 퇴계 학풍을 이어 받은 학자답게 '몸을 삼가고', '항상 공경하는 자세'를 제자들에게
강조했다.
10세 정도 되는 나이에 <소학>과 <십구사략>을 깨쳤고, 13세가 되어서는 <백발 늙은이>,
<몸가짐을 조심하다>, <소소한 빗소리>와 같은 주옥같은 시들을 지었다.
글씨도 곧잘 써서 그녀가 쓴 초서체 '적벽부'는 당대 서예가 정윤목이 "기풍과 필체가 호기로워
우리나라 사람의 글씨와는 다르다"고 평할 정도였다.
나이 19세 되던 1616년 영해 나랏골에 살던 재령 이씨 가문의 이시명과 결혼했다.
남편은 이미 광산 김씨와 결혼해서 1남 1녀를 둔 27세 청장년이었다.
남편과는 여덟 살 차이, 게다가 계실로 들어간 자리였으니 새색시로서는 만만찮은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색시는 전부인 소생 6살배기 상일의 자식 공부를 위해 어린
상일을 남쪽으로 5리 남짓 떨어진 남경훈 선생 집으로 매일 같이 업고 다니는 열의를
보였다.
새 며느리를 지켜보던 시아버지 운악 이함은 동리 이웃들에게 자랑스럽게 며느리
얘기를 했다.
"저 어미 잃은 아이는 어미를 잃은 것이 아니고 죽은 어미가 살아 온 것이다"
이후 그녀는 6남 2녀를 낳아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태기가 있는 동안 그녀는 과일,
채소와 같은 하찮은 물건일지라도 모양과 빛깔이 온전하지 않거나 바르지 않은 것은
입에 대지 않았다.
하루는 동네잔치로 동리 이웃들이 모두 모여 기생을 부르고 음악을 베풀고,
처용무를 펼치는 일이 있었다.
마침 임신 중이던 그녀는 종일토록 머리를 숙이고 눈을 뜨지 않았다.
그 소식을 접한 친정아버지는 "너는 내게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구나"며 탄복해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런 노력 덕택이었을까. 그녀는 전부인과 자신의 소생 7남 3녀를 모두 한결같이
훌륭한 인물로 키웠다.
그중에서도 둘째 휘일, 셋째 현일, 넷째 숭일은 경상도를 대표하는 학자로 명성을
날렸으며, 그의 손자 이은, 이재, 외손자 이상정 또한 문명이 높았다.
'음식디미방'은 나이 일흔이 넘은 장계향 선생이 자신의 지식을 집대성해 후손들을
위해 쓴 조리서이다.
평생 동안 배운 삶의 지혜들을 조리서 곳곳에 고스란히 담았다.
한문 실력이 뛰어난데도 후세들이 가까이 두고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꼼꼼하고
바른 한글로 적었다.
소설가 이문열의 선대 할머니이자, 그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이기도 한 장계향
선생은 인자한 어머니, 현명한 아내, 효심 가득한 딸, 자애로운 어른 등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으며 1680년(숙종6년) 83세를 일기로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 내
석계고택에서 향년을 마칠 때까지 자녀 훈도에 힘을 쏟으니 재령 이씨 가문이
더욱 크게 일어나 훌륭한 학자와 명망있는 동량들이 대대로 배출 되었다.
말년에는 셋째 아들 길암 이현일이 대학자이자 국가적 지도자에게만 부여하는
산림(山林)으로 불림을 받아서 이조판서를 지냈으므로 법전에 따라 정부인의
품계를 받았으며, 이때부터 '정부인 장씨'라 불리게 되었다.
셋째 아들 현일이 한글로 번역한 「정부인 장씨 실기(實記)」에는 선생의
여러 가지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회임한 뒤에는 '열녀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대로 엄격한 태교를 하였으며, 자애로움과 엄격함으로 자녀들을 가르쳤다
고 한다.
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 민생이 참혹할 때는 솥을 밖에 걸고 죽과 밥을
지어 사람들을 먹이기도 하였으며, 의지할 곳 없는 늙은이를 돌보고, 고아를
데려다가 가르치고 기르는 등 인덕과 명망이 자자하였다.
뿐만 아니라 친정 부모와 시가 부모를 모시고 봉양함이 극진하여 몸소 효를
실천하니 그 자식들 또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러한 업적을 인정하여 1999년 11월 문화관광부는 자녀교육에 귀감을 보인
'위대한 어머니상'으로 여중군자 장계향 선생을 선정하였으며,
영양군에서는 두들마을 앞에서 선생의 덕을 기리는 유적비와 유물전시관을
건립하였다.
선생의 아버지 경당 장흥효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벼슬도 마다한 채,
집 가까이 광풍정(光風亭)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평생을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낸 인물이다.
이러한 장흥효가 서른다섯 살 되던 해에 얻은 아이가 장계향 선생이었고,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갈암 이현일의 장계향선생의 팔십 평생을 기록해 놓은 책,
「정부인 장씨 실기(實記)」에 의하면 그는 당시 성인군자의 입문 서인
<소학>은 물론, 유가의 기본적 경전인 사서오경, 세상 돌아가는 실제를
알기 위한 중국역사서 <십구사략>에서 소강절의 난해한 천문도수 학문
'원회운세지수'까지 제대로 이해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초서, 그림, 자수 등의 작품을 보면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장계향 선생의 높은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음식디미방 체험사례
정부인안동장씨 여중군자 장계향 얼이 담긴 음식디미방
영양군청의 주관으로 처음으로 영양땅을 밟았습니다.
첫 방문에 대한 설레임은 석보면의 깔끔하게 정돈된 듯한 넓은 마당과
단아한 모습을 하고 있는 체험관
식사를 할 수 있는 내부
깔끔한 상차림으로 심신이 정돈되는 느낌이였습니다.
340년전에 집필된 음식디미방 저자인 장계향님의 소개와 책에 대한 설명을
아주 잘 해주시네요.
영양에 이렇게 훌륭한 여장부가 있다는 것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음식이 나올때마다 간단 조리법을 설명해주셔서 눈으로 입으로 먹는
음식이 아닌 귀와 마음으로도 함께 먹을 수 있었습니다.
감향주
수저까지 있어 죽인 줄 알았습니다.
알콜도수는 약 12도 막걸리정도의 도수인 듯 합니다.
수저로 떠서 혀끝에서 맛을 보면서 향긋하면서 달콤한 맛...
날새는 줄 모르고 계속 음미하고 싶은 맛이랍니다.
죽인 듯하지만 술이기에 친구들과 어우러져 봅니다.
기본 상차림
장아찌는 음식을 먹는 동안 간간히 입맛을 돋울 수 있는 맛이였습니다.
음~눈으로도 알 수 있는 단호박죽
색깔이 너무도 이쁘죠.
맛 또한 환상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호박죽을 아주 좋아하는데 입안에
감도는 듯한 맛과 향, 제가 먹어본 호박죽중 최고였어요.
잡채
가운데 있는 고기는 닭고기가 아니라 꿩고기라고 하네요..
분홍색은 맨드라미 물을 들인 동아라고 합니다.
음식위에 젓가락을 올려져 있는 것이 보이시나요.
이 젓가락은 음식을 개인 접시에 옮길때 사용하는 것이랍니다.
- 위생적인 배려
보통 잡채라고 하면 당면이 많이 들어있는데 우리의 전통음식에는 이렇게
채소를 위주로 만든 건강 식단이지요.
어만두
학교 다닐때 조리시간에 어만두를 만들어 보았지만 이렇게 예쁘게 앙증맞게
만들지 못하였는데,숭어포에 꿩고기와 버섯으로 만든 소가 들어 있어요.
초간장에 푸욱 담궜다 먹어야 한다고 하여
대구껍질 누르미
이 요리가 나왔을때 어떤 음식일까 많이 궁금했습니다.
대구의 껍질을 말려 꿩고기와 아채를 소로 만든 음식이라고 하네요.
음식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육수나 요리법도 정말로 궁금했습니다.
화전
빈자법 - 거피 녹두를 갈아서 흰팥앙금을 넣어 노릇하게 지진것이라고
합니다.
화전과 연근전
수정계
-닭고기와 알토란을 이용한 요리
동아누르미
-무채과 버섯을 소로 사용하였다고 하네요.
가제육
-돼지고기에 간장양념하여 밀가루를 묻혀서 구워낸 요리로 돼지고기의
색다른 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요리를 먹고 이제는 밥과 반찬들이 나왔어요..
음식은 대체적으로 심심하게 되어 있어 단백하게 먹을 수 있었어요.
국
무슨 국일까 궁금했어요.
눈으로 볼때에는 천엽이나 소양같이 보였는데 맛을 보니 전혀 다른
맛이였습니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여쭈어 봤더니 묵나물과 무채를 이용한 국이라고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꼭 만들어보고 싶은 국이예요.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와 석이편
석이버섯 가루를 쌀가루에 섞어서 쪄낸 후 잣가루를 솔솔 올려진 석이편
이곳 음식디미방에는 전통한옥 체험관도 있답니다.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도심인에게는 힐링하기에 너무도 좋은
장소인 것 같아요.
물론 외국인게도 한국 전통체험으로도 아주 좋기도 하고
식사류에서는 모든 식재료가 잘게 잘라서 요리를 하기에 잡채나 수정계를
먹을때는 젓가락이 서툰 외국인게는 좀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식디비방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이 곳에 있습니다.
장계향
조선 중기의 문인, 요리 연구가
작품으로 《음식디미방》과 《맹호도》 그리고 시 9편이 전해지고 있다.
《음식디미방》은 그의 집안 며느리와 딸들에게만 전해지던 것으로,
종부를 통해서 계속 전해졌으며, 기타 며느리나 딸들은 원본을 물려받을
수 없고 다만 필사본을 베껴갈 수는 있도록 허락하였다. 조선시대 중기의
다양한 요리 방법이 기록된 《음식디미방》은 1910년에 와서 우연히
대중에 공개되었다.
음식디미방 1670년(현종 11년)경 정부인 안동 장씨(貞夫人 安東 張氏)가 쓴
조리서이다. 음식디미방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이 쓴 조리서이며[1],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이기도 하다. 이 책은 궁체로 쓰인 필사본으로,
표지에는 '규곤시의방'이라 이름붙여졌으며, 내용 첫머리에 한글로
'음식디미방'이라 써있다. 음식디미방은 한자어로 그중 '디'는 알 지(知)의
옛말이며, 제목을 풀이하면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뜻을 지닌다.
음식디미방 이전에도 한국에서 음식에 관한 책은 있었지만, 모두 한문으로
쓰였으며,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에 그쳤다.
반면 음식디미방은 예로부터 전해오거나 장씨 부인이 스스로 개발한 음식 등,
양반가에서 먹는 각종
특별한 음식들의 조리법을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가루음식과 떡 종류의
조리법 및 어육류, 각종 술담그기를
자세히 기록한다. 이 책은 17세기 중엽 한국인들의 식생활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귀중한 문헌이다.
현재 원본은 경북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 중이다.
전통문화와 문학의 향기가 넘치는 마음 속의 고향 두들마을.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에 소재한 음식디미방에서 오피니언리더 초청행사가 있다기에
함께 참여했답니다.
승용차를 몰고 가다보니 영양이라는 곳이 참 멀긴 먼 곳이구나 새삼 느꼈습니다.
육지 속에 섬마을이라 불리울 만큼 첩첩 산 중의 두들마을을 찾아 가니, 마을입구 표지가
환하게 우릴 반겨주네요.
이곳 두들마을은 조선시대 광제원이 있던 곳으로 언덕에 위치한 원이 있던 마을이라하여
원두들, 원리리라 부른다고 합니다.
1640년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들어와
학문연구와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하였고, 석계의 아들 넷째 숭일이 선업을 이었고 후손들이
더해져 재령이씨 집성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음식디미방 체험관입니다.
음식디미방에 수록된 340여년 전 반가음식을 오늘날 우리의 입맛에 맞도록 재현해 내는 곳으로
정갈하고 고풍스런 전통 한옥에서 음식디미방이 주는 여유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그 옛날 조상들의
삶의 지혜와 정성을 함께 느껴볼 수 있는 곳이죠.
음식디미방 음식은 급하게 익히지 않고 오랜 시간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화학조미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아 담백하고 개운한 맛이 일품이라고 합니다.
이곳에선 '소부상'과 '정부인상'을 맛 볼 수 있는데 사전 예약 한 후 이용이 가능하다고 하네요.
음식디미방은 1670년경 여중군자 장계향 선생이 후손들을 위해 일흔이 넘어서 지은 조리서입니다.
장계향 선생은 "이 책을 이리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을 알아 제대로 시행하고 딸 자식들은 각각
베껴 가되 이 책을 가져 갈 생각일랑 마음도 먹지 말며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쉽게 떨어지게 하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자식 열을 키우고 환갑, 진갑을 넘긴 벽촌의 부인이 글자 한 자에도 정성 들여 써 나갔을 음식디미방.
자자손손 가문의 전통을 이어가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을 오롯이 담은 것은 아닐까?
이 음식디미방에는 경상도 지방의 가정에서 실제 만들던 음식의 조리법과 저장 발효식품, 식품 보관법,
장계향 선생이 직접 개발한 음식 등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쓴 조리서이며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이기도 합니다.
조귀분 회장님께서 커피물에 담군 복사본이라며 음식디미방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음식이 나옵니다. 우선 밑반찬인 것 같네요.
멸치조림, 감장아찌, 명이장아찌인데 조미료가 전혀 안들어 간 반찬이라 맛도 담백합니다
호박죽과 진사주라는 술입니다.
장계향 선생이 이 마을에 들어와서 상수리 나무를 많이 심어 도토리 죽이 유명하다는데 오늘은 호박죽이
나왔네요.
진사주는 어렸을적 먹었던 술지거미 같은데 술이 순하고 달착지근하지만 많이 먹으면 취한다고 합니다.
잡채. 10가지의 나물을 고기와 함께 골고루 버무려 먹으면 됩니다.
어만두라고 합니다.
대구껍질누르미입니다.
대구껍질을 벗겨내고 그 속에 석이버섯, 표고버섯, 꿩고기 등을 잘게 다져 넣고 물에 삶아 꿩고기 즙과
밀가루를 섞어 골파를 넣어 즙을 내어 누르미를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화전과 연근채, 감자전 등 세가지 전이네요.
수증계라고 합니다. 닭고기로 만들었답니다.
동아누르미라고 합니다.
가제육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한상차림입니다.
밥, 국, 찌개, 고등어구이, 문어, 나물류, 호박부침과 장떡, 두부부침, 마른반찬, 물김치, 연계찜, 숙채,
생채, 장아찌, 고추조림 등등
아~ 그런데 음식디미방이 무슨 뜻이냐고요?
음식디미방은 '좋은 음식 맛을 내는 방문'이라는 뜻을 담은 조리백과입니다.
고어에서는 '지'발음을 '디'로 하였다고 합니다.
후식으로 석이편이 나오네요
화채가 나옴으로 음식디미방의 정부인상 음식체험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내내 음식 설명을 해주시며 장계향 선생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해주신
조귀분 회장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기념사진 한 컷 했습니다.
시공을 초월한 음식디미방.
그 귀한 맛의 향연 속에서 오래 머물고 싶습니다.
음식디미방에서는 전통음식체험, 전통음식문화 당일체험, 전통문화교육, 문학 역사체험, 전통한옥체험,
계절별 연계 테마 프로그램 등 아주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운영 중에 있다고 합니다.
영양 음식디미방.
시간 되는대로 한번 체험해 볼만한 곳이라고 적극 추천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