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
매년 삼일절은 선친 추도 일로 자녀 손이 모였다.
금년은 어머니 입원으로 요양병원에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병색 짙은 어머니 위로하는 시간을 가졌다.
점심은 샤브 향에서 막내가 섬겼다.
어머니 집에서 다과 나누며 가족회의를 가졌다.
34년 전, 당숙 산에 안장 시킨 선친 묘가 문제였다.
오래전 이장 결정을 내렸지만 미뤄온 일이다.
봉분이 허물어지고 솔잎 떨어진 자리 진디가 말랐다.
사초 못한 부담감에 성묘 때마다 머리 무거웠다.
어머니 건강을 장담 못 하는 시기라 서둘렀다.
묘 개장 절차가 쉽지 않았다.
관할 지역 당일 화장이 어려웠다.
파묘 후 유골을 수습하여 현장에서 화장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영락공원 자연 장 접수가 문제였다.
구비 서류로 개장 신고서와 화장 증명서 원본을 요구했다.
정한 법대로 처리해야 옳았다.
개장 신고는 묘지 원근 사진 2매, 산 번지, 화장장 주소가 필수였다.
고향 사촌 형님이 본인 일처럼 발 벗고 나섰다.
난 신분증과 제적 등본을 톡으로 보냈다.
어렵게 현지에서 처리한 개장신고 증명서를 받았다.
인터넷으로 개장 유골 화장 예약 날을 잡았다.
일본 동생이 어머니 간병 위해 일시 귀국한 다음 날(3/22) 오후였다.
관외 지역 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국가 유공자라 무료였다.
사전에 영락 공원 관리 사무소를 찾아갔다.
각종 서류 접수, 운구 방법, 예약 번호와 몇 회 차인지 물었다.
자연 장 절차 확인 후 개나리 묘역으로 갔다.
참이슬 들고 찾는 이들을 보였다.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서럽게 울며 상실의 아픔을 달랬다.
석축 아래 하루 종일 볕 들고 산들바람 이는 명소였다.
형제들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길가에 버려진 소주병 10개를 수거해 트렁크에 실었다.
여수 누님이 파묘할 비용을 보내왔다.
‘동생, 아버지 덕에 잘 사는데 이장 이야기할 때마다 마음먹었어!’
매형 간병에 쓸 곳 많은데 준 돈이라 고마웠다.
어머니 병실을 찾아 서류 보이며 자세한 설명을 드렸다.
‘애썼다!’ 만족한 표정이었다.
파묘는 사촌 형님에게 맡겼다.
‘동생! 산지기에게 전화했어. 포클레인 필요 없네.
인부 한 명만 데리고 가면 충분하네.
아침 일찍 잔 올리고 시작할게 염려 마소.
작업해 놓으면 모셔만 가소.
오동나무 상자도 준비했네. 걱정 말고 내려오게..’
경험자의 권면에 경비 절감과 일이 쉽게 풀렸다.
당일에 막내와 서당 골로 나섰다.
제과점에서 간식을 챙겼다.
동생과 커피를 나눠 마시며 추억을 그렸다.
도중에 수습한 유골 사진 몇 장을 카톡으로 받았다.
감회가 새로웠다. 동트기 전 일을 시작한 모양이다.
어른 키 높이로 파내려 가서 꽃잎처럼 누운 분을 들어 올렸다.
양지바른 산지라 탈골이 잘 됐다.
하얀 치아는 그대로였다.
수건으로 닦아 상자 한지에 가지런히 모셨다.
마을 주차장에 들어서자 두 형님이 기다렸다.
‘동생! 아버지 수의가 온전해 기분 좋네.
흔적 없으면 그것처럼 허망한 일 없네.
묏자리에 나무 한 그루 심고 내려왔네.’
아버지 모셔 가면 고향 등지고 발길 끊을까? 눈시울 붉혔다.
‘동생 같은 사람 없는 줄 아네.
휴가철이면 손자들과 삼겹살 구워 먹고 가게..’
‘네, 형님! 그렇게 할게요. 벌초비도 계속 보내고요..’
품삯과 비용, 기름값과 식비를 드렸다.
산지기 형수 답례는 별도였다.
출입이 어려운 큰 형님 집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작은 힘을 보탰다.
어머니 안부 묻고 문병하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어머니 원대로 동네 어른들 대접할 기회를 놓쳐 서운했다.
고향산천 두고 온 길에 임 목사님 딸 찬양 ‘임마누엘’이 단톡에 떴다.
차분히 듣고 댓글을 남겼다.
‘은혜가 흐릅니다/ 기쁨이 드러납니다/
외로운 삶의 현장/ 홀로 견뎌내며/ 이겨내게 하신 임마누엘/
주님을 높여 찬양하는/ 전도사님의 신앙고백이네요.’
계획한 일정보다 빨랐다.
어머니 시중들고 나온 두 여동생과 식당에서 만났다.
뚝배기 한 그릇 먹고 커피 타임을 가졌다.
영락공원 관리실에 서류 접수하며 자연 장 2위 값(W696.000)을 냈다.
표지석(3579-0) 내용을 쓰고 대금(W135,000)을 치렀다.
사용 기간은 45년, 만료 즉시 모든 권한은 광주시로 넘어갔다.
화장 신고 필증 들고 기다렸다.
정한 시간에 유골을 넘겼다.
1호 대기실에 앉아 제적 등본을 들춰 가족사를 전했다.
마침내 오동나무 상자에 한 줌의 재로 돌아왔다.
두 손으로 감싸며 온기를 품었다.
화장 증명서를 들고 개나리 묘역을 찾았다.
인부가 손짓하는 곳으로 갔다.
삽 한 자루 공간에 유골함을 내렸다.
뚜껑을 열고 돌아가며 흙을 뿌렸다.
온 가족이 천국 백성으로 만날 그때를 고대하며 기도드렸다.
슬픈 봄날 구름이 만나 가랑비를 뿌렸지만 가볍게 돌아섰다.
저녁에 2남 3녀가 빈궁한 학창 시절, 방앗간 삶을 소환하여 웃었다.
동생이 10만 앤 봉투를 내밀었다.
매제가 6년 전, 별이 되어 가슴 찡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두 아들이 건실하게 자리 잡아 괜찮다’거였다.
그들이 귀국하여 할머니 찾아볼 주말을 기다렸다.
약속한 듯 어머니 피붙이들이 모여들었다.
외박 나온 어머니와 만찬으로 가족 사랑을 나눴다.
아버지 안장한 곳도 들렸다.
가려운 등 긁어 드리는 것처럼 시원하게 여겼다.
중요 통역은 동생이 하고 구글 번역기로 궁금한 사안을 물었다.
아이들과 어울려 다양한 추억거리를 쌓았다.
가족의 하나 됨은 기쁨이요, 모든 것 하나님의 은혜였다.
살아도 죽어도 부모 덕이란 말이 맞았다.
간병으로 일상이 분주한 동생들과 천만 관객 이룬 파묘가 보고 싶었다.
서당골 생명샘 발행인 광주신광교회 이상래 목사 010 4793 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