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715호
복사나무
이태관
알몸을 보았다고 했다 그것도
갓 목욕을 한 싱싱한 육체에선 천상의 향기처럼
아련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지
늦은 밤, 술을 마시다
안주를 구한답시고 현관을 나선 녀석이
설레발치며 들어서더니
이웃집 처자의 알몸을 보았다 했다
문을 두드리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알몸으로
그녀가 나왔다고 했다
달빛 깊은 밤이었다
복사꽃 웃음소리가 마을을 휘돌던 밤이었다
달빛에 취한 그놈의 얼굴을
복사라도 한 장 해놓고 싶은
그런 밤이었다
― 『숲에 세 들어 살다』(달아실시선27, 2020)
*
지난 주에는 녹색평론을 통해 홀로/함께 생태문명을 온몸으로 끄을고 오셨던 김종철 선생께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다는 황망한 부음을 들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태관 시인의 신작 시집 『숲에 세 들어 살다』에서 한 편 띄웁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동요 <고향의 봄>을 기억하실 테지요.
봄꽃 하면 지금은 으레 벚꽃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가 봄꽃을 대표하는 삼인방이었지요.
복숭아는 복사나무 열매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복숭아꽃(도화·桃花)이 복사꽃이고, 복숭아꽃 피는 마을을 복사골이라 불렀지요.
동양에서는 이상향(유토피아)에는 복사꽃이 핀다고 믿었으니 도연명은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 했고, 안견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리기도 했지요. 유비와 관우와 장비가 의기를 모은 곳은 또 어딘가요. 복숭아밭이었지요[桃園結義]. 이태백은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 물 위로 아득히 흘러가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이곳은 별천지, 인간 세상이 아니구나"라 노래하기도 했구요.
아, 제일 중요한 걸 빠트릴 뻔했네요. 도색(桃色) 말입니다. 사전에서 도색(桃色)을 찾아보면 이렇게 뜻이 나옵니다.
1. 복숭아꽃의 빛깔과 같이 연한 분홍색. 2. 남녀 사이에 일어나는 색정적인 일.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를 '도색물'이라 부르는 것도 그런 연유입니다.
시 한 편 읽겠다면서 밑밥을 너무 길게 깔고 말았습니다.
복사꽃 핀 봄날 깊은 밤
복숭아처럼 둥근 달이 환하게 뜬 봄날 깊은 밤
달빛 향기와 복사꽃 향이 황홀하게 휘감던 그런 밤
사내 둘이 취했습니다.
술에 취하고 복사꽃에 취하고 달빛에 취헀으니
그곳이 천상이요 무릉도원이겠다 싶기도 하고
그곳이라면 복숭아가 알몸의 처자로 현현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지요.
복사꽃 그늘이니 가능한 일이겠지요.
사족. 박황재형 선생의 그림으로 새롭게 태어난 "부생육기"가 드디어 나왔습니다. 지난주 강릉 북콘서트도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浮生若夢 爲歡幾何(부생약몽 위환위가) 덧없는 인생, 꿈과 같으니 즐거움을 누릴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부생(浮生), 덧없는 인생이라는 말은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서 나왔지요. 부생육기도 읽고 박황재형의 그림도 덤으로 챙기는 큰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020. 6. 29.
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올림
첫댓글 고딩때 부생육기를 읽으며 내 반려자는 운이 같았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운이가 부생육기를 쓴 심복의 아내이거든요.
새로 나온 책도 한번 읽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