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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엽기 혹은 진실..(연예인 과거사진) 원문보기 글쓴이: 야동해.
①황진이.그녀는 누구인가?
조선중종시대 개성의 기생,시조시인 겸 명기(名妓).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음
書畵歌舞(서화가무=글,그림,노래,춤에 능한 만능예인)
박연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3절(松都三絶)이라 일컫는다.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이다.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야금의 묘수(妙手)라 불리는 이들까지도
그녀를 선녀(仙女)라고 칭찬했다.
황진사의 서녀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개성의 관기가 되었다.
15세 때 이웃의 한 서생이 황진이를 사모하다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영구가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는 야담이 전한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송공대부인(宋公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노래를 불러 모든 이의 칭송을 들었고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성격이 활달해 남자와 같았으며,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다.
30년간 벽만 바라보고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나,
서경덕이 처사(處士)로 학문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시험 하다가
그의 높은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서경덕을 사모했다.
거문고와 술·안주를 가지고 자주 화담정사를 방문해 담론하며 스승으로 섬겼다.
죽을 때 곡을 하지 말고 고악(鼓樂)으로 전송해달라, 산에 묻지 말고 큰 길에 묻어달라,
관도 쓰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게 하라는 등의 유언을 했다는 야담도 전한다.
②그녀의 생애
황진이(1520?-1560?,개성)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개성(송악)의 기생이었다.
황진이 어머니는 진현금이란 아전의 딸로서 그다지 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느날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데 마침 지나가던 황진사의 아들과 서로 반하였다.
둘은 정을 통하였지만 결혼은 할 수 없는 사이였다. 이후 진현금은 딸을 낳았는데, 바로 황진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황진이의 남다른 성격과 미모는 돋보이기 시작했다.
황진이가 15세 되던해의 일화이다.황진이가 글을 읽고 있는데 지나가던 상여가 황진이의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황진이를 사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동네 총각의 상여였던 것이다.황진이가 소복을 입고 밖으로 나가 자기 치마를 벗어 관을 덮어주며 슬프게 곡을 하였더니 그때서야 상여가 움직였다.
사람들은 이일로 인하여 그녀가 기생이 되었다고도 한다.
황진이는 첩의 딸로서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일생을 헛되이 보내기보다는 봉건적 윤리의 질곡 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였다. 그 결심을 실천하자면 당시 그의 신분으로서는 불가능하였으므로 오직 길이라면 기생의 인생을 걷는 것이었다.
황진이는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적에 입적하게 되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되자 각지의 내노라 하는 풍류객들이 그녀를 보기 위해 송도에 몰려들었다.
당시만 하여도 전국에 공식적으로 약 3만 명의 기생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개성에는 유명한 학자와 선승이 있었으니, 학자는 곧 화담 서경덕선생이다
황진이는 그 인물의 됨됨이를 시험하여 보려고 먼저 화담선생을 찾아가서 수학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조금도 난색이 없이 승낙하였다. 황진이는 얼마 동안 선생에게 공부를 하러 다니다가 하루는 밤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생의 침실에서 같이 자며 공부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또한 허락하였다.
그렇게 수년 동안을 한방에서 동거하는 중에 황진이는 별별 수단을 다 써서 선생을 유혹시키고자 하였으나 선생은 목불과 같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황진이는 이미 여색의 경지를 넘어선 화담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히 말했다.
“역시 선생님은 송도 3절의 하나이십니다.” 화담이 나머지 둘은 무엇이냐고 묻자
“하나는 박연폭포요, 다른 하나는 접니다”라고 답했다.
왕족중에서 벽계수 이은원이 있었다. 그는 황진이 소문을 듣고, 만일 내가 그 계집을 본다면 침혹은 커녕 천하 요망스러운 년이라고 당장에 호령을 하여 축출하겠다고 장담을 하였었다.
이야기를 들은 황진이는 그가 얼마나 고결한가 한번 시험에 보리라 하고 중간에 사람을 놓아 벽계수를 유인하여 만월대구경을 오게 하였는데 때는 마침 만추시절이라 중천에 월색이 교교하고 만산에 낙엽은 소소하여 누구나 감개한 회포가 일어날 즈음이었다. 황진이는 단장소복으로 숲속에 숨어 있다가 연연히 나와서 이씨의 말고삐를 휘여잡고 위에 적은 노래를 한곡조 부르니 이씨가 월하에서 그 어여쁜 자태를 보고 또 청아한 노래를 들으니 스스로 심신이 황홀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부지중에 말에서 떨어져서 창피를 당했다고 한다.
황진이의 연정 가운데 가장 짧았던 건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과 나눈 사랑. 두 사람은 애초 30일을 기한으로 애정생활에 들어갔다. 날을 채운 뒤 소세양이 떠나려 하자 황진이는 시 한 수로 발걸음을 잡아맸다.
두 사람의 사랑이 그 뒤 얼마나 지속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건 황진이가 소세양과 헤어진 뒤에도 그리움에 찬 나날을 보낸 점이다.
서경덕이 죽고 난 후 황진이는 서경덕의 발걸음이 닿았던 곳을 두루 찾아다녔다고 한다.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묘향산을 막론하고 그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나이도 서른을 훨씬 넘기고 있었다.
여러 곳을 두루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와 여독을 풀고 있는데, 담 밖에서 남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듣자니 분명 서울의 풍류객 이사종이겠다 싶어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며칠을 함께 보냈다. 이사종이 함께 살자며 설득하자 황진이는 망설이다가 40세가 되는 6년 동안만이라고 다짐을 받았다. 6년이 지나자 이사종은 그녀를 붙잡았으나 황진이는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송도로 돌아갔다.
황진이는 이와 같이 일생을 지내다가 사십 내외에 불행히 병에 걸려 죽었다. 그녀는 죽을 때에 집안 사람들에게 유언하되
"나는 평생에 여러 사람들과 같이 놀기를 좋아하였은 즉 고적한 산중에다 묻어주지 말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에다 묻어주며, 또 평생에 음률을 좋아하였은 즉 장사지낼 때에도 곡을 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장례를 지내달라"하였다.
그녀의 무덤은 몇 백년 전까지도 송도 대로변에 있었다. 천하의 호협 시인 백호 임제 같은 이는 평안도사로 부임하던 길에 일부러 제문을 지어가지고 그의 무덤에까지 가서 제를 지내 주었다가 그것이 언관에게 말썽거리가 되어 그 일로 좌천까지 된 일이 있었다.
● 別金慶元 (별김경원) 김경원과 헤어지며 <황진이>
三世金緣成燕尾 (삼세금연성연미) 삼세의 굳은 인연 좋은 짝이니
此中生死兩心知 (차중생사양심지) 이 중에서 생사는 두 마음만 알리로다
楊州芳約吾無負 (양주방약오무부) 양주의 꽃다운 언약 내 아니 저버렸는데
恐子還如杜牧之 (공자환여두목지) 도리어 그대가 두목(杜牧)처럼 한량이라 두려울 뿐.
● 朴淵瀑布 (박연폭포) <황진이>
一派長川噴壑? (일파장천분학롱) 한 줄기 긴 물줄기가 바위에서 뿜어나와
龍湫百?水叢叢(용추백인수총총)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다
飛泉倒瀉疑銀漢 (비천도사의은한)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같고
怒瀑橫垂宛白虹(노폭횡수완백홍) 성난 폭포 가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
雹亂霆馳彌洞府 (박난정치미동부) 어지러운 물방울이 골짜기에 가득하니
珠?玉碎徹晴空 (주용옥쇄철청공) 구슬 방아에 부서진 옥 허공에 치솟는다
遊人莫道廬山勝 (유인막도려산승) 나그네여, 여산을 말하지 말라
須識天磨冠海東(수식천마관해동) 천마산야말로 해동에서 으뜸인 것을.
* 황진이가 자신을 포함한 송도삼절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사랑한 박연폭포. 송도의 기생이었던 황진이는 물론 이곳을 자주 방문하여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유려한 표현은 박연의 장관을 짐작케 한다.
박연폭포는 현재 개성시 개풍군(開豊郡) 천마산(天摩山) 기슭에 있다.
● 松 都 (송 도) 송도를 노래함 <황진이>
雪中前朝色 (설중전조색) 눈 가운데 옛 고려의 빛 떠돌고
寒鐘故國聲 (한종고국성) 차디찬 종소리는 옛 나라의 소리 같네
南樓愁獨立 (남루수독립) 남루에 올라 수심 겨워 홀로 섰노라니
殘廓暮烟香 (잔곽모연향) 남은 성터에 저녁연기 피어 오르네
* 황진이는 옛 고려의 수도인 송도에서 태어나 평생을 송도를 중심으로 살았다. 남아 있는 몇 편 안 되는 황진이의 시 중에 두 편이 송도를 노래한 것이다.
● 相思夢 (상사몽) 꿈 <황진이>
相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그리워라, 만날 길은 꿈길밖에 없는데
?訪歡時歡訪? (농방환시환방농) 내가 님 찾아 떠났을 때 님은 나를 찾아왔네
願使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로중봉) 같이 떠나 오가는 길에서 만나기를
● 滿月臺懷古 (만월대회고) 만월대를 생각하며 <황진이>
古寺蕭然傍御溝 (고사소연방어구) 옛 절은 쓸쓸히 어구 옆에 있고
夕陽喬木使人愁 (석양교목사인수) 저녁 해가 교목에 비치어 서럽구나
煙霞冷落殘僧夢 (연하냉락잔승몽) 연기 같은 놀(태평세월)은 스러지고 중의 꿈만 남았는데
歲月嶸破塔頭 (세월쟁영파탑두) 세월만 첩첩이 깨진 탑머리에 어렸다.
黃鳳羽歸飛鳥雀 (황봉우귀비조작) 황봉은 어디가고 참새만 날아들고
杜鵑花發牧羊牛 (두견화발목양우) 두견화 핀 성터에는 소와 양이 풀을 뜯네.
神松憶得繁華日 (신송억득번화일) 송악의 번화롭던 날을 생각하니
豈意如今春似秋 (기의여금춘사추) 어찌 봄이 온들 가을 같을 줄 알았으랴
● 奉別蘇判書世讓(봉별소판서세양) 소세양 판서를 보내며 <황진이>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霜中野菊黃(설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랭)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 소세양이 소싯적에 이르기를,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황진이의 재주와 얼굴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친구들에게 약조하기를 “내가 황진이와 한 달을 지낸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자신이 있네. 하루라도 더 묵는다면 사람이 아니네”라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그러나 막상 송도로 가서 황진이를 만나보니 과연 뛰어난 사람이었다. 30일을 살고 어쩔 수 없이 떠나려 하니, 황진이가 누(樓)에 올라 시를 읊었다. 이 시를 듣고 소세양은 결국 탄식을 하면서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더 머물렀다.
이 때 황진이가 읊은 시가 바로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이다.
●청산리 벽계수야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종실 벽계수는 평소 결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해왔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황진이가 사람을 시켜 그를 개성으로 유인해왔다.
어느 달이 뜬 저녁, 나귀를 탄 벽계수가 경치에 취해 있을 때
황진이가 나타나 "청산리 벽계수야..."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는 밝은 달빛 아래 나타난
고운 음성과 아름다운 자태에 놀라 나귀에서 떨어졌다.
<황진이와 화담 서경덕> 마음이 어린 후이니
‥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V가 하노라
-화담 서경덕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상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楸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황진이
->그리운 정에 떨어지는 잎 소리마저도 님이 아닌가 한다는 화담이 시조에
지는 잎 소리를 난들 어찌하겠느냐는 황진이의 안타까움을 전한다.
④그녀의 유언
저는 천하의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자애할수 없으니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죽거든 금수도 관도 쓰지 말고
옛 동문 밖 들가 모래밭에 시신을 내버려서
개미와 땅강아지,여우와 살쾡이가 내 살을 뜯어 먹게 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저를 경계 삼도록 해주세요
-대중에 많이 알려져있는 유언-
나 때문에 세상 남자들이
자기를 사랑하지 못했으니,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시체를 그냥 동문 밖에 내쳐두어
개미와 벌레들이 내 살을
뜯어먹게 하여 천하 여인들의
본보기로 삼으라.
-숭양기구전-
대로변에 저를 묻어주세요..
-어우야담-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말고 북과 음악으로 인도해달라
-식소록-
황진이의 그림 또는 초상화는 존재하지않습니다.
떠돌아다니는 사진은 김홍도의 "미인도"(17~)
황진이는 중종때(14~15)의 기녀입니다
노래:KBS황진이 전곡(넘기시면 다른곡들도 나옵니다)
첫댓글 내다
....
하
ㅇㅇ
안물
어쩔
김간호사어디갔어
아 갑자기 콩나물국이 싫어지네^^
후..... 벌써몇번째탈출이예요.. 계화루선생님저여깄어요
컹나물 아구지3천만대 ㅇㅋ
루머강등
나 302호 환자인데 같이 놀래? ^ㅂ^
아 음악...ㅜㅜ ... 갑자기 음료가 떠오른다..
길어서 사진만 ㄷㄷㄷ
학교에서 시조하다가 배운게 있는데 .. 어떤 남자가 송도에 유명한 기녀가 있다해서 가봤더니 이미 그때는 황진이가 죽은뒤였지요 . 그래서 그 남자는 황진이 무덤에 가서 시조를 지었고 그 뒤로 그 남자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네요. 황진이 때문이지요 ...
아.........명월이 ㅋㅋㅋ너무재밌어 ㅠㅠ
우리모두같이 학춤을춰요.................................................................
전 검무추고싶어요
소리도 내요 끼약 끼이약 끼야악
그냥 검무추면서 학춤 춥시다. 끼약끼약 덜그락덜그락
사진이 안나와....................
22
사진이.......느낌표다;
근데 뭐 황진이의 죽음이 정확히 밝혀진 적이 없어서 황진이 드라마 그런식으로 끝난 거라고 하던데 아닌가보네..;
한자가나오자마자 바로 내려버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황진이 얼굴 진짜 궁금..........
아 정말 사랑해요황진이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하지원은 더사랑해 ㅋㅋㅋㅋㅋㅋㅋㅋ
물색없는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루한것..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빼놀수없음
김흥도의 그림도 황진이가 아니래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 조회수가 4444......황진이의 그림은 화가들이 담을수가 없어서 존재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아소름돋아................
궁금한게 있는데 대로변에 시신을 묻어서 여자들의 경계를 삼게한다는 게 무슨말이에요?
환상
황지니 너무 재미있게 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