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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아서 강해(4)
8. 유대인의 해석법과 예수님의 해석법은 어떻게 다른가?
* 유대인의 성경 해석법은, 기존의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신학을 토대로 해서 지금의 성경 해석법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즉, 교리와 전통으로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과거 선배들의 해석을 수정은 하지만 답습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절대로 선배들의 해석을 무시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유대인의 해석이 옳으냐 틀리느냐의 기준은 선배들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을 하고, 과거 신학교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어느 신학교에서 배웠느냐?' 라고 질문하는데,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러한 성경 해석법에 대해서 도전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시편 110편을 가지고 시비를 걸었는데, 한번 살펴보자.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主)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 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마 22: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마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마 22: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마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마 22: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마 22:46)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 여기서 예수님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주가 될 수 있는가? 이 해석법에 답변을 해 보라는 것이다.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 다윗의 주가 될 수 있는가? ① 있다. ② 없다.
*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없지만, 그런데 세례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먼저 계신 자' 라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현실에서 가능하다는 말인가? 자식이 아버지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 예수님을 아무리 봐도 보통 사람의 모습, 요셉의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주가 된다고 한다면, 기존 해석은 과거에 근거해서 해석했는데, 이것이 왕창 깨어지고 과거에 근거해서 해석을 하지 말고 미래에 나올 메시야를 근거해서 해석을 거꾸로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니 여기에 유대인은 동의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메시야를 지금의 예수로 인정 못하기 때문에, 메시야가 오실 때까지는 성경해석을 역시 과거에 있는 선배들의 의견을 충실히 받아서 해석을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해석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바로 너희들이 기다리던 다윗의 자손이다' 라는 것이다. 즉, 메시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기가 차고 분통 터질 노릇인 것이다.
* 지금 온 국민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데, 유대인의 메시야는 어떻게 와야 되는가? 화려하게 와야 되고, 다니엘에 계시된 대로 구름 타고 와야 되는 것이다. 또 세례 요한이 말대로 유대인의 메시야는 심판하러 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다시 한번 질문을 했던 것이다. '당신이 메시야 맞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더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말이다.
◈ 왜 메시야를 거부하는가? - 너무나도 평범한 보통사람이다 !!
* 우리가 자꾸 예수를 화려하고 영광스럽다고 하니까, 죽었다 깨어나도 믿기 어려운 것이다. 너무나 보통 사람이고, 너무나 평범하니까, 당신 말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내가 바로 메시야이기에, 그러므로 지금까지 해석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 유대인들은 과거에 근거를 두고 미래의 메시야를 겨냥하면서 해석을, 즉,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해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눈에 보이는 실체로서 등장하여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온 예수님을 못 알아본다는 것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의 해석은 몽땅 엉터리란 것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 그러면 무엇이 맞는 해석인가? 예수님이 메시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것을 거꾸로 이유 없이 확인해 주는 해석법이 바른 해석법인 것이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님의 해석법은 완벽한 알레고리가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신약성경의 구약성경의 인용은 말도 안 되는 알레고리 해석이다. 예를 들어, 구약의 본문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다는 본문이 있는가? 없는데,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도행전과 시편을 보자.
(행 1: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시 69:25)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시 109:8) 그 연수를 단촉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 예수님의 성경해석법은 그야말로 완전히 일방적인 성경해석이다 !!
* 사도행전에서 가룟유다의 자살 문제를 말하면서 시편 69편과 109편을 인용하지만, 그러나 시편에서 가룟유다 문제를 언급할 직접적인 동기를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인용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전혀 상관이 없는데 말이다. 임마누엘 인용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처녀가 아기를 낳는 것이 한 두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노새를 타고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도 한 둘이 아니고 말이다.
*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경해석법은 그야말로 완전히 일방적인 해석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학교 교수들이 이 해석법을, 구조주의를 들고 나온다는 것이다. 구조주의 해석법이 곧 유대인들의 해석법인 줄 모른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해석법을 배우려고 외국 유학을 갔던가?
◈ 창조 과학회 -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들의 모임이다 !!
* 과학을 아무리 해도 예수님이 안나오게 되어 있는데, 그런데 창조 과학회는 과학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을 보지도 못한 것 같은 것이다. 성경에서의 영광은 모든 이름이 주님 앞에 무릎을 끊을 때인데, 그러나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 라는 말씀을 믿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 자기들이 증명해 주어서 믿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말은 안 믿는다고들 하지만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 존재를 소개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믿으면 되는데, 자기가 증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놈들이 많이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누가 진짜 예언자인가를 아시는 것이다.
* 예레미야를 계속해서 살펴보자.
(렘 23: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 라 하였느니라
(렘 23:18)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렘 23:19)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렘 23:20)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렘 23:21) 이 선지자들은 내가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렘 23:22)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 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 진짜 선지자는, 예수님의 모습을 반복하는 그 기능과 모습을 담고 있는 자이다 !!
* 하나님은 참 선지자를 아시는데, 그 아신다는 것의 역사 속의 증거가, 말씀의 육신이니까 오직 진짜 선지자는 예수님의 모습을 반복하는 그 기능과 모습을 담고 있는 선지자가 진짜인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진짜 선지자는 예수님이 가졌던 그 심성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진짜 선지자인 것이다. 초점은 오직 예수님인데, 주의 이름을 높여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이다. 성부도 아니고, 성령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는 것이다.
◈ 진짜 선지자 - 성부도 아니고, 성령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는 것이다 !!
*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그것은 거짓 선지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보여 주는 거짓 선지자는 무엇을 보여 주는가?
* 그들이 속해 있는 조직의 번성과 발전과 유지와 보존, 여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상시 은혜롭고 자비로운 모습을 보이다가도 자기 조직에 도전을 하면 이단이라고 대번에 몰아 붙인다는 것이다. 이단의 기준이 우리 조직에 흠집을 내니까 그 근거로서 이단으로 몰아 붙인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서, 한국교회에 이상한 기존의 목소리와 다른 목소리 내는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옳고 그름의 판단을 성경을 가지고 판단을 해야 할 텐데, 자기 조직의 교단의 사람들이 그런 쪽으로 몰리는 것 때문에 모든 이단의 구실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 류광수를 이단을 몰아 세우는 방식도 마찬가지인데, 자기들도 평상시 류광수와 똑같이 행동하다가 사람들이 몰려가는 그것 때문에 긴장을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보지 않는 것인데, 왜냐하면 자기들의 해석을 류광수도 꼭 같이 그 전통과 계시를 들고 나오기에 말이다. 이런 자들이 합세해서 또다시 예수님을 늘 욕보이는 것이다.
*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이러한 작자들에 대해서 '내가 너희를 버린다' 라는 것이다. 복음은 저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렘 23: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렘 23: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며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3:33) 이 백성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이 네게 물어 이르기를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뇨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 하느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버리리라 하셨고
* 이렇게 해서, 예레미야는 형제들에 의한 죽음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러나 그 죽음의 부당성을 언급하는 자도 있다는 것이다.
(렘 26:15) 너희는 분명히 알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정녕히 무죄한 피로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거민에게로 돌아가게 하리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이르게 하셨음이니라
(렘 26:16)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우리에게 말하였으니 죽음이 부당하니라
(렘 26:17) 때에 그 땅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 말하여 가로되
(렘 26:18)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시온은 밭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며 이전 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들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렘 26:19) 유다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고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 생명을 스스로 크게 해하는 일이니라
* 다시 말해서, 그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종말을 앞두고서 이러한 유다 내부의 갈등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당장 죽임을 당하지 않고서도 계속 예언을 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 과정은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반박과 충돌 속에서(28:10), 구원의 개념의 실체가 서서히 열리게 되는 것이다.
* 거짓 선지자의 신학이 무엇인가를 잘 파악하여, 그 신학이 오늘날 모든 인간 속에 다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지적하면 좋은(?) 설교가 될 것이다.
9. 거짓 선지자와 참된 선지자의 특징
◈ 거짓 선지자의 특징 - 백성들에게 꿈과 희망을 !!
(렘 28:10)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취하여 꺾고
(렘 28:11) 모든 백성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두 해가 차기 전에 열방의 목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 길을 가니라
* 대표적으로 선지자 하냐나에서 알 수 있듯이, 거짓 선지자는 상당히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비전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지금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세상의 인간들에게 야심과 야망과 희망을 제시하는 이것이 거짓된 선지자들의 통일된 목표인데, 그래서 그들에게 위로와 평안과 축복을 제공하는 것에 목적을 두는 것이다.
◈ 참된 선지자의 특징 - 이젠 망했다 !!
* 저주를 선포하는 자가 참 선지자인데, 하나님은 저주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택한 자도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 책에서도 지워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촛대도 옮기어지고 말이다. 이것을 전파할 때만이 참 선지자인데, 그런데 거짓 선지자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 하냐나, 그는 쇼맨쉽이 끝내준다는 것이다.
(렘 27:1)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의 즉위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여호와께서 말씀으로나 예레미야에게 이르시니라
(렘 27:2)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줄과 멍에를 만들어 네 목에 얹고
(렘 27:11) 오직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나라는 내가 그들을 그 땅에 머물러서 밭을 갈며 거기 거하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7:12) 내가 이 모든 말씀대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과 백성은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고 그와 그 백성을 섬기소서 그리하면 살리이다
* 예레미야가 자기가 줄과 멍에로서 자기의 목에 메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래서 바벨론 왕을 섬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지자 하나냐가 나타나서, 예레미야의 목에 있는 멍에를 꺾어버리면서 하는 말이, '여러분, 보세요! 이렇게 멍에를 꺾고 깨듯이 느부갓네살 왕의 멍에를 여호와께서 이같이 꺾어버립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렘 28:10)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취하여 꺾고
(렘 28:11) 모든 백성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두 해가 차기 전에 열방의 목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같이 꺾어 버리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기 길을 가니라
* 그런데 그 이후에 여호와께서 쇠 멍에로서 말씀을 예레미야를 통해서 전달하게 하시는 것이다.
(렘 28:12)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버린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렘 28:13)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를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를 만들었느니라
(렘 28: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하신다 하라
(렘 28:15)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으로 거짓을 믿게 하는 도다
(렘 28:1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하는 말을 하였음이라 금년에 죽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더니
(렘 28:17) 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칠월에 죽었더라
◈ 축복을 선포하면 거짓 선지자이고, 저주를 선포하면 참 선지자이다.
* 이렇게 정의를 내리면, '너무 간단한 것이 아니냐, 그리고 예레미야 당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그렇게 임했기 때문에 그렇지, 지금은 예레미야 시대를 꼭 같이 적용할 환경이 아니지 않느냐' 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이렇게 반박할 사람은 신학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할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 그들은 말하기를, "예레미야가 저주한 것은 나도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지금은 예수님의 시대이기 때문에 위로와 치유와 축복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라는 것에 적합하지 않느냐" 라고 반박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이런 이야기가 예레미야 당시에 거짓 선지자들이 꼭 같이 '지금은 평화의 시대, 은혜의 시대' 라는 그런 소리를 그대로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들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6장 24-26절을 보자.
(눅 6:24)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눅 6:25)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눅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같이 하였느니라
* 예레미야 시대의 거짓 선지자가 이 역사가 끝날 때까지 흘러간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가 끝날 때까지 예레미야를 괴롭힌 그러한 요소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남은 자는 거짓 선지자에 싸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성경의 계시는, 항상 남은 자를 따로 놔두는 것이 아니고, 악마의 세력이 마치 붕어빵 속의 팥처럼 악마의 세력 속에 쌓여 있는 체로 이 세상에서 표현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 그러니까 예레미야 시대는, 어느 특정 지역, 즉, 유다에 한정이 되어서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의 싸움이 있었지만, 그러나 지금 십자가 이후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천하에 전달이 된 이후에는 거짓 선지자가 온 천지에 발작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 이 시대가 종말의 시대인데, 요한 계시록에 나온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144,000명이 다 순교자로 마감한다는 것이다. 바른 복음을 전하면 꼭 이런 소릴 하는데, '왜 당신은 부정적입니까?' 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점만 고치면 되지 않느냐' 라고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무엇이든지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왜 부정적으로 봅니까? 살맛 안 나게' 라는 것이다.
◈ 예수님이 왜 부정적인가? = 예수님이 십자가에 왜 죽었던가 !! - 종말이기에 !!
* 그러나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이, 현실과 모든 계시가 항상 이쪽을 치고 등장을 한다는 것이다. 즉, 부자를 그냥 놔두면 대는데 '너희 부요한 자여, 화 있을진저' 라고, 꼭 이렇게 나온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이렇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왜 죽었던가?' 라는 것이다. 더 큰 부정, 극단적인 부정, 십자가에 자기가 저주받은 이 의미를 만방에 알려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너희들이 내게로 오지 않는 것은 너희 어두움이 들어 날까 함이라', '너희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다' 라는 식이다. 이 얼마나 부정적인 발언들인가?
◈ 예레미야 시대가 유다나라의 종말이라면, 지금 이 시대는 온 우주의 종말이다 !
* 그러므로 그 때 그 당시에 해당되고, 지금은 해당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예레미야 당시는 유다 나라의 종말이면, 지금 이 시대는 온 우주의 종말이다. 그러니까 온 우주의 종말의 법칙은 그 법칙이 딴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유다 나라에서 적용이 되던 그 법칙이 그대로 확대시킨 것이 온 우주의 종말의 법칙이다.
◈ 예레미야는 미리 앞당겨서 예수님을 보여 주었다 !!
* 예레미야가 예수님을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 정답이지만, 말을 바꾸면, 예수님이 예레미야를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선지자, 즉, 이사야, 예레미야, 엘리야, 모세, 그대로 다 담고 있다고 보아도 되고, 사실은 예레미야가 앞당겨서 예수님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 바로 정답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거짓 선지자의 요소는 지금도 배제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지금 더 강화되어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10. 거짓 선지자의 신학과 참 선지자 신학을 구분해 보자(70이레).
* 거짓 선지자 신학의 특징은, 내가 계속해서 선지자의 직책을 유지 보존하고 싶다는 것, 이것을 거짓 선지자 신학의 마음 바탕으로 보는데, 왜냐 하면 그들은 궁중 선지자이기 때문에 말이다.
◈ 거짓 선지자 신학 - 기존 체제의 유지 보존이다 !!
* 자기에게 녹을 주는 회사에 충성하고 봉사하는, 궁중의 안전과 복지에 도움이 되는 종교 서비스를 제공하여 월급을 받는 사람, 이것이 거짓 선지자 신학의 의중(意中)인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이들의 외침의 내용이 모두 드러난다는 것이다.
* 왜 그들이 '평화롭다, 평화롭다', '화가 미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외치는가? 이것이 바로 통치자의 의중이기 때문인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을 보좌하는 목사라면, 대통령의 통치에 누수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 그러나 본인들은 거짓 선지자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식 신학교를 나왔다고 하면서, 통치구조 내에서는 비정규 신학교 나온 사람이 이단이 되는 것이다. 개념을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거짓 선지자라는 소릴 들을 때, 듣는 그들은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
◈ 실제로 얻어맞을 짓을 많이 한 예레미야 !!
*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하는 참 선지자의 뺨을 치고 하는 현상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예레미야가 많이 맞았는데, 실제로 맞을 짓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외침을 보자 !
(렘 23:25)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를 얻었다 함을 내가 들었노라
(렘 23:26)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렘 23:27) 그들이 서로 몽사를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열조가 바알로 인하여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렘 23:2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렘 23: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렘 23:3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렘 23: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렘 23: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며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예레미야 23장의 이 부분은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의 대결인데, 이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그들로부터 얻어맞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종말을 앞두고 이러한 유다 내부의 갈등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당장 죽임을 당하지 않고서도 계속 예언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그 과정은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반박과 충돌(28:10) 속에서 구원의 개념의 실체가 서서히 열리는데, 즉,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구원은 잡혀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렘 28:10) 선지자 하나냐가 선지자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취하여 꺾고
(렘 28:15)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으로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렘28:1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하는 말을 하였음이라 금년에 죽으리라하셨느니라 하더니
(렘28:17) 선지자 하나냐가 그 해 칠월에 죽었더라
* 이 본문을 가지고 '과연 내가 목회를 계속할 것인가?' 라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간단한데, 신학교에 가는 것만 소명이 아니고, 목회를 그만두는 것도 소명이라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 나보다 더 주님의 계시를 힘차게 바로 전달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지 그 사람에게 양도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시기와 질투하여 죽이는 가인이 될 필요 없이 그냥 은혜를 받으면 되고 말이다.
* 그래서 목사는 소박한 자기는 아무 재주 없음에서 출발하여 소박하고 재주 없는 사람으로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구원에 성공한 삶인 것이다.
* 참된 선지자가 나타나서, 아무리 들어봐도 나보다 예수님께 더 가깝게 순교를 각오하고서 말씀을 전한다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강단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고, 그 교회에서 나갈 필요도 없고 강단을 물려주고, 그 교회에서 은혜만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듯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벨을 하나의 구원통로로 간주하면 된다는 것이다.
* 하나냐가 죽어도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따르지 않는데, 어떻게 죽더라도 그것은 수명이 다해서 죽는 것으로 보지, 말씀이 응해서 죽는 것으로 보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말씀을 안 믿는 사람은 어떤 증거를 대도 안 믿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 어떤 증거 가지고 믿는 사람은 아직도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십자가 통해서 죄인 됨을 깨닫고 믿는 사람은 진짜이고, 병 낫고 방언하고, 이렇게 믿는 사람은 전부가 가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목사의 임무인 것이다.
◈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
* 그러므로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구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잡혀가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잡혀가서 거기서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나는 것을 말하는데, 즉,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이 현실이 곧 구원이라는 것이다.
(렘 29:1)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이 같은 편지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포로 중 남아 있는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에게 보내었는데
(렘 29: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렘 29: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렘 29:6)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렘 29: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 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 70년의 의미 - 그 사이에 이 약속의 땅이 정화되는 것이다 !!
* 이스라엘 백성들이 잡혀가는 그 성읍에, 바로 바벨론의 그 현장에 부활의 산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선조에게 약속한 그 땅은 바벨론에서 70년이 지나야 비로소 돌아 올 수 있는데, 예레미야서를 계속해서 살펴보자.
(렘 29: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30: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70년의 의미란, 그 사이에 이 약속의 땅이 정화가 되는 것이다. 70년, 그 기간 동안 또한 바벨론의 죄악이 무르익는 기간이기도 하고 말이다.
(렘 25: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더럽혀진 땅이 그곳을 비우게 하심으로 안식을 찾게 되고, 유다는 70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어 비로소 땅과 안식의 의미를 알게되어 되니 이것이 곧 구원인 것이다.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 하니 곧 내 가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 그 땅은 자기 공로로 들어가 살 수 있는 땅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선조들의 죄상을 익히 알기에 그들의 율법은 돌판에 새겨져 있는 것도 아니고, 더욱 성전의 법궤 안에 들어있을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에 새겨질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바로 남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렘 31: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 이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에 자식을 잃은 경험을 하지만, 그것이 바로 옛날 출애굽 당시의 어린양의 희생에 동참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울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다.
(렘 31:1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도다
(렘 31: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제2의 출애굽 !! 제2의 출애굽 !!
* 애굽에서 출애굽했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거꾸로 현재 이스라엘이 애굽화되어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이것이 제2의 출애굽이 되는 것이다. 장소가 바뀌어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이것이 출애굽인데, 바벨론에는 고레스라는 새로운 메시야(고레스가 메시야 역할)가 나와서 70년만에 돌아오도록 한다는 것이다. 70년만에 말이다.
(렘 29: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 70년만에 돌아온다는 것을, 이것을 나중에 다니엘이 알게 되는데, 그러면, 다니엘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선지자가 이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 그 쪽에서 일어나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렘 29:15)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바벨론에서 우리를 위하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 하므로
(렘 29:16) 여호와께서 다윗의 위에 앉은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 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 남은 자 - 하나님께 저주받은 경험이 있어야 회복된 자들이다 !!
* 잃어버린 돌멩이, 또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쪽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잃어버린, 버림받은, 즉 하나님께 저주받은 경험이 있어야 회복된 자, 그들이 바로 남은 자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노아도 하나님께 심판 받은 경험이 있었듯이, 하나님께 심판 받은 경험이 있는 자라야 남은 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백 마리 양 중에서 한 마리 양을 기뻐하는 이유는, 그 한 마리 양이 잃어버렸던 경험이 있기에 그것을 고백하기에 기뻐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탕자 등, 이 비유들이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이 비유들에서 잃어버린 경험이 초점인데, 그러나 맏아들(바리새인)은 인간적인 상식 선에서 생각을 하는데, 나는 이렇게 잘하고 있으니까,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할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 탕자와 자기를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 [ 1. 저주 내려서 → 2. 잃어버려서 → 3. 되찾음 ] !!
* 예레미야의 남은 자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아버지에 의해서 잃어버린 경험을 간직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름대로 계획이 있는데, 그 계획이 [ 저주 내려서 → 잃어버려서 → 되찾음 ] 라는 계획인데, 그런데 세상의 인간들은 이런 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 잊어버리지 아니하고(심판 받음이 없이) 그냥 이 상태에서 점점 더 위대하게 되어 구원되겠다는 것이 인간들의 보통 심성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 세상에 거짓이 판치는 유다나라에 잃어버림의 계획을 집어넣는 것이다.
* 이것이 말씀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말씀대로의 계획에 예레미야가 동원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70년만에 돌아가는 이것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과 같기에 지금 포로로 잡혀가는 이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7이라는 숫자가 들어가는 경우는 반드시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는 계획이라는 것이고 말이다.
* 예를 들어, '7일만에 창조' 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이고, '70년 계획' 도, 이스라엘이 죄를 지은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고 잃어버린 경험을 가지고 일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 여기서 다니엘서를 한번 보자.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 나가시는구나', '하나의 방해도 없이 기꺼이 이루어 나가신다' 라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말한 것을 다니엘이 받아서, 하나님께서 자기 계획대로 반드시 이루어 나가심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철저한 하나님의 고집 '하나님의 열심'이 이룬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열심 !!
(단 9: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 '연수를 깨달았다' 라는 것은, 70년만에 마친다는 예레미야의 말을 다니엘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70년이구나' 하는 것을 안다. 그러면 이 70년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 뒤에 보면 알 수 있는데, 선지자하나 뽑아 내는 기간이 70년이라는 것이다.
* 다시 말하면, 70년이 하나님이 손수 한 년수 라고 했는데, 그러면 70년 동안 하나님이 노시는 것이 아니고, 그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이야 놀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대로, 다윗 같은 왕을 만들어 내고, 선지자 만들어 내고, 성전 만들어 내고, 영원한 언약을 만들고, 새로운 영원한 공동체 만들어내고, 이런 일들 하시고 계셨다는 것이다. 억수로 바빴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완성된 이 일을 다니엘 9장에서 '70이레' 라고 하는 것이다.
* 지금 예레미야가 말하고 있는 그 내용을 다 충족하는 기간이 70이레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70년간 포로 잡혀 있는 이 기간도 하나님께서 하신 그 모든 70이레의 계획 속에 일부에 다 포함이 되어 있는 것이다. 성전을 가서 짓는데 성전이 와장창 깨지고 새로운 완벽한 성전 세워지고, 메시야가 등장하는 이것이 이미 예레미야의 말씀 속에, 즉, 예레미야의 가방 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 70 이레 - 예레미야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충족하는 기간이다 !!
* 결론적으로, 계시란 더 보태어 지는 것이 아니고 계시가 꽃피는 것이다. 개화되면 꽃이 다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을 계시의 개화라고 하는데, 즉, 예레미야 속에 장차 다니엘이 다 들어있고, 다니엘 속에 장차 신약이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를 우리는 이스라엘의 종말을 보았고, 이것이 개화되니까 온 우주의 종말이 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오늘날에는 거짓 선지자가 반드시 등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예레미야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았다면, 우리도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예레미야는 유다만 부정적으로 보았다면, 우리는 온 우주를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설교할 때, 모든 부분을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예를 들어, '경제를 살립시다' 라는, 이것을 가지고 인간을 끄집어내고, 드라마 통해서 인간의 죄를 끄집어내고, 그래서 이 모든 드라마가 거짓 선지자 사상임을 고발해야 하는 것이다.
* 70이레가 이렇게 풀리는 것이다. 70이레는 70년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하신 말씀 중에서 놀지 않고 다 해야 될 몫을 하기 위해서 70이레로 된 것이다. 그러면 왜 70년만에 다 일이 안 되는가?
◈ 70년은 역사적인 용어이고, 70이레는 묵시적 용어이다 !!
* 70년은 역사적인 용어이고, 70이레는 하나님께서 이제는 종말을 온 우주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서 70이레라는 묵시적 용어를 사용해서 역사 끝날 때까지가 70년이라는 것이다. 우주적 계산으로 보아서 역사 끝날 때까지가 70년인 것이다. 유대인들로 보아서는 다시 본토로 되돌아오는 기간 이 70년이고 말이다. 다니엘은 이 70년을 확 당겨서 온 우주가 끝날 그 때 까지를 70년으로 보았던 것이다.
* 그래서 성경신학이 이처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구속사 공부를 안하고 70이레를 강의하게 되면, [ 70×7=490년 ] 라는 이런 식으로 계산하여 완전히 70 이레가 아니고, 490년이 되어 가지고, 이것을 계산한다고 난리를 떤다는 것이다.
* 간하배, 여호와 증인, 안식교 등, 모든 세대주의는 다 이런 방식인데,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니까 다 빠진다는 것이다. 말씀보존학회도 역시 마찬가지고 말이다. 성경을 유대교처럼 옹호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 70년이 무슨 기간인가? - 다시 되돌아오는 기간이다 !!
(렘 29: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30: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이킬 때가 이르리니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 올 때에 그냥 돌아오는가? 그 사이에 땅이 정화되어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가? 땅의 정화가 곧 땅에 사는 인간들의 정화인 것이다.
(레 18: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레 26:34)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레 26:35) 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대하 36: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대하 36:22)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 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대하 36:23)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 지어다 너희 하나님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 땅의 정화에서 인간 정화로 !! - 시련을 통해서 새로운 인간으로 !!
* 이러한 땅의 정화는, 곧 약속의 땅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는 인간 정화를 미리 내다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돌아오는 인간들은 반드시 살만한 인간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신학자들은 제2의 출애굽이라 하는데, 첫 번째 출애굽에서 광야는 광야였다면, 그렇다면 제2의 출애굽에서 광야는 어디였던가?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살았던 가나안 땅이 바로 광야가 되는 것이다.
◈ 제2의 출애굽 - 가나안 땅 탈출 !!
*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천대를 받아도 마땅한데, 왜냐하면 정화라는 시련 과정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사람들을 자신들의 혈족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단순히 피가 섞여 있다고 해서 혈족으로 보지 않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같이 고생을 한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 같이 고생한 흔적이 없을 때에는 군대에서도 대접을 못 받는 경험을 보는데, 같이 고생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은 자기편에 안 넣어 준다는 것이다. 교회를 건축할 때와 같이 고생한 신도가 인정을 받고, 직분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 만사의 대충 흐름이고 말이다.
◈ 70년의 또 다른 의미 - 이 기간은 바벨론의 죄악이 무르익는 기간이기도 하다 !!
(렘 25: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 하여튼 이스라엘 가는 곳은 어디든지 말썽인데, 가나안 황폐하게 되었고, 바벨론에 가니까 고향인 동시에 떠날 때는 또 다시 황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하늘나라인 것이다. 주님 계신 곳이 하늘나라이고 말이다.
◈ 어디를 가도 늘 회개하고 정화하는 곳이 약속의 땅이다 !!
* 어디를 가도 늘 회개하고 정화하는 곳이 약속의 땅인데, 그런데 그곳이 오래 되면 황무하게 된다는 것이다. 떠날 때는 떠나야 하고, 가라 할 때는 가야 한다는 것이다. 가야 정화가 되기에 말이다. 정화라는 것은 새롭게 바꾸는 것이고 말이다.
◈ 약속의 땅이란, 자기 공로로 들어 갈 수 없는 땅이고, 이것이 구원이다 !!
*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더렵혀진 땅이, 그곳을 비우게 함으로 안식을 되찾게 되고, 유다는 70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어 비로소 땅과 안식의 의미를 알게 되니, 이것이 곧 구원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땅은 자기 공로로 들어가 살 수 있는 땅이 아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지금 법궤는 어디 있는가? - 우리 마음속에 !!
*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조들의 죄상을 익히 알기에, 그들은 율법이 돌판에 새겨져 있는 것도 아니고, 성전의 법궤 안에 들어 있을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에 새겨질 사람들인데, 항상 하나님의 성전이 있어야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가 되는데, 그러면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이 법궤가 어디로 이동되는가? 이제는 법궤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법궤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찾아도 법궤는 이 땅에 없다는 것이다.
◈ 예레미야의 핵심이 되는 말씀은, 바로 이 새 언약에 관한 말씀이다 !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 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 첫 출애굽 때에는 하나님의 법이 아까시아 나무상자 안에 있었지만, 이제는 아까시아 나무상자도 필요 없고, 놋뱀도 필요 없기에, 그래서 예레미야 때에 법궤가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감추고 말았는데, 그래서 여기에 관련된 영화가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레이더스, 인디아나 존스 등, 사람들은 항상 이런 식이다. 그러니 이제 법궤는 굿 바이 !!
* 기독교는 역동적이기 때문에, 즉, 성령이 임의로 불기 때문에, 과거의 유물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유물을 보유하면 그것이 올무가 되고, 기념할 것은 오직 우리가 무릎을 꿇고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기념이지, 주기철 기념관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는 것이다. 옛날의 유물을 역사적 의미에서 보존하는 것은 있을 수가 있으나, 어디까지나 그냥 박물관이고, 죄인들의 박물관이라는 것이다. 한경직은 죄인인데, 왜 기념관을 만드는가?
* 그러면, 주님이 진짜 만든 기념품은 누구인가? 바로, 오늘날의 성도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살아 있는 유물은 생각하지 않고, 왜 죽은 자의 유물을 기념하는가?
* 전도서에 나오듯이, '아, 옛 날이여!' 라는, 이런 식은 지혜자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 7: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 지금 살아 계신 주님을 섬기는 것이 소박한 신자이고, 과거에 자기가 땅 바쳐서 일한 것 자랑하는 것은, 성도 생활기록부의 오른편이냐, 우편이냐를 결정할 뿐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 '당신은 지금 신자인가?' 라고 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제자입니까?' 라고 묻는 것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제자의 길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길을 가면 제자이고, 구원의 길을 가면 제자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옛날의 거룩한 법궤가 지금은 거룩한 심령으로 변화가 되었으니, 이것을 성도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모두가 웃사가 만지면 안 되는 그러한 법궤이고, 우리에게 주의 법(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義)의 종이라 하고 말이다. 이 법궤가 들어 있는 상자를 '증거궤' 라고 하는데, 우리는 주님의 의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의인이 되는 것이다.
◈ 새 언약 - 구약시대의 거룩한 법궤가 거룩한 심령으로 변화가 된 상태이다 !!
* 이것이야말로 예레미야가 말한 새로 갱신된 언약, 즉, 새언약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약속한 대로 모든 구비조건들을 다 갖추시도록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인간 쪽에서 갖출 수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증거궤 속에 하나님의 법을 담았고, 인간 편에서 담은 것은 '그들은 고생했다' 라는 것이다. 독자를 잃어버린 그 아픔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렘 31:1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 도다
* 의(義)의 종에 대한 외부적인 모습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고난의 모습이고, 실제로 이것이 내부에는 하나님의 하신 일이 들어있는, 즉, 세상 속에서 고난의 길을 가야 되는 사람들이 성도이고, 그 안에 내부는 살아 있는 법궤요, 성전이라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고생해도 괜찮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면 죽어도 괜찮다는 말이다. 그래서 울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반드시 고향에 돌아오기 때문에 말이다.
(렘 31: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
* 그리고 중요한 것은, 포로기간은 새 창조의 기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렘 31:22)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
* 원래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것은, 여기 남자는 사실은 남자가 아니고 여자의 아들인데, 즉,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는 새 창조와 같은 차원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지금까지 변함없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안는 새 창조물을 안는 그러한 작업이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반복되어지는 것이다.
* 그 근거를 예레미야 31장 20절에서 살펴보자.
(렘 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 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긍휼히 여겨서 탕자가 돌아온 것처럼, 여자가 자기 아들을 안는 그런 식인데, 마치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잉태하듯이 잉태한 그 자체가 고통이고, 그 태어난 예수님이 고통의 길을 가는 것처럼 진짜 구원받은 성도는,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자들만이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는 것이다.
* 여기서 갈라디아서 4장을 보자. 육체와 약속을 서로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약속은 성령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고 말이다.
(갈 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 예를 들어, 베드로가 주를 믿게 된 것은, 혈육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알게 하였다는 말이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 모든 일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홀로 하시는데, 인간의 육체로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 상담학' 이라든지, 이런 목회를 하려고 하는 자체가 완전히 주님을 무시하고 주님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종교적인 행위를 들어내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거짓 선지자의 신학이 되는 것이다.
* 하늘나라의 천상회의 때에 예레미야가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가결된 내용이 이스라엘은 엉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다시 창조하겠다는 것이다. - 다시 다윗을 일으켜서 새 창조를 !!
◈ 오늘날 행함을 강조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이다 !!
* 그러면 거짓 선지자는 이 천상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되는데, 참석하지 않았기에 항상 주장을 하는 것이 우리 힘으로 하면 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면, 오늘날 거짓 선지자는 행함을 강조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그러면 인간들은 뭘 해야 되는가? 참된 선지자는, '주님이 홀로 다 하셨다' 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주님이시기에 말이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다 하셨고, 일하고 계시고, 적용을 하는 것도 그리스도께서 하신다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렇게 보면 다락방의 류광수가 대번에 그 진상이 밝혀지는데, 류광수가 기성 교단을 공격한다고 이단이 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의 계시에 의해서 전도해야 된다고 하는 그 행함 때문에 이단이 되는 것이다. 주님이 하시는 그 전도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각양 불신자들의 모임이 그들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뜨거움으로 전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단은 이렇게 '인간이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것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 예레미야가 목회자임에 분명한데, 그러나 오늘날 식으로 하면 그는 목회를 한 흔적이 없는 것이다. 그냥 주님이 주신 말씀을 외치다가 그냥 소리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언제 죽었는지 모르게 말이다. 기존 거짓 선지자들의 목회, 제사제도, 성전제도, 낙관적인 희망, 축복, 평강, 방백들 등을 모조리 공격하다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 그러면 왜 그런가? 그것은 바로 진짜 메시야 예수님께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것을 '릴레이 게임'이라고 하는데, 프로 레슬링의 바통터치 식인 것이다. 예레미야가 가지고 있는 그대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렘 18: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렘 32:8) 여호와의 말씀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내게로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 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렘 32:15) 만군의 여호와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렘 32:44) 베냐민 땅과 예루살렘 사방과 유다 성읍들과 산지의 성읍들과 평지의 성읍들과 남방의 성읍들에 있는 밭을 은으로 사고증서를 기록하여 인봉하고 증인을 세우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포로로 돌아오게 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토기장이가 밭을 산다는 그 이야기는 언젠가는 이 땅에 돌아온다는 뜻이고, 예수님이 밭을 산다는 이야기는 내가 산 이 땅에서 언젠가 부활한다는 뜻이고, 즉, 저쪽은 언젠가 돌아온다는 수평적인 이동이고, 예수님 쪽에서는 수직적 이동이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 죽고 하늘나라에 가서 새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에 와서는 할 수 없이 역사와 시간개념을 무시해야 하는 것이다.
(마 26: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마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죽은지라
(마 27: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마 27: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마 27: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 밭이라 일컫느니라
(마 27: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마 27: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 종말에는, 역사와 시간개념을 무시해야 한다 !!
첫댓글 좋흔 자료 감사합니다. 2번이 빠져있어서 좀 아쉽기는 하자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