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숙공의 조선시대 대일 외교 활약상
"이예의 사명
-나는 조선의 통신사로소이다" 출판기념회도 열렸다.
조선시대 대일 외교무대 독보적 활약이 컸으며 이로 인해 중인계급서 공 세워 양반으로 신분이 상승되었다.
이예(李藝). 조선 전기의 관원(외교관). 본관은 학성(鶴城). 아호는 학파(鶴坡). 시호는 충숙(忠肅). 학성이씨 시조.
1373년(공민왕 22) 울산에서 태어나 1445년(세종27) 2월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예의 부친과 조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학성이씨 문중에서 '고려말 왕조 교체기에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키다 조선 왕조의 미움을 샀던 사대부 신분'으로 전승돼 오고 있다.
1380년(고려 우왕6) 울산군에 왜구가 침입했다. 이때 이예의 모친도 왜구의 포로로 끌려갔다. 당시 부친이 생존했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예는 중인계급에 속하는 아전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아전은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관아에서 일선 행정의 실무를 맡은 하급 관리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이예는 울산의 향리(蔚山群吏)이며, 직책은 기관(記官, 일선 행정기록을 맡은 지방 관아의 직책)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예는 그 후 종2품인 동지중추원사의 자리까지 올랐다.
충숙공 이예는 조선의 대일 외교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던 독보적 인물이다. 근세 이전 민간의 국제교류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임금이 파견하는 공식 사행은 정치·외교적 기능은 물론 문화의 국제교류에 있어서도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문학, 예술, 농업기술, 광업기술, 무기, 음식 등의 문화교류도 사행을 통해 이뤄졌다.
조선 전후기에 걸쳐 일본 국왕에게 파견된 사행(私行)은 모두 30회이다. 이예는 이 중 6회의 사행에 참여했다. 또한 통신사란 명칭이 최초로 사용된 사행에도 참여했다. 조선 전기 200년간 대마도, 일기도, 유구국에 대한 사행은 40회였다. 이예는 이 중 7회의 사행에 참여했다.
왕조실록을 보면 이예에 대한 세종의 신뢰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다. 실록에는 왕이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서 그대를 명하여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지 말라"며 이예를 보냈다고 기록돼 있다.
1396년(태조5) 12월 이예의 나이 24세가 되던 해이다. 왜적 비구로고 등이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침입해 와 울산군수 이은(李殷) 등을 사로 잡아갔다. 이때 울산의 관리들은 모두 도망해 숨었다. 그러나 아전 신분의 이예는 숨지 않았다. 오히려 해적의 배를 바다 가운데까지 뒤쫓아 가서 군수와 같은 배에 타기를 청하였다. 해적이 그의 용기에 감복하여 승선을 허락했다. 대마도에 이르렀을 때 왜적이 군수 일행을 죽이기로 했다. 그런데 이예가 아전으로서 예의를 다하여 변함없이 군수를 모시는 것이 아닌가. 왜적은 그 모습에 진실로 감동해 죽이는 일을 포기했다. 그 대신 군수 일행을 대마도의 화전포에다 억류했다. 후일 조선에서 파견한 통신사의 중재로 1397년 2월 이예는 군수와 함께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이예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아전의 역(役)을 면제하고 벼슬을 주었다. 당시 그 벼슬이 어떤 직책이었으며, 어떤 품계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아무튼 이 사건을 계기로 이예는 중인 계층의 아전 신분에서 벗어나 사대부 양반으로서의 전문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된다.
1400년(태종 즉위년)이예는 조정에 청해 회례사(回禮使) 윤명(尹銘)의 수행원으로 대마도에 갔다. 왜구에 포로로 잡혀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마도 부근 일기도의 집들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1401년(태종1) 이예는 외교관으로서 공식 사행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임금의 명에 따라 보병사로서 일기도에 파견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