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양으로 진격하는 청군을 피해 도성 동쪽 시구문으로 황급히 빠져나온 인조는 송파나루를 건넜다.
인조를 모시던 신하들은 하나 둘 흩어져 그 주위에는 몇 안되는 신하들이 왕의 피난길을 도왔다.
날은 어두웠다. 설상가상으로 눈까지 내렸다. 그 눈 쌓인 산길을 타고 남한산성으로 가는 일이 아득했다.
신하들이 번갈아 인조를 덮고 험한 산길을 걸었으나 모두 지치고 지쳐 길을 멈추고 또 멈추웠다.
"나를 좀 업어서 성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
굽 높은 나막신을 한 총각에게 인조가 부탁했다. 그 총각은 길가에서 나무를 하고 있었다.
그 총각은 나막신을 거꾸로 돌려 싣고 왕을 업고 눈 덮힌 산길을 달렸다.

인조는 무사히 남쪽 문 지화문(至和門)에 도착했다.
왕은 그 지화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무사히 피난할 수 있었다.
"왜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느냐."
남한산성에 무사히 도착한 인조는 불편하게 나막신을 거꾸로 신은 게 궁금해서 물었다.
"당신은 피난민 같은데, 만약 신을 바로 신고 산을 오르게 되면 눈 위에 발자국이 나서 적군에게
들키게 되는 위험에 처할 될까봐 나막신을 거꾸로 신었지요."
그 총각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인조는 그 총각이 너무나 신통하고 고마워 말했다.
"너의 소원이 있으면 말해보라."
"당신이 입고 있는 그 옷을 벗어주오."
그 총각은 인조가 입고 있던 곤룡포가 너무 좋아 보였나 보다.
인조는 자신이 입고 있던 곤룡포를 그 총각에 벗어주었다.

남한산성 지수당 북쪽 화단에 있는 두 개의 묘비가 있다.
왼쪽에 있는 묘비이다. 묘비 위쪽이 깨져 없어졌다.
오른쪽부터 韓氏袝左 大夫同知中樞府 徐公欣男之墓 이렇게 써 있다.
묘비 주인공 서흔남(徐欣男)이다, 서흔남이 바로 왕을 업고 달린 그 총각이다.
서흔남은 남한산성에서 여러 활약을 했다고 한다.
청나라 군사가 철통같이 포위하여 산성 안과 밖의 교통을 끊어놓았을 때이다.
그는 거지 행세나 적군으로 변장을 하고, 심지어 미친 사람처럼 행세를 하면서
적진을 통과하여 삼남지방과 강원도 지방으로 나가서 위급한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서흔남은 전국 각지의 근왕병 진영에 왕의 뜻을 전하는 동시에 적군의 동태를 보고하는 등의 활약을 한다.
그는 청과의 전투에 참여하여 청군 3~4명을 죽이는 공도 세웠다.
서흔남은 죽을 때까지 왕에게서 받은 곤룡포를 정성껏 보존했다고 전한다.
그는 죽을 때 평생 간직해온 곤룡포를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다.
그의 가족들은 그와 함께 곤룡포를 광주군 중부면 검복리 병풍산에 묻었다.
그에게는 정3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라는 파격적인 품계를 내린다.
서흔남의 묘 근처를 지날 때 벼슬아치들은 말에서 내렸다고 한다.
바로 왕의 곤룡포가 묻혀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예를 차린 것이다.

오른쪽에 세워진 서흔남의 묘비이다.
'嘉義大夫大夫同知中樞府事徐公之墓'
그의 묘는 후손이 화장을 해서 없어진다.
그 묘역에 있던 두 개의 비는 지수당 화단으로 옮긴 것이다.
인조를 업어 모신 사람은 서흔남이 아니라 서기남(徐紀男)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서기남은 천하영웅이라 그 후 원두표의 비장이 되어 산성 북문 밖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우고 청나라 장수 양고리를 붙잡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한미한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크게 등용되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