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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감옥
-김 원 일
금년으로 일곱 번째 맞은 "모스크바 국제 도서박람회"에 한국이 처음으로 오백 칠십 여 종의 도서를 출품하게 되었다. 그 사무를 주관한 대한출판협회는 도서박람회의 참관과 소련 시찰을 목적으로 모스크바 파견 대표단을 모집한 결과, 스물 두 개의 회원 출판사 대표가 참가신청서를 내었다. 나도 그 일원으로 지원하였다. 모스크바에서의 도서박람회 개최 기간은 일주일이었으나 한국 대표단의 일정에 따라 나 역시 레닌그라드와 키에프를 둘러보는 열 이틀 동안의 소련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김포공항으로 마중을 나온 아내가 안부말 끝에 현구의 소식을 알려 주었다.
"그쪽은 국제전화도 힘들고 공연히 걱정만 안고 다닐 것 같아, 당신이 레닌그라드에선가 전화를 했을 때 그 말은 하지 않았지만요, 일주일 전에 삼촌이 경북대 의대 부속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현구의 병에 따른 감정유치 명령이 드디어 법원으로부터 떨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아내의 말에서 아우의 병이 전문의의 지속적인 관찰이 요구될 만큼 나빠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구는 일심공판에서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되어 고법에 항소 계류중에 있었다. 그러나 감정유치 명령 결정이 너무 늦은 감이 있어 나는 법원의 그 조치를 선의로만 해석할 수 없었다. 십 년 전 아우는 간염을 앓은 적이 있었다. 79년 그해, 1년 8개월의 형을 살고 형집행 정지로 석방된 직후였다. 눈의 흰자위에 노리끼리한 황달 증세가 나타났으나 숙영이 집에서 쉬며 가까운 개인병원의 통원치료로 쉽게 회복되었다. 아우의 허우대가 건장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허약 체질도 아니었기에 그 뒤 그는 별 탈 없이 바쁘게 그의 삶을 살아왔던 셈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구속된 뒤, 경찰에서 검찰로 넘어 가고부터 그는 그 알량한 그곳 식사조차 제대로 소화를 못해 늘 속이 쓰리고 기운이 없어 앉아 있기조차 힘들다고 면회자에게 호소를 했던 터였다. 첫 장마절기에 들어 날마다 비가 뿌리던 7월 초순 어느 날, 내가 대구로 내려가서 면회를 통해 아우의 얼굴을 보자, 그를 못 본 지 불과 한 달 사이에 보기가 딱할 정도로 여위었고 혈색 또한 좋지 않았다. 얼굴색이 검누렇게 찌든 데다 광대뼈가 도드라져, 다시 단식이라도 시작한 듯 영양실조증이 완연하였다. 다섯 해 전 아우가 안동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교도소 당국의 양심범 가혹행위에 항의하여 일주일 동안 물만 먹고 단식을 한다기에 내가 그를 면회 갔을 때가 꼭 그랬었다. 그러나 그때는 얼굴색이 창백했다는 점이 달랐다. 일거리도 없을 이 장마 비에 주민들이 뭘 먹고 지낼까, 그 걱정을 하다 보면 잠들지도 않았는데 마치 꿈이나 꾸듯, 내가 석방이 되어 산동네로 막 뛰어올라가고 있잖아요. 그 말을 하며 아우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표정 중에 한 특징이라고 말해야 할 그런 미소를 지을 때, 입가의 메마른 살갗이 겹주름까지 져서 서른 아홉 살의 한창나이인 그가 마치 늙은이 같아 보였다. 아무래도 위장이나 간장에 문제가 있다며 진찰을 받았느냐고 내가 묻자, 아우는 소화제를 타 먹고 있다며, 별로 달리 아픈 데는 없으니 곧 낫겠지요 하고 힘담 없게 대답했다. 나는 아우의 담당변호사 주영준을 만나 현구가 병이 있으니 병원 감정유치(鑑定留置)를 청구하여 종합병원에서 진찰과 치료를 받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상경했었다. 그러나 내가 소련으로 떠날 때까지 그 허가는 떨어지지 않았었다.
공항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내는, 그저께 당일치기로 대구에 다녀왔다며, 현구의 종합검진이 진행중이더라고 말했다. 그런데 의사 말로는 병이 위가 아니라 간 쪽이며, 자기가 보기에도 그 상태가 아주 좋지 않더라는 것이다.
"복수(腹水)로 차 있는 물부터 뽑았는데, 체중이 한꺼번에 육 킬로나 빠졌대요.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여위었어요. 검사를 받느라고 미음조차 먹지를 못하니.... 간병하시는 어머님이 몸져누우실까 걱정입디다. 그렇다고 애들 때문에 내가 내려가 있을 수도 없잖아요. 아무리 바쁘더라도 당신이 속히 한 번 다녀와야겠어요"하며 손수건으로 눈을 훔치던 아내가 문득 생각했는지, "지난번 것하고 이번 힘써준 사례비로 변호사 비용 일백 만원은 대구 아가씨가 냈어요"하고 말했다.
차창 밖으로 팔월 중순의 불볕 더위가 끓고 있었다. 가로수 잎이 후줄근히 늘어졌고 멀리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는 증발하는 증기로 무너져 내릴 듯 흐물거렸다. 그 흐물거리는 뒤쪽, 현구의 여윈 모습이 물아래 가라앉은 가랑잎이듯 얼비쳐 보였다. 아우와 나는 여덟 살의 나이 차이로 사실 속 깊은 대화는 나누어보지 못한 채, 여지껏 떨어져 살아온 세월이 더 길었다. 그와 함께 생활하기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였다. 그가 중학교에 다닐 때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그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입대했으며, 그가 대구에서 대학에 다닐 때 나는 이미 사회인이 되어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아파트 주차장에 보름째 덮개를 쓰고 있는 자가용을 그대로 두고 나는 좌석버스 편으로 출근하였다. 자리를 비운 동안 판매실적 장부부터 점검하니, 모두 산과 바다를 찾아 빠져나갔을 지난 두 주일 동안 따분한 읽을거리가 잘 팔릴 리 없었다. 가을 출간을 목표로 진행중이던 신간 세 권의 편집 진행 현황도 살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가져온, 초판이 현지 시중에 나온 지 불과 달포밖에 되지 않은 아나톨리 리바코프의 소설 《1935년과 그 이후》첫째 권의 원서 번역을 서둘러 착수해야 했기에 《아르바뜨 아이들》을 번역했던 러시아어과 교수를 만났다. 《1935년과 그 이후》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힘입어 소련에서 출간되자마자 곧 서방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리바코프 만년의 대작 《아르바뜨 아이들》의 제 2 부 첫 권에 해당되는 소설이었다. 3백여 쪽 분량의 원서를 두 달 안으로 번역을 마쳐 달라는 나의 부탁에, 교수는 더위를 핑계로 난색을 표명하였다. 조급한 마음 같아서는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이미 시판되고 있을는지도 모를 일어판을 구해 서너 토막으로 나누어 여럿에게 중역을 의뢰했으면 싶었으나 나의 출판 기본방침이 그러하지 아니했기에 제1부 역자와 밀고 당기는 설득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꼼꼼한 번역은 믿을 만했던 것이다. 인원 아홉 명을 거느린 내가 경영하는 소규모 단행본 출판사는 그동안 팔십여 종의 책을 출판하였으나 작년 이후로는 내세울 만한 상품이 없어 현상유지가 빠듯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 점에는 영업부장의 은근한 투정도 있었듯 시류에 영합하는 청소년 취향의 감상적인 읽을거리를 출판에서 배제한 내 출판 방침에도 원인이 있었다. 그런데 리바코프의 《아르바뜨 아이들》세 권이 근래 도하 신문 외신란과 특집란을 거의 덮다시피하는 소련의 민주화 개혁정치 소개기사에 힘입어 사 개월 만에 총 9만여 권의 판매 실적을 올리고 있으므로 운영자금에 큰 도움을 받고 있었다. 마침 소련에서 국제 도서박람회가 개최되었기에 나로서는 첫 외국여행에 선뜻 따라나서게 된 것도 "소련작가동맹"산하 "소련저작권협회"와의 사무 협의와 리바코프의 면담에 주목적이 있었다. 한편, 문화의 해빙기를 맞아 재평가를 받고 있는 스탈린 치하 강제수용소의 실태를 고발한 샬라모프의 소설 《콜리마 이야기》의 원전을 입수해 오기도 하였다. 그래서 저녁시간에는 다른 러시아어과 교수를 만나 샬라모프의 소설 번역을 교섭하느라 식사와 곁들여 맥주도 마셨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이미 아내에게 말해 두었기에, 나는 떠난다는 전화 한 통만 집에다 걸고 밤기차를 탔다.
<중략>
내가 해직기자의 추레한 모양새로 그 협의회의 모임에 나다니며 농성으로 더러 외박도 할 무렵, 어머니는 아예 대구 생활을 작파하고 서울의 나의 집에서만 기거하였다. 저렇게 남다른 길을 걷는 현구를 보더라도, 피난 내려와 너희들만 믿고 살아온 이 어미를 보더라도 장자인 너만은 제발 험한 길 스스로 찾아 나서지 말라는 당신의 간곡한 호소를 이틀이 멀다하며 듣고 살았다.
-내 살아 생전 통일될 그날 이 어미 등에 업고 봄철이면 진달래 지천으로 피는 고향 산천을 꼭 구경시켜주겠다고 너 대학에 들어갈 때 굳은 약속 하지 않았느냐. 어미한테는 너가 돈 많이 버는 일도, 남처럼 높은 사람 되어 낮은 사람 시기 사는 것도 원치 않는다. 너가 그저 부부 금슬 좋게 오손도손 다숩게 살며 자식 건사 잘하고 건강만 하다면야 그 이상 소원이 없다고 나는 늘 하나님께 기도한단다.
어머니는 그런 말도 했었다. 어머니가 철야기도에 금식까지 단행하며, 장자인 내가 제발 가정적인 안정을 찾게 되기를 기원드릴 때, 나는 사실 다른 어머니와 구별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 모성애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도 적잖게 겪었고, 주량이 약한 나로서 소주도 꽤나 마셨다. 제 5 공화국이 들어선 직후던가, 현구가 대구지방 노동운동 실태와 현장 사례라는 제목의 원고 묶음을 들고 나를 찾아와 출판 문제를 상의했을 때, 내가 거절한 것도 아우가 부탁한 책을 형의 출판사에서 낸다는 계면쩍은 점보다, 아우가 관계하며 원고의 편자로 되어 있는 대구지방 민주노조의 그 활동이 당시의 시국과 견줄 때 다분히 문제시될 수 있다는 기우 탓이 더 강하게 작용했었다. 그 원고는 대구지역 경제 변천 과정, 산업구조, 제조업 현황, 노동계급 실태에 절반을 할애하고, 나머지는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생존권 투쟁의 기록이었다. 당국의 방해로 대부분 노동조합이 결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친목회 단위로 사용자측을 상대하여 노동자들이 공동투쟁에 임한 일지(日誌)식 사례가 공장 단위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신문사 통폐합에 따른 관제 언론화의 획책에 맞서서 내가 솔선하여 그 투쟁에 나섰다기보다, 나는 내 양심의 뜻에 좇아 해직기자의 길로 나섰던 셈이다. 그런 나의 전력으로 보아도 비록 내 출판사가 진보적인 사회과학서를 십여 종 출판하기는 했으나, 역시 그런 책은 그런 종류의 책을 내는 출판사라야 동류항으로서의 성격이 부각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현구에게 출판사를 천거할 입장이 아니었다. 나는 당시의 경색된 시국 전반을 들먹이며 아우에게 출판을 보류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했었다. 그러자 아우는 어느 쪽으로도 자기의 마음을 보이지 않고, 바쁜 형님 시간만 빼앗았다며 예의 그 수줍어하는 미소를 보이고는 원고를 찾아갔었다. 그 원고는 석 달만에 책이 되어 나왔고, 보란 듯이 나에게도 한권이 우송되었다. 역시 나의 예상대로 그 책은 당국으로부터 압수의 수난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우는 물론, 출판사 대표와 편집 책임자가 보름 동안 구류를 살고 나왔던 것이다.
"윤구야, 너 이진서 소식 들었냐? 건설업 하는 똥똥한 친구 말야. 진서가 죽었어.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야."근조가 말했다.
이진서는 고등학교 삼학년 때 급우였다. 나 역시 그가 그렇게 쉬 죽으리라고는 생각 밖이었다. 문들 60년 그해 2월 28일이 떠올랐다. 당국이 고교생들의 민주당 선거강연회에 참석을 우려하여 학교측에다 일요일 등교를 종용하였다. 그 발상법조차 우스꽝스러운, 영화 관람이 미끼였다. 그러자 우리들은 일요 등교에 항의하여 고등학교로서는 전국 처음으로 가두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오후 1시 5분, 삼학년이 주동이 되어 수백 명이 교문을 빠져나와 어깨를 겯고 반월당 큰길로 내달았다. 학생들의 인권을 옹호하라! 민주주의를 소생시켜라! 우리는 학원에 개입하는 정치권력에 반대한다! 우리는 비굴하지 않다! 여러 종류의 구호가 외쳐졌다. 대학 입시에 매달렸던 나는 그 시위를 촉발시킨 주동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 역시 장기집권을 음모하는 이승만 정권의 비민주적인 작태에 의분만은 느끼고 있었다. 개체에서 공동체의 운명으로 결속되자 모두 힘이 솟았다. 우리는 계속 산발적인 구호롤 외치며 중앙통을 거쳐 도청 광장을 향해 질주하였다. 그때 나와 어깨결었던 친구가 진서였다. 물론 근조도 동참을 했었다. 진서를 마지막 본지가 벌써 삼 년이 넘을 듯하였다. 그는 집장사답게 사십대를 들어서자 몸이 났고, 말끝마다 바빠서 미치겠다는 푸념을 했었다. 집에서는 식구들로부터 하숙생으로 내몰릴 만큼, 낮이면 현장에 붙어살고 밤이면 그 스트레스를 푸느라 술판 앞에 앉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몸을 돌보지 않고 뛰니 주택경기가 좋은 시절이라 그가 짓는 다세대 연립주택은 잘 팔렸다.
─세 끼 밥 먹기는 마찬가진데 돈 몇 푼 더 벌겠다고 내가 꼭 이렇게 미친 놈 널뛰듯 허둥대야 하냐? 난 정말 속물이 다 되어 버렸어. 윤구, 우린 그 시절이 좋았잖아. 도청 앞까지 진출했을 때 말야. 그때 대구경찰서로 무더기 연행당해 꽤나 얻어터졌지. 그런데 지금은 뭐냐. 난 집장사가 되고, 넌 그래도 식자 소리 듣는 출판쟁이가 됐으니 나보다야 낫다. 사일구 혁명도 우리가 그렇게 도화선에 불을 붙여놓았는데, 길 닦는 놈은 따로 있고 세단 타고 지나가는 놈들 따로 있으니,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자, 마셔. 먹는 게 남는 거 아냐.
진서가 맥주잔을 들며 떠들던 불쾌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 역시 사일구 세대의 한 일원으로 대학 일학년 그해, 학우들과 함께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사일구의 순수한 의미는 그 뒤 계속된 군사정권에 의해 퇴색되었다. 이 땅에 참다운 민주주의의 소생을 바라며 소박한 정의감만으로 뛰쳐나갔다. 총탄에 쓰러진 185명의 영령은 수유리에 밀폐되고 말았다. 그 "미완의 혁명"을 열심히 들먹이는 우리 세대의 일부는 혁명의 주역으로 자처하며 오히려 정권에 유착되어 영달에 급급했고, 사일구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도 계속 생겨났다. 그러나 사일구가 순수하고 정직한 젊은이들의 의분만으로 사령탑의 전략 전술 없이 시작되었고 끝났기에, 참여자의 대부분은 본래의 자기 직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사일구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그 어떤 노력에도 몸 바치지 않은 채 결혼하여 가정에 안주해버림으로써 봉급쟁이 기자로 평범하게 살아간 나날이었다. 후진국의 종속적 정치 형태를 탓하며 나까지 혁명을 팔아먹기에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나는 여지껏 한 번도 어느 자리에서나 사일구 세대로 자처한 적이 없었다.
사십대의 사망률이 세계 일위라는 말끝에 근조는 한국인의 지나친 성취 욕구, 물신숭배의 이기심, 거기에 따른 맹렬한 저돌성과 조급증을 통박하였다.
"한창 일할 나이인 사십대에 쓰러진다고 생각해 봐. 자식이 뭔지, 이제부터 시집 장가보낼 때까지 돈이 다발로 들어가는 나이 아냐. 일할 나이만 믿고 천방지축 뛰다가 진서도 그렇게 쓰러진 게야. 옛날에는 삼시 세 끼만 먹어도 족했는데, 먹고 살 만하게 되니 모두들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잘사는 놈들은 제 배 터지는 줄 모르고 돈과 땅을 혈안이 되어 긁어모으기만 하지, 또 반대쪽에 섰는 학생놈들과 노동자들 보라구. 그렇게 폭력을 앞세워 죽자살자 나선다구 제 배부른 자들이 나누어 먹자며 백기 들고 나서겠어. 이 정경유착의 방만한 시대에 말야. 혼란만 오구, 경제나 망치는 게지. 노동자가 파업투쟁해서 임금 쬐금 올려놓으면 정부가 그 노동 파업에 신경을 쓰는 사이 물가가 더 뛰어 덜미를 잡는 것, 그들이 그걸 왜 몰라. 지엔피 일만 달라까지만 좀 참으면 안 되나......"
논리가 서지 않은 근조의 주절거림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는 다시 진서의 죽음으로 말머리를 돌리더니, 고삼에 다니는 딸애가 서울의 음악대학을 목표로 피아노를 치는데 일주일에 두 번씩 비행기로 왕복하며 서울의 모 유명한 교수 밑에 두 시간씩 개인교수를 받는다고 말했다. 그 수업료가 자그만치 월 큰 것 한 장,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고 오늘의 교육제도까지 마구잡이로 헐뜯었다. 상류층 속물로 주저앉아 버린 근조를 두고 사일구 세대라면 그의 말은 꼴사나운 작태가 아닐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남들처럼 티케이를 앞세워 욕망의 덩어리 서울바닥에 끼어 붙지 않고 고향에 남아 있다는 점만은 신통하였다. 어쩌면 그 끼어들지 못함의 화풀이를 그렇게 입으로 찧고 있는지도 몰랐다. 들은 만큼 들어주었구나 싶어 내가 말을 꺼내었다.
"너도 알고 있지. 내 동생 말야. 현구가 여기에 입원을 했어."
근조는, 그 문제 많은 동생? 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지방신문에서 법정에 선 현구를 사진으로 보았다고 그가 말했다. 아마 비산동 재개발지역의 철거민들이 몰려와 법정 소란을 벌였던 아우의 일심공판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구속 중인 줄 아는데, 어디가 안 좋아?"
나는 현구의 병력을 설명했다. 종합검진이 끝난 모양인데 지금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앞으로 병원 측에서는 어떤 조치가 있을는지에 대해 알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그렇게 해보마고 대답했다.
"점심이나 같이 하지. 내가 입원실로 찾아가마."
나는 그의 말을, 그때까지 그 결과를 알아오겠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
현구의 병동으로 돌아오니 입원실 앞 복도에 다섯 명의 아낙네가 의자에 앉거나 쪼그리고 앉아 동수 엄마와 무슨 이야기인가 나누고 있었다. 모두 그 표정이 어두웠다.
"친구분 만나셨어요?"동수 엄마가 내게 물었다.
"점심시간에 이쪽에 오기로 했어요. 그때 무슨 소식이든 알아오겠지요."
"아주버님, 그럼 그 시간에 제가 여기로 전화를 하겠어요. 만약 외출을 하신담 어머님께 귀띔을 해 주세요."
동수 엄마가 내게 말하고는 입원실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하루입이 바쁜 판에 일터는 어찌하고 이렇게 몰려오면 어떡하냐며 아낙네들과 함께 바삐 병동을 떠났다. 복도를 걸으며 아우의 병실을 돌아보던 머릿수건을 쓴 한 아낙네가, 선생님이 어서 회복되시고 풀려 나오셔야 될 텐데 하며 거친 손등으로 눈꼬리를 훔쳤다. 아낙네들은 동수 엄마가 운영하는 빈민촌 탁아소의 어머니들임에 틀림없었다. 하나같게 까맣게 그을린 얼굴이 주름살이 고랑으로 패여 있었다. 상주댁처럼 왜바지 차림에다 흙가루를 뒤발한 남자용 작업복까지 입고 있어, 공사판 일용직에 나섰음이 한눈에 짚여졌다.
내가 복도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찐득하게 괴는 목덜미의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고 있을 때, 숙영이가 저만큼에서 양산을 접으며 걸어왔다. 누이는 초급대학 재학 시절 그런대로 반반한 외모와 활달한 성정 덕인지 약학대학에 다니던 시골 출신의 김서방과 연애을 하더니, 졸업 뒤 곧 결혼을 했었다. 지금은 세 아이를 두었고, 시 외곽 아파트 단지에서 약국을 열고 있었다. 일년으로 쳐서 어머니가 서울의 내 집에서 두세 달을 보낸다면 대구에서는 주로 숙영이네 살림집에 기거하며, 현구네가 사는 비산동 산동네로 그 노구를 이끌고 마치 등산이나 하듯 반찬거리를 싸들고 돌아다녔다. 어머니는 내 집으로 올라와 보름쯤 계시면, 아파트 생활이 닭장 같고 감옥 같다며 푸념을 하기가 일쑤였다. 그럴 때쯤이면 어김없이 누이로부터, 서울에 웬만큼 계셨으니 어머니를 보내달라는 장거리 전화가 걸려왔다. 김서방이 약국으로 나가 대신 점포를 지킬 때가 잦다 보니, 학교에서 돌아오는 외손들 밥을 챙겨 먹이랴, 잡다한 집안 살림을 맡아줄 노친네가 필요하기도 하였다. 한편, 장사로 서른 해 가까이 시장바닥에서 보낸 바지런한 "이북녀자"인 어머니로서는, 비록 타관이긴 하지만 오래 정이 들었던 대구요, 아직도 교동시장(예전의 양키시장)에는 벗들도 있었고, 늘 위태로와 보이는 막내의 생활이 마음에 걸려 서둘러 서울을 떠났다. 홀어미는 죽 쑤어먹을 처지라도 되면 맏이 집에 살아야 한다던데 내가 이 무슨 주책인고 하면서도, 출근길 내가 자가용 편에 고속터미널까지 모셔다 드릴 때는, 그 자그마한 몸집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현구가 다시 구속된 뒤로는 아주 대구에 주질러 앉아버리고 마셨다. 아우의 옥바라지가 어머니의 큰 몫이었던 것이다.
"오빠, 김서방이 여기에 아는 의사가 있어 알아봤는데,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고만 말하지 구체적인 답은 회피한대." 숙영이가 들고 있던 양산의 날개를 모두어 똑딱단추로 채우고는 말했다. 밝은 성격처럼 그 목소리에는 그늘이 없었다.
"이제 와서야 감정유치를 허가해 줄 정도니 그렇다고 봐야지. 시국사범으로 몰아붙이면 사람 목숨 하나야 짐승쯤으로 아는 세상 아니냐."
"오빠도 알지, 간 질환 말야. 일단 경화로 넘어가면 양의로서는 이료제가 없다잖아. 잘 먹고 푹 쉬고..... 그래도 위와 신장의 기능이 자꾸 떨어져 소화도 안 되구 소변이 시원치 않구...."
간장약은 잘 팔면서도 약사의 아내가 아는 지식이나 내가 알고 있는 상식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내가 말이 없자 숙영이가, 엄마 안에 계시지 하며 입원실로 걸음을 돌렸다. 나는 누이를 불러 세웠다.
"지난번에 고마웠어."
나는 지갑에서 접은 봉투 하나를 꺼내었다.
"뭔데?"
"너가 대납한 현구 변호사 비용 말이야."
"뭘 그런 걸 다 돌려주고 그래. 우리가 어디 남이야."
숙영이가 정색을 하며 내 손을 밀쳤다. 순간적으로, 우리는 정말 남다른 동기간이구나 하는 정감이 가슴 뿌듯이 채워왔다.
현구의 보석이 결정되었을 때, 나는 소련에 나가 있었다. 내가 집에다 들여놓은 월 구십 만원으로 가계를 꾸려가는 아내로서는 일백만 원을 자기 통장에서 현찰로 선뜻 찾아낼 여축금이 없었다. 출판사 경리 최양에게 어떻게 돈을 변통하려고 회사에 전화질을 하는 사이, 대구에서 누이가 일백만 원을 내어놓은 모양이었다. 그러며 올케에게 전화로, 출판사가 다들 어렵다는데 오빠가 귀국하더라도 그 돈 걱정은 말라는 단서까지 달았었다. 그러나 그 문제의 해결이야말로 누이 몫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대구로 내려오며 당좌수표 한 장을 가져왔던 것이다.
숙영이는 한사코 봉투를 받지 않겠다고 우겼다. 자기야말로 여지껏 시가와 친정을 따로 저울질해 본 적이 없으며, 시집을 가서도 그만한 돈몫은 해낸다고 말했다. 잠시의 실랑이 끝에, 나는 누이가 팔에 걸고 있는 마로 짠 손가방에다 봉투를 쑤셔넣고 병실로 돌아섰다.
정오를 조금 넘겨 위생복을 벗어버린 함근조가 왔다. 그는 내가 궁금하게 여기는 문제에는 언급을 않고, 모처럼 만났는데 괜찮은 데로 안내를 하겠다며 나를 이끌었다. 어머니는 동수 엄마가 가져온 밥과 빨리 먹지 않으면 쉬어버릴 녹두죽이 있었으므로 병실에서 숙영이와 함께 식사를 하겠다고 했기에, 나는 근조를 따라 나섰다. 건물 안에 있을 때는 눅눅하던 더위가, 볕살 아래로 나서자 금세 살갗의 땀구멍마다 물기를 자아내었다. 해는 머리맡에서 작열하고 있었다. 말복을 넘겼는데도 알아줄 만한 대구의 불볕더위였다.
"너 개 먹지?"
근조가 자가용에 나를 태우고 시동을 걸며 물었다. 내가 좋다고 대답하자, 그는 경산으로 빠지는 외곽도로로 차를 몰았다. 대구도 변두리로 계속 고층 아파트가 늘어나고 있었다. 한낮의 더위 탓도 있겠지만 이제 시내고 시 외곽이고 구별이 없는 서울에 비한다면 교통 소통이 원활하였다. 근조는 여름 한 철만의 보양이 아니라 중년 나이에 왜 개고기가 좋은지에 대해서 그 자랑을 늘어놓았다. 자기들이 안 먹는다고 우리를 야만인으로 취급하는 서양인의 얄팍한 선민의식을 성토하며, 각 민족의 고유한 음식 관습과 그 식성 이야말로 존중되어야 마땅한 기본적인 향유권이라고 주장하였다. 병원에도 사십대가 중심이 되어 "멍멍회"가 조직되어 있는데 그 먹자판은 대성황을 이루며, 자신이 그 회의 간사를 맡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와 경산의 접경지대 야산의 숲속에는 보신탕·염소탕을 전문으로 하는 대형식당이 많았다. 자가용이 넓은 주차장에 들어찼고, 옥내옥외 가릴 것 없이 넥타이를 풀어제친 우리 나이 또래의 식도락패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갈대발을 지붕으로 얹은 평상 한 귀에 자리를 잡자, 근조는 주인과 잘 아는 사이인지 "목살"세 근을 전골로 주문했다.
"내과 쪽에서 뭐라 그래?"전골냄비에서 야채와 고기가 푹 익을 동안 내가 물었다.
"글쎄 말야, 경화가 심하다면서도 모두 쉬쉬 하대. 그게 단순한 폭행사건이 아닌 데다 재판에 계류중이라...."근조가 꼬리를 빼다 말을 이었다. "내가 후배 한 놈을 잡고 다잡았지. 간경화라면 뻔한 병 아냐. 그렇다면 재수감은 불가하고 장기 요양조치가 필요 하잖냐고 말야. 그러자 후배 녀석이, 가족의 승낙이 있어야겠지만 수술을 권유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는 것 같다고 하대."
"그렇다면?"나는 숨을 죽였다.
"켄서로 봐야지. 종양의 크기가 벌써 사 센티나 된다나 어쩌나....."
현구가 간암이라니. 발달한 현대 의학도 간암의 완치에까지는 이르지 못했고, 간암 진단을 받은 환자가 일년 이상 수명을 연장하는 경우가 흔치 않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병원으로부터 퇴원에 따른 가정 요양을 권고받았고, 그럴 경우 서너 달이 마지막 고비였다. 아니면 수술 도중, 또는 수술 직후에 합병증으로 사망하기가 예사였다. 내 나이 또래의 사망 소식을 전화로 접할 때, 교통사고가 아니면 간 질환이 많았다. 나는 상갓집에서, 간염의 시작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여러 차례 이야기들은 적이 있었다. 그 임상강의를 새겨듣다 보면, 한국인에게 사십대 후반에 주로 발생하는 간 질환이야말로 아닌 밤중에 불시로 달려드는 흉악범의 비수와도 같았다. 간은 자각증상이 없으므로 아무런 동통도 수반하지 않은 채 잠복하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급성 간경화"라는 계고장으로 날아들었다. 죽음을 전혀 예비하지 않고 열심히 사회활동을 하는 자에게 날아드는 사형 집행 예고장과 다를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내게 간 질환이야말로, 반드시 내가 죽고 너도 죽이겠다는 맹독성이 간을 비밀한 터삼아 자생력을 기르다가, 결정적인 시한에 당도하면 스스로 폭발해 버림으로써, 터밭은 물론 주위의 생생한 장기까지 일시에 파괴시켜 몸뚱이 전체를 휴지(休止)화하는 소수의 정예 결사대로 느껴졌다.
"만약에 수술을 한다면?"
내 질문에, 찬 물수건으로 땀을 닦던 근조가 무심히 대답했다.
"가능성도 많지. 물론 조기 발견일수록 성공률이 높지만, 내가 알기로 수술 후 삼사 년 버틴 사람도 있고 아주 정상인으로 더 산 사람도 있으니깐. 간은 그 무게가 일점 사 킬로나 되는 가장 큰 장기 아냐. 그러나 자생력이 강하고, 간이 삼분의 일만 기능을 해줘도 정상인과 다름없이 활동할 수 있으니깐."
"그렇다면 현구도 수술을 받아야 할까?"
"메스를 대지 않는다면 식이요법과 휴식밖에 더 있겠어."
"수술해야 할 만큼 악화되었다는 거냐?" 쓸데없는 질문인 줄 알면서도 나는 어눌한 목소리로 자꾸 물었다. 미끄러운 나무줄기에 한사코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나를 보듯 하였다. 나는 땀 차인 손바닥만 연방 부비었다.
"네 동생이 재판에 계류중이라 그 점에서 선뜻 단안을 못 내리고 있는 눈치라. 사실 간 질환도 조기발견만 하면 완치가 가능하지만 병원을 찾을 때는 이미 한 발 늦은 뒤거던. 그러므로 꼭 교도소 당국을 탓할 수만도 없지. 어제까지 멀쩡한 사람이, 요즘 과로로 피곤하다며 종합검진이나 한 번 받겠다고 병원에 찾아왔다가 간경변이라는 진단을 덜컥 받게 되는 게 보통이니깐. 그러고 삼사 개월, 길면 일이 년 이내 끝장을 보게 되지....."
근조의 말이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촛농으로 녹아 내리듯 기운이 빠졌고 주위의 사물이 내 시야에서 멀어졌다. 충분한 보양만이 장수의 지름길이란 듯 이열치열의 화식(火食)을 즐기는 식도락패의 모습도, 그들의 지껄임도 내 눈과 귀에 닿지 않았다. 사망을 남의 일로 알고 병상에 누워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던 현구의 마르고 찌든 선량한 얼굴만이 떠올랐다. 아니, 나는 그의 모습에서 어쩌면 이런 상태가 되기까지 전혀 무관하다고만 볼 수 없는 그의 유년시절 한 토막을 회상할 수 있었다.
<중략>
혼수상태로 들어간 현구를 지켜보는 어머니도 이제는, 막내가 내 몸속에 살고 있다는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현구가 덮고 있는 홑이불을 허리께까지 걷어 내렸다. 환자복의 단추를 풀더니 그의 가슴을 열었다. 땀이 이슬처럼 맺힌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났다. 그 가슴은 흙색으로 검누랬다. 어머니가 수건으로 아우의 가슴에 찬 땀을 천천히 닦았다.
“아비도 못 보고 태어나, 이제 그리고 그리던 제 아비를 보려나. 서른셋에 죽은 네 아비가 젊디젊은 그때 모습으로 거기 천당에 있나…….”
『천정의 선풍기가 왱왱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데도 땀에 절은 현구의 긴 머리카락은 한 올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우는 몸 안의 수분을 다 뱉듯 온몸의 땀구멍마다 찬 땀을 쏟아 내고 있었다. 잦아져 곧 멈출 것 같던 숨이 다시 폭발하듯 코 푸는 소리로 다급해졌다. 그럴 때, 아우가 슬며시 눈을 뜨고 예의 그 수줍은 미소를 띠며 천천히 일어나 앉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곧 숨소리는 다시 낮아졌다. 한 줄기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 내렸다.』현구의 상태가 절망적임을 드러냄
“혼수 상태가 언제부터 계속되었나요?” / 내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벌써 반나절이 넘었다. 그 후로는 영 깨어나지를 않는구나. 우리 아들을 풀어 주지 않으니 기도원의 안수도 못 받고…… 내가 달겨들어, 우리 아들 풀어 달라고 싸우고 애원했지. 맨발로 금호산 기도원까지 내 이 자식 등에 엎고, 피란 올 때처럼 달려가려 했건만…… 나는 그때서야 이 애를 살릴 수 없다고…… 오, 하나님, 이 애를 보세요, 이 세상 못 사는 사람들의 근심과 한숨을 다 맡아 떠나자니 저도 힘이 드는지. 이렇게 고된 숨을 쉬며 울고 있잖아요.” 현구가 소외된 계층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아왔음을 알 수 있음
▶위독한 현구의 건강
나는 현구의 침대 옆에서 물러나왔다. 그제서야 병실 안을 둘러보니 동수를 무릎에 안고 반쯤 틀어앉은 숙영이가 손수건으로 눈을 가려 어깨 들먹이며 훌쩍이고 있었다. 내가 준 장난감 자동차를 양손에 쥔 동수가 붉게 충혈된 겁먹은 눈으로 나를 힐끗 곁눈질하였다. 그리고 나이 든 간수 홍과, 수사관인 듯한 여름용 점퍼 차림의 중년 사내가 묵묵히 나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에서도 수사 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음을 나타냄
바깥에서는 이제 구호가 터지고 있었다.
“양심수 박현구 선생을 즉각 석방하라!”
“즉각 석방하라, 석방하라!”
“양심수 박현구 선생을 우리에게 돌려 달라”
“우리에게 돌려 달라, 돌려 달라!” <중략>
▶현구의 석방을 요구하는 농성이 격화됨
“어머님, 동수 아빠를 비산동 우리 방에서 돌아가시게 하고 싶어요. 동수 아빠는 죄인도 아니고, 그러기에 여기에 갇혀 감시받는 자리에서 돌아가시게 할 수 없어요!” / 동수 엄마가
발통 달린 침대를 끌어내며 빠르게 말했다. 단속적으로 여린 숨을 내쉬고 있는 현구를 보는 그네의 눈이 눈물로 빛났다.
“그래, 그래야지. 네 말이 맞다. 동수야, 우리가 앞장을 서자. 너와 내가 앞장을 서!”
며느리의 말에 어머니도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숙영이로부터 동수를 빼앗아 덥석 등에 업었다.
“할머니, 아빠 정말 집으로 가는 거예요?” / 동수가 또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집으로 가는 거다. 이제는 네가 아빠가 되는 거다. 현구가 못다 한 일을 너가 하는 거야. 너가 이제 이 할미의 막내다!” / 어머니가 신들린 듯 외쳤다.
소외된 계층을 위한 투쟁의 연속성을 드러냄
어머니는 그해 겨울 현구를 업고 남행길을 재촉했듯, 꼬부장한 좁은 등판에 독 같은 동수를 업고 앞장에 나서며 병실 문을 활짝 열었다.
“오빠, 이래도 되는 거예요?” / 얼떨떨한 표정으로 숙영이가 나를 보고 물었다.
“어쩔 수 없잖아. 상황이 이렇게 된 걸. 자, 나가자.” / 어리벙벙해져 있던 내가 숙영이의 등을 밀었다.
“앞쪽은 안 돼요. 뒷문 쪽으로 어서!” 하더니, 결심을 세운 듯 숙영이가 어머니 뒤를 따랐다.
저뭇한 속에 복도는 벌써 최루탄 내음으로 매캐하였다. 바깥뜰에서는 매연이 자욱했고 난장
현구를 탈출시키기 이한 시위가 진행됨
판의 소요가 계속되고 있었다.
▶죽어 가는 현구를 탈출시키기로 함
젊은이들이 침대를 옆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었다. 복도로 나서니 어둑발이 내리는 속에 현구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초조했다. 그러자 언뜻 한 가지 결단이 전류처럼 머리를 때렸다. 이제 현구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다 자신이 들어앉아 살아 숨쉴 감옥 한 칸을 짓
소외된 자를 위한 투쟁했던 현구의 정신적 가치
기 시작한다는 깨달음이었다. 나는 비로소 현구를 거주 제한 구역 안에서 운명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현구가 사망하면 폭행죄와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된 이번 사건이 영원한 미제(未濟)로 남겠지만 그 사건의 상징성이 말해 주듯, 설령 비산동 사글셋
소외된 계층을 위한 투쟁의 정당성
방까지 현구를 데려갈 수 없다 하더라도 그가 숨을 쉬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를 자유로운 구역까지 내보낼 책임이 나에게도 있음을 알았다. 나는 동수 엄마와 나란히 침대 머리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최루탄 내음으로 들어찬 복도로, 좌르르 침대가 굴러갔다. 동수를 업은 어머니와 어머니의 뒷허리에 팔을 두른 숙영이는 뒷문을 향해 저만큼 앞장서서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그때 뒷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지 젊은이 몇이 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막혀 있던 통로가 자유로 향한 출구처럼 훤하게 뚫렸다. 어머니와 함께 우리 오누이 셋이 그해 겨울 그렇게 남행길을 재촉했듯이, 우리들은 마치 포연을 뚫고 진군하듯 최루탄 매연을 헤쳐 침대를 끌고 밭은걸음을 걸었다. 그제야 사일구 그날, 우리 모두 어깨를 겯고 경무대를 향해 내닫던 그 벅찬 흥분이 되살아남을 나는 가슴 뿌듯이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현구를 탈출시키며 4.19의 흥분을 느낌
● 해제 : 6·25 전쟁에서 비롯된 비극적 현실이 현재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분단 소설이다. 분단 현실이 안고 있는 삶의 고통의 실체를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사회와 화해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삶의 현실에 대한 투철한 상황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삶의 진정성을 그려 내고 있다고 평가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나’는 소시민적 사고를 갖고 있지만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진실한 삶으로의 인식 전환을 하게 된다. 중산층으로서 방관자적 입장에 서 있던 ‘나’는 동생의 순교자적 인생이 계기가 되어 핍박받는 사람들의 정당한 요구에 동참하게 된다. 이러한 삶의 전환은 6·25, 4·19등의 우리 현대사를 고통스럽게 견디어 온 투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핵심 정리
▶갈래 : 중편 소설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배경 : 1980년대 변혁이 소용돌이치는 사회 현실
▶성격 : 사실주의적, 회고적
▶주제 : 극한적 현실 속에서의 삶의 진정성 추구
▶특징 : 소시민적 지식인인 형을 관찰자로 하여, 빈민 운동가인 동생의 죽음을 감동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현실의 모순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등장인물 :
나(윤구)-출판사를 경영하는 중산층 인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사회 문제에 대해서 애써 외면해 왔으나 동생 현구의 사건으로 인해 사회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인식이 전환되는 인물이다.
현구-대학 재학 시절부터 운동권에서 활동했으며, 3학년 때 강제 징집당하여 최전방 특수 부대에서 많은 고생을 했다. 제대 후 곧 바로 노동 운동에 투신하였다가 투옥 중 병세 악화로 입원하였지만 끝내 사망한다.
▶구성 :
발단-모스코바에 다녀온 나는 현구가 병원에 입원한 사실을 알게 됨.
전개-나는 현구가 재개발 지역 강제 철거 과정에서 철거 반원을 구타한 일로 투옥되었고 간암이 난 것을 앎.
위기-현구의 병세가 악화되어 살아날 가망이 없자, 현구의 아내는 장례만이라도 집에서 지내고자 함.
절정-현구를 병원 밖으로 빼내려는 시위가 일어남.
결말-나는 현구를 병원 밖으로 빼내면서 4·19의 흥분이 되살아남을 느낌.
● 줄거리
소규모 출판사를 경영하는 ‘나’는 모스크바 국제 도서 박람회에 참가했다가 귀국한 후 동생 현구가 감정유치 명령이 내려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간 질환을 앓고 있는 현구는 빈민 운동에 앞장서다가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되었다. 그러나 법원의 감정유치 명령이 늦어져 병세가 심각한 상태다. 6·25 전쟁 당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대학교에 다니던 때부터 활발히 사회 운동을 해 온 인물이다. 이에 반해 ‘나’는 4·19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생활을 위해 사회적인 문제를 애써 외면해 온 인물이다. 결국, 현구가 살아날 가망이 없게 되자, 현구 아내는 현구를 달동네로 옮겨 빈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겠다고 한다. 병원 밖에서는 동생의 귀가 조치를 외치는 연대 농성이 시작된다. 시간이 갈수록 농성은 격렬해지고 경찰은 병원 안에까지 최류탄을 쏘아대는 혼란의 상황에서 ‘나’는 현구를 거주 제한 구역에서 운명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려 동생의 침대를 밀고 밖으로 달려 나간다. 그제야 나는 4·19혁명의 벅찬 감동이 되살아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