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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삼경(三更), 이 냥반이 또 방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네, 하는 아내의 지청구를 들으며 담배를 물고 베란다에 쫓겨 쓸쓸히 나와 서서 문득 저 아래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다본다. 거기 도현이와 그 아내와 딸 유경이와 똘방진 놈 민석이가 함께 살고 있을 아파트가 모악산을 우뚝 가로막고 있고, 눈으로 더듬더듬 17층의 그 `산당화`같은 안도현이 서재로 쓰는 방을 더듬자니 이 밤 그 창문에도 불빛이 뜨겁도록 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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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당화야
산당화야
교장 선생님한테 불려가 혼나고, 너도
숙직실 처마 밑에 나와 섰구나
-----------------------「산당화」부분
간 저녁에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고 돌아왔었다. 아마도 그는 우리를 만나기 전에, 어딘가에서 청탁했을 시편들을 깨끗이 탈고했었는지도 모른다. 아, 대처나 그때의 술맛이란!...... 한잔씩만 더 나누고 일어서자고 그는 우리에게 졸라댔으며 우리 또한 마지못한 척 유혹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그런데도 도현아, 너는 이 밤도 늦게까지 또 시를 쓰고 있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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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그렇지. 아, 안도현에 대해서 쓰는 일은 여간해서는 아, 안된다. 적어도 우리끼리는 그렇다는 말이다. 용택이형의 얘기를 사실대로 옮기자면, 발문을 쓰려고 만년필 뚜껑을 열었는데 막상 시작하려고 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자꾸 하얗게 지워질 뿐이더라고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이유가 있다면, 우리는 이미 너무 가까워져버렸고 너무 소속들이, 전신마취를 당하듯, 서로 너무나 유기적(有機的)으로 살아왔기 때문인 것이다.
저 지난 가을, 도현이네 식구와 용택이형네 식구와 우리 식구는, 새로 담근 김치와 불고기와 삼겹살이며 어물전에서 산 생합이며를 바리바리 싸 들고 용택이형네 시골집 아래 섬진강변에 소풍을 나갔었다. 물빛은 이제 막 투명하게 가을 햇빛을 퉁기기 시작했고, 그 물빛과 하늘빛이 서로 시샘 없이 푸르렀으며, 우리들 인간의 나이로 따지자면 이제 겨우 중학교에 입학한 유경이 정도나 됐을 단풍나무 어린 새끼조차도 홍역이라도 치르는 듯 온몸을 발갛게 물들여놓고 있을 때였다. 강변에 앉아 우리 어른들은 그 기생의 치마폭 같은 비취빛 하늘과 선선한 가을 바람이 꾹꾹 눌러 따라주는 술을 마셨다. 이게 바로 우리 촌놈들의 보약이거니 여기고는.
"우리 아빠는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시인이다!"
물수제비를 뜨다 말고, 초등학교 5학년이던 용택이형네 민세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숨돌릴 사이도 없이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할 도현이네 민석이가 맞받는 외침이 그 수면에 쨍하고 울렸다.
"우리 아빠는 대통령이 알아주는 시인이여!"
4학년짜리 우리 아들만 묵묵부담, 와르르 따라 웃는 수면으로 오로지 물수제비만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영악한 민석이는 즈 또래에서라면, 나라고 민족이고, 대통령이라는 약발보다 더 끗발이 센 것은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 말 한마디로 다음에 말을 받아야 할 우리 아들까지 침묵시켜버렸던 것이다. 그때 상처깨나 입었을 우리 유환이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빠는 무엇이냐고 내게 물었다. 이미 짐작해둔 일이라서 대답이야 쉽게 해줄 수 있었다. 아빠는, 소설가드리 알아주는 소설가지.
아들은 그게 영 미심쩍은 눈치였지만, 스스로의 입으로도 자기 한몸의 건강을 위한 일이라면 몰라도 공부는 하기 싫어한다고 밝혔던 우리나라 대통령이 참말이지 안도현 시인을 알고 있을지는 나로서도 내내 천진하게 궁금했지만, 사실은 현직 대통령이 아니라 아직도 시 몇줄쯤은 외우고 있노라고 자랑했던 그 직전 대통령을 민석이가 흉중에 언급했었는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전주에서 그렇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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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를 신으면서 아내한테 차비 좀, 하면 만원을 준다
전주까지 왔다갔다 하려면 시내버스비 210원 곱하기 4에다
더하기 직행버스비 870원 곱하기 2에다
더하기 점심 짜장면 한 그릇 값 1,800원 하면
좀 남는다 나는 남는 돈으로 무얼 할까 생각하면서
벼랑 끝에 내몰린 나의 경제야, 아주 나지막하게
불러본다 또 어떤 날은 차비 좀, 하면 오만원도 준다
일주일 동안 써야 된다고 아내는 콩콩거리며 일찍 들어와요 하지만
나는 병천이형한테 그동안 술 얻어먹은 것 염치도 없고 하니
그런 날 저녁에는 소주에다 감자탕이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제」부분
전교조 해직교사 시절, 그 어려웠던 살림살이에 대해 도현이는 이렇듯 가계부를 적듯 시를 써내면서도 의리를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도(?) 했었다. 술값 때문에 상심해서 지내지는 않은 듯하니 다행이기도 하고, 그때 그 꺼칠하던 세월에도 불구하고 도현이가 우리 곁에서 늘상 맑고 티없이 지내온 게 고맙기만 하다.
그러나 이제 도현이의 생활양식도 변했다. 이리에서 전주까지 오가는 시내버스비와 직행버스비를 줄이려고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전주에, 그것도 내가 사는 곳의 이웃 아파트로 이주해 온 지 오래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전주시 평화동 주민이 됐다고 낄낄거리고, 내 아내는, 당신 애인이 옆으로 이사 와서 좋겠수 하면서 장차 더욱 더불어 밤들이 노니다가 늦게 돌아올 일을 걱정하기도 했지만, 이리 따의 정양 선생이며 심호택형이며 김영춘, 정영길 같은 도현이의 즐비한 옛 애인들은 속으로 눈물깨나 찍었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나깨나 그저 `먹어주기 밥통`이거나 맨맛으로 먹기에도 그만이라는 `홍어젓`처럼, 도현이의 성품이 한없이 곱고 수더분해서, 노래 잘하고 춤 잘 추고 시 잘 짓고 술 잘 먹고 남의 뜻 잘 받아주고, 그러면서도 자태까지 아리땁던 기생 뺨칠 정도였기 때문이다. 아니, 단지 심성이 그렇다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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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로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겨울 강가에서」전문
"안도현이 거, 시 잘 쓰데."
작가회의 3월 정기총회가 끝나고 칵테일을 한잔씩 드는 자리에서 작가 조정래 선생은 위의 시를 지칭하며 내게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위의 시가 좋은 게 사실이라면, 나는 우선 그 이유가 우리 어문학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의존명사인 `것`과 `것이다`를 적절하게 되살려냈기 때문이 아닌가 여긴다. 시와 달리 소설을 쓰는 이들이라며, 별수없이 `것이다`를 이따금 반복해서 써야만 하는 괴로움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조차 회피되는 이 말을 오히려 마구 남용함으로써 안도현은 시에 창조적인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그러고 보니 무슨 노래던가, 도현은 노랫말에도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이 `것`이 들어가는 어느 유행가 속에서 `것이`어쩌고 하는 부분에서는 한 음을 높여 영 마뜩찮게 부르곤 했던 게 떠오른다. 확인을 하기 위해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자 이윽고 기다렸다는 듯이 유경이와 민석이가 함께 불러주는 세 부자녀의 그 노래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온다. "알 수 없는 또 다른 나의 미래가 나를 더욱더 힘들게 하지만 네가 있다는 `것이`나를 존재하게 해......" 전화기에 대고 부르는데도 여전히 `것이`하는 부분은 높다. 도현이는 내가 왜 갑자기 그 노래 가사를 물었는지 모를 것이다. 그렇구나. 도현이는 요즘 들어 `것`과 `것이다`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고, 결국은 그 의존명사를 멋지게 싹틔워내고 이 봄으로 들어선 것이다.
물론 이 시의 매력이 그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기억하고 있겠지만, 나는 도현이의 성품에 대해 언급하려고 이 시를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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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순간, 구례 산동(山東)의 산수유가 절정이라고, 도현이에게서 전화가 온다. 용택이형네와 자기 가족 모두 그곳이나 함께 다녀오자고 한다. 또 며칠 이 발문이 늦어지겠지만, 모르겠다. 어차피 내 시집은 아니니까.
산둥의 산수유는 역시 좋았다. 샛노랗지는 않은, 그냥 파리하게 노란 산수유꽃들은 봄이 우리에게 사실은 얼마나 힘들게 다가오는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사람들이 떼지어 그곳에 몰려드는 이유도 어쩌면 그걸 직접 체감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꽃잔치를 벌인 이날, 강원도 영동 지방에는 폭설주의보가 내린 가운데 40센티미터가 넘는 눈이 쏟아져 교통이 두절되기도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아마도 지금쯤 틀림없이 도현이는, 이런 부조리와 어긋남을 자기 나름대로 자연운행의 질서로 풀이하는 시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 단순하면서도 재미있는 시 한 편은 도현이가 세상의 모든 자연현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가 시에서 즐기는 `세상 보기`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얽히고설킨 지구 혹은 우주 사회에서 그가 즐겨 발견해내는 질서가 무엇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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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서고등학교 관사 앞에 매화꽃 핀 다음에는
산서주조장 돌담에 기대어 산수유꽃 피고
산서중학교 뒷산에 조팝나무꽃 핀 다음에는
산서우체국 뒤뜰에서는 목련꽃 피고
산서초등학교 울타리 너머 개나리꽃 핀 다음에는
산서정류소 가는 길가에 자주제비꽃 피고
--------------------「3월에서 4월 사이」전문
"다 좋은디, 꽃 피는 순서가 쪼꼼 틀렸다야. 조팝나무가 맨 끝으로 가야지"
내가 도현이의 좋은 시들에 대해 초를 치고 시비를 걸 수 있는 문제들은 기껏 그쯤에 불과하지만, 그리고 내 얘기가 옳든 그르든 도현이의 시적 진실까지 훼손당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고 보니 도현이에게 생활이 바뀐 면이 또 있다.
안도현이 오랜 전교조 해직생활에서 벗어나 복직해 갔던 곳이 장수 땅, 산서(山西), 산수유가 많은 앞의 산동이 지리산을 동쪽에 두고 있는 지역이라면 뒤의 산서는 남원의 보절 땅에 솟아 있는 천왕봉이라는 독산(獨山)의 서쪽에 위치한 고장이다. 어쨌거나 도현은 거기 아름다운 이름의 산서고등학교에서 지난 2월 스스로 물러나왔다.
"형, 우리 집사람 나오면 잘 좀 얘기해줘요."
"뭘?"
"나 사표 내면 자기도 직장 그만둔다고 맨날 엄포를 놓았거든요."
"그리여."
그렇게 해서 박배엽과 나는 안도현이네 아파트 앞 포장마차에서 그 박성란이를 만나 이미 오른 취기로 인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혀를 놀려 설득한답시고 오래 붙들고 앚아 있기도 했지만, 사실 내 걱정과 기우는 좀 다른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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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은 저 홀로 푸르러지지 않는다네
한 山이 그 빛깔 흐려지며 그 너머 山에 자기를 넘기면
그 빛깔 흐려진 山이 또 빛깔 흐려지며 그 너머 山에게 자기를 넘긴다네
----------------------------------------------「山에 대하여」부분
됐습니다
오수까지 다 왔으니
운전사도, 할머니도, 나도, 다 왔으니
모두 열심히 살았으니!
----------------「열심히 산다는 것」부분
송사리떼에게 거슬러 오르는 일을 가르치려고
시냇물은 스스로 저의 폭을 좁히고
자갈을 깔아 여울을 만들었네
-----------------「여울가에서」부분
이렇듯 감동을 안겨주는 시적 성과는 우리가 쉽게 대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리고 뛰어난 시인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감동을 언제나 줄 수는 더더구나 없는 법이다. 우리는 한 시절, 그때가 어느 때였던가, 한 권의 시집을 사서 읽었을 때 가슴에 남는 시가 단 서너 편만 있어도 책값이 결코 아깝지 않다고 자위하곤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도현이가 산서, 그 아름다운 이름의 고장과 그보다 더 아름다운 아이들로부터 떨어져 나와서도 우리에게 이런 시편들을 계속해서 보여줄 수 있을는지, 걱정이 은근히 앞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 시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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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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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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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애기똥풀」전문
일찍이 몰랐던 사실을 깨닫는 즐거움, 특히나 어여쁜 꽃 이름 하나를 몰랐던 사실을 무슨 큰 죄라도 되듯이 반성을 하면서 그걸 시로 만드는 일, 그건 어쩌면 시인이 지닐 수 있는 특권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점은 특권이며 동시에 시적 수사며 재치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부구하고, 섭섭함은 여전히 남는다. 「애기똥풀」에는 앞에 인용한 시편들에서 느낄 수 있는 시적 긴장과 진솔성 대신에 성공적인 어떤 의미 부여를 통해 얻어지는 성취도가 더 있을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도현이와 전주의 우리들이 함께 했던 술자리를 빌어 비유를 한다면, 1차와 2차의 차이 같은 것이다. 결국은, 현장에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문제와도 같은......
물론 사소한 배신감(?)도 없지는 않다. 전주의 모악산 박남준이네 집에 오르며 내가 물었었다.
"너는 내 소설 「애기똥풀」도 안 읽어봤냐?"
"읽었어도 꽃은 몰랐지요."
"그먼, 시방은 참말로 알어?"
"알죠."
"근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이라고 썼어?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이라며 `코딱지풀`이란 게 따로 또 있잖냐?"
"뭐, 그냥 꽃이 작다는 뜻으로 쓸라꼬 했는데......"
아, 안도현이 학교를 그만두기 잘했다고 부인에게 우리가 얘기했는데, 그의 시가 자연과 학교의 현장성이라는 건강한 이름 다음에서 퉁겨져나와 평소의 안도현답지 않게 혹시라도 요상허고 해괴하게 시를 쓰기라도 헐작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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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전라선을 타보지 않은 者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인생」전문
저 안동 땅에서 도현이 처음 이리로 오고 우리가 그를 만났던게 언제였던가? 그게 80년대의 시작과 함께였다. 넉넉잡아 17년!...... 그런데 이제 그가 단언코, `者`를 굳이 한자로 쓴 뜻을 다시 헤아려 고쳐 말하자면, 전라선 밤기차를 타보지 않은 `놈 `하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외치기도 한다. 거, 참!
아직 문학도에 불과하던 그 80년대 초, 박배엽과 나는 우연히 이리로 안도현과 그 친구들이 펼쳐놓은 시화전을 구경간 일이 있다. 그때가 그에 대한 첫인상인데,불행하게도 그게 썩 좋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왜냐하면 그게 지우기가 좋잖아요` 하는 식으로 그때 그 나이의 그가 그런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비슷한 유행가가 나온 건 훨씬 뒤의 일이다. 이건 최초의 고백인데, 배엽과 나는 그의 재기발랄함을 높이 사기는 했으되 고개를 동시에 저었다. 박배엽은 그무렵 입버릇처럼 성공한 소설가보다는 실패한 시인은, 실패한 시인보다는 좌절한 혁명가를 꿈꾼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었고 그 표현의 화려함과 진정성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날, 안도현과는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던 것이다. 어린것들이......
그런데 그 안도현이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 이르러서는 "척왜척화 척왜척화" 그 한 구절로 우리를 송두리째 뒤흔들더니 그 이후 급기야 박배엽과 나를 다시는 그 앞에서 시 쓰지 못하도록 팔을 부려뜨려놓고야 말았다. 그래서 나는 성공한 소설가라도 돼야겠다고 일찍이 개종했으며 배엽은 그냥 맘 편하게 좌절을 거듭하는 중이라고 일컬을 만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안도현이 자신있게 스톱을 외친 이번 『그리운 여우』라는 고스톱 판에서 그가 쥔 패는 무엇이었던가? 그의 시적 특장은 무엇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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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사랑」부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花巖寺, 내 사랑」부분
`山`字로 시작되는 곳답게
면소재지 지서 앞에는 보루대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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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곳에도 사람이 지나갔구나
----------------「山西面」전문
첫번째 인용한 시구를 통해서 본 그가 쥔 그만의 패는, 그가 진작부터 지녔던 재치가 이제는 어떻게 일가(一家)를 이루어가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그가 이 경우 자주 애용하는 기법은 이른바 의인법(擬人法)처럼 보인다.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그는 삼라만상을 일단 닥치는 대로 의인화시켜놓고 본다. 의인법뿐만이 아니라 무릇 그 모든 비유법들이 시에 동원되는 일이 당연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육회 안주를 특별히 좋아하는 안도현의 식성처럼, 그가 어쩌면 편식이다 싶게 즐기는 이 의인법이라는 방식으로 말미암아 그의 시편들은 쉽고 만만하게 여겨지면서도 독특한 참신성을 자랑하게 된다. 가령,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하고 외치는 「너에게 묻는다」와 같은 시편들이 그 대표라 할 것이다. 물론 이번의 시집에서도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런 기법이 유감없이 발휘된 시구들을 얼마든지 가려낼 수도 있다.
두번째 인용한 패는, 그가 종래에는 많이 보여주지 않던 새로운 초식의 화두로, 이번 시집을 무겁게 관류하는 한 특징이라고 할 만하다. 우주나 잠자리, 깃털 하나, 고삐 등의 많은 시어를 통해 그는 이번에 불교적 성찰과 조용한 관조의 세계 자체를 화두로 들었다. 그건 인생을 진지하게 맞이하겠다는 자세에 다름 아니다. 혹시 안도현은 벌써부터 발걸음을 잠시 멈추어보며 자기 인생을 뒤돌아 응시하기 시작하고 무엇인가를 자꾸 하나씩 깨달아가는 나이에 들어선 것일까?...... 어쨌거나 이 뚜렷한 징후를 감지했다고 치고 이제 마지막 남은 세번째의 패를 살펴보기로 하자.
첫번째 열어 보인 패처럼, 현란하고 새로운 각종 병장기라는 시적 기법을 무기로 구사했으며, 두번째 열어 보인 패에 이르러 내적 성찰을 거듭한 그의 시심은, 흔히 세번째 인용한 것과 같은 독특한 세계에 이윽고 도달하곤 한다. 그게 곧 짧고도 구체적인 깨달음. 바로 할!...... 그것이다. 다만 할이 언제나 그렇듯, 위의 세번째 시에서 산서면을 지나갔다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 것인지, 그건 언젠 우리들 독자가 깨달아야 할 몫으로 남겨진다.
사실 이 경지는 그가 이번의 시집에서 처음 선보이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작과 세월을 거쳐 단련된 것으로, 그가 늘 시를 쓸 때면 소맷귀 사이에 숨겨두고 지내왔던, 손안의 비수(匕首)같은 것이다. 하여, 그는 앞으로도 시를 쓸 때마다 당분간은 이렇게 오래 벼린 비수를 애용할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거니와, 다시 처음의 의문으로 돌아가자면...... 아, 우리들의 팔목을 부러뜨려 다시는 시를 쓸 엄두를 못 내게 했던 안도현의 암기(暗技)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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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삼경이다. 나는 아예 담배를 물고 베란다로 향한다. 내가 도현이의 품앗이 글을 써주고 있는 이 시간 그의 방에도 역시 불이 또 밝다. 요즘 들어 용택이형은 그 형수씨가, 무슨 모사를 꾸미느라고 그렇게 자주 패거리들을 만나느냐고 캐물으면서 그를 자주 불러내는 우리에게 따질 게 좀 있다고 하더라고 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 형수님은, 무슨 일인가로 용택이형이 신명나서 나돌아다니는 게 오히려 보기 좋은 것이리라.
우리가 무삼 일로 바빴던가?......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를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전북지회로 바꾸는 일, 그 창립총회 문제, 고교생 백일장 개최 건, 아아, 우리들이 자금을 조금씩 염출해서 차라리 조그만 까페 하나를 운영하고야 말겠다는 야심찬 분홍빛 계획이며...... 도현이도 바쁘고 나도 바쁘고, 이 봄에 이곳 전주의 문인 친구들이 다 함께 분주하다. 그중에서도 안도현은 처음 몸의 변화가 오기 시작하는 사춘기 소녀애들처럼 불안하고 섬세하게 이 계절을 맞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그도 이른바 전업 시인이 된 것이다. 그 젖멍울을 하는 듯한 앓이앓이가 도현이를 새롭게 키우겠지만...... 내 앞에 폭설처럼 쌓인 그놈의 눈사태 같은 소설들을 언제 다 써서 치우노?
그러나, 안도현의 좋은 시편들을 다 읽은 탓일는지, 이래저래 비록 팔목이야 부러졌지만 내가 두고 온 그 마을로 슬그머니 돌아가서, 나도 문득 다시 시를 쓰고 싶어지는 참 좋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