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남정맥 22구간 ~ 25구간 까지 조사해 놓은 참고자료를 그대로 올립니다. 처음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빠짐 없이 답사를 하고 산행기를 올려야 하는데 너무 빠진 구간이 많아 아쉬움이 많습니다. 결국 호남정맥은 미완의 완주가 되고말았습니다. 두번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채워보겠다는 미련을 갖습니다. 함께하고 격려와 도움을 주신 한배산악회 회원님들에게 거듭 감사를 들립니다. |
1. 산행일자 : 2009년 6월 27(토)
2. 산 행 지 :
3. 출발일시 : 6월 27일(토) 04 : 00시
4. 출발장소 : 수원 경기도 여권 민원실 앞
5. 산행개요(송치 ~ 미사치)
6. 산행 참가자 : 이용준 --->노승애, 박봉하, 윤희원, 장현옥(중간탈출)
7. 날 씨 : 흐림
8. 총 산행 거리 및 소요 시간 : 총 산행 약 12.1km, 5시간 50분 정도 소요
9. 일정 및 소요시간
[1] 구간별 거리 및 주요 산 높이
송치(280m)--3.5km--농암산(476.2km)--1.5km--장사굴재(330m)--1.1km--죽청치(390m)--2.5km--수리봉(508.2m)--마당재(430m)--1.5km--갓꼬리봉(689m)--2.0km--708m봉--미사치(450m)
[2] 산행일정
송치(12:50/점심/13:30) → 병풍산분기(14:10) → 농암산(14:45/14:55) → 장사굴재(15:20/15:30) → 죽청치(16:25/16:35) → 갈매봉(16:55) → 마당재(17:25/17:35) → 갓꼬리봉(18:25/18:35) → 갓머리봉(19:00) → 미사치(19:20)
[3] 산행 후
미사치(19:30) -- 황전터널 -- 840번도로 -- 핑크본가별장, 식사 및 숙박(20:00 ∼ )
[4] 산행의 실제(산악대장 홀로 산행)
○ 송치(12:32/점심/12:56) → 병풍산분기점(13:54) → 농암산(14:26) → 죽청치(15:40) → 갈매봉(15:56) → 마당재(16:41) → 갓거리봉(17:28/17:38) → 미사치(18:26)
○ 미사치(18:35) -- 황전터널 -- 840번도로 -- 핑크본가별장, 식사 및 숙박(18:45 ∼ )
[5] 탈출로 및 편의사항
○ 핑크 본가별장,
○ 진일기사식당(061-754-5320),
○ 선창네집(061-763-2113, 장어)
○ 승주 원보산장(061-754-5541, 추어탕),
○ 승주택시(061-754-5858, 011-618-2726)
10. 산 행 기(참고자료)
[1] 송치(松峙)
서면 학구에서 황전면 송치로 넘어가는 재로, 사람들은 ‘소련재’라고 부른다. 소련재 동쪽 산봉우리에서 황전면 쪽으로 내려가자면 묘비가 있는데 거기엔 솔연치(率燕峙)로 새겨 있으며, 재 정상 주유소가 있는 곳엔 송치(松峙)라 새겨놓았고, 황전면의 마을을 송치(촌로들은 산골내기라 부름)라고도 한다. 재는 하나인데 그 이름은 여러 가지이다.
난중일기에는 “정유년(1597) 4월 27일에 순천 송원에 이르다.”란 기록이 있으며, 이수광은 승평지에 송현원(松峴院)이라 기록하였다.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 송원리(松元里)와 와요리(瓦要里)가 보인다.
재의 이름이 ‘솔재’인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뜻옮김을 해 송치와 송현으로 적었고, 그 재에서 서면 계곡에 나라에서 경영하던 원(院)을 설치하고 송원과 송현원으로 이름했지만, 사람들은 한자대로 부르지 않고 ‘솔원’이라 불렀던 것 같다. 그리고 ‘솔원이 있는 재’란 뜻으로 ‘솔원재’라 부르면서 옛 이름인 ‘솔재’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다만 문헌에 송치라고 기록되어 있어 도로를 확・포장하며 송치라 새겨 세운 것이다. 그리고 재 아래 마을이름으로 사용된 것이다. ‘솔원재’가 ‘소련재’로 바뀌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어째서 ‘소련재’라고 하였을까? 한국전쟁 때 소련군이 이 재를 넘어왔다고 ‘소련재’라고 하였을까 하고 무척 궁금해 한다.
요컨대 ‘솔재’가 원이름이고 이를 한자로 송치와 송현으로 표기했고, 관리나 나그네가 머물다 가는 원을 설치하고 송원이라 이름했다. 한자대로 부르지 않고 ‘솔원’이라 불러오다가 ‘솔원’이 있는 재란 뜻으로 ‘솔원재’라 불렀고, 거기서 소리가 변해 ‘소련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역원제가 폐지되면서 그곳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그대로 눌러 살기 때문에 마을이름이 되었다. 그래서 일제의 자료에 송원리로 기록된 것이다.
<출처> 순천시청>순천소개>순천시사
(http://www.suncheon.go.kr/open_content/about/sisa/politics/politics/)
[2] 호남의 음식 맛
호남음식을 찾아가는 것이다. 전라남도의 음식은 ‘맛의 예술’이며 판소리의 원동력이라고 한다. 남도음식 맛의 비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천혜의 자연조건과 멋스러운 전라도 사람들의 넉넉함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손맛이다. 하늘과 땅, 대륙과 해양의 힘이 끊임없이 만나는 남도에서 맵고(辛) 달고(甘) 시고(酸) 짜고(鹹) 쓴(苦) 오미(五味)를 담아 푸르고(靑) 붉고(赤) 희고(白) 검고(黑) 노랗게(黃) 오채(五彩)로 자란 것들에 후덕한 인심과 웅숭깊은 손맛을 더해 다듬고, 씻고, 절이고 버무리고 굽고 조리고 삭히면 개미가 쏠쏠한 남도음식이 태어난다. 이렇게 천지인 삼재사상의 조화를 담아 흐벅지게 차려내는 남도음식에는 인(仁-靑), 의(義-白), 예(禮-赤), 지(智-黑), 신(信-黃)의 오륜이 담겨 있어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고 비장(靑), 폐(赤), 심장(黃), 간(白), 신장(黑)의 오장을 튼튼하게 해서 몸을 건강하게 만든다며 자랑스럽게 말하는데 다시 보아도 전라도 음식은 가지 수에 있어서나 맛에 있어서나 다시 찾게 만든다.
<출처> 한국의 산하>호남정맥 4구간
http://www.koreasanha.net/bbs/view.php?id=sanha5&no=4651
[3] 병풍산 분기봉 : 병풍산, 499.8m
(1) 위치 : 전남 순천시 월등면
(2) 특징 : 순천에는 알려지지 않은, 높이 500m에서 700m 사이의 수많은 산들이 있고 병풍산도 그 하나이다. 이 산은 순천에서 구례로 가는 방면에 송치재의 송치터널 윗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터널위의 구 도로 주유소 자리에서 왼편으로오르면 군장마을로 향하는 바랑산(620m)이 있고 오른편으로 오르면 병풍산이 나온다.
산행은 오른편으로 올라 비포장도로를 걸어 오르면 왼편에 등산로 표지판이 있다. 등산로를 지나치면 돼지 축사가 많이있는 농장으로 향하게 된다. 등산로 안내판에따라 왼편으로 계속 오르니 멀리 왼편에 병풍산 정상이 보이고 오른편 아래에는 푸른 지붕의 돼지 막사가 대여섯동 즐비하게 보인다.
계속 봉우리를 4개쯤 넘으면 바위로 된 정상이다.
등산로는 계속 능선으로 이어졌으며 오른편 멀리 밑에는 마을들이 보이고 왼편으로는 겹겹이 산이다. 정상에서 곧장 가면 망월마을로 가는 하산 코스이다.
<출처> 한국의 산하
(3) 접근코스 및 소요시간
1) 1코스 : 송치재→구도로→능선→정상(1시간)
2) 2코스 : 망월마을→능선→정상(50분)
(4) 교통편
1) 순천역→월등, 황전시내버스(송치재 하차)
2) 순천→송치재 택시 20분(10,000원)
(5) 주요 편익시설
1) 식당ㆍ숙박 : 괴목식당, 여관
2) 주변관광지 : 화엄사, 지리산 온천, 선암사, 태안사(곡성 원달)
[4] 농암산.
○ '구례 464-1985 재설' 삼각점이 있는 농암산 정상
○ 농암산 정상은 삼각점만 있을 별다른 특징이 없음
○ 학구리(鶴口里)
전라남도 순천시 세면에 있는 里다. 바랑산, 병풍산, 농암산에 둘러싸여 있으며, 중산간지역이다. 남쪽으로는 서천이 흐른다. 태실봉, 암태봉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구어집(구호집), 다릿걸(벅수거리), 삼거리, 학구리(합구징이, 학구징이, 학구) 등이 있다.
구어집은 1963년 정부에서 빈민 구호를 위하여 집을 지어 이룩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다릿걸의 지명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군처에 다리가 있어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벅수(장승)가 섰다하여 유래된 설이 있다. 삼거리는 신촌 남쪽에 있는 마을로 구례, 광주, 순천으로 가는 세 갈림깅이 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학구리는 여러 골의 물이 한데 합치는 곳에 정자나무가 있다하여 붙여졌다.
[5] 장사굴재
[6] 450봉, 능선이 분기하는 봉(남쪽 아래 청소년수련원)
[7] 죽정치 (竹淸峙)
○ 순천시(황전면, 서면), 절개지, 노폭 4m 정도의 임도.
○ 죽청리(竹淸里)
전라남도 순천시 황전면에 있는 里이다. 황전천 유역에 위치하여 있으며 대부분 지역이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는 죽청, 상검, 하검이 있다. ]
죽청은 죽청리의 본 마을로 대나무가 많아 푸른 숲을 이루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상검은 칼 모양의 산의 위에 위치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하검은 그 아래쪽에 위치하여 하검이라 불린다.
[8] 갈매봉.
○ 삼각점(구례 133)이 있는 508.2봉('갈매봉정상지점 해발 468m고지'라는 푯말이 있음)
○ 능선3거리
▶ 뚜렷한 직진길 : 청소년수련원에서 정비한 일반 등산로
▶ 마루금길 : 좌측으로 내려서는 약간 덜 뚜렷한 길
[ 갈미봉, 638m ]
○ 위치 : 갈미봉 638m 전남 순천시 황전면 덕림리 구룡마을 뒤
○ 특징 : 산행은 매화가 만발한 섬진강 일원의 갈미봉(638m)~쫓비산(537m) 능선을 찾았다. 봄기운을 한껏 머금은 섬진강변과 산아래로부터 자락까지 활짝 피어 있는 매화꽃무리를 감상하면서 산행하는 재미가 인상적이다. 만개한 하얀 꽃잎으로 산자락을 휘감은 매화꽃 무리를 보노라면 마치 구름위에 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산 능선과 나란히 하면서도 이리저리 물줄기가 굽이치는 섬진강을 내려다보는 것도 산행이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 덕림리(德林里)
전라남도 순천시 황전면에 있는 里다. 월출봉 동쪽 자락에 위치하여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으로 덕림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구룡, 내불무동, 화평 등이 있다.
구룡은 덜림의 동북족에 있는 마을로 뒤에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내불무동은 덜림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불뭇골의 안쪽이 된다로 하여 내불무동이라 칭하였다. 화평은 구룡 서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며 담이 있다고 하여 담터라고도 불린다.
[9] 마당재.
[10] 조망바위봉(650)
○ 갓꼬리봉, 계족산을 위주로 한 긴 능선이 장쾌하게 늘어서 있음. 일면 여수지맥으로 불리는 능선이다.
[10] 갓꼬리봉.
○ 산불감시초소
○ 삼각점(구례313-1985복구)
○ 주변이 숲으로 둘러쌓여 있음 / 우측으로 수십 길 절벽을 이룬 바위지대, 청소리와 계족산 일대의 조망이 됨
[11] 갓거리봉, 688m
(1) 위치 : 순천시 서면 청소리 청소마을 뒤
(2) 접근코스 및 소요시간
1) 1코스 : 청소마을→계곡→고개→정상(1시간 30분)
2) 2코스 : 관풍정마을→임도→능선→정상(1시간10분)
(3) 교통편
1) 순천역→서면 청소 시내버스(53번)
2) 선평삼거리→청소마을 택시10분(5,000원)
3) 순천→청소마을 택시30분(12,000원)
(4) 주요 편익시설
1) 식당ㆍ숙박 : 청소골주변 산장 이용
2) 주변관광지 : 청소골, 정혜사
[12] 갓머리봉(708봉)
[13] 신선바위.
[14] 미사치
○ 아름다운 모래고개(모래는 없음)
○ 순천시(황전면, 서면), 비포장도로, 사거리안부
○ 이정표 : ←갓꼬리봉, 청소년수련원, →계족산, 깃대봉 2335m, ↓서면 심원마을(관풍 정)1700m, ↑황전면 회룡(순천 서면산악회)
[15] 심원마을(관풍쟁이)
○ 관풍쟁이'라고 불렀던 심원마을
선평 삼거리를 지나서 여수방면으로 가다보면 순천교도소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1km를 더가서 좌회전 신호를 받고 접어들어 계속 길을 따라 10여km 올라가면 물이 맑고 시원하기로 유명한 청소리를 만날 수 있다.
“청소리는 원래부터 청소골이라고 불려온 원 청소와 미삿재를 오르기 전 고갯마루에 못 미쳐 관풍쟁이라는 두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고 마을이장 주경돈씨(47세)는 얘기한다.
주씨와 먼저 찾은 곳은 관풍쟁이 마을인데 산으로 둘러 쌓여 밖에서는 들어서는 길만 보이는 곳이었다.
마침 마을로 들어서며 이곳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온 김복만씨를 만날 수 있었다.
“여가 걸괘(掛)자 갓관(冠)자, 갓을 벗어서 걸어놓았다고 해서 개관산하에 유 관풍정 그랬어” 마을이름이 왜 관풍쟁이(觀楓亭)라고 불리는지 궁금해하는 기자에게 김복만씨(67세)는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 전해들었다며 유래를 설명한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청소리 심원마을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김씨가 어렸을 때만 해도 관풍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이곳은 미삿재를 사이에 두고 황전면의 미초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도로가 포장되어 차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오히려 서면보다 황전면이 더 가까워서 장을 보러 갈 때도 주로 괴목장(황전면의 오일장)으로 많이 갔다고 한다.
심지어 김씨보다 나이가 서너살 많은 이들은 초등학교도 황전으로 통학을 하였다고 한다.
“그 때 마을에서 세 명인가 학교를 다녔는디 학교에 가는 아침이나 저녁에는 부모들이 미삿재까지 바래다주고 데려오기도 하고 그랬지요.”
이 마을에서 황전에 있는 초등학교를 가려면 재를 넘는 험한 산길이지만 4km이고 이에 반해 당시에 서면의 동산 초등학교를 다니려면 10여km 이상을 걸어서 가야하기 때문에 사실상 어린 학생들이 통학이 힘들었던 것이다.
“682고지인 깃대봉에 올라서면 광양, 구례, 승주 3군이 다 보인다”는 김씨는 “산으로 이어진 지형탓에 6.25 이후 여러 차례 경찰과 빨치산들 사이에 격렬한 총격전이 마을 안에서 벌어졌다”고 증언한다.
“아주 무서운 총소리가 한동안 계속되자 우리 할머니가 나를 당신 치마폭으로 덮고 방안에 꼭 엎드려 있었지요. 나중에 조용해서 나와보니 밭고랑에 빨치산들이 총을 쏠 때 떨어진 탄피가 수북히 쌓여 있었어요.”
“괴목장이 가까워 돼지새끼, 강아지새끼, 한 마리를 사도 거그 가서 샀지!”라고 김복만씨는 얘기한다.
그러나 가끔 순천 시내 5일장을 찾을 때면 대나무 조각을 보드랍게 쪼개거나 바짝 말린 재릅대(삼베를 짤 껍질을 벗기고 나서 남은 하얀 속대)를 여러 개 묶어서 횃불을 만들고 새벽같이 길을 나섰다고 한다.
“노디(독다리) 건너라고 앞에 간 사람이 횃불을 비춰주고, 가다가 불이 안타면 요리 흔들어주면 다시 타들어 가고 그랬제”라고 김씨는 말한다.
“물에 담궜다가 바짝 말린 재릅대는 무재릅이라고 했는데 무재릅이 훨씬 잘 타지요. 장거리를 향해 가다보면 날이 밝아왔고 그때쯤이면 횃불도 수명을 다했다”라고 김씨는 설명한다.
호롱불 켤 요량으로 장에서 사온 기름은 당시만 해도 몇 달을 두고 써야할 귀중한 생필품이어서 이것으로 횃불을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장보러간 사람들이 어두워 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마을에서 다시 횃불을 들고 원 청소마을까지 마중을 나갔다.
짧은 여름날 지금의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는 아랫장터까지 장 마실을 나서는 것은 마을사람들에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을에서는 능어리 버섯을 비롯하여 더덕, 딱주 등 산에서 나는 약초가 제법 있었으나 집에서 삶아먹기만 했지 내다 팔 궁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라고 김씨는 말한다.
그리고 김씨는 이 마을에서 많이 재배되었던 삼베 굽는 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들려준다.
“우선 깊고 넓게 구덩이를 파고 굵은 나무를 해와서 구덩이에다 수북히 쌓고 그 밑에다 불쏘시개를 갔다놓고 불을 지펴요. 그리고 나서 나무가 타기 시작하면 그 위에 돌을 잔뜩 쌓아놔요. 돌이 벌겋게 달궈지면 짚 덕석으로 달궈진 돌 위를 여러 번 덮고 한쪽으로는 구멍을 내어 삼을 쌓아놓고 다른 구멍으로 동네사람들이 물동이 들고 물을 부어대면 뜨거운 증기가 삼을 삶게된다”라고 김씨는 설명한다.
큰솥이 없어 삼을 찔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은 전통의 방식대로 삼을 구웠던 것이다.
얘기를 마치고 이장 주경돈씨와 함께 미삿재를 안내해주던 김씨는 산 위로 오르는 어귀에서 할미당에 얽힌 얘기를 해준다.
“여그가 옛날에 고려장터였는데 할미당이라고 합니다. 지나는 길손들이 넋을 달랜다고 돌 하나씩을 던져주는 것이 상례인데 한번은 다른 마을 사람들이 싹 파헤쳐 놓았어요. 뭐라도 나올까봐...”
할미당 터에서 산 위로 조금 올라서자 김씨는 집이 있던 돌담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가리키며 “길손들이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이던 주막자리”라며 대나무로 가려져서 어두운 곳을 가리킨다.
“지금은 깊은 숲길에 파묻혀 작은 소로길도 변변히 없지만 이곳이 한창 번성할 때는 마당이 넓어 곧잘 씨름판을 벌리기도 했다”라고 얘기한다.
세 사람이 도착한 미삿재 정상은 청소마을과 황전, 구례를 넘어 서울로 연결이 되는 중요한 갈림길이었으나 지금은 5평 남짓한 평지로 느껴질 뿐이다.
미삿재 밑으로 뚫리고 있는 터널이 완공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니 서울 가는 옛길도 이제는 추억이 옛길로만 남을 것 같다.
▶ 문봉준 기자bjmoon@suncheon-news.com
[16] 계족산
(1) 위치 : 전남 순천시 서면 청소리
(2) 높이 : 481m
(3) 특징
계족산 서쪽자락에 터를 잡은 정혜사는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을 끼고 있어서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가을 단풍도 매혹적이다. 그러나 상류 쪽 계곡은 철조망으로 막아 놓아 접근할 수 없으며 정혜사로 들어오는 진입로 중에 550m쯤은 일반 차량의 통행이 제한된다.
조용히 수도하는 사찰이므로 독깨스를 품어대며 고함소리를 지르는 세떵어리는 접근을 금하는가 보다. 남해고속도로 순천나들목에서 빠저나와 구례방면(840번 지방도)으로 가다 선평리 선평다리건너기전 오른쪽으로난 청소리방면으로 들어가 정혜사입구에 다달은다. 정혜사 입구에서 북족으로 볼록 튀어나온 봉우리가 갓꼬리봉이고 동쪽 절뒷산이 계족산, 서쪽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수리봉으로 계족산에서 발원한 정혜사 계곡을 비롯하여 갓꼬리봉, 수리봉 등에서 뻗어 내린 고랑물이 모여 이루어진 계곡이 청소골이다. 피서철이면 순천 시민의 사랑을 받는 이 골짜기는 죽정치-수리봉-갓 꼬리봉-미사치-안치-계족산 등이 말굽 형태로 이어진 능선에 둘러싸여 아늑한 정경을 연출한다. 정혜사스님들의 엄숙한 기도처를 시끄럽게 차를 가지고 드르렁거리며 정혜사 근방 까지 올라가는 것보다 이 입구 근방 공터에다 차를 두고 걸어서 올라가는 것도 스님들 몾지않은 불심일 것이다. 정혜사근방으로는 입산금지를 하므로 정혜사를 되돌아나와 산행을 시작한다. 스님한테 사정을 하면 두손을 합장하며 길을 열어주지만 불심이 가득찬 자연속에 정혜사 뒷산이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지면 황폐화되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함이므로 슬그머니 정혜사를 나와 산속으로 들어감이 옳을 것이다. 정혜사에서 남쪽날등을 타던 북쪽날등을 타던 계족산까지 올라가자면 초행길인 사람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잘못하면 고로쇠채취길을 따라가게 되어 엉뚱한 곳으로 가다 뒷걸음질을 치는 수도 많다. 축제를 벌여가며 벅실대는 고로쇠물맛 산행보다 한적하게 산오름을 하고 주민들과 정담을 나눠가며 고로쇠도 챙겨가지고 가기에 적합한 계족산 산행이다
(4) 계족산 정혜사
① 전남 순천시와 광양시의 경계인 계족산 서쪽 중턱에 자리한 정혜사는 신라 시대에 혜조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고찰로서, 고려 때 원감국사 충지(1266~1292년)가 참선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때는 대찰로서 이름났지만 여러 차례의 난을 겪으면서 규모가 즐어들었으며 귀중품들도 많이 잃었다.
정혜사는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을 끼고 있어서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가을 단풍도 매혹적이다.
깃대봉에서 계족산으로 등산로도 잘 닦여져있다.
계족산에서 발원한 정혜사 계곡을 비롯하여 갓꼬리봉, 수리봉 등에서 뻗어 내린 계류가 모여 이루어진 계곡이 청소골이다.
피서철이면 순천 시민의 사랑을 받는 이 골짜기는, 죽정치-깃대봉-갓꼬리봉-미사치-안치-계족산 등이 말굽형태로 이어진 능선에 둘러싸여 아늑한 정경을 연출한다.
② 정혜사 대웅전 (定惠寺 大雄殿)
- 순천시 서면 청소리 711 정혜사 경내
- 보물 제804호
- 조선시대
- 정혜사는 순천시 서면 계족산(鷄足山) 기슭에 있다. 계족산이란 산의 형세가 닭의 발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혜사는 원래 승주군에 속하였으나 근년에 순천시로 편입되었으며 주변에는 송광사, 화엄사, 선암사와 같은 유서깊은 고찰들이 밀집하여 있다. 이 사찰은 신라 영덕왕 때 보조국사가 건립하였다는 설과 중국 당나라 천봉(天奉) 원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당나라에는 천봉이라는 연호가 없고 천보라는 연호의 원년이 742년으로 경덕왕 1년에 해당되므로 이때의 초창으로 여겨지나 확실한 사적기가 전해지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정혜사의 가람배치는 주불전인 대웅전과 부속전각인 명부전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요사채 등을 배치한 형태이다. 여기에 대웅전 전면의 누각만 갖춘다면 전형적인 산지가람의 4동중정형(四棟中庭形)이 된다. 현재는 누각이 없는 상태이나 사지 전면의 높이 차이가 큰 경사지인 점을 감안한다면 누각이 있어 그 아래로 진입한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각 기둥의 사이마다 1구(具)씩의 공포를 짜 얹은 다포계 건축물이다.
기단의 전면은 화강석 장대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나 나머지 3면은 자연석과 길게 다듬은 화강석을 섞어 사용하고 있다. 전면은 지복석을 놓고 여기에 4단의 장대석을 겹치고 그 위를 다시 한 단의 장대석으로 갑석같이 마감하고 있다. 산간의 소규모 사찰임에 비하여 기단은 제대로 격식을 갖춘 것이다.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원형기둥을 사용하였다. 평면의 네 모서리에는 추녀의 처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8각형의 활주를 두었다. 기둥머리는 창방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평방을 얹는 다포식의 전형을 따랐으며 공포는 4면 모두 주간포를
1구씩 일률적으로 배열하는 통상적인 배치방식을 따르고 있다.
커다란 대들보를 내고주와 평주의 포작 위에 걸치고 그 위에 충량과 동자주를 올려놓고 종보를 얹었으며 종보에 빗천장과 우물천장을 걸쳐 결구하였다. 내부는 순각판으로 공포 부분을 마감하였고 그 위에는 빗천장을, 그리고 중앙에는 소란을 한 우물 천장을 설치하였다.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으로 건물 규모에 비하여 출목수가 다소 많은 느낌이 있다. 또한 귀공포의 한대(限大)는 옆의 공포의 포작과 연결하였고 끝에 연봉을 조출(彫出)하였다. 내부의 3·4출목의 살미첨차는 운공형으로 길게 대들보를 받치고 있고 첨차의 모서리 부분이 교두형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건립 년대가 무척 높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붕은 겹처마이며 창호는 전면3칸과 동·서측면에 놓았고 후면에는 창호 없이 전체를 판벽으로 마감하였다.
<출처> 순천시 (http://altair.chonnam.ac.kr/~dycheon/sc/sc49.htm>
③ 정혜사(定慧寺)역사(歷史)와 유래.
계족산(鷄足山) 중턱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大韓佛敎曹溪宗第十九敎區)에 속해 있는 사찰(寺刹)이며 정혜사(定慧寺)는 지금으로 부터 약 1260년 전 신라 경덕왕 1년 서기 742년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제2창건은 혜철 국사(慧哲國寺)가 중창 하였으며 이 지방에서는 아주 오래된 사찰이란 뜻으로 "고사절" 이라고 이름이 나 있습니다. 또는 1150년 전(前) 통일신라 시대 말에 보조국사(普照國師)체징(體澄)서기 804년-880년 이 정혜사를 창건 했다고 하나 이에 관한 기록은 없어 확실 하지 않습니다.
한편 송광사 제6세 원감국사(圓監國寺) 충지(沖止) 서기 1226년-1293년 에 그의 스승에 대해 쓴 혜소국사 제문(慧炤國寺祭文) 등에 보면 정혜사는 혜소국사가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혜소국사가 여생을 보내기 위해 정혜사를 창건 했으나 생시에 완성하지 못하고 제자들이 뒤를 이어서 큰 도량(道場)을 이루었으며.그 뒤 또다시 절이 황폐화 되었으나 원감국사 충지 대사(圓監國師沖止大師)가 관음기도(觀音祈禱)로서 원력을 세워 다시 절을 부흥시커 창건 당시의 모습을 되 찾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전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관음기도 도량(觀音祈禱道場0으로 명성이 나 있으며 현재까지도 간절히 기도발원(祈禱發願)하면 꼭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영험(靈驗)있는 도량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그 뒤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연혁(沿革)은 잘 알려진 것이 없지만 서기 1616년 광해군 10년에 나온 신 증승평지(新增昇平誌)에 보면 옛날에는 큰 사찰이었으며 임진왜난과 정유재난 이후 다시 절을 중창하였고 그리고 18세기에 편찬된 가람고(伽濫考)에 정혜사(定慧寺)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이 무렵까지 계속 법등(法燈)이 이어진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순천읍지와 여승람에 본 정혜사에 부처님의 진신 치사리(眞身齒砂利)를 봉안 하였다는 기록이 되어 있으나 현존하지 않으므로 애고 가슴 아픈 사연이 아닐수 없습니다.더욱 안타까운 것은 여순 항쟁과 6.25 사변을 겪는 동안 국보급 쾌불등 귀중한 문화재가 화재로 소실을 당하고 잃어 버렸습니다.이곳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2칸 단층 팔작으로 각 구간마다 1구씩 공포를 짜얹은 다포계이며 1984년 11월 30일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 제804호(文化財寶物第804號)로 지정이 되었으며 그 밖에 산내 곳곳에 파손된 탑과 부도탑 등이 있으며 순천에서 넘어 가는 이길을 옛날에는 한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였다고 합니다.
<출처> http://blog.daum.net/kkdks660/15090979
(5) 청소골 산촌 체험 마을
해발 350~400m의 고지대에 위치한 전형적인 산간마을로 지금부터 약 470년전 김해김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생겼다. 물이 맑고 신선한 곳이라하여 청소(淸所)마을이라 하였으며, 뒤로는 ‘옛날에 한양을 가게되면 이곳을 거쳐가는 원님이 쉬어가는 곳’ 이었다는 심원(深院)마을이 위치해 있다. 닭 발바닥 형상을 한 계족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계족산 중턱에는 지금부터 약 1600년전에 혜조국사가 창건한 정혜사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혈이라 하여 이곳에 절터를 잡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혜사 대웅전은 국고 제80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임진왜란과 여순반란, 6ㆍ25 동란때 많은 유물이 소실되고 분실되었다.
<출처> http://www.namdokorea.com/leisure/leisure.do?DBCLASS=C0205&FORM...
[17]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 '순천'
(1) 들어가며.
옛것을 보존하고 새것을 가꾸어나가는 아름다운도시 순천은 남도의 부드러운 대지의 기운을 받아 인심이 순후하고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조상들의 슬기와 호국의 얼이 깃들어 있는 고장이다. 또한 순천은 산과 바다 그리고 호수가 어우러진 산자수려한 터전 속에 송광사, 선암사, 낙안읍성 민속마을 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고려 충렬왕때 청백리의 표상인 최 석 부사의 팔마 정신이 서려 있고 전남 동부 지역의 문화, 예술, 교육, 교통의 중심지로 풍요롭고 생활의 활력이 흐르는 곳이다. 앞으로도 순천은 팔마의 전통과 예술의 향기를 이어나가는 고장으로서 자부심과 애향심이 가득한 고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연 혁
○ 삼한시대 : 마한에 속함
○ 삼국시대 : 백제에 속함, 감평군이라 칭함
○ 고려시대 : 충선왕 때 승주목으로 승격
○ 조선시대 : 고종 32년(1895) 순천군으로 됨
○ 1995년 : 순천시와 승주군으로 통합하여 '순천시'로 발족
(2) 관광 순천과 찬란한 문화 유적
1) 주요 관광명소
① 낙안읍성 민속마을
고려 때 낙안군 고을 터며, 조선시대 성과 동헌, 객사, 임경업 군수비, 장터, 초가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성과 마을이 한께 국내 최초로 사적 제 302호로 지정되었다. 다른 지역의 성과는 달리 넓은 평야지대에 1~2m 크기의 정방형 자연석을 이용하여 높이 4m, 너비 3~4m, 성곽 총 총 길이가 1,410m로 동내, 남내, 서내 등 4만 1천여평에 달하는 3개 마을 생활 근거지를 감싸 안은 듯 네모형으로 견고하게 축조되어 400년이 지난 지금도 끊긴 데가 없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도 성안에는 108세대가 실제 살고 있는 살아 숨쉬는 민속 고유의 전통마을로서 민속 학술자료는 물론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남부지방 특유의 독특한 주거양식인 툇마루와 부엌, 토방, 지붕, 섬돌 위의 장독과 이웃과 이웃을 잇는 돌담은 모나지도 높지도 않고 담장이와 호박넝쿨이 어우러져 술래잡기하며 뛰놀던 어린 시절의 마음의 고향을 연상케 하며 마당 한 켠의 절구통마저도 예스럽다.
② 송광사
송광면 신평리에 있으며, 우리나라의 노랜 불교 역사 속에서 전통 승맥을 계승한 승보사찰로, 합천 해인사, 양산 통도사와 더불어 삼보 사찰로 물리고 있다. 특히 목조문화재가 많은 사찰로 16국사 영정을 봉안하는 '국사전'과 '목조삼존불감', '고려 고종제서'등 국보3점을 포함하여 총 32점의 문화재가 보존 되어있다. 사찰로 들어서서 홍교를 지나 일주문을 거쳐 우화각에 이르면 속세와 인연을 끊고 다리를 건너 불국정토로 향했던 선승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승보전과 지장전이 자리하고 있어 웅장한 기상을 나타내고 있다.
③ 선암사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에 있으며 고려 불교의 여러 사상이 선과 교의 승풍으로 융합되어 많은 선승을 배출한 태고종 본산으로 이름나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아치형의 승선교가 세속의 번뇌를 다리아래 흐르는 계곡 물에 TLt고 건너 피안의 세계인 불국 정토를 향해가듯 제 그림자를 비추고 그 중앙에 돌출 된 용두는 더더욱 아름답다. 임제선풍의 대쪽같은 승풍을 고고하게 지켜온 청정도장이자 천년고찰로서 우리나라 불교 문화연구에 송광사와 쌍벽을 이룬 사찰이다.
④ 승선교
조선조 숙종 39년(1713) 호암화상이 6년만에 완공한 다리로 넓은 개울을 기저부에 별다른 가설이 없고 홍예는 하단부 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의 문양은 반원형을 이루고 한 개의 아치로 이루어졌으며, 보물 제 400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리 중심석 아래의 조그맣게 돌출시킨 석재는 용두 모습 같기도 하며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중생들을 보호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⑤ 동화사
순천시 별량면 대룡리 개운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서기 1047년에 창건되었고,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 의천이 중건했다. 대웅전은 아담하면서도 웅장함이 감도는 조선시대의 건물이며 경내에 보물 제 831호인 삼층석탑과 200년 이상 된 동백 숲을 볼 수 있다.
⑥ 정혜사
순천시 서면 청소리 계족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사찰은 지금으로부터 약 1천3백년 전 신라시대에 해조국사가 창건한 사찰로서 이 지방에서는 고사로 이름나 있다. 안타깝게도 여순사건과 6·25사변을 겪는 동안 국보급 보물 등 귀중품을 많이 잃었다. 사찰 부근에서는 많은 고로쇠 물이 나올 뿐 아니라 가을 단풍이 유명하며 이 절로 가는 길은 옛날에는 한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상경 길이었다.
⑦ 조계산 도립공원
산속 깊은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며, 만수봉과 모후산이 송광사 일대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선암사 계곡의 맑은 물은 죽학천과 합류하여 이사천으로 흘러간다. 선암사 둘레에는 월출봉, 장군봉, 깃대봉, 일월석 등이 줄지어 솟아 있다. 해발 884m 높이로 특히 선암사의 가을 단풍은 일품으로 등반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⑧ 순천만
순천시를 중심으로 동쪽의 여수반도와 서쪽의 고흥반도로 둘러싸인 호수 같은 만으로. 광활한 갯벌이 펼쳐져 있으며 크고 작은 성과 주변의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서해안 등 다른 지역과는 달리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지역이다. 동천과 이사천의 합류지점으로부터 순천만의 갯벌 앞부분까지 전개되는 갈대군락은 전국에서 가장 넓은 면적으로 가을 무렵 갈대꽃이 피고 칠면초가 붉은 빛을 띠며 흰색의 철새가 날아오르는 광견은 가히 장관이다. 특히 오염원이 적어 잘 발달된 갯벌과 염습지, 갈대군락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어 질 좋은 수산물이 풍부하며, 천연기념물 제22호인 흑두루미를 비롯하여 검은머리갈매기, 황새, 저어새, 노란부리백로 등 국제적 희귀 조류들이 월동 및 서식하는 전 세계 습지 중 희귀 조류가 많은 지역으로, 자연관찰과 탐조를 위한 자연학습장과 국제적 학술 연구의 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또한 2005년 완공으 목표로 순천만 자연생태 공원을 조성중에 있으며,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은 비지터 센터, 조류 관찰장, 생태연못, 관찰 테크, 갯벌체험지구가 들어선다.
⑨ 주암호
8년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되어 7억7만톤의 물을 담수하고 있는 주암호는 광주, 전남권의 용수조절 기능 외에 145.5km의 호반도로를 끼고 있으며, 송광사, 선암사, 낙안읍성 민속마을과 고인돌 공원 등 자연 및 문화 관광 자원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으로 조계산과 모후산 자락 아래 펼쳐진 여우롭고 풍만한 자연을 만끽 할 수 있는 순천시의 중요한 관광자원이다.
⑩ 고인돌 공원
선사시대 문화 유적지인 고인돌군을 비롯하여 구석기 집터, 신석기 밑 청동기 움집, 선돌 등을 보유하고 있는 주암호수 주변에 야외 전시장, 유물전시관, 모제 전시관을 건립하여 전국 최초로 이루어진 고인돌 공원으로서 선사문화를 연구하는 귀중한 학습장으로 각광 받고 있다.
⑪ 죽도봉 공원과 순천 팔마비
순천시민의 휴식처로 사랑 받는 죽도봉 공원은 조선시대에 화살 재료로 사용한 대밭이 있던 섬 같이 생긴 곳이라 하여 죽도란 이름이 붙여진 곳으로 팔마탑과 연자루, 현충탑, 백우비, 우석 선생 동상, 강남정 등이 있다. 시누시대와 동백이 우거진 숲길을 산책하며 강남정에서 내려다보이는 시가지 전경도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순천팔마비(順天八馬碑)는 고려 충렬왕 때 승평부사 최 석이 내직으로 영전하게 되자 주민들이 전례에 따라 부사에게 말 7필과 법조에 올리는 말 6필을 올렸는데 최부사는 상경후 말6필을 제외하고 자신에게 준 말7필에다 새끼 한 마리를 더해 여덟 마리의 말을 다시 승평으로 돌려보내 최부사의 청렴한 뜻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를 세웠다.
⑫ 검단산성
검단산성은 6세기 후반부터 7세기에 걸쳐 축성된 백제시대의 성으로 순천대학 박물관팀에 의하여 수많은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특히 성곽 내 하단부에 위치한 대형 우물내에 목기류 등은 백제시대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와 더불어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국가 사적지로 지정되고 정유재란 당시에는 조선·명군의 연합군이 주둔하여 순천 왜성의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⑬ 순천 왜성
정유재란(1597년) 당시 육전에서 패퇴한 왜군 선봉장 우키다 히데이와 도다카 도라가 호남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 기지 겸 최후의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3개월간 쌓은 토석성으로 1만 4천여명의 왜병이 주둔하여, 조·명 연합군과 두 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남해안 26개의 왜성 중 유일하게 한 곳만 남아 있다.
⑭ 월평 유적지
월평 유적은 후기 구석기 시대와 철기시대를 포함한 선사와 역사시대의 문화층이 잘 남아있고, 시굴 조사에서 14,000여년 전 무렵의 대표 석기들과 석기 제작터가 확인되어 중석기 또는 신석기 문화와 연속선상에서 우리나라와 동북아시아의 선사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지이다.
⑮ 천자암 쌍향수
천연기념물 제 88호로 지정된 쌍향수는 향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침엽 교목으로서, 나무의 높이는 12.5m, 둘레는 3.98m이다. 나무의 품위가 조용하고 장중하며 선경에 이른 느낌을 주며 수령은 700년이다.
전설에 의하면 조계산에 천자암을 짓고 수도하던 보조국사가 중국에서 돌아 올 때 짚고 온 지팡이를 나란히 꽂아놓은 것이 뿌리가 내려 자랐다고 전해지며 엿가락처럼 비비 꼬인 것이 특색이다.
16
이팝나무
천년기념물 제 36호인 이팝나무는 목서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교목으로 높이 16.5m, 둘레 4.46m로 수령은 400년 당산목이며 평중리 마을 앞에 바위를 감싸면서 자랐으며 동쪽에 있는 느티나무와 장자목 구실을 하며 본시 신목(神木)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못자리를 시작할 때 꽃이 활짝 피면 풍년이 들고 잘 피지 않으면 흉년, 시름시름 피면 한밭이 심하였다고 전해진다.
(2) 찬란한 문화유적
① 송광사 목조삼존불감(木造三尊佛龕,국보 제42호)
이 불감은 송광사의 16국사 중 제1세이며 수선사의 정해결사를 일으켰던 보조국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지니고 왔다고 전해지며 목조로 된 전개식 삼면으로 닫으면 원통형이 되고 열면 중앙 반원부에 본존과 좌우 협시 보살을 배치하게 되어있고 정교한 기법과 양식은 인도풍 분위기를 풍겨주어 국내 불감류로서는 매우 희귀한 작품이다.
② 고려 고종 제서(高麗高宗制書, 국보 제 43호)
제서는 능형화문을 홍, 황, 백 등의 비단 일곱장을 이어서 만든 두루마리에 묵서한 것으로서 내용은 고려 고종이 조계사 제2세 진각국사 혜심에게 대선사의호를 하사한 것인데 최홍윤 이하 당시의 직사 몽행의 질(帙)을 열기하고 있으며 정우4년 정월일의 간기(刊記)가 있다.
③ 송광사 국사전(松廣寺國師殿, 국보 제56호)
조선조 초기(1400년)의 주심포 건물로 내부 전체에 걸쳐 우물 천장이 가설로 되어 있으며 천장의 연화문, 대들보의 용문 등은 보기 힘든 당시의 단청 문양으로 현제 16국사 진영을 봉인하고 있다.
④ 송광사 금동요령(보물 제204호)
요령이란 불가에서 법요를 행할 때 사용했던 불구(佛具)로 몸은 사각형이고 각 면이 팽창되어 거의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으며 윤곽 안 각면에는 몸을 들고 위로 치솟는 용 한 마리씩 양각 되어 있고 각면 상부에는 큼직한 꽃 한 송이씩이 밑으로 향해있고 여기서 파생도니 넝쿨이 전면에 양각되어 있다.
⑤ 선암사 삼층석탑(보물 제395호)
신라시대의 전형양식을 착실히 승계한 이중기단 석탑이며 수매(數枚)의 장석으로 지대석, 상·하층 기단을 구성하고 각 면에 1개의 탱주(기둥)를 새겼으며 1층 옥신부터 3층 옥개석까지 각1매의 돌로 제작하였고 4단의 옥개석 받침을 갖고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삼층 석탑이다.
⑥ 정혜사 대웅전(보물 제804호)
통일신라 742년 경덕왕 때 보조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며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으로 각주마다 1구씩의 공포를 짜얹은 다포계이다. 내부의 3.4출목의 살미 첨차는 운공형으로 길게 대들보를 받치고 있고 첨차의 모서리 부분이 교두형으로 되어 있고 쇠서 끝이 강직한 것으로 보아 건립 년대가 오래 됨을 증명한다.
⑦ 금둔사지 삼층석탑(보물 제945호)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삼층 기단부 각면석에 8부 신중(神衆)을 양각으로 선명하게 조출한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기단부는 전형적인 이중기단으로 지대석은 수매 판석을 깔고 하층기단은 각구를 2구로 나눠 중앙에 탱주와 4우주를 조각했고 하대갑석은 4매 판석으로 결구, 상면 중앙에 호형과 각형 몰딩을 주어 상층기단을 받았다.
⑧ 선암각사 암부도(보물 제1117호)
전체 모습은 팔각 원당형 전형 양식으로 방형의 지대석 위 각면에 안상이 새겨진 8각 괴임대가 조출되고 그 위에 구름문이 장식된 하대석을 얹고 옥개석의 장중함 등은 통일 신라시대의 잔재기법을 알 수 있다. 이 부도는 대각암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고려시대 천태종을 개창했던 의천대각국사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⑨ 선암사 대웅전(보물 제1311호)
정유재란 대 소실된 후 현종 원년(1660)에 경잠, 경준, 문정의 3대사가 주동이 되어 선암사를 중수하였고 순조때 재차 현재의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건물양식은 다포에 팔각집으로 장엄하며 화려한 건물이며 높직하게 다듬은 돌의 기단에 주초를 놓고 원형 기둥을 새웠고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단청하였으며 지금도 문양이 선명하다.
⑩ 낙안 향교(지방유형문화재 제112호)
조선조 효종 9년에 낙안 동쪽 용암동에서 현재의 교촌리로 이건하였으며 그 후 수 차례에 걸쳐서 중수하였으며, 건물은 대성전, 동무, 서무, 동재, 서재, 명륜당, 내·외삼문, 교직사 등이 있으며 명륜당의 좌측에 수령 400년된 은행나무가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되어 있으며 장녀석의 초상에 원주를 세웠는데 가구는 2고주 5량이며 공포는 초익공익으로 지붕은 겹처마로 풍판이 있는 맞배지붕이다.
⑪ 낙죽장(중요무형문화재 제31호)
낙죽은 인두로 대나무나 나무를 지져서 무늬 또는 글씨와 그림을 쓰고 그리는 기법을 말한다. 종이나 비단 또는 가죽에도 지지는 기법이 있어서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인정된 김기찬끼의 기능은 대를 주로 하고 있으므로 낙죽으로 지정 되었다. 낙죽은 합죽선, 칼자루, 진소, 연죽, 횃대, 선추, 침통 등에 흔히 사용하고 있다.
⑫ 순천팔마비(順天八馬碑)
비석은 현재 영동 우리은행(구 승주군청) 앞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비의 전면에는 팔마비八馬碑라는 글자가 양각되어 있으며, 비의 후면에는 팔마비의 건립내역을 적은 내용이 음각되어 있으나 마모되어 내용 판독이 힘들다. 이 비의 건립 배경에 대해서는『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자세히 나와 있다. 『고려사』권34의 열전 최석에 기록된 관계 사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승평부에서는 태수가 바뀌어 돌아가면 태수에게는 말 8필을 주고, 부사(副使)에게는 7필을, 그리고 법조에게는 6필을 주되 마음대로 고르게 하였다. 석碩이 갈려감에 미쳐서도 읍인들이 말을 바치고 좋은 것 고르기를 청하니 석이 웃으며 말하기를“능히 서울에만 이르면 족할 것이어늘 말을 골라서 무엇하겠는가.”라고 하며 집에 돌아간 뒤 그 말들을 되돌려 보내니, 고을사람들이 받지 않으므로 석이 말하기를“내가 그대들 고을에 수령으로 가서 말이 망아지를 낳은 것을 데리고 온 것도 이는 나의 탐욕이 된다.
그대들이 지금 받지 않는 것은 아마 내가 탐을 내서 겉으로만 사양하는 줄로 알고 그러는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그 망아지까지(모두 9필) 아울러 돌려주니 이로부터 증마贈馬의 폐단이 마침내 끊어졌으므로 고을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우고 팔마비라 이름하였다.
이것이 곧 오늘날까지 순천지역에 널리 알려진 팔마비 의 유래이며, 이 비는 한국의 역사상 지방관의 선정 겸 청덕비의 효시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의가 있다.
<출처> 순천사람(http://suncheonin.kr/new/bbs/board.php?bo_table=sc1&wr_id=4 )
(3) 세시풍속 · 문화행사 · 농특산물 · 향토음식
1) 세시풍속
① 송천 달집태우기
달집태우기는 전남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정원 대보름에 행해지는 세시풍속 놀이로 달집을 짓고 불을 지르면서 불의 주력을 빌어 풍년을 기원하거나 점을 치고 마을의 액을 물리 치고자 하는 뜻이 담겨있다. 이 놀이는 300여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데 매년 정월대보름을 전후하여 마을 당산 앞 논에서 행해진다.
② 순천 구산 용수제
주암면 구산리 마을에서 400여년 전부터 매년 정월대보름을 기하여 행해지는 수간 물보기굿(일명 화신제)은 엄격하나 제의성이 담긴 주술적 민속놀이의 형태로서 공동 축제이다. 마을 앞산인 오성산이 '火'에 해당되므로 화재자 자주 발생하여 화재를 막고 마을의 안녕 질서와 평화를 위해 마을 어귀에 나무 기러기를 세우고 마을 뒤 청룡에 항아리를 묻어 물을 채우고 화마를 예방하고 있다.
③ 낙안읍성 백중놀이
조선조 인조때 군수로 도임한 임경업이 대동 두레패 장정들의 협동심을 고취하기 위해 장려한 민속놀이로 진세마당, 장원질마당, 영문마당, 뒷풀이마당의 4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을 장정이 당산에 모여 진세놀이에 이어 장원질놀이로 이웃 마을 성문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마을 장정들이 나와 성문 진입을 저지하고 상대방 성문을 공격하여 이긴 마을 장정들은 풍물을 울리고 사명기를 세워 군수로부터 상금을 받은 3개 마을이 참여하여 대동 한마당 군무가 어우러지는 백중놀이로 남도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2) 문화행사
① 남도 음식문화 큰잔치
전남의 음식은 예로부터 '맛의 예술'로서 최고로 꼽았으며 소리는 음식에서 나온다고 하듯이 판소리 문화를 창조한 원동력이라 할 만하다. 천혜의 자연 조건과 멋스러운 전라도 사람들의 넉넉함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손맛일 것이다. 전라남도에서는 맛깔스러운 남도 음식의 맥을 잇기 위해 매년 10월 순천시 낙안읍성에서 '남도 음식문화 큰잔치'를 열고 있다.
② 팔마 문화재
매년 10월, 순천 전역에서는 팔마 정신문화를 이어가는 팔마 문화제가 '시민의 날'행사와 함께 펼쳐지는데 순천의 대표적인 문화행사로서 드높은 가을 하늘 아래서 펼치는 한마당 축제의 장이다. 거리 축제로 분위기를 돋우고 음악, 미술, 연극, 민속놀이 그리고 체육행사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③ 낙안 민속문화축제
매년 5월에는 조상들의 생활상을 체험하여 살아 있는 교육 현장의 효과와 더불어 체험하며 느낄 수 있는 축제 한마당이 3일간 열린다. 또 한여름과 한겨울을 제외하고 매주 일요일에 민속공연 행사가 열린다.
3) 농특산물
① 순천단감
일조량이 충분하고 일교차가 커 과육이 연하며 당도가 아주 높아 동남아 여러 나라에 수출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소비자 리콜제 실시로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② 월등 복숭아 가공식품
산간지 황토땅에서 재배되어 당도가 높고 맛이 좋기로 유명하고, 식욕부진, 피로회복에 도움을 주며, 흡연자의 니코틴 해독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는 구연산이 다량 함유된 건강식품이다.
③ 순천미나리
청정지역인 순천만에서 생산되는 무공해 채소로 향이 독특하며, 예로부터 성인병, 부인병 등에 효과가 좋은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어 생즙으로 상복하면 건강에 아주 좋다.
④ 동충화초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불로장생의 비약으로 알려져 왔으며, 폐를 보호하고 신장을 튼튼하게 하는 데 효과가 있어 영양강장제로 쓰이고, 또 면역기능을 강화하는 성질이 함유되어 저항력을 증가시켜 각종 병을 예방하는 약용으로 이용되고 있다.
⑤ 순천 야생 작설차
순천 선암사를 중심으로 조계산 일대 자란 야생 차나무에서 생산한 작설차는 정부에서 지정한 전통식품(작설차 제조부문) 명인이 한국 고유의 전래기법으로 만들어내고 있어 은은한 맛과 향이 독특한 순천의 상품이다.
⑥ 낙안 사삼주
순천 지방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던 사삼주의 전통을 오랜 연구 끝에 옛 맛, 옛 향취를 그대로 이어서 더덕과 찹쌀로 정갈하게 빚어낸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전통 민속 명주이다.
⑦ 순천 영지버섯 술
영지버섯은 예로부터 산삼과 더불어 신비의 생약으로 이름나 있어 액체로 마시는 산소라고도 한다. 영지버섯 술은 지하 110m 천연암반수레 쌀과 보리쌀을 함께 넣어 6개월 이상의 숙성한 자연발효 술이다.
<출처> http://geojephoto.com/bbs/zboard.php?id=jangso&no=164
[18] 승주읍(昇州邑)
(1) 위치 : 전남 순천시 중앙부
(2) 인구 : 4,568명(2001)
(3) 면적 : 93㎢
(4) 특징
문화재 : 선암사 삼층석탑(보물 395), 선암사 승선교(보물 400), 선암사 삼층석탑내 발견유물(보물 955), 대각국사진영(보물 1044), 선암사 대각암 부도(보물 1117)
면적 93㎢, 인구 4,568명(2001)이다. 14개 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은 서면(西面), 남쪽은 상사면(上沙面)과 낙안면(樂安面), 서쪽은 주암면(住岩面)과 송광면(松光面), 북쪽은 월등면(月燈面)과 접한다.
1985년 쌍암면(雙岩面)이 승주읍으로 승격하였다. 읍의 북계(北界)에 오성산(五聖山:609m)·유치산(酉峙山:632m)·문유산(文遊山:688m)·바랑산(620m) 등이 솟아 있는 소백산맥의 지맥(支脈)은 북류하는 보성강(寶城江)의 지류, 섬진강의 지류인 월등천(月燈川)과 남류하는 이사천(伊沙川)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 전체 면적의 78.4%가 산지이고 이사천의 상류에 약간의 경지가 있다. 주로 쌀·보리를 경작하나, 산지의 사면을 이용한 양잠업과 잎담배·밤·감 등의 재배도 많다. 호남고속도로와 국도가 읍의 중앙부를 동서로 가로지른다. 읍내에 태고종(太古宗)의 본산인 선암사(仙巖寺)가 있어 전국에서 불교 신도와 관광객이 연중 모여든다.
문화재로는 선암사 삼층석탑(보물 395), 선암사 승선교(昇仙橋:보물 400), 선암사 삼층석탑내 발견유물(보물 955), 대각국사진영(大覺國師眞影:보물 1044), 선암사 대각암 부도(大覺庵浮屠:보물 1117), 선암사 북(北)부도(보물 1184), 선암사 동(東)부도(보물 1185), 순천 선암사 대웅전(大雄殿:보물 1311), 선암사 금동향로(金銅香爐:전남유형문화재 20), 전도선국사직인통(傳道詵國師職印筒:전남유형문화재 21), 선암사 괘불(掛佛:전남유형문화재 27), 선암사 팔상전(八相殿:전남유형문화재 60), 선암사 중수비(重修碑:전남유형문화재 92), 선암사 일주문(一柱門:전남유형문화재 96), 선암사 원통전(圓通殿:전남유형문화재 169), 선암사 삼인당(三印塘:전남기념물 46), 장윤정려(張潤旌閭:전남기념물 75), 선암사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전남문화재자료 157), 선암사 각황전(覺皇殿:전남문화재자료 177), 순천 선암사 측간(厠間:전남문화재자료 214)이 있다.
[19] 월등면 유래
월등면은 고래(古來)로부터 월등이라 칭하였고 522년인 백제 무녕왕시대에는 감평군 정방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순천부 부유현에 속했고 1914년 월등면이라 칭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종 32년(1895년) 5월 전국을 23부로 지방관제를 개정 236군을 두었는데 이때에 남원부 산하 순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다시 고종 33년(1896년) 8월에 전국을 13도 7부 1목 331군 으로 개정 계속 순천군에 속하여 있다가 1949년 8월 순천읍이 순천시로 승격 분리됨에따라 승주군 월등면이 되었다. 그 이후 1995년 1월 1일 승주군과 순천시가 도농통합을 이뤄 순천시 월등면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10개 법정리, 20개행정리, 29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10개 법정리는 농선리, 월룡리, 대평리, 신월리, 운월리, 갈평리, 송천리, 월림리, 망룡리, 계월리 등이다.
월등의 '월'자는 옛 장평마을(현 대평리 월평) 뒷산 옥녀봉에서 마을에 이르는 지세가 둥그 런 달을 닮았다 하여 '月'자를 따왔고 '등'자는 월룡리에 있는 두류봉이 선인독서형으로 생 겨 전방 1Km지점에 있는 둥그런 남두류봉을 책상삼아 산신이 독서를 할 때 두류봉 일부 능선지점에 있는 등잔 혈에 등불을 밝혀 독서를 한 형상이라 하여 '燈'자를 붙여 월등이 라 칭하였다고 전해 오며, 월등의 '월'자를 인용 월룡, 월평, 신월, 운월, 월림, 계월 등 '월' 자를 붙인 마을이 많다고 한다.
월등면의 면적은 순천시 전체 면적의 4.89%인 44.31㎢이며, 2005년 1월말 현재 1,001세대 2,517명이 살며 남자는 1,247명 여자는 1,270명이다. 산은 희아산(763m)을 비롯 승주읍과 경계를 이루는 문유산(688m), 승주읍· 서면과 경계를 이루는 바랑산(619m) 등이 있고, 하천은 월룡천(운월리→황전천 5.6Km)이 황전면에서 합류 섬진강으로 흐르고 있다.
월등면은 순천시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고, 해발 80m~250m의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산림면적이 약 74%로 농경지가 협소하고 산재한 전답은 수리가 불안전하나 비옥토로 유실수 재배에 적합하며 특히 복숭아 주산지로서 많은 농가가 재배하여 고소득을 올리므로써 복숭아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월등농협에서는 지역특산품인 복숭아를 이용 복숭아 병조림과 복숭아식초 등을 생산 전국에 판매하기도 한다.
문화재로는 '송천 달집태우기'가 전라남도 지방무형문화재(제24호)로 지정되어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민속행사로 재연되고 있다. 최근 갈평리에 관광농원과 눈썰매장이 개장되어 사계절 휴양지로써 각광을 받고 있다.
[20] 서면 유래
서면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BC7,8세기경 부족국가시대에 이미 취락한 흔적이 죽평리 입석마을 입구에 세워진 선돌(입석 Menhir)과 1976년 순천 교도소 신축시 출토되었던 돌칼 무늬없는 토기 등의 유물로써 확인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마한을 거쳐 백제, 고려, 조선초기에 이르는 동안 각각 감평군 승주목 순천부에 속하였을 것이지만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였는지 현재로서는 확실치 않다.
사료에 처음 보이는 서면의 명칭은 '승평지'에서 비롯된다. 조선조를 일관하여 확대 실시해가던 면리제가 17세기초에 비로소 이 지방에서도 시행되었던 것으로 서면도 이에 따라 순천부 서면으로서 그 형태를 갖추었던 것이다. 그 후 '여지도서'에는 방위표시를 한 북서면이란 명칭도 보이는데 1895년 갑오개혁에 의해 순천군 서면이 되었다.
당시 60개리로 구성되었던 서면은 일제하의 1914년 부군면 폐합과 1917년 조선면제의 실시로 학구리 등 14개리를 갖춘 순천군 소속의 서면으로서 면소재지를 지본리에 두었다. 이 후 면소재지를 동산리로 옮기게 된 서면은 1936년 개통된 전라선 철도와 국도 17호선이 지나게 되었으며, 1949년 순천읍이 순천시로 승격됨에 따라 승주군 서면으로 개편되었다. 그 이후 1995년 1월 1일 승주군과 순천시가 통합을 이뤄 순천시 서면이 되었으며 1996년 9 월 소재지를 동산리 문화마을로 옮겨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14개 법정리, 51개 행정리, 55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14개 법정리는 학구리, 대구리, 구만리, 비월리, 동산리, 운평리, 죽평리, 선평리, 압곡리, 구상리, 흥대리, 지본리, 판교리, 청소리 등이다.
서면의 면적은 순천시 전체 면적의 11.4%인 103.52㎢이며, 대지 1.28㎢, 전 5.10㎢, 답 9.12㎢, 임야 80.32㎢ 기타 임야등이 7.7㎢이다. 2003년 3월말 현재 3,836세대 11,312명이 살며 남자는 5,752명 여자는 5,560명이다. 서면은 순천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의 동쪽은 광양시와 접하고 서쪽은 승주읍과, 남쪽은 삼산동, 왕조동, 북쪽은 황전면과 접경하고 있다. 교통은 철도,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등이 사방을 관통하고 있어 비교적 편리한 지역이다.
호남 ·남해고속도로에서 서순천 I.C와 순천I.C로 순천시로 들어오면 분지형태의 평야와 산간지로 연결된 곳으로서 과수, 고등원예등 높은 농가소득작물을 재배하고 있으며 특히 서면 가지는 연간 2,287톤을 생산하고 있고 최근에는 수출길에 오르기도 했다. 순천공단을 비롯 순천교도소, 청소년수련소, 차량등록사업소, 한국도로공사 순천지사가 소재 하며, 98년 3월에는 전자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약3Km의 청소골계곡은 물이 맑고 주위환경이 깨끗하여 많은 시민들의 하계휴양소가 되고 있고, 계곡을 따라 오르면 보물 제804호가 소재하고 있는 정혜사가 있다.
[21] 황전면 유래
시청으로부터 북쪽으로 23.2Km지점 시의 최북단에 위치한 황전면은 북으로 곡성군이 있고 섬진강으로 구례군을 접경하여 동으로 광양시, 남으로 서면, 서쪽은 월등면이 인접하고 있는 농경지가 협소하고 산지가 많은 산간면으로서 532년경인 백제 무녕왕때 점방현과 삽현이 있던곳으로 추정되며 신라통일후 892년인 진성여왕 6년에 승주군에 편입 현과 성이 폐지되고 그후 순천군에 속하면서 본황과 모전의 황과 전자를 따서 황전이라 일컫게 되었고 1910년인 한일합방 후에 지방관제가 실시됨에 따라 황전면으로 되었으며, 1949년 순천읍이 순천시로 승격되어 승주군이 분리 되면서 승주군 황전면이 되었다. 그 이후 1995년 1월 1일 승주군과 순천시가 통합을 이뤄 순천시 황전면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16개 법정리, 34개 행정리, 52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16개 법정리는 죽청 리, 평촌리, 수평리, 괴목리, 죽내리, 황학리, 월산리, 내구리, 봉덕리, 선변리, 비촌리, 금평리, 대치리, 모전리, 회룡리, 덕림리 등이다.
황전면의 면적은 순천시 전체 면적의 10.9%인 98.89㎢이며, 2004년 12월말 현재 1,762세대 4,348명이 살고 남자는 2,141명 여자는 2,207명이다. 산은 봉두산(753m)을 비롯 서면과 경계를 이루는 농암산(470m), 갓꼬리봉(688m), 구례군 문 척면과 경계를 이루는 천황봉(652m)등이 있고, 하천은 섬진강(비촌리→황전천 5.1Km)과 황전천(18.5Km), 평촌천(0.6Km), 회룡천(6.8Km) 등이 흐르고 있다.
교통은 국도 17호선과 전라선 철도가 면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있어 비교적 편리한 편이며, 특히 괴목역, 봉덕역, 구례구역 등 3개의 역이 소재한 면이기도 하다. 구례구역 주변 섬진강변(선변리, 비촌리) 식당가에 가면 여름철에는 수박향을 내고 오독오독 씹히는 맛의 은어회와 은어튀김, 겨울철에는 눈치회와 참게탕이 식도락가의 입맛을 즐겁게 함은 물론 비촌 송림유원지와 용소폭포는 하계 휴양지로써 주위 환경이 깨끗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최근 덕림리 미초마을이 산림청으로부터 산촌 종합개발 사업 대상 마을로 확정되어 버섯· 산채등 지역 특산물 개발 및 산촌 휴양지 조성 등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됨에 따라 생활 환경 개선은 물론 소득 기반이 조성되는 산촌으로 가꾸어 질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