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가는 겨울이 아쉬운듯 지리산 눈꽃의 향연. 상고대(나무서리꽃) 아름다움이 만발한 통천문 주변.
바람과 구름이 빚어낸 산호 또는 사슴뿔 모양 상고대
대기 중 수증기가 승화되어 차가워진 물체에 붙는 것
짧은 생을 가진 상고대는 해가 나면 대부분 소멸된다.
하늘이
멀지 않았다
통천문으로
달도 별도
바람이 지난다
날개 없는 마음만이 통할 수 있는가
지나가면 날개가 돋아날 것인가
入此門來莫存知解
歷千劫而不古亘萬歲而長今
달빛에 주련 글씨가 또렷하다
맑은 비늘을 벗고 새벽을 들이키는 용 한 마리
하늘을 취하지 않고 땅을 버리지도 않는다
내 스스로 남든 줄 안다면 어떤 문에도 속지 않는다
이 문에 들어오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아니요,
만세를 뻗쳐도 항상 오늘이니
천왕봉.
지리산 10 경 중에서 << 제 9 경 - 천왕봉 일출.>> 사방을 둘러보아도 눈가릴 곳 하나 없는 탁 트인 전망. 천왕봉은 하늘에 닿을 듯 장엄한 기상으로 우뚝 솟았다.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칠선계곡, 함양읍내 건너 멀리 백운산, 덕유산 연봉이 있고 가까이 창암산, 법화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중봉, 하봉, 연봉을 넘어 북동쪽 감악산, 가야산의 암봉도 보인다.
'동쪽으로 웅석봉의 기나긴 능선 아래로 아른거리는 경호강.'
남쪽으로 첩첩산맥이 끝없이 이어지고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남해. 서남쪽으로 광양 백운산이 가물거리고 서쪽으로 뻗은 지리산 주능선 서북쪽으로 인월, 운봉이 부분적으로 드러나며 멀리 성수산이 보인다.
한반도의 조상들은 옛날부터 높은 산을 섬겼다. 산은 하늘로 통하는 지름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은 신의 섭리란 믿음.
천왕봉에는 하늘나라 선녀가 살고 있다고 믿어왔다. 엄천사 법우화상이 선녀와 결혼해 8 딸을 얻은 전설. 그 여덟 딸이 팔도의 무당이 되어 인간과 신의 중재자.
하늘나라 선녀가 늙어 죽은 후 천왕봉에 세워진 할미당이 성모사.
이조시대 학자 김일손은 그녀가 위숙왕후라 믿었다. 고려를 창건한 왕건의 어머니.
이조시대에서도 천왕봉 제사를 엄숙하게 지냈다. 평소 제관은 남원부사,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당상관. 조정에서 직접 파견하여 이곳까지 내려와 제사를 올렸다.
훗날 이조는 이곳까지 오르기 벅차 국가 제사 사당을 종석대로 이전한다. 1737년 영조 13년 구례군 강의면 종석대. 제사를 맡은 제관 노고를 덜기 위한 조치.
이조 말 국력이 기울어 종석대는 스님들에 의해 화엄사로 이전한다
한반도 5악 중 지리산은 남쪽에 있어 이조는 그 절을 남악사라고 명명한다.
북한산이 중악 백두산이 북악 설악산이 동악, 묘향산이 서악.
신라 5악에서 본딴 이름.
대구 팔공산이 중악, 경주 토함산이 동악, 공주 계룡산이 서악, 강원도 태백산이 북악.
신라시대 천왕봉에 모시던 할미당 이조시대에는 노고단으로 이전한다.
................................................... ................................................... '天主와 天王'은....... 점 하나 차이.' .................................................... ....................................................
王에다 '(점)하나를 찍으면.. 주인 주(主). 주인 주(主)에서 ' 하나 떼면 임금 왕(王). 왕(王)은 옛날부터 고독한 존재의 대명사.
천왕성모는 천왕봉 전설 속 여자 주인공. 할미당 성모에 天王을 합쳐.. <천왕성모>.
'천왕봉은 언제부터 불리워진 이름일까?'
아직 밝혀진 바 없고, 문헌상 기록도 없다. 천왕봉의 이름은 다양한 유래를 품고 있다.
천왕봉은 불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지배적. 사찰에 들어설때 반드시 사천왕문을 통과한다. 즉, 천왕봉은 사천왕문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
우리나라 산봉우리 이름에는 불교적인 이름들. 천왕봉이라는 이름은 지리산 이외에도 여러 곳. 불교 성지인 지리산 천왕봉도 예외일 수 없을 듯.
.......................천왕문 (天王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전각. 불국정토의 외곽인 동서남북 네 곳을 지키는 수호신. 4 천왕상은 지옥의 사자인듯 한결같이 무섭고 위압적.
잔뜩 불거져 부릅뜬 눈과 치켜 올린 검은 눈썹, 크게 벌어진 빨간 입과 두려움을 주는 얼굴표정. 몸에 갑옷을 걸치고 손에 큼직한 칼을 들고있다.
발로 마귀를 밟고 있고 마귀들은 고통스러운 얼굴 사천왕과 그 수하들은 천하를 두루 다니며 권선징악 천왕문은 보통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양식. ............................................................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오행설(五行說) 천왕문. 목 동쪽, 화 남쪽, 토 중앙, 금 서쪽, 수는 북쪽. 동쪽 목(木)은 청색, 태양의 상징 화(火)는 적색 금(金)은 흰색, 수(水)는 흑색. 그 중앙은 부처님.
'천왕봉 정상은 불교관점에서 보면 부처님 자리.'
동서남북 사천왕에게 둘러싸인 중앙은 부처님 자리. 황금빛을 띤 부처님, 오행 중 중앙인 토(土)의 자리 불교에서 사천왕이란 천상계 6천 중 첫번째 욕계(欲界)
불교에서 상정하는 하늘 중앙에 수미산(須彌山)이 있고, 그 산 중턱 동서남북 각 천왕이 그 관할지역을 관장한다. 사천왕은 원래 고대인도의 신화적 존재였으나 불교에 흡수
고대 인도에서도 초기에 귀족적인 상으로 표현되었다가, 중앙아시아를 거치며 갑옷입은 무장 모습으로 바뀌었고, 신라에 이르러 무섭지 않은 소박한 표정으로 정착되었다.
천왕문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이기에 이 문 밖은 하늘아래 천하(天下)가 되고 문안은 하늘위 천상(天上)이 되는 것이다.
사왕천에는 사천왕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천하 어떠한 힘도 천상은 더럽힐 수 없다. 하여, 이 문을 지나면 이미 하늘나라 사람.
마음과 행동도 곱게 가져야 한다는 믿음.
따라서, 천왕봉은 신라 때 명명된 듯 싶다. 그후 불교종주국 고려도 천왕봉 지명을 계승 오늘날까지 천왕봉이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
'천왕봉 이름에는 몇가지 흥미로운 유래.'
그중 일본의 황실도 천왕봉 유래에 한 몫. 원래 천황봉이 천왕봉으로 바뀌었다는 주장. 천황의 조상이 백제 왕조였다는 학설에서 유래.
일본 천황은 김해 김씨 후손이라고도 한다. 가락국을 창건한 김수로왕은 김해김씨 시조. 천왕봉 마야부인 전설 실제 주인공은 허황후.
고려와 이조 때 저질렀던 왜구들의 만행. 천왕봉 위숙왕후 성모상에 칼질했던 흔적. 왜구가 성모 석상 목을 자른 사례도 있었다.
원 속국 당시 고려가 일본을 3차례 침공. 일본이 고려에게 그 침공에 대한 보복인듯.
일본 천황은 도교에서의 우주 지배자 천황대제 일본이 7세기초 중국 수나라에 사신을 보낼 때 천황대제에서 두자를 따서 천황이라 처음 사용.
그 이전까지는 오오기미(대왕)라 하였는데 중국 수나라의 황제도 도교에서 비롯된 것. 일본 천황은 외교의례 상 국가 원수로 예우.
왜구들은 성모사를 천황 성지로서 여긴듯. 하여, 고려의 위숙왕후 성모상에 칼질한듯
천왕봉 위치는 사실상 한수 이남 한반도 중심. 천왕봉에서 동해 서해 남해까지의 거리가 비슷. 천왕봉은 삼면의 바다에서 솟아오른 한반도 중심.
빙하가 녹아 저지대가 3면의 바다로 변한 한반도. 지금의 동해 서해 남해 해안선은 7천년 전에 형성. 지리산 자락에 살던 조상에게 천왕봉은 신앙의 대상.
대홍수가 세상을 삼킬 때마다 천왕봉은 구세주와 같은 존재.
아사달 도읍지에서 대홍수 때 묘향산으로 대피한 단군.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대홍수의 천재지변을 많이 겪은 듯. 천왕봉 정상 서쪽 암벽에는 '천주'라는 글씨가 새겨져있다.
여기서 조금 더 내려온 공터가 옛 성모사 터.
그 아래 철창이 설치된 곳이 옛 반 토굴식 석조산장 터. 예전에 천왕봉의 성모사 자리에는 성모상 유적이 있었다. 지리산신으로 섬겨왔으나 1960년대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다.
점필재의 유두류록 및 김일손의 속유두류록 속의 성모상.' 흰옷을 입고 얼굴 눈썹에 분칠하고 머리를 쪽진 고운 얼굴.
한낮에는 추운줄 몰라도 새벽녁에는 못견딜 추위. 남녀노소 양반 상민 가리지 않고 부둥켜 안았을 듯. 남녀 구분없이 허리춤 속 체온에 언 손도 녹였을 듯.
'예나 지금이나 남성보다 많은 여성 기도객들.'
천왕봉 추위와 바람을 피해 바위틈마다 포옹한 남녀. 특히, 성모사 안은 남녀 기도객들 간에 풍기문란 심각. 결국, 성모사 민간신앙은 무속행위와 풍기문란의 원인.
당시 이조시대에 사회 문제로 대두될 만큼 심각했던 듯.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더욱 땅에 떨어진 이조의 성윤리. 무속 행위와 풍기 문란을 근절하려 사당을 부순 천연 승려.
그당시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와 남명 등등 유림. 천연의 용기있는 행위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성리학자들의 시각으로 볼 때 성모상은 한낱 무속행위.
그러나, 그 성모상을 마을 주민들이 다시 찾아내 사당을 만들고 예전처럼 제사를 올린 일반 민중들. 여전히 성모상을 영험한 지리산 산신령으로 믿은 듯.
'그당시 이조 민중들에게 성모상은 삶의 일부.'
일제 때 일본인들이 사당을 부수고 성모상을 절벽아래로 굴렸으나 다행히 산청 처녀가 찾아 천왕봉에 다시 모셨다 1945년 11월 성모상은 보쌈 당했다가 그 해에 다시 제자리
1972년 5월 특정 종교인들이 성모상을 훼손하는 수난사. 1972년 실종된 성모상은 1987년 혜범 스님이 다시 찾는다. 몸통과 머리를 각각 통천골과 진주 비봉산 근처에서 발견. 머리와 몸통을 봉합한 뒤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 놓고있다.
1991년 12월 23일 경남민속자료 14호로 지정된 성모상. 다시 천왕봉에 모셔야 한다며 혜범 스님과 법적인 공방전. 산악인들은 천왕봉에 쇠철책까지 만들어 성모상 복원을 시도. 혜범스님은 또 어떤 수난을 당할지 모른다며 그냥 모시고 있다.
하여, 현재 성모사는 옛 터만 남아있는 실정이다. 성모사는 선현들 유두류람 기록 속에만 남아있다.
'유두류록 속 성모상은 쪽진 머리에 분칠한 얼굴.'
성모상은 고려가 원나라 속국일 때 제작된 듯 보인다. 쪽진 머리 모양은 원나라에서 유래된 풍습이기 때문이다. 성모상의 모델은 고려를 창건했던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
위숙왕후를 신격화 하려는 의도였던듯. 고려의 기반을 확고히 하려 했던 목적.
당시 원나라 라마교는 티벳 몽골 네팔에 퍼진 불교의 분파. 라마교에서 '라마'는 덕이 깊은 승려 혹은 스승을 의미한다. 달라이는 큰 바다란 뜻이므로 <'달라이 라마'= 바다 같은 스승>.
13세기 경 티벳에서 몽골로 전해진 라마교는 원나라 왕실 종교. 징기스칸이 티벳을 점령후 티벳 승려 ‘파스파’를 왕실에 초청 그후 몽골 승려는 특권층에 속할 정도로 귀한 신분를 보장받았다.
징기스칸 당시 라마교의 사원은 정복국의 높은 산마다 세워진다. 그러나, 훗날 원나라는 라마교의 득세에 따라 국가 경제는 파탄. 결국 원나라 속국이던던 고려도 원나라처럼 쇠퇴의 길을 걷는다.
천년제국을 꿈꾼 원나라 패망 이유 중 하나는 초야권 풍습. 결혼식 전에 신부는 고매한 라마승에게 순결을 바쳤던 관습 당시 몽골은 어린 신부에게 행해졌던 실질적인 성교육 풍습
몽골 에르덴조 사원의 지붕을 지키고 있는 용머리 모습. 우리나라 용머리에 비해 투박하지만, 그 위용은 뛰어나다. 잡귀 잡신을 물리치는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지는 듯 하다.
용은 원기왕성하고도 강력한 남성의 힘을 상징한다. 전사의 숫자가 국력이었던 징기스칸 유목민들의 신앙. 남녀 간 성적 결합도 해탈에 이를 수 있는 중요한 관문. 하여, 불상의 형태에서도 이러한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유두류록을 보면, 위숙왕후와 엄천국사의 로맨스 전설. 이조시대 유교 관념에 젖은 점필재는 불륜 관계로 단정 고려시대의 불교적인 관념으로 보면 신성한 라마교 의식.
'위숙왕후와 엄천국사 전설은 라마교 초야권 의식.'
한반도에 원나라의 초야권 관습이 성행한 시점은 고려말. 천왕봉에 현재의 성모상을 안치한 시점은 고려 말로 추정. 천왕봉에 성모사를 지은 시기도 원나라 지배 하 고려시대.
원나라는 고려 함대를 빌려 두차례 왜 정벌을 시도한다. 그러나, 두 차례 모두 폭풍을 만나 왜 정벌을 실패한다. 하여, 고려 때 천왕봉 성모상은 왜구에게 수난을 겪는다.
왜는 침공한 원나라보다 거기에 협조한 고려가 미웠던 탓. 천왕봉 성모상 얼굴에 칼질을 하여 분불이를 했던 것 같다.
성모사가 언제부터 천왕봉에 있었는지는 기록 상에 없다. 그러나, 가락국 또는 신라시대부터 비롯된 것으로도 추정. 성모사 터는 우리나라 무속신앙의 근원지이자 불교의 성지.
................석모석상의 모습.................... 1973년 8월 초 천왕봉 서쪽에 합장한 모습의 성모상 그 오른편에 높이 1,1m 크기의 여신상이 새겨진 바위. 1959년 천왕봉 성모석상 & 마애불(사진작가 김결렬 作) 1962년 천왕봉 산막의 김순용 옹과 성모석상 & 마애불
가부좌한듯 다소곳이 앉아 합장한 자그마한 석상
몸집에 비해 얼굴이 크지만 어머니 같은 인자한 얼굴. 움푹 들어간 눈, 햇볕에 눈이 시린듯 눈가에 배인 웃음 오뚝한 콧날, 오므리고 있는 작은 입, 그 언저리에 미소.
쑥색 바탕에 흰점 석질은 보기 힘든 희귀석이다. 천축국 또는 파미르고원이 원산지인 것으로 추정
1945년 11월 어느날 삼장면 내원리 한 농부에 의해 짚가마니와 새끼줄에 묶여 산 아래로 끌어내려왔다.
성모석상을 보쌈 형태로 끌어내려 자기 집에 보관 중 성모상을 찾아 나선 사람들에 의해 발견이 되었을 때, 농부는 꿈에 나타난 성모가 옮겨달라 간청했다고 변명
그로부터 두어 달 후 성모석상은 제 자리로 돌아왔다. 그후 좌측 마애불여신상과 함께 73년 8월 사라진 성모상
전국 무당집 서낭당 산신각 등에 철거령이 내려졌던 즈음 성모석상 증발은 관청에서 행해진 것인지 모른다고도 소문.
1987년 1월17일 천왕사의 주지 스님이 꿈의 계시를 받고 진주 비봉산 어느 과수원 장작더미에서 찾아낸 머리부분 오른쪽 어깨 밑으로 잘려진 몸통은 그해 통신골에서 발견.
지금의 자리에 모신 성모상이 16일 만에 또 없어졌으나 그해 7월17일 절 앞쪽 대나무 숲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2000년 8월 지역주민 모임 두류산악회에서 중산리에 복원 ............................................................. ......................
우리나라 민간신앙의 근원지는 지리산 천왕봉. 천왕성모의 여덟 딸이 8도의 무당이라는 전설. 천왕성모 전설의 시대적 배경은 이조시대 후반.
한반도에서 무속신앙이 가장 성행했던 이조시대. 한반도를 행정상 8도로 구분했던 시기도 이조시대. 성모상을 무당의 시조 할머니로 모신 성모사(聖母祠)
백여명 무당이 들끓던 동네라 하여 백무동(百巫洞)
성모사 성모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 또는 옥황상제가 내려준 마야부인이란 주장도 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 자연발생적 민간 무속신앙 형태
고려시대에는 위숙왕후 설, 신라시대에는 마야부인 설. 이조시대에는 마고 할미 설.
이조시대에 만연한 성모상의 전설에 관해 알아보자. 성모상은 백무동의 천방산 굴바위와 용류담에도 있다. 하여, 천왕봉, 백무동, 용류담을 삼굴(三窟)이라 한다.
.............용류담 성모상에 관한 전설................ 어느날 바둑을 두던 마적도사가 비가 오지 않는데도 개울이 붉은 색을 띠며 불어나는 신기한 현상을 본다. 그 개울을 따라가보니 마고할미가 소피를 보고 있었다.
이만하면 배필이 될 만하다 싶어 같이 살며 낳은 아흔아홉 딸이 8도 무당이 되었다 한다. .............................................................
아흔아홉 딸은 하동지역 무당의 원조인듯. 원래, 옛부터 동아시아 뱃길을 오간 무역상. 무사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무당들이 많았던듯.
원래, 마천은 지리산 북쪽 관문을 일컫던 지명 행정구역으로는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중심 일대 마천은 전라도 남원사람들은 '당벌장터'라 불렀다.
경상도 사람들은 좀 억세게 불러왔던.. 땅뻘.' 원래, 지리산 산신당이 있어 마천은 ..당마을'
지리산 정상 천왕봉 성모사에는 성모상. 지리산 일대 산신당 당마을 무당의 원조. 고려시대에 만든 성모상 모델은 위숙왕후.
성모상은 한반도 민속신앙의 상징적 존재. 백년 전에 한번 도난당한 사건이 있은 후 다시 꼭같은 모습으로 만들었으나 또 도난.
성모에게 제사올린 무당들이 들끓던 이조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마을을 이루었던 백무동. 밥해주고 소잡느라 솥과 그릇들이 널려 있었던 동네.
백무동에서 밤이 되어 기온이 떨어지면 남녀가 부둥켜 안고 체온을 유지했던 곳. 그당시 풍기문란이 문제됐던 기록도 있다.
성모상은 굴바위와 용류담에서 먼저 자취를 감추었고, 마지막 천왕봉 석상은 온갖 수난 끝에 두 동강 난 몸통 현재, 다시 봉합되어 중산리 천왕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성모상이 천왕사로 옮겨진 과정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성모상은 원래 있었던 천왕봉으로 옮겨야 한다는 현지 주민. 이 사건으로 인해 재판이 벌어질 만큼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하동바위.
<하동 바위>는 장터목 거쳐 천왕봉 오르는 들머리. 마천사람들이 물물교환하려고 장터목 오르던 옛길. 옛날에 하동 군수가 떨어져 죽었다 하여...<하동바위> 그만큼 주변경치에 넋 잃고 실족할 정도로 조망 좋은 곳.
<하동바위> 이름에는 또 다른 유래가 전해 내려온다. 예전에 1년에 한번 큰 장이 열렸던 장터목(해발 1750m) 남쪽 사람들은 덕산-중산리-장터목 또는 화개-세석-장터목 북쪽사람들은 마천-백무동-하동바위-장터목 길을 이용했다.
장터목 장날에 북쪽 사람들이 가던 길목에 서있는.. '하동바위' 행정구역상 함양군인데도 바위 이름이 산 너머 하동군의 지명.
백무동 마을에서 한신계곡으로 가는 길목 초입에서 왼쪽 2Km 거리. 함양 원님과 하동 원님이 우연히 이곳에서 만나 장기 한판을 두었다. 산상의 내기 장기는 차, 포 양수겹장을 부른 하동 원님이 이겨 끝났다.
내기 장기에 진 함양 원님은 농담 삼아 이곳 바위를 가져 가라고 했고 하동원님은 고맙다며 그 자리에서 이 바위를 하동바위라고 이름 붙였다. 하여, 함양에 있으면서도..그 산 너머 하동바위가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
지리산 주능선의 동쪽 끝에는 산청 지리산 주능선의 서쪽 끝에는 구례.
산청 동쪽에 합천이 있고 북쪽에 함양. 산청 남쪽으로 사천이 있고 통영이 있다.
구례 서쪽에 화순이 있고, 북쪽은 남원 구례 남쪽에 순천. 광양, 여수가 나란히. 지리산 남쪽 광양과 진주 그 사이에 하동
지리산 주능선에 가로막힌.. 함양과 하동.
하동바위는 함양과 하동의 밀접한 관계를 대변. 가락국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역사적으로 친밀. 함양, 산청, 진주, 사천, 하동은 동일 생활권역.
수천년 전 옛 모습이 아직도 남아있는듯한 섬진강. 섬진강 변 하동 포구는 한반도 선진문명의 발상지. 하동 포구는 중국과 왜를 잇는 옛 해상 무역의 길목.
동아시아 선진문명이 한반도로 유입된..하동 포구. 가야국은 하동포구를 장악하며 급성장하게 되었고 백제에 하동포구를 빼앗긴 후 쇠퇴의 길을 걷는다.
삼국시대 하동 포구는 동아시아 국제무역 요충지.
참샘.(맑은 물).
하동바위를 지나 몇 백미터만 더 올라 가면 참샘이 있다.
“참” 이란 진짜, 먹을 수 있다는 의미가 있는 접두사이다.
백무동에서 장터목 방향으로 2.4km 오르면, 나오는 샘
백무동에서 장터목 가면 이곳에서 반드시 물을 채워야 한다.
참샘을 지나치면, 장터목까지 식수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샘 지나 약 3시간 더 산행을 하면 장터목 대피소가 나온다.
백무동에서 2km 오르면 계곡 철다리 앞., 하동바위.
천왕봉 일출 코스 = 백무동-장터목-천왕봉-중산리
<천왕봉 일출> 산행 들머리는 함양군 마천면 백무동. 국립공원은 일출 2시간전, 일몰 2시간 전까지 입산 가능
장터목은 옛부터 닷새에 한번씩 물물교환을 위한 장터.
옛날 산청 시천 주민들과 함양 마천주민들이 만나는 곳.
하여, 장터목은 옛부터 반드시 1박을 해야하는 장소였다.
1971년 지리산에서 처음 이곳에 세워진., ‘지리산산장’
1986년에 재 건축하여 ‘장터목산장’이라 개명하였으며
지금의 대피소는 1997년에 다시 건축하여 150명을 수용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 1시간 걸려 일출 감상에 안성맞춤.
백무동.
백무동은 상백무 중백무 하백무 세 마을이 들어선 계곡. 백무(百巫)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백무동은 무당골이다.
어떤 사람은 백무(百霧)로 받아들여 안개골이라 하고 행정 지명은 무사 무(武)를 써 百武, 무사골이라 한다. 백무동은 어떻게 불리우든 받아들이든지 다 일리가 있다.
백무에 이르는 길가에 즐비한 굿당들. 굿당에서 버려지는 돼지머리 같은 제물 제수로 하천이 오염될 만큼 백무동은 당골.
백무에서 세석으로 오르기 전날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도정마을.
하천이 쉬엄 쉬엄 흐르기에 휴천, 말처럼 하천이 재빨리 흘러 마천 휴천에서 마천으로 흐르면서 급류.
그 급류 용틀임 위에 피어오르는 백무. 짙은 안개를 뜻하기도 하는., 백무(百霧)
백무동은 유민(流民)들의 피난처이다. 곰실로 불리기도 하는 인근 웅곡마을, 감나무골로 불리는 시곡마을이 그렇다.
'임진왜란 유민들의 정착 마을들.'
'百巫면 어떻고 百霧면 어떠하리 百武면 어떻고 당골인들 어떠하리.'
.......................................................................... 천왕봉까지 최단거리로 올라갈 수 있는 들머리 깃점. 천왕봉에서 최단시간 하산길로 가장 각광 받는 백무동. ..............................................................................
경남 함양군 마천면 강청리는 상백무, 중백무, 하백무 도촌, 송알, 강청 등등 여러 마을을 합친 행정 명칭이다. 강청리란 명칭은 몰라도 백무동은 대부분 사람들이 안다.
북쪽 지리산 관문, 60년대 인월, 70년대 가흥리, 요즘 백무동. 동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백무동 직행버스를 타면 편하다. 2004.6.18 순환도로 개통 후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이 늘고 있다.
백무동은 교통이 불편하던 옛날에도 많은 기도객들이 붐비는 곳 전국 무당들이 '천왕성모'를 떠받들고 있는 전설의 고향..'百巫洞' 百巫洞은 지리산의 천왕성모가 모계사회의 중심세력 임을 상징한다.
'100 무당이 배출되었다는 뜻의 지명이.. 백무동.'
<1790년 '이동향' 방장유록>을 보면 백무당이라 했다. 이조시대에는 지명이 백무당이었고 무당이 많았던 고장. <지리산 이야기 - 열 다섯.> 4월 18일 본문을 참조 바람.
전세계 7만기 고인돌 중 3만기가 한반도에 밀집되어 있는 수수께끼. 한반도에서도 지리산 천왕봉을 중심으로 밀집되어 있는 고인돌 군락. 백무동(百巫洞)이란 지명은 고인돌 군락과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우리나라 어머니의 모성애는 세계 제일이다. 우리나라 여성은 세계 각 전문 분야에서 두각. 신석기시대 모계사회에서 비롯된 저력이 아닐까?
또 다른 이름으로는 '안개가 많은 마을'이란 의미로 ' 백무(白霧)동 ' 백무동(白武洞)이란 주장도 있지만 '전설의 고향' '百巫洞'이 압도적.
옛부터 백무동은 하동군(김해일대)과 밀접한 생활권역. '천왕성모의 전설'은 그 사실을 더욱 실감나게 뒷밭침.
.......................천왕성모의 전설........................ '천왕봉의 전설' 천왕성모는 백무동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는 백무동에 살면서 그 고장 사람들을 돌봐 주었고, 그 고장사람들은 늘 천왕성모를 하늘처럼 우러러 모셨다. 그 무렵 한 스님이 수도를 하기 위해 지리산에 입산하였다. 그 스님은 깊은 동굴 속에서 좌선과 수도를 몇 년간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동굴을 나와 산길을 걷다가 길을 잃었다. 스님은 바위에 털석 주저앉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을 하다가 사람들 소원을 잘 들어주는 천왕성모에게 길을 찾아 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스님 앞에 나타난 복사꽃 뺨에 반달 눈썹의 처녀. 앵두같은 입술로 말을 걸어온 처녀와 놀란 스님과의 대화.
"어떻게 하다 길을 잃으셨어요? 나를 따라 오십시요." "누구십니까?"
"천왕입니다." "...???........."
이제까지 천왕성모를 주름투성이 할머니로 알았던 스님. 막상 어여쁜 처녀가 천왕성모라기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스님을 동굴까지 인도한 처녀 천왕성모는 스님에게 말했다.
"여기가 스님이 거주하는 곳이 맞지요. 저는 여기서 멀지 않은 백무동에 살아요."
그 처녀가 돌아간 후부터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잃었던 스님. 오직 그 처녀 만 보고 싶었고, 천왕성모와 결혼 하는 것이 소원. 하여 스님은 천왕성모에게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스님의 간절한 청혼을 받은 천왕성모는 스님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 후 스님과 천왕성모는 백무동에 함께 살며 딸만 여덟을 낳았다. 8 딸은 모두 무당이 되어 조선팔도로 보내졌고, 각각 터전을 잡았다.
그 중 셋째 딸은 벽소령 넘어 청학동 삼신봉 거쳐 하동에 정착. 그후부터 지금까지 하동에선 함양 마천 백무동까지 가지 않는다.
하동에서는 셋째 딸 무당을 찾아갔기에 무당이 하나 둘 늘어 그후 무려 백 여명. .........................................................
................천왕성모 전설에 관한 해설................... 우리나라가 8도 강산으로 불리우는 유래가 된 전설. '천왕성모의 전설'은 지리산 전설의 핵심적인 골격. 단군신화와는 다른 한반도 민족 지도자에 관한 전설.
이 전설을 보면 우리나라 부족국가의 출발점은 백무동. 전설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전설. 한반도 불교 전파 경로는 곧 한반도 일부 민족이동을 의미.
단군신화는 한반도 민족의 이동경로를 북에서 남으로 본다. 천왕성모의 전설은 우리 민족의 이동경로를 남에서 북으로 아울러, 한반도 민족이 모계사회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한반도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구석기시대 유적지.'
특히, 지리산 일대의 고인돌 분포 현황은 전세계에서 1 위. 전세계 고인돌 7만기 중에서 한반도의 고인돌은 3만 기이다. 그러므로, 단군신화와 상반되는 '천왕성모의 전설'이 흥미롭다.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월마천 산자락의 백무동. 산마을 백무동은 항상 백 사람의 무당이 있다 하여 백무. 백무동은 천왕성모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는 전설의 고향. .............................................................................
천왕성모의 전설 속 무당은 오늘날 무당과 신분이 다르다. 무당의 어원을 이루는 무(巫)는 '샤먼(巫)'.. 제사장이란 뜻. 알타이어 계통의 몽골어·만주어 샤먼((巫)에서 비롯된 말이다. 모계사회에서 토템신앙과 정치를 함께 이끄는 지배자란 뜻이다.
하동에 백여명의 무당은 곧 하나의 국가를 의미.
역사상 하동 일대 고대국가는 가락국 연맹의 소국들. 가락국 이전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삼한시대의 변한. 신라는 가락국과 평화합병 후 여세를 몰아 삼국을 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