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한국불교종단연합회회장 성철스님
일체의 행주좌와에 무심하고 운수의 여로를 멈추지 않은,
본지 풍광이 성철스님
임운자재한 심여본석의 무고구행한 도인
평상심을 일깨우는 '마석근' 화두 삶 자체
마삼근(麻三斤) 조사관을 투과한 기봉은 봄날이 되니 연못가에 풀이 푸르게
돋아난다. 운수의 여로를 멈추지 않은 채 적정의 공간에서 수연방광하는 성
철스님의 삶은 우리 사문들 모두가 그처럼 선망해 마지 않는 '날마다가 좋은
날'이다. 젊은 날 천안 성거산 보명사에서 임운자연하며 타좌하던 성철스님
을 아련히 떠올려보고자 하는 필자의 생각이 행여나 성철스님의 인격에 덧
칠이 되지 않을까 두렵기만 하다.
성철스님의 살림살이는 한마디로 6조 조계혜능의 남종선을 사자 상승한 조
계지취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통일된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보면 삶과 죽음
이 동일하다는 명암일여관(明暗一如觀)으로 이분법적인 분별심만 여의고 자
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도인의 삶이 아니겠는가.
운수의 여로를 헤맬 필요는 없다. 진정한 불성의 실현과 성불은 피안을 향한
해탈이 아니라 차안에서의 훌륭한 인격적인 삶이다. 모든 불도는 지금[此時]
여기서 당하의 인격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필자는 감히 성철스님의 본지풍광을 한마디로 '깨달음의 사회화'라고 압축하
고 싶다. 성철스님의 인격은 밝은 거울처럼 한인이 오면 한인을,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를 나타내 보여주면서 만경에 물들지 않는 청정성으로 일관해왔
다.
모든 살림살이는 언제는 풀들을 쓰러뜨리되 요란하게 흔들어 대지 않는 청
풍처럼 온 대지와 우주 공간을 꽉 채우되 요란스럽게 비치지 않는 밝은 달
빚처럼, 정중동이고 무위이무불위다.
이러한 행장은 종단의 종정을 역임에서 월인천강의 빛을 발했다. 성철스님의
종정 소임은 언제나 종단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수습과 개혁의 소명을
다해야 하는 가시밭길 여정이었다. 그럴 때마다 난국을 무리없이 수습하는
구원 투수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모든 중생의 성불 가능성을 전제한 불성이라는 인간의 무의식에는 억압된
충동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온갖 행위를 유발하는 원초적이며 보편적인 원천
이 들어 있다. 불성이란 바로 무의식이며 우리가 평상의 일상 속에서 늘 부
딪치는 평범한 인간성에 다름 아니다. 천진한 인간성의 소유자가 바로 무위
진인 (無位眞人)이다.
성철스님의 수행 가풍은 이 같은 '진인'의 경계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 천진무
구한 어린이들을 그처럼 좋아하며 어린이 포교에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은
우리를 거듭 감동케 한다. 성철스님이 회주로 있는 옛적 보명사는 어린이들
의 천신성이 맑은 호수처럼 가득한 도량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어
린이들의 천진성을 새삼 아끼는 진인의 법력은 급기야 노인들의 천진성을
보듬는 성철스님이 최근 금봉사 대장불사 회향은 불사로 승화돼 꽃을 피우
고 있다. 속담에도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어린이와
노인은 천진성과 청정성의 상징이다. 본래부터 청정하고 구족한 인간의 불성
을 호지하려는 간절한 원력이리라.
한때 보명사 바위 밑에서 인간의 천진성을 등에 지고 임운등등한 삶을 사는
성철스님의 오늘은 자성(自性)의 보임이며 한평생 들고 있는 화두 마삼근(
麻三斤)의 참구다. 운문종 동산수초 선사의 '마삼근'은 일상생활 속에 나타나
있는 평등[마]과 차별[서근]을 드러내 보여 차별과 평등을 회통하는 절대평등
의 우주 진리안에 살면서 제각기 다른 개성적인 개체들을 수용하는 평상심
을 일깨운 유명한 격외의 공안이다. 마삼근은 성철스님의 삶 그 자체다. 납
자들이 드는 화두는 원래가 납자들의 삶 그 자체다.
성철스님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가지 돌 한 덩이의 생명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생명 친화로 무정물에까지 도덕적 이해의 지평을 넓힌 무정설법의 도
리를 행(行), 주(住), 좌(坐) 와(臥)의 시공에서 여법히 체현해 왔다.
선은 생명의 가치에 대한 인식과 긍정이다. 생명의 가치 인식은 곧 보리의
파악이고, 생명의 가치 긍정은 곧 지혜의 획득이다. 우리 불자들이 그처럼
소중히 여기는 '깨달음'의 구체적 내용도 이 같은 보리의 파악이며 지혜의
획득이다. 성철스님은 조사선의 이러한 실천구조에서 볼 때 '깨달음의 사회
화는 후학들의 고경이 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하겠다.
성철스님의 본한자재한 삶은 채소밭의 채소가 날이 가물어 시들면 물을 길
어다 밭고랑이 축축하도록 뿌려주는 것이다. 장좌불와의 두타행이나 팔만사
천 법문을 달달 외우는 송경에 함몰되는 법박을 단연코 거부한다. 가뭄으로
말라 죽어가는 채소에 물을 길어다 뿌려주어 살리는 일상적인 일은 대승불
교가 그처럼 중시하는 불상생의 계율을 실천하는 불법의 육화(肉化)요, 행동
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평범 속에서 비범을 보이는 것이 선의 진정한 불도 실현이다. 진리는
바로 발바닥 밑의 흙 속에 묻혀 있다. 혜산스님의 투철한 생명 가치 인식과
대긍정은 일생을 통해 한 번도 굴절되거나 흐트러짐이 없었던 화두다.
성철스님의 본래 면목은 선(善)자다. 설니홍조(雪泥鴻爪)와도 같은 허망한 '상
'을 붙들고 노사의 면목을 논하고자 함은 아니로되 성철스님의 태화사 시절인
연을 소중히 생각해 잠시 행장을 엿본 것뿐이다. 선 자로서 뿐만 아니라 종교
세계신문사회장 사)한국불교종단연합회회장, 사)대한불교종단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사찰의 행장에서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이사(理事) 겸비의 면모를 보
여주었다. 보명사관음불교대학(2000년)을 맡아 종단의 교육사업에도 헌신했
다.
원래 선에서의 화살은 미리 정해진 과녁을 맞추는 게 아니라 화살이 꽃히는
곳이 바로 과녁이 된다. 선은 이처럼 주체적이며 다양한 개성을 존중한다.
또 선의원은 본래 둘레가 없다. 선의 원은 둘레를 갖는 원처럼 중심이 하나
밖에 없는 게 아니라 어디고 점만 찍으면 그 점이 바로 그 원의 중심이 된
다. 따라서 선에서의 원은 무수한 중심을 갖는다. 성철스님은 이러한 선의화
살로써 선의 원으로서, 서있는 곳마다에서 주인이 되는 수처작주의 삶을 살
아왔다. 성철스님의 행장을 엿본 것도 바로 이러한 평전(評傳)을 써 보고자
함에서였다.
선의 매력은 한편으로 엄격한 자기 부정의 윤리성으로 지탱되지만 다른 한
편으론 탈속의 낙천성을 갖는 점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선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같은 선의 낙천성에서 세속의 절망을 달래줄 위안을 얻고자 하기 때
문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진정한 선의 낙천성이란 번뇌를
버려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번뇌를 보리가 되도록 살려서 쓰는 것이다.
성철스님의 삶을 존경해 마지않는 연유도 번뇌를 보리로 바꾸어 쓰는 성철
스님의 묘용(妙用) 때문이다. 질박하면서 어눌한 뜻한 위의(威儀)와 적은 말수
는 성철스님이 갖춘 전혀 모자람이 없는 선자로서의 본연자성이다. 이는 역
대 조사들이 보여준 선림의 가풍이며 초연한 인격이다.
성철스님은 “일체의 행주좌와에 무심하고 태평스럽게 임운자재한 것이 마치
어리석은 자와 같으면서도 마음은 단단한 돌과 같이 하라."고 했다. 성철스님
은 일체의 분별심을 떠나 심여본석의 '무심도인'으로 생애를 일관해 왔다. 성
철스님의 무소구행과 한도인의 삶은 오늘의 우리 사문들 모두가 부끄러운
마음으로 우러러 보아야 할 '불교 인격'이 아닐까 싶다.
<인천=윤기순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