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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 천재, 열혈 애국청년
♣ 협성회 회보와 고목가
이승만의 평생에는 '최초'라는 칭호가 따라다녔다. 그만큼 앞서갔던 선구자였다는 증거이다. 오늘날에는 정치인으로서만 알려져 있지만, 사회인 이승만의 첫 발자취는 언론계에 남아있다.
1898년 1월, 주간지 <협성회회보>가 탄생했다. 그것은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신문이었다. 이승만은 주필로 활약하며 필봉(筆鋒)을 휘둘렀다. 그의 개혁적인 정치의식은 탁월한 문장력으로 발휘되었다. 한편에서는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그의 비판적인 논조를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승만 자신의 목소리를 인용한다.
"나는 그 지면을 통해서 자유와 평등이라는 위험한 사상을 힘을 다해서 역설했다. ...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나 다른 사람들은 내가 급진적인 행동을 계속하다가는 목이 잘리게 될 것이라고 여러 번 충고해주었지만, 그 신문은 친러파 정부와 러시아 공사관의 위협으로 생겨난 여러 가지 고난과 위험을 겪으면서도 계속 발간되었다."
1898년 1월에 <협성회회보>의 발행 부수는 2천부였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실적이었다.
1898년 3월 9일자 <협성회회보>는 우리 문학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승만의 시 고목가(枯木歌)가 실린 것이다.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던 이승만이 평생 남긴 시는 한시(漢詩)가 대부분이다. 고목가는 그가 남긴 유일한 한글시이다.
이 시로 말미암아 이승만은 또 한번 '최초'의 지위를 획득한다. 조선 말엽의 개화 시기에, 전통적인 시가의 형태와 다른 새로운 시들이 탄생했는데, 이를 신체시(新體詩)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최남선의 작품이 <해조신문>에 실린 때가 1908년이고, 이승만의 '고목가'는 1898년에 <협성회회보>에 수록되었다. 따라서 한국 최초의 근대시, 신체시의 명예는 이승만의 '고목가'에게 돌려져야 한다.
한국 시인 협회장 김종해는 2004년 10월 24일자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898년 <협성회회보>에 '고목가'가 발표된 것으로 미루어 1898년부터를 한국 현대시의 기점으로 잡을 수 있다."
우리의 건국 대통령은 한국 근대시의 개척자였던 것이다.
'고목가'라는 제목을 우리말로 풀면 "늙고 병든 나무의 노래"이다. 젊은 애국자가 본 늙은 나라를 향한 감상이다. 고목가는 1898년 3월 9일자 <협성회회보>에 실렸다.
슬프다 저 나무 늙었네 /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섰네
심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급히 쳐 / 몇 백 년 큰 나무 오늘 위태
원수의 땃작새(딱따구리) 밑을 쪼네 / 미욱한 저 새야 쪼지 마라
쪼고 또 쪼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依支)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 뿌리만 굳박혀 반근(盤根)되면
새 가지 새 잎이 다시 영화(榮華) 봄 되면 / 강근(强根)이 자란 뒤 풍우 불외(不畏)
쏘아라, 저 포수 땃작새를 / 원수의 저 미물, 남을 쪼아
비바람을 도와 위망(危亡)을 재촉하여 / 넘어지게 하니 어찌할꼬
늙고 병들고 부러지고 썩은 나무는 망신창이가 되어갔던 대한제국을 가리킨다. 그렇지 않아도 쓰러져가는 나무를 쪼아대는 못된 딱따구리는 당시의 집권층이었던 친러파 수구 관료들을 지목한다. 고목을 흔들어대는 비바람은 나라를 위협하는 외세, 특히 러시아를 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목가는 위태로운 현실을 묘사한다. 쓰러져가는 나무같은 대한제국을 못된 딱따구리같은 친러파 관료들이 쏘아대고, 러시아는 바람처럼 나무를 흔들어댄다. 나무를 지키려면 먼저 딱따구리부터 쏘아야한다.
딱따구리를 쏘는 포수는 수구 세력과 대결하는 독립협회나 협성회의 개화파들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고목가"는 러시아의 앞잡이들을 제거하고 대한제국을 수호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고목가를 지은 시심(詩心)은 피끓는 젊음의 애국심이었던 것이다.
시는 시인의 일생을 반영한다. 고목가 한 편에 이승만이 걸어온 길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의 소재는 중국 고전시에서 얻은 것으로 보인다. <시경(詩經)>을 깊이 연구한 이승만은 <시경>에서 새를 비유 대상으로 삼아 시인의 처지와 시대의 상황을 노래한 많은 시들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또 고목가의 율조와 형식은 언더우드(Underwood) 선교사가 1894년에 펴낸 최초의 본격적인 찬송가집 <찬양가> 초판에 나오는 노래를 모방한 것이다. 따라서 고목가는 도동 서당에서 한시를 깊이 공부한 다음 배재학당에서 영어와 찬송가를 배운 이승만이, 동양의 소재와 서양의 형식을 절충하는 한편, 자신의 시작(詩作) 능력 및 한글 전용 의지를 가미하여 지은 시였다.
♣ 일간지 시대를 연 특종기자
<협성회회보>도 배재학당과 아펜젤러 학장에게 부담을 주었다. 날카로운 논설이 정부를 자극하여 선교사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아펜젤러는 신문의 내용을 부드럽게 할 것을 당부했지만, 열혈 청년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협성회회보>는 협성회와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협성회가 배재학당의 울타리를 벗어나 독립협회로 성장한 것처럼, <협성회회보>는 <매일신문>으로 발전했다. 여기에서 또 한번 '최초'가 등장한다. 1898년 4월 9일에 창간된 <매일신문>은 한국 최초의 일간지였다. 주간지가 일간지로 성장해나간 것은 그만큼 반응이 좋았다는 뜻이다. 매일 신문을 발간해도 된다고 판단할 정도로, 제작자들은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이승만은 <매일신문>의 사장 겸 주필이었다. 이로써 이승만은 '한국 최초의 일간 신문 편집자'가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에 일간지 시대를 여는 역사적인 역할을 했다. 이제는 사소해진 것이, 역사에서는 중요하게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요즘에야 날마다 신문이 배달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당시에는 역사에 기록될 만한 새로운 사건이었던 것이다.
신문은 시대의 거울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지식인 윤치호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몇 백 달러나 몇 병의 샴페인 혹은 맥주 몇 병만으로도 일본 사람, 혹은 러시아인, 아니 누구든지 한국 내에서 가질만한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해 이권을 살 수가 있다."
윤치오의 글은 약간 과장된 것이다. 하지만 그 시대의 부패는 심각했다. 정부는 백성들에게는 무자비하면서도 외세에 대해서는 무능력했다. 한반도의 각종 이권은 허술하게 외국으로 넘겨졌다. 우리 땅에 와있던 외국인들의 행패도 극심했다.
<매일신문>은 그와 같은 현실을 고발했다. 우리 언론의 역사에 대한 연구자로 손꼽히는 정진석은 "<매일신문>은 외세에 저항하는 한국 신문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매일신문>은 1898년 5월 16일자 1면에 러시아와 프랑스가 이권을 요구한 외교 문서를 폭로했다. 러시아는 목포와 진남포 조계지의 사방으로 10리를 차지하려고 했고 프랑스는 평양의 석탄광을 채굴하여 경의선 철도부설에 사용하려고 했음을 보도했다.
이 기사는 백성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즉각 독립협회가 들고 일어났다. 정부 측에 사실을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독립협회는 질의서에서 "본국의 땅은 선왕의 강토요, 인민의 생업하는 땅인데,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알아야겠다"고 항의했다.
<매일신문>의 보도와 독립협회의 항의로 여론이 들끓자, 러시아와 프랑스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정부 측에 외교 문서가 유출된 경위를 따지며 관련자의 처벌을 주장했다. 그네들 열강에게 <매일신문>은 매우 거슬리는 존재였다. 당시의 외국 공관은 정부 대신들보다도 신문을 더 꺼리게 되어 '군사 몇 만 명보다도 더 어렵게' 여길 정도였다.
<매일신문>은 혁혁한 발자취를 남겼으나, 경영상의 문제로 곧 발행을 중단했다. 이승만은 곧이어 1898년 8월 <제국신문>을 창간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1898년 한 해 동안 <협성회 회보>, <매일신문>, <제국신문>을 모두 창간하는 희한한 업적을 이루었다. 한 해 동안 무려 3개의 신문을 창간한 기록은 아마도 깨지지 않을 것이다.
<제국신문>은 조선을 합병한 일제가 모든 한국 신문을 폐지시켰던 1910년 8월까지 12년을 존속했다. 그 시기의 대표적인 신문으로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을 들 수 있다. <황성신문>은 주로 지식인 계층을 대상으로 하여 한자와 한글을 겸용했다. <제국신문>은 한문을 모르는 상민과 부녀자들을 위하여 한글 전용을 선택했다. 여기에서도 이승만의 대중적인 노선을 엿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두 신문의 편집인들이 모두 배재학당과 독립협회에서 서재필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라는 점이다. 개화파 지식인들에 대한 서재필의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불의한 시절, 정의파 언론인 이승만은 붓의 힘으로 싸웠다. 1898년 8월 30일자 <제국신문>에는 기자 이승만의 특종 기사가 실렸다. "대한사람 봉변한 사실"이다.
"일인(日人)이 수교에서 배를 사서 껍질을 벗길 새 옆에 앉은 대한 사람 하나가 침을 잘못 뱉다 일인의 옷에 떨어진지라. 일인이 ... 장동 사는 강흥 길을 집탈하여 가지고 배 벗기던 칼로 강가를 찔러 다행히 중초(中焦, 심장에서 배꼽 사이)는 상하지 아니하였으나 바른편 손을 찔러 유혈이 낭자한지라 ... "
침을 뱉었다고 칼로 찔렀으니, 우리나라에 와 있던 일본인들의 행패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승만이 비분강개(悲憤慷慨)한 것은 단순히 칼로 찔렀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한국인이 칼에 맞았지만 한국 순검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대조적으로 일본인 순사가 와서 오히려 피해자인 한국 사람을 자신들의 경찰서로 연행했다.
현장에 있던 군중들은 격분하여 일대 소동이 벌어졌고, "칼질한 놈을 우리가 보는 앞에서 처벌하라"고 요구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기자 이승만은 <제국신문>의 4페이지 가운데 2페이지 반을 할애하여 이 사건을 소상히 보도했다.
"그날 밤에 수백 명이 대한 경무처에 가서 들어가 억울하고 원통함을 하소연하려 한즉, 그곳 있는 순검들이 다 살아서 소리도 크게 질러 감히 가까이 오지 말라 하거늘, 백성들이 소리 지르기를 이날 백성이 이 나라 경무청에 와서 호소하려 하는 것을 어디로 가란 말이오 ... "
우리 백성이 우리 땅에서도 보호받을 수 없었다. 우리의 관리들조차도 칼을 휘두르는 외국인들 앞에서 꼼짝을 못했다. 나라는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다.
♣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투사
독립협회가 남긴 빛나는 발자취 중에 으뜸으로 손꼽히는 것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이다. 만민공동회는 시민, 독립협회원, 관료 등이 참여한 대중 집회이다. 당시 조선을 좌지우지하던 외세, 특히 러시아를 비판하고 자주 독립을 외치는 여론을 만들어냈다.
만민공동회의 중요성은 명단에서도 확인된다. 만민공동회에서 활약하던 독립협회 간부들의 명단에는 훗날 상해 임시 정부는 물론, 다양한 민족 운동의 선두에 섰던 인사들의 이름이 거의 포함되어 있다. 독립협회가 이 나라 독립 운동의 진원지 역할을 한 것이다.
1898년 3월 15일의 만민공동회는 한국 정부가 러시아에 이양했던 이권의 취소를 요구했다. 우리 내정에 간접하는 러시아 고문들을 파면하고 우리 경제를 침탈하는 한로은행을 해체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였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숫자인 만여 명의 군중 앞에 등장한 연설가는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탁월한 언변으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군중의 대표 자격으로 외무 장관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강력한 민심을 목격한 러시아는 독립협회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러시아 고문들은 철수시키고 한로은행을 폐쇄시켰다. 청년 이승만은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그러나 수구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고종 황제와 친러파 정권은 1898년 11월 4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체포했다.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고 했다는 역적 혐의였다. 독립협회의 3대 회장 윤치호와 회원들은 도피하여 잠복에 들어갔다.
하지만 행동파 이승만은 숨으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경무청 앞으로 달려갔다. 수천 명의 군중이 그를 따라갔다. 이 날 이승만은 또 한번 '최초'를 기록했으니, 최초의 서양식 연좌 농성이다.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경무청 앞에 집결한 군중들은 이승만의 지도에 따라 연좌 농성을 벌이며 구호를 외쳤다. "독립지사들을 전원석방 하라. 국왕이 약속한 개혁을 실천하라."
이승만을 아끼는 이들은 위험한 행동을 만류했다. 아버지까지 찾아와 그의 손을 붙잡고 글썽이며 말했다. "승만아, 너는 6대 독자라는 것을 기억해라." 그래도 이승만은 흔들리지 않았다.
군중 속에는 갖가지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국왕이 시위대 사살 명령을 내렸다느니, 고종이 이승만에게 고위직을 제의했고 뇌물까지 주었다느니 하는 뜬소문이 떠돌았다. 실제로 왕실 측근들이 찾아와 회유 공작을 펴기도 했다.
이승만은 날마다, 쉴 새 없이 연설을 계속했다. 밤이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시위대를 향하여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흩어지지 말라고 외쳤다. 여기에서 이승만을 대표하는 구호가 탄생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뒤, 기나긴 망명 생활에서 돌아온 칠순의 이승만이 해방된 조국을 향하여 제 일성(一聲)으로 외친 바로 그 말이었다.
집권층은 무력 진압을 시도했다. 추위와 배고픔과 졸음에 시달리는 시위대 앞에 군악대를 앞세운 군부대가 나타났다. 연설하던 이승만은 그대로 돌진했다. 군인들을 발로 차며 "돌아가라"고 외쳤다. 다음날의 신문은 이승만 앞에 '싸움패'라는 별명을 붙였다. 동양과 서양의 학문에 두루 정통했던 이 나라 최고의 지식인이 싸움패가 되어야 했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때 수구파 정부는 무력 사용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외국 사절들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5일간에 걸친 투쟁의 승리자는 이승만과 시위대였다. 고종은 구금된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석방했다. 이승만은 훗날 기록한 <청년 이승만 자서전>에서 이 장면을 자랑스럽게 회고했다.
"그 밤에야말로 나는 참으로 득의충천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위대한 승리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사기가 오른 이승만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고종 황제는 말 바꾸기의 명수였다. 개화파에게 여러 번 개혁을 약속했지만, 말 뿐이었다. 이승만은 고종이 독립협회에 약속한 개혁 방안인 헌의 6조의 실천을 요구했다. 이를 괘씸하겨 여긴 고종 황제와 수구파는 본때를 보여주기로 작정했다. 수구파가 동원한 물리력은, 유서 깊은 보부상들이었다.
보부상(褓負商)은 보따리에 물건을 싸서 들고 다니는 보상(褓商, 봇짐장수)과 등에 지고 다니는 부상(負商, 등짐장수)를 합한 말이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대수롭지 않은 행상 정도로 여겨진다. 하지만 도로와 운송 수단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대에, 그들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국가가 전국적인 조직망을 통해서 보부상들을 보호하는 한편, 국가적 과제에 동원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군량을 운송하는 중요한 업무에 보부상들이 동원되었다. 동학혁명 당시에도 관군으로 동원되어 혁명군과 싸우기도 했다.
대한제국 시기에 보부상은 황국협회(皇國協會)라는 조직으로 결성되어 있었다. 물건을 들고 혹은 지고 먼 거리를 이동해야했던 만큼, 보부상들은 강건한 사나이들이었다. 국가의 물리력으로 동원될 만큼 전투력이 뛰어나기도 했다.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의 시위 현장에 그들을 투입했다.
1898년 11월 21일 이승만이 왕궁 앞에서 연설하고 있을 때, 보부상들이 습격했다. 치고 박는 유혈극이 벌어졌다. 보부상들의 선두에는 두목 길영수가 있었다. 위급한 순간을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길영수가 인솔하는 보부상들이 서대문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집합 장소에 도달하자, 공동회에 모였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나는 길영수가 보부상들의 선두에 서서 따라오는 것을 보자 흥분하여 자제를 잃고 그에게 달려가서 발로 힘껏 차버렸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나를 두 팔로 꽉 껴안고는 '이승만 씨, 진정하고 빨리 달아나시오' 한다. 내가 뒤를 돌아보았더니 나는 적들의 가운데 혼자 있었다.
나는 보부상들이 밀려오는 쪽으로 걸어갔다. 시골에서 온 보부상 장사들은 나를 알지 못했거니와 내가 그들 속을 그렇게 걸어갈 것이라고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내가 만일 남들이 달아난 쪽으로 가려고 했다면 그들이 나를 알아 보았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 자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식할 새도 없었다. 이때도 '보이지 않는 그의 손'이 나를 인도해서 구원해준 것이 틀림없다."
길영수와의 격투에서 맞아죽지 않은 것을, 훗날 이승만은 하나님의 은혜로 기억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를 보호했다고 기록했다. 그에게도 보이지 않았으니, 다른 이들에게는 알려질 수도 없었다. 신문에는 이승만이 길영수에게 덤벼들었다가 맞아죽었다고 보도되었다.
시위를 앞장서서 이끌던 리더가 한바탕 유혈 폭풍이 지난 뒤에 보이지 않으니, 충분히 죽었다고 생각할 만했다. 동지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들이 통곡하는 가운데, 말짱한 모습으로 이승만이 나타났다. 너무나 놀란 동료들은 그가 얼마나 상했는지 알아보려고 몸을 만져보기도 했다.
거듭난 난투극은 죽음을 불렀다. 독립협회의 김덕구가 보부상에게 맞아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 또다시 수천의 군중이 운집했다. 군중의 규모에 놀라고 물리적인 진압으로 한계를 느낀 고종 황제는 사태를 무마하고자 했다.
황제는 독립협회장 윤치호와 황국협회 수령 길영수를 불러놓고 정부를 개혁하고 독립협회회원들을 함부로 체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고종은 이미 여러 번 약속을 어겨서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약속을 지킨다는 보증으로 외국의 사절들이 자리를 지켰다. 고종이 직접 증인으로 외국인들을 불렀다고 말했다. 황제 스스로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며 외국인들을 증인으로 세울 정도였으니, 나라의 체면과 황제의 체통이 말이 아닌 지경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의 도우심으로 살아났지만, 이십대의 유혈 충돌은 이승만의 내면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이승만은 보부상들의 험상궂은 얼굴과 그들이 지니고 다니던 길고 굵은 몽둥이를 오랫동안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