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국제음악제

통영의 바다는 연둣빛이다. 쪽빛 바다 위에 옅은 노란 색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그곳은 천지가 연두색이다. 잔잔하고 은은한 물결, 둥실둥실 떠다니는 고깃배, 덩그마니 서있는 기암절벽. 통영의 바다는 참으로 따뜻하다. 음악제 기간 내내 통영의 거리에는 음악이 떠돈다. 가로등에 달려 있는 투박한 스피커에서도 음악이 흐르고, 환하게 불을 밝힌 통영대교 위에도, 고지대에 우뚝 서서 위용을 자랑하는 통영 시민문화회관에서도 음악이 들려온다. 거리 구석구석을 휘감는 클래식과 재즈, 합창의 소리들. 미처 몰랐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통영 현대음악제가 처음 시작된 것은 2000년이었다. 국제음악제로 모습을 바꾼 것이 지난해부터였으니 불과 3년만에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셈이다. 오늘의 통영 국제음악제가 있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녹아들었다. 윤이상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통영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들이 함께 모여 오늘의 통영 국제음악제를 만들었다. 이들을 모이게 한 구심점이 작곡가 윤이상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통영 국제음악제는 작곡가 윤이상이 고향에 남기고 간 선물이다. 2003년 통영 국제음악제의 주제는 '꿈'이다. 이번 음악제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음악 도시로 비상하고자 하는 통영 사람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 통영 국제음악제는 진정한 국제음악제를 꿈꾼다. 그리고 그들의 꿈은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 같다.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을 위시해 앙상블 모데른, 오보이스트 하인츠 홀리거, 후고 볼프 현악 4중주단 등 그야 말로 세계적인 연주단체들이 통영 국제음악제를 위해 속속들이 한국을 찾기 때문이다. 음악제가 열리는 3월 25일부터 4월 2일까지 9일 동안 통영은 음악으로 가득하다. 클래식과 현대음악을 연주하는 20여 회의 공식 공연과 다양한 프린지 공연, 스페셜 공연이 펼쳐진다. 그 서막은 3월 24일에 열리는 전야제부터 시작된다. 오보이스트 하인츠 홀리거와 하피스트 우어줄라 홀리거, 이투리아가 현악 4중주단이 출연해 윤이상의 오보에 4중주, 하프 독주를 위한 '인 발란스', 첼로와 하프, 오보에를 위한 '공간 II' 등을 연주한다. 하인츠 홀리거는 윤이상과 오랜 친구 사이다. 그는 윤이상의 오보에 협주곡을 헌정 받아 세계 초연했으며 그 외에도 '디스탄첸' '루페' '동서의 단편' 등 다수의 윤이상 곡을 세상에 선보였다. 부인이자 하피스트인 우어줄라 홀리거 역시 윤이상의 하프 협주곡 '공후', 이중협주곡 '견우와 직녀', 독주곡 '균형을 위하여' 등을 세계 초연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이번 통영 국제음악제에서 하인츠 홀리거가 맡은 역할은 매우 크다. 그는 전야제에 이어 25일 개막 무대에 올라 앙상블 모데른과 통영 국제음악제를 위해 특별히 구성된 TMIF 앙상블을 지휘하고, 윤이상의 오보에 협주곡을 협연한다. 통영 무대 외에 3월 26일 금호아트홀과 27일 호암아트홀에서도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다. 현악 4중주단의 새로운 별, 후고 볼프 4중주단 3월 27일에 열리는 세종 솔로이스츠의 무대 역시 눈에 띈다. 이번 음악제를 통해 이들은 고전과 현대가 어우러지면서도 동시에 청중이 매료될 수 있는 곡들을 선보이겠다며 포부가 대단하다. 이에 따라 이들은 그리그의 '홀베르크 모음곡', 비발디의 이중 협주곡 같은 전통적인 곡과 더불어 펜데레츠키의 신포니에타, 고든 친의 '포모사 시즌' 같은 혁신적인 레퍼토리를 함께 선보일 계획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초량린과 양지인이 협연자로 출연해 비발디와 고든 친의 작품을 연주한다. 세종 솔로이스츠가 통영 국제음악제에 참가하는 것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강효다. '세종'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 세종 솔로이스츠를 창단한 그와 윤이상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통영 국제음악제는 어쩌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윤이상 선생을 생전에 꼭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기회가 없었어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윤이상 선생의 훌륭한 작품에 대해 존경을 표합니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세계 음악계에 영향을 미친 윤이상 선생이 무척 자랑스러워요. 그런 점에서 볼 때 한국에 통영 국제음악제 같은 국제 규모의 음악제가 있어서 너무나도 기대가 큽니다. 이런 무대에 세종 솔로이스츠가 설 수 있게 된 것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세종 솔로이스츠의 무대에 이어 28일과 29일에는 후고 볼프 현악 4중주단의 무대가 이어진다. 1993년 빈 국립음악대학 출신 연주자로 구성된 후고 볼프 현악 4중주단은 현재 국제적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신세대 현악 4중주단이다. "현악 4중주단의 새로운 별"(빈 데어 스탠다드), "모든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연주"(수드도이췌 자이퉁, Suddeutsche Zeitung) 등 이들에 대한 언론의 반응 역시 매우 호의적이다. 상복도 많아서 이탈리아 크레모나 국제 현악 4중주 콩쿠르, 잘츠부르크, 비오티, 메르쿠르 콩쿠르에서 우승했으며 1999년에는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실내악단에게 주어지는 '유럽 실내악상'을 수상했다. 하이든, 베토벤, 드보르자크 같은 고전을 비롯해 리게티, 즈비그니예프 바르기엘스키(Zbigniew Bargielski), 프리드리히 체르하(Friedrich Cerha) 같은 현대 작곡가의 레퍼토리까지 두루두루 능통한 실력파 현악 4중주단. 이들은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위스, 한국 출신의 음악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제1바이올린을 맡고 있는 박제희는 작곡가 박준상의 아들이다. 그가 이번 통영 국제음악제에 참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다. 작곡가 윤이상과의 인연 역시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불행히도 윤이상 선생을 잘 알지는 못해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와 매우 친했죠. 아버지는 백남준, 윤이상과 함께 한국 최초로 국제 현대음악 비엔날레를 개최했으니까요. 통영 무대에서 우리는 나의 아버지, 즉 박준상의 현악 4중주곡을 연주할 겁니다. 내가 직접 작곡을 부탁해서 탄생한 그의 첫 번째 현악 4중주곡이죠. 전체적인 분위기는 브람스와 비슷해요. 아버지의 작품 외에도 베르크, 볼프, 윤이상, 하이든 등의 레퍼토리를 연주할 겁니다." 후고 볼프 현악 4중주단은 올해로 꼭 창단 10주년을 맞는다. 지난 10년간 이들이 선 무대는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런던의 위그모어홀, 뉴욕의 카네기홀, 빈 무지크페라인 등 셀 수 없이 많다. 특히 암스테르담과 뉴욕에서 받았던 기립 박수는 아직도 그의 머리 속에 생생하다. 이들은 이번 통영에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무대를 갖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음악은 감동을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우리는 현악 4중주를 통해 좀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음악의 가장 높은 단계는 현악 4중주 같아요. 괴테가 이런 말을 했다죠. '현악 4중주는 4명의 깊이 있는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한국 청중이 우리가 나누는 음악적 대화를 듣고 함께 교감했으면 좋겠습니다." 러시아 교회음악의 정수, 상트 페테르부르크 카펠라 굵직굵직한 실내악단의 진중한 무대에 비해 29일 저녁 통영 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열리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카펠라 합창단의 콘서트는 한결 감상이 용이할 듯하다. 이들은 블라디미르 체르누센코의 지휘로 러시아 종교 음악과 민속 음악을 노래한다. 2003년 통영 국제음악제의 소주제는 '음악과 종교'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카펠라의 무대는 이번 음악제의 소주제에 가장 잘 어울린다. 29일에 이어서 30일 충무교회에서는 라흐마니노프의 '성 요한 크리소스톰을 위한 전례'(Liturgy)를, 4월 1일 서울 명동성당 대성당에서는 라흐마니노프의 '저녁 기도'(Vespers)도 선보일 예정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카펠라는 1479년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3세에 의해 황실 합창단으로 발족된 러시아의 대표적인 합창단이다. 자그마치 500년이 넘는 긴 세월동안 이들은 노래를 통해 러시아 사람들의 지친 영혼을 달래준 정신적 지주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카펠라는 1824년 베토벤의 '장엄미사'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세계 초연했으며 라흐마니노프의 러시아 정교음악의 초연 역시 이들의 몫이었다. 이외에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스비리도프 등 근대 러시아 작곡가들은 대부분 이들을 위해 합창음악을 남겼다. 그 동안 이들을 지휘했던 음악가는 글린카, 발라키레프, 림스키 코르사코프 등 러시아 최고의 거장뿐이다. 지휘자 므라빈스키 역시 합창이 포함된 곡을 연주할 때는 늘 상트 페테르부르크 카펠라를 선호했다. 그는 현재 합창단의 지휘를 맡고 있는 체르누센코와도 친분이 각별했다고 한다. 이외에 2003 통영 국제음악제를 장식할 음악가는 무수히 많다. 피아니스트 어수희, 비올리스트 김성은, 플루티스트 마르통 베그 (Marton Vegh), 윤이상 플루트 4중주단, 아르헤우스 앙상블, 창원시립교향악단, 국립오페라단 등 실로 화려하다. 이들이 모두 모여 한마음으로 만드는 2003 통영 국제음악제. 이를 통해 통영은 다시 한번 비상할 것이다. 올해 통영의 바다는 다시 한번 음악으로 넘실거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