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뉨ˍ 김광규
소형 임대 아파트 주민들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오고 가지 못하도록
주상복합 고층 아파트 입주자들이
통로를 막고
길에 철조망을 쳤다
그렇다
우리는 예부터 나누어진 겨레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다
촛불집회 때 서울광장에 나가서 엉뚱하게 세대차를 느꼈던 일이 있다. <님을 위한 행진곡> 정도면 되겠지 했는데, 그곳에서 가장 많이 불러지는 노래가 처음 듣는 노래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는 노래. 이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고, 그러니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너무나 당연한 그 노랫말이 왜 그리 눈물나게 하던지, 머리가 먹먹해지더니 나중에는 가슴까지 아파왔다. 무식해서 잘 몰라서 묻는 것인데, 모든 국민은 평등하고, 적어도 재산이 없다는 것으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구절은 헌법 어디쯤에 있나? 십여 년 전, 중국에서 교환교수로 온 분이 하는 말, 한국이 계급국가라는 걸 너무나 실감나게 느낀다고 했다. 난 그럴 리가! 라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자의 반 이상이 비정규직이고, 너무나 많은 자영업자들이 한계상황으로 몰리는 현상을 보면서, 현대의 계급이란 양반과 평민으로 나누어진 나라가 아니라, 양극화가 심해지고 하층민이 중산층으로 오를 기회가 막히고, 중산층 대열에서 한번 미끄러지면 다시 올라오기 힘든 사회를 이르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사물을 분석적으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종합·통합적으로, 그건 그럴싸하게 말장난한 것이고, 솔직히 말하면 감으로 때려잡게 된다. 내 감으론 이렇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무서워하는 사회가 되면 그 사회는 이미 위기에 처했다는 적신호라는 것이다. 무서워서 적대적이 되고, 그래서 자기들만의 블록을 더욱 공고하게 굳히게 되고, 가진 자들이 그러할진대 그런 차별을 당한 자들의 분노가 그 몇 배가 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시인은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 경제·사회학적으로 푸는 게 아니라 이 나라 국민이 극복하지 못한 마음의 문제로 보고 있는 듯하다. 민족 최대의 비극인 남북분단도 바로 이런 마음에서 생겼다는 것. 따지고 보면 인간세계 모든 비극의 궁극엔 인간의 어리석은 이기(利己)가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그 이기에서 벗어나는 게 궁극의 답이지만, 시인세계의 답이지만, 욕망으로 들끓고 있는 인간세계엔 답이 될 수가 없다. 분단이 우리의 마음의 문제였다면, 한국분단에 책임져야 할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열강들과, 열강의 힘에 기대어 자기 이익만을 추구했던 그 당시의 지배층들에게 너무나 쉽게 면죄부를 주고 만 것이다. 애당초 시란 무효용한 것이다. 그 무효용성 때문에 시를 읽는다. 무효용의 효용성이라고나 할까.
이제 무효용의 효용성으로 이 시를 다시 보자. 세계의 카톨릭 신자들이 2000년 전 유대의 지배층과 로마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자행된 예수의 죽음에 지금도 가슴을 치며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외치는 것은 그 죽임에 대해 법률적인 책임이 나에게 있어서가 아니라, 신앙 차원의 책임이듯, 오늘 우리는 조국분단에 그런 책임이 있다는 걸 자각하라는 것이다. 지금 네 마음속에 유대와 사랑이 아니라 나뉨과 차별이 있다면, 당신이 그 부자동네의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 하여도 당신이 바로 담을 친 사람이고, 또 38선에 철조망을 친 사람이라는 것.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걸 시인의 직관이라 한다.
김광규의 시선은 작고 약한 곳에 머문 것 같지만 역사 앞에선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지속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역사의식이 단연 돋보이는 시를 꺼내본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4·19 세대의 좌절과 절망을 노래하고 있는 걸 안다. 순수한 열정에 찬 젊은 날의 모습과 중년의 소시민으로 사는 현재의 모습이 대결 구도를 이루는데 혁명을 두려워하는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화자는 그 시절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음을 18년을 지나고서야 확인하게 된다. 흑백사진 속 추억같이 아련한 슬픔이 느껴졌다. 그때 시인의 나이가 대학생 쯤 되었으므로 화자가 시인 자신이고, 원체험으로 읽히면서 더욱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달려오는 군용 트럭에 깔려/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어린 게의 죽음)을 읽고 ‘군용차량’이란 시어로 인해 참혹했던 5·18 광주항쟁이 오버랩 되었다. 새끼줄에 묶여온 게들= 독재에 항거하는 민중, 구럭=군부세력, 어린 게=학생으로 도식화해 본다. 비록 군용차량에 깔려 죽지만 어린 게는 군부세력에 굴복하지 않고 구럭을 빠져나오지 않는가. 시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무도 보지 않는 어린 게의 시체를 찬란한 빛이라고 노래한다. 결국 약한 것이 강하다고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김광규는 시력 50년이 넘은 시인이다.『하루 또 하루』는 10번째 시집이다. 긴 시간에 걸쳐 그가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현실에 눈 감거나 매몰되지 않고, 똑바로 눈을 떠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오늘을 사는 자세와 지혜를 얻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아직도 젊다. 모두의 행복이다
『(시를사랑하는사람들』여름호
) 김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