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평소, 이런저런 시상식에 쫙 깔리는 레드카펫(red carpet)에 거부감이 있었다. 빨간 색은 전통적으로 '권위'를 상징하는 귀족색, 그래서 레드카펫은 유럽 왕실에 주로 깔렸다가 이제 오스카를 비롯한 대규모 시상식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상의 권위'를 보여준다는 이유 때문이다. 배우들의 '하차지점'에서 시작된 레드카펫은 계단자국까지 매끈하게 만들며 시상식장으로 이어져 올라간다. '레드카펫'에는 '아무나 밟을 수 없다'는 암묵이 숨어있고, 세상의 '평범'과 시상식장의 '특별함', 즉 계(界)을 구분짓는 힘이 있다. 고혹스럽게 차려입은 영화배우들은 레드카펫을 통해 이쪽에 눈 한번 찡긋해 주고는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늘 궁금했다. 흥행에 꽤나 성공한 영화의 배우나 제작자들이 결국 그 카펫을 밟게 되는데, 그 자격은 관객이 부여한 것 아닌가. 근데 뭘 그리 삐까뻔쩍하게 '지들만의 잔치'를 즐기려 하는지...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작품 속 '철수' '영희' 등의 배역에서 금세 스르륵 빠져나와 고급 액세서리와 핸드백(몇 년전인가 한 방송국 리포터는 그 핸드백을 뒤지기도 했댔다)을 들고 여기저기가 푹푹 파이고 찢긴 옷을 입고, 굽이 수십 cm나 되는 힐에 올라탄 그들은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며 사뿐사뿐 시상식으로 들어간다.
물론 더 웃긴 건 언론들이다. "여기 좀 봐주세요" "뒤로 돌아주세요" 난리가 나고, 다음 날 언론에는 '보일락말락' 한다느니 누가 베스트니 누가 워스트니 헤어스타일이 어땠느니, 채점 매기고, 허리가 어쩌고 뒷태가 어쩌고 쇄골이 어쩌고...이 여자배우의 목걸이는 얼마고 저 여자배우의 귀걸이는 얼마고 그 여자배우의 드레스는 예전에 누가 입었던 거고...호들갑을 떤다.
블랙홀이다. 레드카펫을 '섹시하게' 달군 배우들의 '몸'과 '옷'이 인터넷을 누빈다. 그리고는 '누가 무슨무슨 상을 받았더라'는 보도가 좀 붙고는 끝이다. 팬들이 감명깊었던 영화 되감아보고, 작품 속 배우들 다시 불러낼 만한 판이 도무지 깔리기가 힘들다. 다 잡아먹는다.
이렇게 관객, 시민들과 거리 두는 작업에 우리는 너무나 충실하다. 그 많은 시상식, 하나로 모으고, 레드 카펫 돌돌 말아 치우고, 그냥 한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작품 속에서 입었던 옷 그대로 걸치고 나와 마니아, 팬클럽하고 악수하고 사진찍고 작품 얘기하고 그럴 수는 없는 걸까. "난 늘 관객 옆에 있다"는 효과낼 그런 궁리는 안 하는 걸까. 정말 지겹다. 레드카펫 위에서의 쇄골, 뒷태...
아무튼 각설하고(아..서론이 너무 길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이제부터다. 드디어 아나운서들까지 이 레드카펫(red carpet)의 '향연'에 동참들 하셨단 거다. 지난 15일 열린 아나운서 대상 시상식. 협회 차원에서 '분위기 파악'에 나선건지, 포털에서 알아 판단한 건지 모르겠지만 암튼 비중있게 보도되진 않은 것 같다. (참 다행이다.)
난 이 시상식에 -지금 이 시기, 평소에는 절대 입고 다닐 수 없는-온갖 치장(물론 일부 언론에서는 소박하다고 보도했던데...진짜 대박 보도다. '소박'이 뭔지 모르나?)을 하고 나타난 일부 아나운서들 보고 경악했다. 오버하자면, 스스로들 참 애매해 하던, 그리고 누가 봐도 참 애매한 대한민국 아나운서의 현주소와 위상을 스스로 명쾌하게 정리한 것이라고나 할까. '저쪽'으로의 '편입'이다.
KBS, MBC, SBS 등의 아나운서들이 차례차례 MBC D 공개홀까지 깔린 레드카펫을 밟고 왔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졌다. 그들은 마치 영화배우가 된 양 손을 흔들고 웃었다. '포토월'에 서서 한껏 포즈 잡아주고 일부 아나운서들은 뒤로 살포시 돌아주는 센스까지 발휘했다. 둘씩 셋씩 입장하는 것도 어디서 많이 보던 거다.
하긴 한국에서 (얼굴 잘난, 특히 여) '아나운서'는 언제나 잘 '팔리는' 연예 기사 소재이긴 하다. 연애해도, 결혼해도, 임신해도, 회사를 그만둬도 언론에 난다. 재벌이랑 연애하고 결혼하고 회사 그만두고 임신하면 아주 난리가 난다. 그런 아나운서들이 집단으로 레드카펫까지 깔고 '모여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언론에 사진으로 도배된다. 각선미 있는 다리를 보란다. '하얀 드레스의 천사'를 보란다. '여신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단다. 한낱 인간에 불과했던 아나운서들이 천사가 되고 여신이 됐다. 모 아나운서는 '아나운서로서 기품을 잃지 않고 우아한 자태를 드러내' best 란다. 반면 모 아나운서는 '의상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엑세서리까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산만한 분위기를 연출해' worst란다. '어깨가 시원하죠?' '미니 원피스로 더 귀엽게...' 사진이 말을 다 한다.
행사 전날인가? 기자간담회에서 강재형 한국아나운서협회장은 "시청자들에게 아나운서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레드카펫 행사를 하기로 결정했다"며 "아나운서다운 드레스 코드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했단다. (차분하기로 유명한, '우리말 바루기'의 뚝심을 지켜온 강재형 회장이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도 의문이다)
그래 "또 다른 모습?" "아나운서다운 드레스 코드?" 먹혔나? 안 먹혔다.
일단 대상 받은 성기영 아나운서가 뒤로 밀렸다. 성기영 아나운서의 현장 사진 몇 장 건지기 어렵다. 대부분의 언론이 성 아나운서의 수상소식은 단신으로 전하며 자료사진을 썼다. 아나운서 중에 턱하니 자기 이름 건 경제 프로그램 진행해 여러 사람에게 귀감이 되었던, 그래서 충분히 대상 자격 있는 성 아나운서는 정작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대신 레드카펫을 밟고 들어오던 젊고 '잘생긴' 아나운서들이 이날의 주인공이었다. 스스로를 상품화한 아나운서와 상업 언론의 필연적인 결합이었다.
또 있다. 지상파 3사 젊은 아나운서들에게만 초점이 맞춰졌다. 이들만 아나운선가? 극동방송, 교통방송, 지역 방송 등 다른 아나운서들은 아예 다른 문으로 들어가 레드카펫을 밟지 않은 건지, 밟았는데 이 '나쁜' 언론들이 무시해 버린건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일부 이름있는 아나운서들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들은 얼마나 씁쓸하겠나? 충분히 예견 가능한 일이었다.
더 있다. (이번 시상식의 주제가 '시청자 여러분 고맙습니다'란 것은, 레드카펫과 워낙 잘 매치가 안되니 아예 논외로 치고), 2008 아나운서 대상은 국제비영리단체인 '굿네이버스'와 연계해 저소득층 어린이들을 돕는 모금행사를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역시 의미가 퇴색됐다. 이거 했다는 거 몇 명이나 알까.
행사는 그냥 평범하게 치루고 다음날 강재형 회장과 몇몇 아나운서들이 굿네이버스 사무실에 찾아가 "아나운서들이 조촐하게 모여 걷은 성금입니다" 내밀었다면? 그럼 얼마나 멋졌을까? 옷 빌린 값, 치장한 시간, 아나운서 이미지 제고 등을 두루 계산했을때 그게 여러모로 좋았다.
자 이제 묻자. 아나운서는 언론인인가 아닌가? 당연히 언론인이다. "엄습하고 있는 방송 위기"는 들이대지도 않겠다. 아나운서는 방송과 세상을 이어주는 기술자들이다. 그것을 잘 하면 된다. 그것만 잘하면 된다. 끊임없이 세상과 호흡하고 그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지들만의 리그' '나만의 쇼'를 펼쳐서 도대체 뭘 아나운싱하겠다는 건가. 더구나 아나운서 대상은 철저한 내부 행사다. 시청자들이나 국민이 참여하는 코너도 없는 행사다. 밖으로 시끌벅적 알릴 행사가 아니다. 더군다나 '이 죽을 맛의' 2008년 끝자락 아닌가.
연예인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아나운서들이 패널로 등장하는 시대가 됐다. 아나운서가 게임 벌칙으로 연예인에게 뽀뽀하는 시대다.
뿐인가. 너도나도 방송국 박차고 나와 프리랜서 선언을 하고는 신통치 않으면 다시 그 방송국 두드린다.(다행히 KBS는 3년동안 이걸 금지한단다) 그리고 이변이 없는한, 잠시 후회하는 듯 액션 취하고 다시 이 방송국 저 방송국 누빈다.
"허 참 뻔뻔하네"라고 생각할만한데 아나운서 사회는 조용하다. 2004년엔가 정지영 아나운서가 KBS 낭독의 발견인가에 투입된다고 할때 아나운서들이 대응했던 것 이외에 들어본 적이 없다. 남의 얘기가 아닐 수도 있어서인가? 언제 내가 그 위치에 갈 수 있을지 몰라라고 생각하는 아나운서들이 많다는 눈흘김이 적지 않다. 아나운서 시장의 뿌리가 튼튼하지 않다는 지적, 나이브하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난 지난 15일 레드카펫 밟았던 아나운서들 잘 지켜보려 한다. 한겨울에, 민소매, 미니 스커트 차림으로 '퍼'(쉽게 말해 '고급 털목도리')를 두르고 카메라 향해 웃음짓던 그 언론인들이 방송국으로 돌아가서 "경제 위기 한파에 서민들이 얼어죽고 있다" "연말 여기저기서 서민들의 한숨소리가 들린다...'는 뉴스는 과연 어떤 표정으로들 진행하는지.
그리고 또, 이들이 몇 년 안에 자기 이름 걸고 '적극적인 전달자'로서의 끼 발산하는지, '시키는 것'만 하다가 그냥 그런 수백 명의 아나운서 중에 한 명으로 지내고는 어느 순간 프리랜서 전문 연예인으로 나설지...잘 지켜보고 싶다.
아나운서연합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초기화면에 言(말씀 언)자가 크게 깜빡인다.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 테다. 맞다. 아나운서는 '말하는 사람'이다. '알려주는' 직업이다. 그것으로 실력을 입증하는 직업이다. 아나운서들의 그 '실력' 보고 싶다.
자, 레드 카펫 돌돌 말아 넣고, 다시는 펴지 말자. 그리고 이번에 대상 받은 저 성기영 선배 같은 사람 딱 '롤 모델' 삼아, 그녀처럼 '이름 새기는 아나운서'들 되자.
멀지 않은 곳에, 고작 연탄 석 장 안고 눈물 흘리는 서민들이 있는 2008년 대한민국, 더구나 많은 방송 노동자들이 머리띠 다시 꺼내들고 있는 여의도 한 복판에서 벌어진 '아나운서 레드카펫' 행렬은 참, 차~암 안타깝고 씁쓸한 일이다.
(하나더, 아나운서대상 포토월을 보니 'POSCO', '생각대로 T', 'allforyou' 등의 협찬사 로고가 박혀 있었다. 모르긴 해도 이들 기업 협찬 받아 이 행사 진행한 것 같은데,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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