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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고구려의 外戚과 지배 집단
3. 고구려 사회와 외척
자고로 역사를 살펴보면 외척들이 득세한 경우는 엄청나게 많았다. 인류가 생긴 이래 ‘혈연(血緣)’ 이라는 부분은 가장 중요한 친분 관계로 자리잡았으며 그로 인해 다른 조직에서는 볼 수 없는 조직력(組織力)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명문가(名門家)라는 것도 이런 혈연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대대로 고위 관직을 독점했다거나, 대대로 특정 세력을 형성했다거나,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했다거나 하는 여러 이유로 그들은 다른 지배 계층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었으며 더 영향력 있는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이런 현상은 상류층으로 올라갈수록 더 심화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렇게 혈연으로 연결된 조직에서는 한번 기득권(旣得權)을 획득하면 그만큼 유지하기가 쉬웠으며, 그 기득권을 더 확장시키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위 계급에 속하는 지배 계층일수록 혈연으로 이뤄진 조직 체계를 더 단단히 구축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조직체는 한 지역을 장악하기도 하고, 여러 지역을 장악하기도 했으며 한 나라를 장악할 수도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왕가(王家)다. 왕을 배출해내는 집안은 건국 시조때부터 내려온 조직체를 바탕으로 기득권을 장악하기도, 유지하기도, 확장시키기도 쉬웠다. 하지만 왕을 중심으로 그 일족들에 국한된 왕가가 지배하는 왕국(王國)은 정치 체제나 국가 경영면에서 한계가 있었다. 혈족을 중심으로 국가가 경영됐기 때문에 국가 시스템을 떠나 그 시스템을 사용하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1). 하지만 제국(帝國)은 달랐고, 또 달라야만 했다. 제국은 하나의 혈족을 중심으로 이뤄진 왕가에 의해 지배될 수 없다. 수많은 민족들을 정복하고 엄청난 영토를 지배함에 따라 최상류층이었던 왕족은 효율적인 국가 통치를 위해 조력자들을 얻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런 환경 속에서 왕실의 조력자들은 외척이라는 이름으로 무수히 많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등장한 외척들은 왕 혹은 왕의 가족들과 혈연적으로 2중, 3중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혼인을 통한 이 관계 속에서 외척들은 다른 지배 계층보다 훨씬 더 확고하게 왕실과 밀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때로는 왕의 장인으로, 왕의 사돈으로, 왕의 사위로, 왕의 할아버지로 다양한 관계로 이뤄진 외척들은 마치 거미줄처럼 왕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관계 속에서 왕실과 외척의 구분이 모호해지기도 했으며 외척은 자신의 지위에 안주하지 않고 왕실처럼 군림하려고 하기도 했으며 왕의 자리를 노리기까지 했다. 외척들은 왕실과 혈연 관계를 맺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외척들 중에서는 종종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정치권 전면에 등장해 국가 경영에 손을 뻗치기도 했다. 고구려 역시 국초에는 왕실이 졸본 세력과 혈연으로 연관되어 있었고, 졸본 세력이 고구려 곳곳에 투입해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지만 동명성왕때부터 꾸준히 실시된 정계 개혁으로 이들 외척은 세력 확장에 제재를 받기 시작한다.
그럼 어떻게 고구려에서는 국초부터 외척에 대한 강력한 제재가 이뤄질 수 있었으며 유리명태왕대에는 태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권력 집중 현상이 나타난 것일까? 이를 두고 주인장은 다음 몇 가지 가설을 생각해봤다. 일단, 고구려에는 외척과 정치 세력간의 철저한 분리가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즉, 외척이면서 왕실 집안 문제뿐 아니라 정치권까지 영향력을 뻗치는 것이 아니라 외척 중에서도 관직에 나가있는 사람만이 정치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상당히 모호한 개념인데 왕실의 외척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관직을 독점하고 그 권세를 믿고 전횡을 일삼는 현상이 역사상으로 비일비재했던 것에 비하면 고구려에서는 이 개념을 분명히 했었던 것 같다. 즉, 정치권에서 일어난 일을 가지고 왕실 내부적으로 연계(連繫)시키지 않았다는 소리가 될 것이다.
고구려사를 보면 흥미로운 반란 기사가 하나 등장하는데 고국천태왕 12년(190)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고국천태왕은 즉위 2년째 되는 해(180)에 제나부(提那部) 우소(于素)의 딸을 왕후로 맞이한다. 하지만 어비류와 좌가려 등이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정치 권력을 잡고, 그 자제들까지 권세를 믿고 교만하고 사치스러웠으며 백성들을 괴롭히자 고국천태왕이 그들을 죽이려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자 좌가려 등은 연나부에 속한 4개 부내부(部內部)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켰고 고국천태왕은 곧 그들을 진압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왕후의 친척들이 정치 권력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뭐가 흥미롭냐고 할 수도 있다. 왕실의 외척으로서 높은 관직에 있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여길 수도 있다.
그럼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자. 어비류(於畀留)는 중외대부(中畏大夫)라는 관직을 가지고 있었고 패자(沛者)라는 관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좌가려(左可慮)는 평자(評者)라는 관등에 있었던 인물이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이들은 일정한 관등과 함께, 관직에도 올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그의 자제들 역시 아비의 덕을 봐서 여러 관직에 올라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제 노릇을 다 하지 못 했다. 고국천태왕이 그들을 죽이려고까지 했다는 사실은 그들 일가(一家)가 관직에 머물러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전횡을 일삼았는지 알려준다 하겠다. 이후 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모두 진압당했는데, 이상하게 중국사에 흔히 보이는 삼족(三族)이나 구족(九族)을 멸하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2). 반역자는 최고 중죄(重罪)에 해당하며, 그 반역자의 가족은 씨를 말려버리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생각인데 당시에는 그런 기록이 전혀 보이질 않고 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럼 다음을 계속 살펴보자. 고국천태왕이 죽고 둘째 아우인 연우(延優)가 산상태왕을 등극하는데 있어 가장 큰 힘을 발휘한 것은 다름아닌 고국천태왕의 왕후였었던 우씨(于氏)였다. 그녀는 고국천태왕의 임종(臨終)을 지켜보고는 자신의 측근들을 이용해 그 사실을 은폐한 뒤에 산상태왕을 보위에 오르게 하고 재혼에 성공한다. 당시 산상태왕 즉위에 신하들의 반발이 없었다는 점, 첫째 아우였던 발기(發崎)가 군대를 동원해 왕도를 공격했는데 나라 사람들은 발기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왕후 우씨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 지엄한 태왕에게 반기를 들었던 자들의 일족(一族)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왕후는 무사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주인장은 두 가지로 본다.
첫 번째는 왕후라고 하는 특정 지위에 대한 고구려만의 독특한 제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일종의 특별면책권(特別免責權, Amnesty)이라고 해야 할까? 칭기즈칸 시절, 그는 자신이 특별히 총애하는 신하들에게 9번 죄를 물어 용서할 수 있는 면책권을 부여하는 등 최고의 대우를 했었다. 그처럼 고구려에서도 왕후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반역자 집안 출신인 왕후가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서, 더구나 다음 세대에서도 왕후로서의 권세를 누렸을 리가 없다. 주인장은 유리명태왕 당대에 정실이었던 송씨가 죽자, 그 자리를 비워뒀다는 점에서 정실 왕비에 대한 대우가 남달랐음을 확인했다. 특히 아들을 낳아 다음 세대에 태후(太后)로까지 지위가 격상되면 더 많은 예우를 받았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 제도가 어떤 형태를 띄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반역이라는 중죄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정도라면 상당히 확고하게 틀이 잡혀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는 왕비의 정치적인 입지를 제한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왕실 외부에서의 공격에 대해서도 거의 완벽하게 보호받을 수 있을 정도였던 것 같다.
두 번째는 고구려 시대에 내시(內侍)라고 하는 독특한 계층이 없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이익(李瀷)은 그의 저서인『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고구려 시대에는 내관(內官)이 없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흥미롭게 하고 있다. 그가 어떤 근거를 토대로 그런 기록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상당히 이채(異彩)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본시 환관(宦官)이라 함은 황제의 호위(護衛)는 물론, 각종 시중을 드는 최측근의 중요 관직이었다3). 하지만 황제가 거느리고 있는 무수히 많은 여인들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예방하려고 그들은 모두 거세(去勢)를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양성적(陽性的)인 면이 많이 감소되어 목소리나 몸 상태가 일반 남자와는 상당히 다르게 변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환관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환관 본래의 임무는 많이 변질되어 갔다. 그들은 단순히 황제의 호위와 시중만 드는 관직이 아니라 궁중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도하는 특수 계층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당연히 황제들이 거느리고 있던 수많은 여인들의 암투, 황태자 책봉, 내관 인사 관리 등등 황실 내부적인 문제부터 군사, 정치, 경제, 사회 곳곳에 손을 뻗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정치권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4). 심지어 이들 환관 집단에 의해 국정이 문란해지는 경우를 우리는 중국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고구려에서는 환관이라는 집단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궁중 내부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필요악적인 요소를 원천적으로 제거함과 동시에, 현재는 확인이 불가능한 그에 상응하는 다른 제도적 장치가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훗날, 제국적 시스템을 갖추면서 고구려도 환관이라는 특수 집단의 존재에 대해서 인지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환관이라는 존재는 마치 궁중 내부의 일을 잘 흘러가게 해 주는 윤활유(潤滑油)와도 같아서 궁중 내에서 여자인 궁녀(宮女)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인 왕비가 아닌, 남자인 왕을 보좌하면서도 여성의 역할을 대변해주는 특수한 존재들이 바로 환관이었던 것이다. 주인장은 보장태왕 시절 등장하는 선도해라는 신하가 혹시 내관(內官)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최고 지배자의 최측근에서 최고 지배자를 보좌하고, 그의 수발을 들어주고, 때로는 그의 고민을 함께 얘기하기도 하는 등, 환관이라는 집단은 음지(陰地)에서 최고 지배자와 가장 친밀해질 수 있었던 계층이었다. 그렇기에 고구려에 환관이라는 존재가 정말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주목할 점은 북방 유목민족 사회에서는 내관이니, 환관이니 하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뭘까? 바로 후계자 계승에 대한 법칙과 지배 계층의 혈연적 구조가 다르다는 점이다. 몽골족은 원칙적으로 제일 막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업을 계승하고 다른 형제들은 영토나 마소 등의 재산들을 공동분배해 각자 일가(一家)를 이루어 떠난다. 이는 칭기즈칸이 막내아들 ‘툴루이칸‘에게 항상 몽골고원을 맡기고 다른 자식들과 신하들을 거느리고 원정을 떠나곤 했던 사실을 상기해보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몽골 이외의 다른 유목민족의 경우를 살펴봐도 반드시 장자 계승 원칙을 준수한 것이 아니라 능력 위주로 후계자가 결정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들은 단지 아버지의 뒤를 계승했냐, 안 했냐의 차이일 뿐, 각자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고 각자 정해진 권리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서로 크게 문제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농경민족은 이와 다르다. 오래전부터 구축해온 종법적(宗法的) 가계 구조는 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했고, 또 그래야만 유지가 가능했다. 항상 맏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계를 계승했고, 다른 형제들은 그 맏이에 예속되어 그 집안을 잘 이끌어 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왕이 자신의 후계자를 두고 장자로 정할지, 아니면 능력있는 다른 왕자들로 정할지 고민하는 경우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가족이 새로운 후계자를 중심으로 뭉쳐 살면서 계속적으로 자손을 늘려가야만 했던 농경민족에게 분가(分家)라는 개념은 생소하기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딸은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것이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 생각한다. 유목민족은 혈통(血統)을 중시했기 때문에 분가나 딸이든, 아들이든 그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역적 개념도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이전 세대를 계승해 혈통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더 중요했었다. 명분만 앞세우는 농경민족에 비해 훨씬 합리적이고도 효과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신라에서는 여왕이 3명이나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순히 첫째 아들에 의해 왕위가 계승되었던 농경민족이 아니라 혈통이 우선시되는 유목민족이 신라의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기에 왕족이라 할 수 있는 성골(聖骨) 출신으로 왕위를 잇다보니 여성들이 왕이 되었던 것이지, 고대 왕조에서 여자의 지위가 남자와 대등했기에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이런 차이점 때문에 내관이라는 관직이나, 환관이라는 집단이 유목민족에게는 따로이 없었던 것이다. 유목민과 달리 농경민은 실력이 아닌, 출신으로 휴계자를 선택했다. 실력이 없는 자가 단지 출신 성분만 가지고 군림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최고 지배자(支配者)가 곧 최고 전사(戰士)이자, 최고의 지성(知性)이었으며, 최고의 경제가(經濟家)이자 최고의 정치가(政治家)가여야만 했다. 그들은 경쟁과 투쟁으로 연이은 일생을 살아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아야만 했다.
단순히 깊은 내전 안에 마련된 옥좌(玉座)에 앉아서 정책 수립에 임했던 농경민족의 황제들과 달리, 유목민족의 선우(單于), 칸(汗) 등은 항상 앞장서야 했고, 또 몸소 실천해야만 했었다. 그런 그들이 측근에 환관이라는 특수한 집단을 형성할 필요성을 느꼈을리 없다. 또한 남자라면 당연히 말 타고, 활 쏘고, 전쟁에서 전리품 획득과 가족의 번영을 위해 앞장서 싸워야 했던 유목민들에게 있어 거세를 하면서까지 최고 지배자의 측근으로 자리잡아야만 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에게 자신의 딸이나 친족은 물론, 자신의 후비(后妃)까지 서슴없이 하사하는 유목민족의 관습(慣習)상, 황제가 거느리고 있는 궁녀들과 관계를 맺는 일을 단속하기 위해 내전의 출입이 자유로운 자들에게 거세를 시킨다는 발상 자체가 그들에게는 이질적인 문화였을 것이다. 유목민 사회에서의 여자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주체(主體)로서 남자와 동등한 입장에서 생(生)을 영위할 수 있었다. 칭기즈칸은 그의 어머니에게도 다른 신하들이나 친족들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얻을 수 있는 예하 부락과 군대를 주었는데 이는 그녀가 단순히 칸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칸이 속한 황실의 장(長)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자의 지위가 높았던만큼, 남자의 지위 역시 농경민족의 그것에 비해 훨씬 권위(權威)를 지니게 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하지만 농경민족에게 여자란 남자에 종속한 존재에 불과했으며 그저 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런 여자들을 수없이 많이 거느린 황제가 자신의 여자들에 대해 과다한 소유욕(所有慾)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한 황제의 여자로서 황제 일인을 위해 살아가는 여자들이 환관이라는 특수 집단과 결탁해 그녀들의 삶을 영위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통적인 농경민족의 사회적 관습이 황실 내에 환관이라고 하는 독특한 집단을 형성했고, 그로 인해 많은 폐단을 낳았다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봤을 때 이익이 주장하듯이 고구려에 환관이 없었다는 주장은 주목할만 하다. 설사 고구려에 환관이 있었다고 해도, 최소한 국초에는 없었으며 이후에는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국초에는 북방 유목민족식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었던 부분이 강했기에 아무래도 농경민족식 국가 체제의 흔적은 약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5). 환관이 없었다는 것 자체가 고구려만의 독특한 왕실 문화가 존재했다는 소리가 될 것이며, 이로 미루어 봤을 때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사실이 고구려에 존재했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 준다.
아울러 고구려가 705년 역사상, 단 한번도 중원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것도 고구려에 환관이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한다. 역사상 존재했던 수많은 북방 유목세력들은 자신들의 힘이 강해지면 여지없이 중원 일대를 넘보고 그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자행했었다. 마치 중원 일대가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라도 되는 듯이 탐욕스런 북방의 야만인들은 그 곳에 대한 지배욕을 수천년동안 버리지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중원 일대를 지배하게 되면 그들은 그 달콤한 중원의 환락(歡樂)에 빠져 스스로의 정체성을 버리곤 했다. 고구려는 이와 달랐다. 중원 세력이 직접적으로 고구려로 침투한 적은 있지만 그들이 고구려의 세력권내에 오래도록 머물렀던 적은 없었다. 국초 고구려가 형성해놓은 정치 체제, 문화, 풍습은 수백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거의 변형되지 않고 고구려만의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며 존속해왔던 것이다. 당연히 환관이나 내시로 대표되는 중원 왕실의 문화가 고구려로 전래되어 번졌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6).
이런 특수한 환경 속에서 고구려는 외척 억제력을 지니고 있는 정치적 장치까지 마련해 놓고 있었다고 추측하는 것에 무리가 있을까? 아닐 것이다. 우리는『화랑세기』라는 책이 나오기 이전까지 신라사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 하고 있었다.『화랑세기』에 기록된 신라 지배 계층과 사회 전반적인 부분에 대한 사실들은 현대인의 시각(視覺)을 완전히 뒤엎는 것들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와 백제의 사회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과 전혀 다를 가능성이 높다. 주인장은『삼국사기』와 여타 자료들을 가지고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을 얻었다. 분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분들은 오늘날 주요 연구 대상이 아니다. 관련 자료가 극히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구할 필요가 없는 부분들은 아니다. 어떡해서든지, 실마리를 잡아서 연구해야 할 부분인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가 흔히 지나치고, 무시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더 많은 연구 결과가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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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씨족 단위의 집단이나 부족은 그 집단을 이끄는 부족장(部族長)등의 능력과 생각에 따라 모든 일을 결정하고 시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러 부족들이 모여 일정한 세력권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국가(國家)라는 것이 형성됐고, 더 이상 그 집단의 장(長), 1인에 의한 경영은 불가능해졌다. 당연히 최고 결정권자 주위에는 여러 세력이 모이기 시작했고, 그들 중 일부만이 국가 경영에 있어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귀족연합체(貴族聯合體), 혹은 부족연합체(部族聯合體)의 성격을 띤 세력들이 늘어나게 되고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정형화되기 시작한다. 즉, 최고 결정권자가 속한 집단에 예속 ․ 흡수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세력의 연합체(聯合體)적인 성격에서, 최고 지배자에 예속된 보좌(輔佐) 세력들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곧 최고 지배자의 절대 권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지배계층에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왕국의 경우, 관직이나 각 계층의 책임관 자리를 대부분 왕가의 혈족이 차지하고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야만 국왕(國王)과 그를 둘러싼 왕가에 의한 지배가 공고히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국의 경우, 효율적인 국가 제도가 발휘되기 보다는, 지배자와 지배계층의 능력에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제국의 경우는 이런 흔적이 덜 하다. 다민족을 통치하려면, 그만큼 다양한 통치 제도가 필요하며 다양한 통치 제도를 하나로 묶어서 통제할 효과적인 정치 체제가 필요하다. 그만큼 어떤 한사람의 능력에 의하기보다는 오랜 시일을 걸쳐 형성된 국가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즉, 지배 계층이 바뀌는 경우가 있더라도, 국가 경영에는 큰 변화를 불러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물론, 제국의 지배자가 가지고 있는 권력의 힘이란, 왕국의 지배자가 가지고 있는 권력의 힘을 훨씬 상회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행사할 수 있는 힘이 큰 만큼, 그 힘이 제국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크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의 지배자는 더욱 주변에 있는 보좌관(輔佐官)들의 의견을 잘 수렴해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2) 당장「백제본기(百濟本紀)」만 봐도 온조왕 34년(16) 겨울 10월에 마한의 옛 장수인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 웅거해 반역하자 온조왕이 몸소 5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가 반란을 진압하고 자결한 주근의 시체를 가지고 와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식까지 다 죽여 버렸다고 한다. 이는 당시 고대 왕조에서 반역이라는 죄가 얼마나 중죄(重罪)이며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는지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고구려에서 일어난 몇 번의 반란 사건 뒤에는 이런 대참살(大慘殺)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3) 고려 시대에는 근시(近侍) 및 숙위(宿衛)의 일을 맡아보던 벼슬아치를 가리켜 내시(內侍)라 하였다. 재예(才藝)와 용모가 뛰어난 세족자제(世族子弟) 또는 시문(詩文) ․ 경문(經文)에 능통한 문신(文臣) 출신으로 임명하였으나 의종 이후, 특히 원나라의 간섭 이후에는 환관(宦官)들이 이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조선 시대에는 내시부에 속한 궁중의 남자 내관을 일컫는 용어로 바뀌었는데 이들은 대개 임금의 시중을 들거나 숙직 따위의 일을 맡아보았으며 모두 거세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한국사에서 환관의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이미 신라시대 환수(宦竪)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본격적인 환관을 설치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이기 때문에 고려 이전에도 내시라는 존재가 존재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분명, 동시대 중국 왕조들에는 내시들이 존재했을테고 그들과 수백년간 교류했던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도 내시에 대한 인식(認識)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측 사서나 각종 문헌에 내시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주의해서 봐야 할 사항이다.
4) 거대한 대륙을 통일한 위대한 영웅, 시황제(始皇帝)의 진(秦)도 조고라는 환관에 의해 정권(政權)이 좌지우지되다가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民亂)과 군웅(軍雄)들의 득세로 인해 멸망했으며, 광무제가 재건(再建)한 후한(後漢) 역시 십상시(十常侍)라고 불리는 10명의 환관 집단에 의해 멸망했다. 중평(中平) 5년(188) 8월, 십상시는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라고 하는 황실친위대(皇室警備隊)를 창설했는데 당시 대장군(大將軍) 직책에 있던 하진은 이 서원팔교위의 군사력이 두려워 각 지방의 군대를 불러들였고 결국은 그로 인해 군웅(軍雄)들의 할거(割據)가 시작해 후한을 멸망으로 몰고 간 것이다. 이처럼 중국 고대 왕조에서 환관의 영향력은 엄청나서 말 몇마디로 인해 국가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다. 이런 폐단(弊端)은 중국사가 진행되는 내내 계속됐으며 한동안 황제권의 강화로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명대(明代) 영락제가 환관들의 도움으로 즉위하면서부터 다시 득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중국 황실 내부에는 환관이라는 존재가 자리잡아 한 시대를 풍미했었다. 그런 중국사에 비해 한국사에서 환관의 득세와 관련된 기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5) 물론 북방 유목민족식 국가 체제가 구식(舊式)이라든가, 비효율적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농경민족식 국가 체제에 비해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 북방 유목민족이 중국 대륙을 남침(南侵)해 그들의 제국을 건설했던 경우는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 지배 스타일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중국 대륙을 유목민족식으로 지배하는 것이다. 과거 흉노제국은 한(漢)이라는 나라를 끊임없이 공격해 한의 황제를 곤경에 빠뜨렸고, 매번 한 황실의 공주와 막대한 양의 금은보화 등을 공납품(貢納品)으로 받아갔었다. 유목민족에게 광대한 영토는 의미가 없다. 그들에게는 목축하기 좋은 초지(草地)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도시를 점령하고, 세금을 걷고, 호구수를 관리하는 식의 지배는 그들에게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지배해서는 오래도록 유지되기가 힘들다. 총력전(總力戰) 면에서 일정한 영토와 호구수, 수입원이 존재하지 않으면 유목민족은 절대 농경민족을 압도하지 못 한다. 두 번째는 유목민족이 유목민족식, 농경민족식 지배 체제를 동시에 사용하는 경우로서 거란족(契丹族)의 요(遼), 여진족(女眞族)의 금(金), 탕구트족의 서하(西夏) 등이 이러했다. 그들은 자국민을 유목민과 농경민으로 양분하고 각각의 민족성에 맞는 정치 체제를 운용했다. 이렇게 되면 효율적으로 두 세력을 통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두 계층간의 반목과 대립이 생겨, 쉽게 융합되지 못 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결국 그들은 외세의 침입에 피지배층이었던 한인(漢人)이 동조하는 등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유목민족이 농경민족식 정치 체제를 흡수해 적응한 경우로서 만주족(滿洲族)의 청(淸)에 해당한다. 물론 몽골족의 元도 그러했지만 그들은 정치, 경제 제도는 농경민족의 것을, 사회 제도는 이분법적 정치 체제를 이용했다. 그에 반해 청(淸)은 그들 고유의 풍습과 전통을 지키되, 다른 이민족들의 것들도 존중해주면서 농경민족의 통치 체제를 만주족만의 독특한 제도로 재편했다. 그 결과, 청은 중국사에서 보기 드문 장수 왕조로 남게 된 것이다. 역대적으로 한국사에 보이는 왕조들 중에서 제국적 요소를 지니고 있던 왕조들을 꼽으라면 고구려와 백제, 발해, 고려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단군조선은 이질적 요소를 지니고 있던 다민족으로 구성되었다기보다 동이(東夷)라는 포괄적인 개념에 속한 여러 계통의 세력들로 이뤄진 나라이며, 중앙집권형 제국을 이루지 못 했으므로 제외했다. 일단, 고구려와 백제, 발해 등은 동북방에 산재해있는 수많은 종족들을 하나로 융합해 독자적인 문명권을 이룩했던 나라들이었다. 굳이 비교한다면 세 번째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피지배층을 그들 문명권에 편입시켜 완전히 흡수했으며 고구려, 백제, 발해에서 예하 이민족들이나 피지배층에 의한 반란 기사가 없다는 것은 주목할 부분이다. 그에 반해 고려의 경우는 두 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고려가 비록 건원칭제하기는 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제국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정치,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서 宋이라고 하는 중국 왕조의 문명권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북방의 이민족들과 남방의 왜에 대해서 고려인으로 흡수했던 것이 아니라, 이민족으로서 지배했었다. 마지막으로 신라의 경우는 이와 전혀 다른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볼 수 있다. 북방에서 남하한 그들은 박씨와 김씨 왕조 시절에 예하 이민족들을 철저히 정복했고, 수차례 일어난 반란을 계속적으로 진압하면서 중앙집권형 국가를 이룩해 왔었다. 고로, 주인장은 고구려, 백제에는 국초에 환관이라는 집단이 없었지만 후대에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고려-조선에는 환관이 존재했고, 신라에는 환관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실제『화랑세기(花郞世紀)』에 그려진 신라 왕실 문화에 환관이라고 하는 집단에 대한 묘사가 없다는 것은 주목해서 봐야 할 부분이다.
6) 물론 중원 세력과의 교류로 인해 중원 왕실의 풍습이 고구려로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다. 하지만 문화 교류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마치 신라에 유목민의 풍습이 남아있는 것을 두고 그것이 북방 유목민족과 끊임없이 교류했었던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처럼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금관문화(金冠文化)라고 불릴 수 있는 하대(下代) 신라의 문화권은 그렇게 단순히 문화 교류로 형성된 문화권이 아니다. 직접적인 문화 전파가 아니고서는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도 각배(角杯)나 서역인(西域人)등이 등장함을 들어 고구려가 북방 문화권, 서역 문화권과 끊임없이 교류했으며 백제에서 장군이나 제후들에 대해 좌현왕, 우현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흔적들은 분명히 이들 국가가 북방 유목세력과 직 ․ 간접적으로 교류를 했었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의 경우는 분명히 이와 다르다.『화랑세기(花郞世紀)』와 여타 문헌기록들은 물론이고, 오늘날 각종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물, 유적들이 신라는 유목민의 왕국이라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몽골의 통치를 받던 고려시대때, 몽골에는 고려인의 풍습이, 고려에는 몽골인의 풍습이 유행했고 또 사회 전체적인 관습이나 통치 제도까지 변모(變貌)했던 이유는 고려가 몽골 황실의 부마국이라는 독특한 국제적 지위와 당시 몽골의 통치력이 고려 사회 곳곳에 미쳤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고구려와 백제는 이처럼 외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적이 없었다. 타국과 교류를 할지언정, 그렇다고 그 문화에 흠뻑 빠져 자국의 풍습까지 바꿀 정도로 심각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물며 고구려와 백제는 한때 천하를 경영하던 제국 아닌가? 제국적 자부심과 자존심을 지니고 있던 나라가 그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뭐가 아쉬워서 그랬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