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주체에 의한 해석의 결과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느낌일 뿐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역사를 논하고 인간,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이 모두 '해석'(해석학의 주요개념)의 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해석이 주관적이라고 개체로 흩어져 있다고 비관하진 않습니다. 주관적인 해석이 쌓여 다양한 부류의 많은 이가 공감할 수 있을 때 보편의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입니다.
해석은 이해를 위한 과정입니다. 모든 것은 이해될 수 있다는 믿음 없이 해석의 과정은 무의미한 행위일 뿐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해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제 해석의 입장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어느 한 면에 치우친 궁색한 형편일 것입니다.
오늘 미동에 들러 하루 종일 아이들과 함께 운동했습니다. 사범님께서 계시리라는 기대를 가졌지만 다른 일로 바쁘셔서 이동원 부사범님(초등학교 때부터 미동에서 체계적으로 배워 기본기가 충실함)께서 지도하시는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아이들은 이규형 사범님을 '큰'사범님이라고 부르고 부사범님에겐 그냥 사범님이라고 칭하는 걸 보면서 미동에서의 부사범의 위치가 얼마나 힘든가를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범님께서 지도하실 경우 아이들의 집중력이 몰라보게 향상되어 쏙 빨려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수련 시간만큼은 '신'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대중을 흡입시키는 매력을 발합니다. 부사범의 경우 땜방이라고 할까, 5분 대기조라고 할까 불안한 위치에서 그림자 노릇을 하니 보조자로서 만족해야 합니다. 거기에다 도장 관리, 정리, 잡무로 바쁜데다 꼼꼼하고 격을 달리하는 사범님의 안목으로 정말이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어 엄청난 스트레스로 6개월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을 넘긴 부사범들은 미동을 거쳐 모두 훌륭한 사범으로 미동의 권위를 지켜가고 있습니다. 제가 89년 이후로 지금까지 미동을 거쳐간 부사범을 꼽아보니 8명 정도인데 2명은 제외하곤 모두 대단한 경지의 실력자로 성장했습니다. 미동에 처음 들어올 때는 형편없는 실력으로 배우겠다는 열정만 가득찬 청년을 잘 다듬어 역시 미동 부사범답다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열심히 했던 김철희 사범은 미동 부사범을 거쳐 중국에 진출하여 중국체육학교를 졸업하고 도장을 개설하여 오만한 중국인들에게 태권도로 진검승부하여 한국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아이들에 대한 사범님의 지도 모습을 앞으로 볼 수있는 날이 많지 않다는 서글픈 감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40대초의 자신감과 강렬한 눈빛이 50의 지천명을 훌쩍 넘겨 온화하고 너그러운 원숙의 경지로 바뀌는 과정을 직접 지켜본 저로서는 세월의 변화에 따른 무상을 깊이 느낍니다. 제 몸 속에 살아 숨쉬는 제가 느낀 사범님의 모습과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는 것이 허무를 떨칠 수 있는 기회일 것 같습니다. 막이 열리기 전
첫만남. 분명 잊을 수 없는 심연의 기억을 남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태곳적 신비와도 같은 생생한 기억이 꽉 박혀 있습니다. 대학 1학년 1학기를 휴교령으로 실업자처럼 지내다 2학기 시작하며 새로운 기대 속에 운동을 하던 때 교대 체육관에서 이규형 사범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88 올림픽 개회식 준비와 함께 진행된 연세대 체육교육과 석사과정을 마치시고 모처럼 여유 있던 시기에 외국에 나가셔서 강의를 못하시는 박해만 관장님을 대신에 3학년 선배들의 선택과목을 지도하시고 태권도부의 축제 시범 준비를 위해 남으셨던 것입니다. 당시 저는 파란 띠를 매고 꿇어앉아 위를 쳐다보면서 경이롭게 시범 발차기의 과정을 지켜봤는데 감탄을 넘어서서 입조차 벌리지 못하는 충격에 휩싸였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본 발차기부터 차례로 난이도가 높은 이단 발차기, 시범으로 이어졌는데 말씀과 함께 시범을 보여주셔서 집중력을 배가 시켰던 것 같습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태권도의 수준이 이런거구나하는 구체적인 그림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사범님의 경우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매시간 수준에 맞는 목표 의식과 참여 동기를 부여하시는 탁월한 교육자의 감각이 있으신 데, 함께 있었던 20여명의 선배님, 동기들이 이 글을 통해 공감하시리라 생각됩니다.
1막 1장
첫만남의 경우 만남의 진실과 성실이 이어지지 않는 경우 강렬한 인상이 쌓이지 않는데 사범님과의 첫만남은 올곧은 지조로 모든 순간을 압축하고 있는 신화로 떠오릅니다. 사범님의 탁월한 시범만 기억에 남지만 사범님의 말씀은 아마도 이렇게 이어졌을 것입니다. '제가 많은 분들을 존경하고 있지만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담당하시는 선생님들을 더욱 존경하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자 노력하는 교대생 여러분들을 가장 존경합니다. 인간으로 성장하는데 있어서 어느 시기든 중요하겠지만 초등학교 시기에 올바른 가르침을 받는다면 중고등학교 시기에 힘들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대생 여러분들을 가장 존경합니다.'
가을 축제 시범을 마치고 선배님들과 사범님께서 계신 미동초등학교를 방문하였는데 일제시대 지어졌다는 창고 같은 체육관을 들어서자 휴식시간을 갖고 있던 시범단 어린이들이 깍듯이 인사하는 모습에 놀라고 사범님을 따르는 아이들의 절도 있는 모습에 또 한번 놀랐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은 대학 2학년 1학기로 넘어갑니다. 누구나 원하는 대학일지라도 한 번쯤은 의심을 하기 마련인데 대학 1년을 마냥 생각 없이 놀다 2학년 시작하면서 혼자만의 고민에 휩싸였습니다. 정체 모를, 번지수 없는 고민에 수업도 빼먹고 시내를 거닐다 불현듯 미동이 떠올라 혼자 체육관에 들렀습니다. 당시 초라하기 그지없고 삶의 희망이라고는 없어 보였을 텐데 사범님께서는 제가 교대생인걸 아시고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아이들의 훈련 모습과 시범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누굴 위해서 보여주신 것이 아닌 평상적인 훈련 모습이 너무나 진지하고 긴장되는 순간이라 한시도 아이들과 사범님의 눈빛을 놓치지 않고 번갈아 바라보았는데 제 생활의 반성과 함께 다시 한번 해보자는 용틀임을 느꼈습니다. 도장을 나올 때 주신 88 개회식 사진과 사범님의 휘장은 지금도 분당 부모님 댁에 걸려 있습니다. 사범님을 거쳐간 수많은 제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는 것은 분명 사범님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되고 유교보다는 기독교의 사랑에 가까운, 평범한 인간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희생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1막 2장
90년 2학년 2학기에도 사범님께서 교대에 들렀던 것 같습니다. 수교하기전 구소련을 민간외교 차원에서 처음 방문하셔서 태권도의 얼을 전파하시고 보드카를 가져 오셔서 중국집에서 나누어 마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미동 체육관 뒤의 많은 사진들 중에 구소련 어느 체육관에서 다양한 무술 도복을 입고 사범님의 지도를 받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ITF와 카라테 등을 배운 무술인들이 모두 모여 처음으로 WTF의 체계에 따라 배우고 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주 인상적인 사건을 들면 운동 시기가 추워 창문과 문을 닫고 수련을 하였는데 300명이 넘는 수련자들이 사범님의 구령에 맞추어 동시에 기합을 토하자 지붕 가까운 창문 하나가 깨져 나가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기합 역시 에너지의 전위 현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뻔한데 실지로 기합의 위력을 보게 되어 신문 기사화 되고 지금 러시아 태권도 협회의 주축이 된 당시 수련자들이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한답니다. 또 하나는 영화배우 김지미씨와 관련된 일인데 수교 후 영화 촬영차 러시아에 들렀다가 한국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장소 섭외가 힘들었다는데 우연히 사범님의 지도를 받은 수련자가 고위직에 있어 아주 수월하게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이름만 들었던 사범님께 저녁을 사셨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2학년 2학기 끝날 즈음 새로운 부장단이 정해져 22기 부장인 장현희, 훈련부장인 정대일과 함께 사범님께 부탁하여 방학 동안 매일 오후 미동에서 땀 흘렸습니다. 현희와 대일이는 운동을 잘하여 무리 없이 참여하는데 저는 상당한 충격과 스트레스로 힘들었던 기억입니다. 오후 1시부터 최소한 5시까지는 수련하였는데 개인적으로 사범님으로부터 지도 받는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6학년 중에서 착한 아이들에게 쉬는 시간에 물어보면서 따라갔던 기억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상냥하게 가르쳐 주었던 김선영이라는 여학생은 지금 외국어대 학생으로 성장했는데 미동 시범단 실력을 갖춘다는 것은 훌륭한 인간이 되는 과정과 흡사합니다. 당시 아이들의 모습을 비유하자면 제 안목이 형편없어서 더욱 그렇겠지만 운동 시간만큼은 마치 전사와도 같은 진지한 눈빛을 띠고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던 것 같습니다. 허름한 체육관과 넓은 창, 난로가에 앉아 은행과 고구마, 밤을 구워 먹으며 사범님 얘기에 귀기울이는 아이들의 정경은 늘 편안한 마음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운동을 마치신 뒤 사범님께서는 다양한 이야기로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주셨는데 어떤 경우에는 영화 한편을 구수하게 풀어내시는 입담을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영화 록키의 교훈적인 부분을 부각시키면서 말씀하실 때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몰입으로 난로가 주변을 달구었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아이들은 뒷정리하고 저희는 인사드리고 미동 교문을 나설 때 늘 그렇듯 시원한 바람이 가슴으로 밀려옵니다.
1막 3장
이 글을 쓰겠다고 약속하고 시간이 허락할 떄 조금씩 쓰면서 일어난 저의 변화 중의 하나는 과거에 대한 집착은 정신 건강엔 결코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양하게 두루 전관하며 열려 있어야 하는데 시야가 과거에 한정되어 미래를 위한 현실을 돌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허물을 낳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성장하면서 다르게 보였던 사범님. 제가 같은 산을 갈 때마다 다르게 느끼는 산의 신령을 대하듯 저에게 귀한 배움의 기회를 열러준 태권도부에 늘 깊은 마음을 느낍니다.
3학년 부장단 활동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열심히 살았던 것 같고, 좋은 동기의 고군분투에 여유 있던 저는 나름의 문제 의식을 키웠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으나 제 자신이 조금씩 변하고 있구나를 느낀 것이 3학년 2학기입니다. 이때부터 궁금증을 달래고자 제가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 작은 형님이 워낙 공부를 잘하여 책에 대해선 읽지도 않으면서 괜히 진저리가 나 되도록 책을 멀리 했는데 한 인물을 이해할 방도가 없어 교육학과 기독교와 불교, 유교와 관련된 종교 서적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습니다. 미동에 들러도 사범님과는 감히 얘기 한 마디 못하면서 가깝게 느껴지는 부사범님(백상민 사범, 캐나다로 가셨다가 지금 일산에서 크게 성공하시고 있음)과의 대화를 통하여 매력적인, 존경할만한, 수수께끼 인물로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과연 예수는 어떤 분이고 싣다르타의 꺠달음은 무엇이었나? 에 대한 인간적인 모습을 알고자, 그러면서 끊임없이 이규형 사범님과 비교하는 과정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저에게도 성령 충만한 체험이 왔던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얘기하는 성령을 저의 체험으로 알려드리는 것이 많이 왜곡 되다고 여기실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갖는 언어의 마력(spell)을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되리라 생각하면서 저의 경험을 보이겠습니다.
3학년 겨울방학은 정말 열심히 운동하고 절제된 생활을 했습니다. 오전에 책 읽고 오후에 미동에서 운동하고 저녁에 책 읽고, 거의 똑 같은 생활을 3개월 정도 했습니다. 백일 가까이... 사범님께서 지도 하시는 과정을 거의 따라갈 수 있는 단계였고 이때부터 궁금한 것을 많이 물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물음도 많았는데 사범님께서는 진지하게 들으시고 최선의 대답으로 반겨주셨습니다. 사범님의 호학은 공자 수준과 맞먹을 정도로 경험의 폭이 열려 있고 확트인 시원함과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으십니다. 동기들은 부장단 임무가 끝나면서 운동에 꾸준히 참여하지 못하여 저 혼자만의 문제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잊혀지지 않는 추억은 어느 날 운동을 마치시고 사범님께서 갈매기살을 사주신 것입니다. 저는 당시 처음 갈매기살을 먹었는데 맛보다는 고기 이름이 주는 희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갈매기를 돼지 속에서 찾는다? 교대 유한구 교수님의 영향으로 이홍우 교수님의 교육과정 이론에 푹 빠지면서 교육학이 이렇게 매력이 있구나라고 탐독하던 시기가 바로 이때입니다. 무엇보다도 수수께끼와도 같았던 사범님을 이해하는데 당시로서는 적합하다고 생각되었던 교육이론이었습니다. 교사를 성인의 경지에서 바라보는, 평범한 우리로서는 감히 흉내내기도 힘든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는 이홍우 교수님의 교육이론은 교육학 내에서도 상당히 문제 제기를 넘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론을 저는 진리로 착각하는 독서의 벽을 쌓고 있었던 것입니다. 4학년 1학기 개학하기 몇일 전 저는 이홍우 교수의 책(교육의 목적과 난점 제5판)을 보다가 빛을 보았습니다. 책이 빛으로 보여 한동안(10초 가까이) 다른 사물을 보지 못하는 어지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면서 제 머리 속이 새롭게 조직 배열되면서 물밀듯이 새로운 생각들이 구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저는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잠을 자면 이러한 새로운 생각들이 사장되지 않을까 염려되어 가까운 과학과 친구들에게 흥분하며 얘기를 하고 밀려오는 새로운 생각을 조합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제 경험은 저로 그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영향이 있으리라 생각되어 독서회도 조직하여 이홍우 교수의 책을 읽고 이홍우 교수의 교도가 되어 사범님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어린 생각이지만 언어의 마력이 가져다준 귀한 체험일 뿐입니다. 기독교도의 전도주의가 저와 같은 언어의 충격 속에서 되풀이되고 있다는 인류학적 사실 하나만 짚어두고 지나갑니다.
4학년 1학기는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제가 만든 절대적 진리 속에 안주했으니 뭐가 두려웠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종교적 진리라 착각하고 절대 타협이 없어 급기야 동기들과 싸움에 휘말리고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태권도부를 나와 혼자가 되었습니다. 이규형 사범님을 만나게 된 인연이 태권도부에 있었는데 태권도부를 떠나니 사범님을 뵐 면목이 없어 죄인처럼 책만 읽으며 최홍관 교수님 연구실을 여름방학까지 지켰습니다. 저는 운동하고 싶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체육관을 어슬렁거렸습니다. 사범님을 만나기까지는 6개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1막 4장
교회 부흥회에 가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성령 체험은 제각기 다른 특색을 나타내지만 자신만의 특별한 내적 상태와 성경, 목사의 설교가 자아내는 초월적인 언어 공동체의 소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만의 문제만으로 강렬한 깨달음의 기회는 힘들고 반드시 언어의 주술이 부가 되거나 선행될 때 체험의 폭과 자신의 언어 지도의 확충을 가져오는 특이한 체험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러한 체험을 지금까지 두 번 강렬하게 맛보았는데 무술의 기합 소리와 순복음 교회의 외침과 같은 기도, 주술로 느껴지는 소리에 대해 다 같은 언어의 효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사범님은 48년 장수에서 태어나 군대 가기 전까지 장수에서 지내셨습니다. 초등학교 때 태권도를 시작했는데 싸움을 잘 하고자 태권도를 배우면서 어느 샌가 폭력을 다스리는 강한 자의 여유를 느끼셨다고 합니다. '가다가 중도에 포기하느니 아니 간만 못하다'는 속담은 모든 공부의 과정을 보편화시키고 있지만 특히 폭력이 도사리고 있는 태권도 교육을 정당화시키기에는 가장 적절한 전통의 미덕입니다. 자신의 폭력을 다스릴 수 있는 수준까지는 태권도를 해야된다는 공부론의 과정을 밀고 나간다면 결국 죽을 때까지 수신의 한 가지 방법으로 밀고 나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가 대학 졸업 후에는 사범님 댁을 자유롭게 방문하는데 사범님 책상 위의 흰 저고리와 까만 치마의 흑백 사진을 보는 순간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야.' 사범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모친께서는 지아비의 몰락과 술로 인한 폐신으로 5남매를 거두고 생활해야하는 간고를 겪다 일찍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종교는 없으셨다고 하나 친척 중에 원불교를 가까이 하셨던 분이 계셔 조선 여인의 희생과 비전을 느낄 수있었습니다. 특이한 사실 하나는 자식들이 밥먹듯이 굶는 상황에서 아침에 왔던 거지가 저녁에 다시 방문하여 구걸할 때 모친께서 독에 남은 쌀을 긁어 거지를 안방 아랫목에 모시고 정성껏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사범님께서는 어렸던 시기라 어머니를 그렇게 원망하며 청소년기에는 반항하며 자살을 세번까지 시도할 정도로 가정에 대한 탄식이 심하셨나 봅니다. 처음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식은 굶기면서 거지를 정중히 대접하는 모친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사범님의 삶을 느끼면서 이제는 이해가 됩니다. 원불교의 뿌리가 되는 동학에 대한 이해와 함께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삶을 접한다면 쉽게 공감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사범님께서 빨간 띠 단계에서 스승이 장수를 떠나시는 바람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일정한 스승 없이 거의 자력으로 수련하셨다고 합니다. 스승이 없으니 검은 띠도 여러 번 고배를 마시고 따고 겨루기 시합에서도 코치도 없이 혼자 나가고 떨어지고... 실패의 과정 속에서 보다 단단히 기초를 확립할 수 있고 깊은 고민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범님의 도약의 계기는 고3 때 장수에 있던 경찰관들을 지도하셨다는 사건입니다. 당시 장수에서 검은 띠는 사범님 뿐이었기 떄문에 나이는 어렸지만 청장년 층의 경찰관과 수련을 원하는 장수 주민들에게 상무관을 개방하여 어린이들까지 지도하셨다고 합니다. 사범님의 탁월한 교육자로서의 모습은 역시 어렸을 때 이와 같은 기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 신문 기사 중에는 사범님의 제자가 전국체전에서 메달을 따는 경우와 어린이 시범으로 갈채를 받았다는 지방지가 있습니다. 스승이 없는 가운데 처절한 고통을 당하여 제자에 대한 각별한 정은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군대 가기 전까지 장수에서 다양한 수련생을 대상으로 교육자의 몸가짐을 세우고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는 각고의 시간이었습니다.
1막 5장
사범님 모친의 가정을 초월한 이타주의는 사범님의 행위를 이해하는 관건입니다. 세계 각국을 제집 드나들 듯 주유하시는 사범님께서 가장 애착을 가지는 나라가 아프리카 빈민국인데 가실 때 꼭 가방 가득 사탕을 넣어 가셔서 따라오는 눈 맑고 순수한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나누어준다는 순수한 영혼은 사범님 모친의 재현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제자들이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처신에 있어서 늘 상좌에 처하지 않고 스스로 낮은 자리를 편안히 여기고 양보하는 미덕은 결코 가식이 아닌 생활 속에서 지조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군대 생활은 성남 행정학교에서 사령관 밑에 있었다고 합니다. 행정학교를 찾는 장병들에게 태권도를 지도하고 복싱과 유도를 잘 하는 동기들과 함께 무술을 연마하는 배움과 훈련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령관 밑에서 행정을 봐야 했기에 꼼꼼한 뒷처리를 제대로 익혀 일에 있어서 완벽을 추구하십니다. 미동초등학교와의 인연은 제대를 1년 정도 앞둔 어느 날인가 봅니다.
당시 1973년 사령관과 미동초등학교 교장이 서로 안면이 있어 유명무실해진 태권도부를 일으킬 심산으로 사령관에게 적임자를 부탁하셨다고 하는데 운동에 대한 열의와 책임감이 남다른 사범님을 추천하여 군화를 신고 오후에 미동에 들르셔서 태권도를 지도하셨습니다. 패기로 뭉친 사범님의 젊은 모습을 상상해 보니 기합소리가 운동장에 꽉 찼을 것 같네요. 사범님께서는 아이들에겐 오로지 잘 가르치길 궁리하셨지만 배움에 뜻을 두고 제대를 하는 즉시 미국으로 건너가 사범 생활을 하면서 대학 공부를 희구하셨다고 합니다. 어느덧 군복무가 끝나가고 미동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군복무가 끝나면 아이들에 대한 태권도 지도가 끝난다고 얘기하셨나 봅니다.
사범님께서도 마음이 무거웠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기량은 일취월장하는데 후임자는 없고 모두들 자신에게 매달린다고 느꼈을 순간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새로운 꿈을 간절히 희구하신 분의 고민은 몇일을 흰 밤으로 새웠을 것입니다. 드디어 제대를 하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미동 아이들과의 만남을 앞에 두고 차마 내키지 않은 걸음을 향했습니다. 학부모와 아이들은 보은의 덕으로 사범님의 새로운 꿈을 전송하러 깨끗한 옷으로 젊은 사범님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기약 없이 헤어진다는 이별을 앞에 두자 도장은 삽시간에 눈물바다로 변하여 참여한 모든 분들이 사범님 앞에서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단 일년만이라도 미동에서 아이들을 돌봐 주세요.' 아이들과 학부모의 간절한 흐느낌에 사범님은 미국 행을 연기하고 '1년만 더 있다가 미국으로 간다.'고 다짐한 것이 이제 30년이 되었습니다. 아마 사범님께서 미국을 가셨다면 이준구, 이행웅과 같은 미국 태권도의 대부로 성장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범님의 미동에 남은 선택은 태권도 교육의 새로운 장을 열고 더욱 풍성한 문제와 인간학적 구원과 관련이 있어 파생력이 대단하리라 여겨집니다.
1막 6장
저는 사범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미국 행을 전회시킨 아이들과 학부모님의 눈물바다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적 구원과 자신의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교육자의 공생애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날 미동에서 울려 퍼진 젊은 사범에 대한 사범곡은 앞으로 정초될 태권도 교육사에서 가장 큰 의미를 장식하게 될 것입니다.
저의 4학년 2학기는 초조하게 시작되었습니다. 사범님을 뵙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극에 달하여 거의 매일 꿈에서 땀을 적시고 태권도부와의 관계를 조정하지 않으면 안될 국면에 이르렀습니다. 다행히 동기들은 안타깝게 여기고 운동 참여를 권유하였고 저 역시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던 터라 사범님께 그 동안의 정황에 대해 편지를 드리고 미동을 방문하였습니다. 당시 일제 때 지은 창고 같은 체육관은 태권도를 세계에 알린 사범님의 공로로 새로 짓고 있어서 교실 2개를 빌려 좁은 공간에서 운동하는 때였습니다. 혹시나 사범님께서 노하시진 않으실까 염려했는데 쉬는 시간 아이들과 마사지하시던 사범님께서 저를 보시고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말씀 드렸고 이후로 사범님께서는 더욱 가까운 사제 관계를 허락하셨습니다. 6개월 동안 몸을 돌보지 못하여 몸은 많이 부대꼈으나 막연했던 사범님의 말씀이 보다 가깝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88년 올림픽 개막식 태권도 시범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조금 한가한가 싶었는데 국가대표 시범단 단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감당코자 사범님의 생활은 일년에 대여섯 정도의 잦은 외국 시범과 세미나, 육사 태권도 교관, 국기원 연수 강사, 대학 강의 등으로 점점 허가 없어지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운동을 마치고 분당으로 가야하는 저를 댁 가까운 잠실까지 데려다 주시면서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아버님 연배의 사범님께서 개인적인 딜레마를 말씀하실 때 저는 그냥 가만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라도 꼭 주변에 물어보시고 결정하는 신중함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몇 년전부터 아이들에게 기합은 주셔도 체벌은 하지 않으신 데 당시 사범님의 체벌은 운동 과정의 긴장과 함께 이완의 방법으로 예술의 경지로 느껴졌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4학년 2학기 유한구 교수님의 강의 시간에 '체벌을 교육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를 물어보지 않았습니까? 아이들이 따를 수 있고 이해할만한 원칙을 세우면 벌은 엄격히 적용됩니다. 시간 약속, 운동에 대한 집중, 장난, 잡담은 운동 과정에 계속 강조되었는데 정도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시면서도 절대 아이의 순수 정감(주체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훈계와 다른 수련자의 각성으로 이루어집니다. 저는 직접적으로 한 번도 야단 맞은 적이 없는데 아이들이 야단 맞을 때 제가 야단 맞는 것과 같은 부끄러움과 각성을 받습니다. 저는 체벌의 진정한 효과가 당사자뿐만 아니라 배우는 모든 사람에 대한 환기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당사자가 벌 받을 때 물끄러미 쳐다보며 나와는 상관없는 재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제 잘못을 들여다보고 한없이 부끄럽게 만드는 사범님의 상황 판단은 체벌마저 탁월한 예술로까지 여겨지게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저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선배들의 추억담을 들어보면 겨루기 과정에서 잘못하면 사범님의 뒤차기에 5m 정도 풍~ 날아서 뒤에 있던 긴 의자 밑으로 쏙쏙 박히게끔 실력을 과시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놀라운 일이라고나 할까. 아마도 아이들은 긴장하면서도 사범님의 실력에 감탄하였을 것입니다.
저와 같은 사범님 매니아가 당시 서너 명 정도 있었는데 법대생이었던 한 분(조주)은 대학 1년때 사범님의 시범을 우연히 보고 배움을 청하여 지금은 대표시범단원으로 성장하여 태권도로 생계를 꾸리고 있고, 캐나다에서 ITF 태권도를 배우고 고교 졸업 후 한국에 와서 미동에 들러 사범님께 매료된 매튜는 한국 여자와 결혼하여 한국 국적의 한국인이 되었습니다. 처음 왔을 때는 예의도 모르고 겨루기 시간에 어찌나 거칠게 하는지 말도 통하지 않고 답답했는데 미동에 계속 나오는 동안 점점 인간미 넘치는 신사로 변해 가는 과정을 통해 사범님의 감화가 참으로 위대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매튜는 정말 한국인보다 더 한국의 문화를 사랑합니다. 처음엔 대개 한국의 음식이나 습관이 문제가 될 터인데 하나도 역겨운 게 없었다고 합니다. 처음 먹어본 김치가 너무 좋아 연세대에서 한글을 배우면서 '김치'를 읽을 수 있게 되자 무조건 식당에 가서 김치를 요구하는 김치매니아입니다. 한번은 치과에 들러 간호원에게 '김치 주세요.' 했다는데 글쎄 '김치과'라는 간판만 보고 김치에 관한 특별한 곳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사범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중학교 진학하면 태권도를 하지 않아 관계가 소원해 졌다가 대학 입학이나 군대 가거나 결혼 전에 꼭 들릅니다. 군대 가기 전이면 태권도를 그만둔 지 10년 정도 되었을 텐데 놀랍게도 어릴 때 제대로 익혀두었던 거라 몇 일 지나면 놀라운 기량을 보여 역시 어릴 때 한게 다르구나를 절실히 느낍니다.
1막 7장
4학년 2학기 겨울방학은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임용고사를 치른다고 자주 미동에 나가지 못했는지 운동과 관련해선 별다른 기억이 없습니다. 이 때 미동의 부사범은 이광호 사범님이셨는데 인상이 좋으시고 일을 꼼꼼히 하시고 운동에 적극적이셔서 미동에 있는 동안 전문대, 대학을 졸업하며 국가대표 시범단에 합격하고 미국 유학을 떠나 해외 사범을 경험하며 배움의 길을 실천하셨습니다. 저와도 나이 차가 2살 정도라 운동 마치면 미동학교 옆 만두집에 들러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미동에 계시는 동안 변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사범님의 부사범 교육이 참으로 훌륭한 후계자 양성 과정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스승 없이 자력의 실패 속에서 성장하셔서 제자에게 더욱 각별히 본을 보이신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스승 없이 배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저는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사범님께서는 가끔 스승 없이 성장하신 회고담을 들려주시는데 우리들에겐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사범님에겐 스승이 없다는 이유로 끊임없는 좌절과 실수를 반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어제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에 관한 책을 보면서 지눌 역시 일정한 스승 없이 불법을 향해 매진하면서 오히려 가장 탁월한 스승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한형조 선생의 의견을 읽고 사범님의 스승으로서의 모범은 당신이 스승 없는 가운데 더 많은 고민과 공력을 쌓았다는 데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스승 없는 제자의 아픔을 아시기 때문에 제자들의 각소유장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절도에 맞아 제자들의 존경과 권위를 받는 것입니다.
사범님 주위의 분들은 이상하게 사범님과 인상이 닮아갑니다. 제자들의 행실이 스승을 닮아가듯이... 아마 이맘 때 탤런트 김혜수를 처음 보았습니다. 촬영차 미동에 방문하여 학교가 떠나갈 듯 시끄러웠는데 운 좋게도 휴식시간에 인사 나눌 영광이 있었습니다. TV에서 보던 대로 건강하고 활달하게 느껴졌습니다. 웃는 모습이 사범님과 똑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범님께선 제자 자랑을 많이 하시는데 특히 김혜수 자랑은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김혜수는 초등학교 5학년에야 태권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당시 여학생은 한 학년에 1명 내지 전무했는데 시범단에 도전한 걸 보면 씩씩했나 봅니다. 후보에서 시범단으로의 승격은 테스트가 있었는데 열의가 대단하고 운동에 재능을 보여 6학년에는 모든 시범에 참여하였습니다. 외국 손님이 오셨을 때 시범 전후에 외국 귀빈에게 꽃을 선물하는 화동은 김혜수의 몫이었다 합니다. 옛날 필름을 봤는데 역시 이쁘더군요. 졸업 후에도 주말에 도장을 방문하여 운동도 하고 후배들을 지도하곤 했다는데 방송에 입문할 기회를 사범님께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마일로'라는 건강 음료가 시판되어 건강한 어린이가 등장했으면 하는 CF의 요청을 받고 주저 없이 건강 청소년 혜수를 추천했다고 합니다. 김혜수의 방송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어 고3 때 전국 스타로 부각시킨 '사모곡'이란 드라마로 꽃을 피웠다고 합니다. 당시 김혜수는 인기에 몰입해 학업은 뒷전이어서 대학 진학이 어려웠다는데 사범님의 추상같은 한 마디로 드라마가 끝나는 대로 뒷심을 발휘해 대학을 진학하고 고비 때마다 사범님의 조언을 고마워하는 변함없는 연기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최근에 믿었던 유승준 마저 저의 기대를 꺾어 감히 뭐라고 얘기드릴 수 없으나 김혜수는 괜히 믿음이 가는 거 있죠.
사범님의 방송 경력도 화려한데 이참에 재미난 이야기를 올리겠습니다. 73년 미동을 맡으시고 거의 무명으로 운동과 교육에만 매진하시다가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 개회식 행사를 통해 방송에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90년 들어 우리 나라 시장 경제가 세계화 조류 속에 밀려들면서 카드 회사의 광고가 본격화되었는데 엉뚱하게 세계에서 가장 큰 마스타 카드 회사에서 한국을 공략하고자 회사명에 걸맞는 한국의 마스타를 찾고자 국기원을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태권도의 장인이 누구요?' 국기원 관계자는 당시 사범 연수 때 가장 존경받고 인기 있는 이규형 강사를 추천하였다는데 처음에 미동을 방문한 외국의 마스타 카드 임원진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체육관 건물에 놀라고 부족하다고 사양하는 사범님의 태도에 다시 국기원을 찾아 여러 사람의 추천을 통해 재차 미동을 찾았다고 합니다. 사범님께서는 광고 내용이 태권도를 홍보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시고 대머리를 감춰볼까 궁리하시고 시도하셨다가 자연스럽지 못하여 그냥 있는 그대로 하여 일주일 동안 찍으셨다고 합니다. 저는 대학2년 당시 사범님께서 몇일 나오지 않으셔서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무사히 촬영은 잘 되었는데 출연비 문제로 오해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저도 믿을 만한 제3자를 통해서 전해들은 것이기에 주저됩니다만 재미로 읽어주세요. 처음에 카드사에서 몇천 만원을 제시했는데 사범님께서는 태권도 홍보를 위해서 했을 뿐이라며 받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인의 겸양의 미덕을 이해 못하는 외국인 간부는 액수가 적어 서운하지 않았나 생각되어 더 많은 돈을 드리겠다고 재차 부탁했다고 하는데 사범님의 고집을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고심한 외국인 간부는 90년 당시로서는 CF 최고 광고액으로 사범님 개인 통장을 만들어 드리고 한국을 떠났다고 합니다. 얼마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이 광고의 구성은 사범님께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직접 시범과 기합으로 가르치시면서 열심히 수련한 백인 수련자의 느슨해진 빨간 띠를 매어주며 수련자가 사범님께 '땡큐 마스타'로 예의를 갖추는 장면과 태권도 용품점을 찾아 실력이 향상된 이 백인 수련자에게 검은 띠를 선물하면서 사범님의 사인을 담는 마스타카드의 전략이 담겨있습니다. 사범님과 성인시범단 1명이 함께 뒤후리기를 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광고가 뜨자 일선 도장에서는 수련자가 많이 늘었다고 굉장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뿐 아니라 일본, 동남 아시아 지역까지 홍보되었다고 하더군요.
1막 8장
오늘 1월 29일 화요일 오후에 미동에 들렀습니다. 오전에 들러 후보들 가르치는 모습도 보고 싶었지만 치과에서의 시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오후에 시범단과 함께 시범 발차기의 기본을 연습했습니다. 사범님께서는 칠레 태권도 협회 초청으로 세미나를 하시고 오셔서 그런지 시차 적응이 아직 되지 않고 긴장이 풀려 힘드신 모습이었습니다. 마흔 이전엔 외국에 다녀오셔도 김포공항에서 바로 미동으로 직행하셔서 운동 지도를 하셨는데 이제는 연세가 있으셔서 운동 강도가 약화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드실수록 삶의 정황과 교육 현장에서의 판단력은 보다 조심스럽고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이끄시는 심미성을 과시합니다. 저 역시 26살 이후로 점프력이 떨어져 한 동안 꺾어진다고 낙심한 적이 있었는데 전체적인 몸의 기능과 정신적 토대는 보다 전체적이고 깊어진다는 느낌이 들어 나이가 든다는 것이 결코 슬픈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사범님과 맑은 생령과의 만남은 늘 집중적이고 삶에 대한 성취동기를 강하게 이끌어 운동을 마친 뒤에 젖는 보람을 극대화시킵니다. 특히 대학생을 대상으로한 강의에서는 저도 여러 번 지켜봤지만 탁월한 시범과 정확한 언어 구사, 태권도를 삶의 문제로 보편화시키는 삶의 자세가 드러나 강의가 끝나면 사범님께서 옷을 갈아입으시고 강의장을 나가시기까지 열렬한 박수로 고마움을 표현합니다. 육사 한 학년 250명 정도를 대강당에서 혼자 지도하시더라도 전체를 아우르는 기합과 밀도 있는 진행으로 땀이 줄줄 흘러내려도 얼굴 닦을 여유를 주지 않을 정도의 집중력을 과시하는 사범님께서 퇴장하실 때 보담하는 생도들의 씩씩한 박수에 그만 하라고 손을 저으시며 웃으시는 사범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이번 칠레 세미나도 1시간 먼저 나가셔서 손수 도장 주변을 청소하시는 것으로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사범님의 교육 실천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청소를 꼽습니다. 태권도 수련의 목적이 결국 나와 우리,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자는 데 있다는 상징적 실천 행위가 바로 청소인 것입니다. 운동이 시작되기 전 사범님께서는 도장 앞을 대빗자루로 쓰시는 모습을 늘 볼 수있는데 나뿐만 아니라 남까지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는 우리 일상의 성스러운 행위라고 여겨집니다.
인류의 미래가 과연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점점 더러워지는 환경과 함께 인류가 망할 것이라는 예상과 과학 기술의 획기적 발전으로 새로운 전기가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으로 대별됩니다. 저의 경우는 환경에 대한 정말 절실한 실천이 따르지 않을 경우 인류의 미래, 푸른 구슬 지구는 산산조각 날리라 생각합니다.
지나가는 미동 아이들이 늘 같은 시각 쳐다보는 사범님의 빗자루 쓰시는 모습 속에 태권도 교육을 보다 보편적으로 정당화시키고 교육의 궁극을 지향하는 우주적인 생각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의 평범한 소제론 역시 게으른 인간을 일깨우는 일상의 실천이며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경천, 경물 사상과도 이어지는 우리의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 졸업때 태권도 수련을 계속하리라 다짐합니다. 사범님의 인간적인 모습이 너무도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날로 날로 새로워지는 저의 모습과 세상, 사범님의 경지가 고통 속에서 희열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늘 그렇듯 나의 태권도 실천은 계속 됩니다.
1장 9장
저의 대학 생활만으로 일단 맺을까 합니다. 제가 기술할 수 있는 자료가 정확하지 못하고 사범님의 지도 내용을 소화할 수 있는 기량이 아니기에 더욱 저의 주관적인 입김만 강하게 느껴집니다.
지금은 외국어 공부로 계속 쓸 기회를 가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실은 이제부터 정말 제가 들려주고 싶은 교육의 핵심인 공부론(효율적인 공부 방법)과 시간론(공부의 경지에 따른 시간에 대한 인식), 중용론(교육 내용을 삶의 문제로 확산시키는 보편화 과정)을 기술하고 싶은데 제 공부가 착실히 쌓여지는 때가 되면 선보이겠습니다.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못하는 저의 불완전을 꾸짖어 주십시오. 늘 부족한 제자 민 기식 올림